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업작품에 기생

이름을 찾는 여로에서 (2)

FGO, 아르주나X카르나

서번트 아르주나 X 마스터 카르나


새벽이었다.

마스터가 고비를 넘겼음을 확인하고 아처는 한시름을 놓았다. 지저분한 창문 한쪽의 깨진 틈새로, 야간등을 켜둔 채 잠에 든 도시가 보였다.

일곱의 마술사와 그의 권속들이 문명의 이면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건 말건, 세계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제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흘러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각자의 일상에 매몰된 채, 어제와 같이 동이 트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즉 아처의 마스터 - 하필 이름이 또 ‘카르나’인 그 남자 - 가 적의 마스터에게 속아 (속아? 정말로? 그럴 리가.) 하마터면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건 말건, 그가 거주하는 마을의 정경은 몹시도 평온하고, 차분하며, 고즈넉했다.

현대 사회를 이루는 무수한 익명의 얼굴들 사이에서는 카르나와 같은 인간조차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 사라질 수 있었다. 불현듯 아처는 그 사실이 거슬렸다. 그 남자가 그런 식으로 초라한 최후를 맞는 것은 이상하니까. 피도 소음도, 천둥도 불꽃도 없이 이름 없는 들풀처럼 스러지는 카르나라니…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마스터를 또 생전의 숙적과 불필요하게 결부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도.

아처의 마스터는 가난하고, 연약한데다 어수룩하고,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요즘 젊은이치고 규율에 꽤나 엄격하다는 것 정도밖에 없는 대단히 평범한 청소년에 불과했다. 아처는 누누히 그 사실을 되새기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는 했다. 때로는 마스터의 수수하고 바보 같은 면모를 일부러 들춰 보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이를테면, 정말 그 남자라면 자신에게, 이 아르주나에게 그 따위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던가.

‘곁에 있어다오.’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뱉을 리 없다고.

불현듯 아처는 조금 전의 몹시 급박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어두운 밤 하늘 아래서, 상태가 위중한 마스터를 제 품에 안고서 아처가 전력을 다해 은신처로 내달리던 때.


“물론 이 아처는 끝까지 마스터, 당신의 옆을 지킬 것입니다. 이 영기와 영핵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그는 충성스러운 종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신실한 태도로 마스터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장 완벽한 서번트, 그것이 바로 아처니까.

헌데 생각해보니 완벽한 서번트라면 마스터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유로 사경을 헤매게 만들지 않았을 터였고, 솔직히 그건 아처가 어떻게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딱히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불가피한 사유로 ‘감점’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아처의 완벽한 태도에 살짝 금이 갔다.

“…그러니까 마스터, 눈에 빤히 보이는 적의 수작에는 넘어가지 않아주시면 안될까요?!”

“나는 그녀와 약속을 했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다는 대꾸가 그 모양이어서 아처는 어이가 없었다. 뭔가를 놓아버린 그는 그냥 바가지 긁는 배우자처럼 대놓고 마스터를 면박하기 시작했다. 종복된 자로서 주인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 약속이 성배 전쟁의 승패보다, 저와 마스터의 목숨보다 중한 것이었습니까?”

“약속에… 우열을 나눌 수는 없었다.”

“하. 더군다나 마스터는, 그 자에게 기만당했음을 알고 나서도 수중에 두고 꿋꿋이 지키려 했지요, 받은 물건을?”

“내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불사 살해’의 해묵은 집념이 낳은 극약이었고요? 마스터가 독에 완전히 당하기 전에 알아낸 게 천운이었지요?”

“…미안하다.”

“……”

다다다 쏘아댄 끝에 기어이 사과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아처는 하나도 개운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력한 짐승을 무너질 때까지 때린 것처럼 죄스러운 기분마저 심장에 엷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무력감이기도 했다.

