2) 상업작품에 기생

이름을 찾는 여로에서 (3)

FGO, 아르주나X카르나

서번트 아르주나 X 마스터 카르나


아처는 마스터에게 많은 것을 숨겼다.

도리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스터는 말이 (상당히) 적은 편인데다, 제 서번트에게 구태여 이것저것을 캐내지 않았으므로, 아처는 ‘어쨌든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다’는 변명으로 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 아무튼 성배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 낫지 않은가, 종자가 주인을 살해하는 하극상이 일어나는 것보다야…

서번트와 마스터 간의 링크를 통해 카르나는 때때로 아처에 대한 꿈을 꿨다. 그러나 그것은 햇살 아래 흩어지는 백일몽과도 같아, 그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저 어렴풋한 상으로만 남았다. 이를테면,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공기. 흩날리는 꽃잎과 열기를 머금은 바람. 들판 위의 젊은 전사들과 그들을 찬미하는 백성들.

꿈 자체의 희미함과 더불어 아처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카르나란 소년에게 그런 심상들이 (비유하자면) 일종의 어트랙션에 가깝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설령 같은 영혼을 타고났다고 해도, 현대의 도시 문명이 낳은 자와 신대에 영웅으로 태어난 자의 감각은 외계인의 그것처럼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소년 카르나가 무의식의 틈새로 엿보는 신비란, 마치 한시적으로 화성인이 되어보는 경험과 비슷했던 것이다.

…라고, 아처는 혼자 결론을 내렸다.

분명 자신에 대한 꿈을 꾼다면서, 매번 지나간 밤의 아득한 잔향만을 붙들 뿐 자신의 과거에 대해 더 알려 들거나 굳이 캐묻지 않는 마스터를 보며. 그가 ‘카르나’임에도 아처에 대해 그토록 소극적인 것은,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마스터가 잘 벼린 창날처럼 예리해지는 대신, 무구한 아이처럼 어수룩한 모습을 더 자주 보이는 것은 분명 아처에게 행운이었다. 그럼에도 아처는 때때로 불안해지곤 했다. 마스터의 앞에 서면 자신이 한 송이의 꽃이 되는 것만 같아서. 약한 아이 주제에 그의 시선은 간혹 기이할 정도로 거대했고, 그럴 때마다 아처는 제게서 나는 향기를 맡는 숨결에 파묻히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자기 몸 안쪽에서 악이 부패해가는 냄새를 카르나가 눈치챌까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대영웅이 사춘기 청소년처럼 내적 갈등에 시달리건 말건, 성배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강적들과의 대결도 계속되었다. 몇몇 순간은 (아처의 마스터가 캐스터의 계책에 당할 뻔한 일도 포함해서) 상당히 위험했고, 운과 우연의 덕으로 구사일생하는 때도 있었다. 그나마 버서커와의 재회가 미뤄지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젊은 타타르의 왕이 그런 보구를 감춰두고 있었을 줄이야. 쉽지 않은 전투였습니다.”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후에야 아처가 말을 꺼냈다. 문헌상으로 알려진 것(남의 무구를 훔친 후 기고만장하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자를 죽이거나, 다른 이의 여자를 빼앗거나…)과 달리 서번트로 현계한 라이더는 상당히 자신감 낮고 의기소침한 남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탓에 진명 파악이 늦어졌으니 라이더는 제 어두운 성격의 덕을 본 셈이 되었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일지라도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아처에게는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상대의 몽검儚剣에 당하지 않은 것은 마스터의 통찰에 수긍하고 방심하지 않은 덕분이라고, 아처는 제 공로의 일부를 카르나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족한 것 같았다.”

지나간 전황을 복기하는 사람의 발언치고 묘하게 들렸다, 마치 적이 번뇌에서 벗어난 것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인 양. 아처는 자신의 마스터를 힐끔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 자는… 끝까지 주인을 지켜냈지요. 그의 지난 생이 오만과 탐욕에 물들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훌륭하게 갱생한 셈이니 그로서 잘된 일입니다.”

말과 말의 사이에서 아처는 잠시 생전의 일을 떠올렸다. 제것이 아닌 보물을 탐내고 탐내다 끝내 몰락한 악인들이 바로 아처의 적이었다. 남보다 못했던 가족.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아처의 숙적이 있었다. 고아. 마부의 아들. 본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전사의 자리를 탐낸…

서번트인 몸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아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미혹을 뿌리치고 서번트로서의 본분을 다했기에, 그 남자가 최후에 보여준 빛은 확실히 ‘진짜’ 절세검의 빛에 무척 가까웠습니다, 마는… 그럼에도 원본의 탁월함에는 미치지 못했겠지요. 결국 그가 선망하는 바를 흉내낸, 순간의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다소 가차 없이 말하는 아처를 이번에는 카르나가 돌아보았다. 얼핏 대적자를 폄하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어쩐지 말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도 들렸기 때문이다.

“진짜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그때 그 빛은 오직 라이더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을 테지. 화분 안의 꽃과 들판 위의 꽃을 비교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셈인가.”

늘 그랬듯, 카르나는 아처와 다투려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섬세하게 말하는 법을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의 서툰 표현을 가급적 선해하고 대화를 유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아처의 몫이 되었다.

“…마스터의 견해에 일리가 있군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활약은 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 진실로 괄목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결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지만요.”

아처는 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자신의 책임과 권한이 늘어날 때마다 으레 하던 짓을 했다. 즉, ‘아르주나’를 바닥 밑에 꼭꼭 숨기고서 ‘아처’의 자리에 보란 듯이 떳떳한 척 앉았다. 올바르게 기능하는 서번트를 질책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카르나의 눈을 가진 자라 해도.

“저는 그와 다를 겁니다. 마스터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드리는 것이 저의 가장 뛰어난 공적이 되겠지요. 마스터, 이 아처는 반드시, 아그니의 위광과 함께 성배를 가져오겠습니다.”

서번트로서 무척이나 모범적인 동시에, 우등생이 살짝 젠체하는 듯한 기색마저 느껴지는 선언이었다. 어쨌든 트집 잡힐 구석은 없을 터였다. 아처가 기대한 대로, 제 주인을 위해 반드시 승리하겠다 다짐하는 종자에게 주인은 별다른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그래’, 하고 나직한 소리로 대답 정도나 했을까. 그것으로 대화는 ‘올바르게’ 마무리되었다. 문제 없이.

“……”

사실 카르나는 이 이상 소통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을 따름이지만.

라이더가 최후에 존재하지 않는 절세검을 현현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왕도, 모험가도, 실패자도 아니라, 마스터를 위해 싸우는 한 사람의 맹우로서 스스로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방만한 삶을 살다 죽음을 기점으로 실의에 빠진 그에게 마스터와의 우정은 두번째 기회가 되었다. 우연히 영맥에 선택받은 반쪽짜리 마술사와, 기실 영령의 그림자에 불과한 서번트. 그 둘이 성배를 위해 잠시 계약을 맺었을 뿐이라 해도 그들 사이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에 그치지 않았고 통상적인 마술사와 사역마의 관계와도 달랐다. 꿈과 다를 바 없는 한 순간의 반짝임에 불과할 지언정, 그들의 진심은 서로에게 전해졌다.

어쩐지 카르나는 그것이 조금 부러웠다. 또 조금 그립기도 했다.

번번히 그는 아처가 날카롭게, 그리고 단단하게 세운 벽을 느꼈다. 손을 뻗어 더듬으면 그가 제 몸에 두른 새까만 장막이 잡힐 듯했다. 그것을 붙잡은 그대로 끌어내려 햇빛 아래 그의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은 틈 사이에서 이쪽을 경계하는 눈이 (지금의 카르나로서는) 영문 모를 불안과 번민에 사로잡혀 있어 그는 저도 모르게 신중해졌다. 꼭 허물어지기 직전의 컨테이너 박스 아래 숨어든 고양이를 보고, 저 위태로운 생명체가 자재에 깔리기 전에 어떻게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더 어둡고 비좁은 곳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그날 밤 카르나는 또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축복받은 대지 위가 아니었다.

해가 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해를 떨어뜨린 것인지, 하늘은 전에 없이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캐하게 고약한 탄내, 그리고 더 끔찍한 피비린내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그림자 없이 그늘진 덩어리는 어둠이 아니라 형체 잃은 시체 더미였다. 지옥의 풍경 한 가운데 우뚝 선 영웅에게는 죽은 스승과, 친지와, 벗들과 자식들의 시취가 묻어 있었다. 그곳은 전장이었다.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영웅의 심장 안에는 이글거리는 원한과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것은 전사다운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겐 전차 아래로 기어들어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어하는 나약한 충동도 분명 존재했다. 그것은 있어선 안되는 감정이었다.

 한편 그따위 감정들은 이미 다 전쟁의 업화에 말라붙은지 오래고, 영웅이라 불리는 것은 한참 전부터 단지 승리와 종전을 위한 살인 기계로만 움직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

그리고 그가 안은 모든 번민은, 다가오는 적수의 얼굴을 확인하자 뒤집혔다. 지금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하나도. 유일하게 ‘진짜 나’를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죽어 마땅한 남자가 내게 오고 있었으므로.

■■■.

그의 몸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검게 뒤틀린 소리가 외쳤다.

■■■!

장막 안쪽에 숨어 있는 어둠이, 간절히 기다리던 이름을 외쳐 부르고 있었다.

명확한 음성으로 발화되지 않았음에도, 피바다 속에서 홀로 새하얀 그 남자는 제 이름이 호명되었음을 알아챈 듯 영웅을, 가장 뛰어난 경쟁자를, 자신의 숙적을 시린 색깔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얀 남자 또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상대를, 자신의 숙적을, 마침내 그를 죽일 수 있는 대결을. 모든 것의 결착을 지을 이 순간으로 운명이 그들을 인도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때부터 이미 예정된 미래였다.

그쯤에서 카르나는 생각했다. 저 얼굴은 익숙하다. 낯이 익다. 특히 거울이나 차창, 유리문에 시선을 돌렸을 때 곧잘 본 것 같았다. 이상하군.

태양의 빛을 닮은 낯이 이쪽을 돌아보매, 영웅이어야만 하는 남자는 마치 자신의 거짓된 외피를 잡아뜯기는 듯한 불쾌함을 느꼈다. 실제로 제 거죽을 베고 뜯어낸 것은 상대방이건만. 

실은 그가 태어났을 적부터 지니고 있던 황갑을 피부째 뜯어낸 사연도, 아들을 승리자로 만들기 위한 부신父神의 계책에 따른 결과였다. 축복받은 영웅에게 운명이 점지해준 적수답게 남자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페널티가 그에게 따랐다. 그리고 영웅은 그것이, 신과 업보와 운명의 간섭이, 때때로 숙적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들러붙는 진흙처럼 느껴졌다.

그런 일들이 모두 문제가 되었다.

명징하게 구분되던 선과 악, 영웅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 따위, 더 나아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 - 그런 것들이 자꾸만 그 남자의 앞에서 갈피를 잃어버리는 모든 순간들이. 저 자가 자신을 번민하고 갈등하고 질투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게다가 저 얄미운 남자는 사람의 속내를 아무렇지 않게 들추는 불온한 천성을 타고났다. 영웅이 끌어안은 그 모든 추악함을 언제 눈치챌지 모르는 존재였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될 그의 실체를. 그렇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아르주나의 진짜 모습을 보아서는 안되니까.

숙적은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울 것을 요구했다. 물론 아르주나에겐 그렇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 비겁자, 외도, 악이라 매도받는다고 해도 저 남자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는 활을 들었다. 화살 촉의 끝에 햇빛이 머무르자 마치 그것으로 태양을 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운명은 영웅을 위한 마지막 패를 꺼냈다. 판다바의 삼왕자에게 다가가던 전차의 바퀴가 갑작스레 진흙에 처박혔고, 내통자였던 마부의 농간으로 카우라바의 가장 뛰어난 장수는 선 자리에서 기울어졌다.

난데없는 상황에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 짧은 찰나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갔는지 모른다. 저주인가? 천우天佑인가? 인과응보인가? 또 어느 신의 참견인가? 세계는 이 아르주나를 신뢰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가 겨눈 화살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끝이 숙적의 목을 노렸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전쟁에는 신성한 규칙이 있었다. 이를테면, 싸울 수 없는 상대를 공격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올바른 전사라면, 영웅이라면 그것을 따라야만 했다. 무력한 적을 죽이다니 그런 짓은 결코 ㅡ

그리고 아르주나는 시위를 놓았다.

화살을 빛과 같이 곧게 날아갔고,

최후의 순간에 남자의 하얀 얼굴은 저주와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기쁨은 없었다. 안도감도 없었다. 머리 잃은 시신 앞에서 아르주나는 아득한 허망함에 전율했다.


소년은 조금 이른 때에 잠에서 깨어났다.

제 종자가 구워준 마멀레이드 (갑자기 나타나 ‘저는 그의, 형제… 라고 할까, 사촌 형제입니다’ 같은 자기 소개를 한 청년에게 집주인이 선물로 주었다) 바른 식빵의 바삭거리는 귀퉁이를 입에 넣고 씹으며 카르나는 생각에 잠긴 낯을 했다. 일일히 기척을 숨기고 다니느니 어차피 사람이 올 일도 거의 없는 이 자취방의 식객 노릇을 하기로 한 아처가, 방금 막 끓인 물에 아쌈 티백(마스터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서 몇 개 얻었다)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는 마치 허름한 집안 풍경에 비해 지나치게 훌륭한 집사 같았다.

“잘 구워졌군.”

카르나의 집에는 당연하게도 토스터가 없었다. 이 작은 집에 그나마 구비된 도구들의 사용법은 아처가 스스로 익혔다. 양처良妻처럼 겸허한 태도로 아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영령의 좌에서 현대 문물의 지식을 미리 얻었습니다. 가스 버너의 사용 정도는, 우수한 서번트인 제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비록 요리는 저의 특기가 아니지만, …”

아처는 생각 없이 제 형제 얘기를 나불댈 뻔한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르나는 빵을 마저 먹었다. 자신의 서번트가 또 선을 긋고 있었다.

“……”

누군가 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경험이 소년에겐 생소했다. 그렇게 해줄 이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카르나가 굳이 해달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요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소년은 스스로 제 한 몸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에 어떠한 결핍도 박탈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지금 먹는 빵의 살짝 쌉쌀한 달콤함이나, 좁은 방을 가득 채운 저렴한 홍차의 향을 싫어지게 만들진 않았다. 오히려 카르나는 이런 체험이 꽤 기뻤다. 그래서 이런 일을 자신에게 해주는 남자의 결벽하고도 날 선 태도가 기이했다. 이제까지는.

“간밤에 나를 닮은 남자를 보았다, 아처.”

그런 꿈을 꾼 뒤에야 그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 자는 누구지?”

말을 마치자마자 아처가 차를 쏟았다. 카르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이, 이런, 죄송합니다, 이 아… 처가 이런 실수를,”

“진정해라. 마른 수건을 가져오겠다. 찬물에 환부를… 너도 화상을 입나?”

“뜨거운 차 정도에 다치지는 않습니다…!”

엎지른 차보다 다른 것에 더 난감해하며 아처는 목소리를 높였다. 카르나는 고개를 기울였지만, 거침없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마른 천을 문댔다. 묘한 침묵이 잠시간 이어졌다.

“…또 꿈을 꾸신 겁니까?”

언제나 타인을 똑바로 직시하다 못해 본질까지 꿰뚫어보는 인간이 바로 카르나였다. 그러나 하필 지금은 제 주인을 당장 죽여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맹렬해진 시선과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이런 새하얀 의복에 붉은 물이 들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 전쟁터였다. 너는 훌륭한 장수였고, 강력한 적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지.”

…그렇게만 말한다고?

 아처는 상대가 자신의 어디까지 보고, 또 얼마나 알아냈는지를 가늠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혼란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그 다음은?’ 재촉하자, 뒤늦게 그 눈과 마주친 카르나는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몰라 덩달아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음, 네가 쓰러뜨린 그 자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미소를 짓더군.”

“미소를…”

“그래.”

이번엔 카르나가 되묻는 타이밍이었다. ‘이제 누군지 기억 나나?’

 아처는 여전히 어지러운 마음을 안은 채 시선을 조금 밑으로 내렸다. 주인이 손수 훔쳐주긴 했지만, 찻물이 남긴 옅은 붉은 색은 아직 예복의 하얀 천 위로 피처럼 번져 있었다. 얼핏 보면 화살에 맞고 난 흔적 같았다. 사실 카르나가 자신에게 냅다 화살을 쐈어도 방금 던진 질문보다는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긴… 이야기입니다. 마스터.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처는 애써 웃어보였다.

“이런 아침에 시작했다간, 아마… 마스터가 학교에 지각을 하고 말 겁니다.”

전쟁이 터졌는데 학교가 그리 중요한가? 한 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그런 마스터의 고지식함이 지금은 누구 하나 죽는 꼴을 유예할 좋은 명분이 되어주고 있었다.

카르나는 아처를 쳐다보았고, 자신의 구형 휴대 기기(놀랍게도 그도 하나 가지고 있기는 했다.)를 켜서 시간을 확인했고, 다시 아처를 쳐다보며 그 말에 수긍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알겠다.”

마스터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급기야 아처는 그의 가방까지 살뜰히 챙겨주었다.

“준비물과 과제는 다 담으셨습니까? 성실히 수행한 숙제를 제출하지 못하면 안될 일이니까요.”

아처의 참견에 말 잘 듣는 아이마냥 카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소 서두르다 못해 마스터를 내보내고 싶어하는 기색마저 느꼈지만, 학교에 조금 일찍 가서 학생회실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아무튼 유예는 유예에 불과했다.


카르나가 새 자전거(전과 마찬가지로 남이 쓰던 것이고, 고물이지만)를 꺼내 학교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마스터.”

그를 보호자처럼 배웅하던 아처가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간밤의 꿈에서 본 그 남자는, 분명 미소를 지었다고 하셨지요.”

페달에 발을 올린 채 카르나가 대답했다.

“그렇다. 그가 화살 앞에서 웃는 것을 보았어.”

“그렇다면, 카르나…”

아르주나는 한 번 더 머뭇거렸다. 회한이 식은 찻물처럼 그의 가슴 위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숙적이 남긴 미소는 그의 여생 동안 절대 풀지 못하는 미스터리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다시 한 번 본인을 만난다면 묻고 싶었다. 피차 서로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만한 사이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만약에라도 기회가 온다면.

그리고 지금이 그 만약일지도 몰랐다. 아르주나와 카르나가 아니라, 아처와 마스터로 만난 지금이야말로. 응어리처럼 남은 의혹을 풀어낼 천재일우의 기회.

왜 네놈은 그때 미소를 지은 거냐! 

“왜 그 자는 그때, 미소를 지었을까요?”

질문을 듣고 카르나의 눈길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모른다.”

“네?”

“네 삶에 관한 꿈이 아닌가? 네가 모른다면 나 역시 모르겠지. 해 봐야 어설픈 추측에 불과할 뿐. 더욱이 너에 대해서도, 그 남자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한없이 원론에 가까운 답이었다. 아처는 입을 조금 벌린 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마스터의 답이 이 모양인 게 그동안 자신이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사수한 것에 대한 심술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에 카르나의 얼굴은 아주 차분하고 진지했다.

제 서번트가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자, 카르나는 자전거를 움직여 평소와 같이 등교길로 향했다.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아처가 옷이 마르기 전에 빨래를 해야할텐데, 싶어 조금 걱정스러워졌으나, 자신의 서번트는 우수하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거니 믿고 나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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