그에겐 악의가 없으니까, 이 사람의 타고난 성정이 그러하니까,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그는 그저 원칙을 지켰을 뿐이니까, 결국 남들은 그가 내리는 선택에 대해 무어라 더 따지고 간섭할 수가 없게 된다. 한없이 올곧은 인간 앞에서 개인의 사감私感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는 어쩌면, 아르주나의 영원한 호적수를 아군으로 뒀던 자들이 일찍이 느꼈을 법한 감정이었다. 

아처는 그 모든 것이 불쾌했다. 당신의 어리석음도,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도.

그러니 그 말은 그런 기분에 익숙하지 못한, 그리고 왜 자신이 그런 걸 느껴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대영웅의 작은 실수였을 것이다.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절 소환할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가 떳떳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인 호소밖에 없었다. 굳건한 상대를 진창에 처박으려는 시도가 참으로 무의미하고 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처는 여전히 말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슬프게 만들 사람에게.”

그러자 마스터는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 이어 그의 입도 약간 벌어졌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미묘한 표정 변화였지만, 그럼에도 아마 아처와 조우한 이래 가장 감정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상처 입은 기색을 읽어낸 아처는 크게 당황했다. 왜?

어째서 그렇게 놀라고, 주눅이 들고 상처를 받는 거냐, 네놈이…

그와 동시에 내딛은 발이 낡아빠진 현관 앞에 닿았다. 아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의 그건 선을 지나치게 넘은 발언이었다.

“나는…”

“실언했습니다. 마스터, 부디 저의 불충을 용서해주시기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서번트가 빠르게 사죄를 구했다. 다시금 아처에게 어울리는 깍듯한 태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마스터는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종자의 사면을 거절했다. 

“아니. 네가 그렇게… 할 일이 아니다.”

그 말을 듣고 아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묵묵히 혼란스러워 하는 와중에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마스터의 손이 그의 어깨를, 그리고 뺨을 점점이 더듬고 있었다. 투박하고 상냥한 접촉. 그러자 아처는 자신의 등 뒤로 섬짓한 기운이 기어가는 듯했다. 그의 피부에 닿는 손길은 분명 따뜻했는데도.

“용서는 내가 구하마. 사죄하겠다.”

이윽고 마스터는 조그만 소리로… 이 행위를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의 연약한 음성은 건조했고, 내뱉는 표현은 단조로웠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사과하고 있었다. 어째서? 직전의 말이 정말로 그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그것은 분명 아처의 과오였다. 모욕을 들은 이가 도리어 저를 모욕한 상대에게 애걸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카르나’는 그렇게 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나는 너를 슬프게 하지 않겠다… 곁에 있어다오.”

아처는 마스터가 하는 말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졌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을 욕보이는 말에도 그리 나약한 반응을 하는 범부가 되었나, 소리치며 따지고 싶어질 그 즈음에, 그의 목을 지나가던 손가락은 간신히 모은 힘을 잃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어쨌든 당장 시급한 것은 마스터의 회복이란 사실을 아처는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쓰잘 데 없는 말로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아르주나는 마스터를 살리는 데 성공했고, 더는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혼미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매트리스에 이불을 덮고 잠에 드는 시늉까지 한 아르주나였지만, 이 허술한 진지가 언제 또 적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수면을 취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색색대던 마스터의 숨소리가 점차 고른 박자를 되찾을 무렵, 그는 누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찬드라는 도시의 가장 낡은 구석에도 공정하게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

의식이 또렷하다는 것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근심에 직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근심에 직면하는 것은 곧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아르주나는 혼자였다. 그의 마스터는 무서운 두 눈으로 그를 보지 않고 있었고, 이 후미진 곳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곤 주정뱅이의 비틀거리는 발걸음뿐이었다. 대영웅조차 조금은 해이해져도 좋은 시각이었다. 낮 시간 동안 그는 카르나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시야와 마음에서 몰아내려 애썼다. 그것이 그를 서번트로 기능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번트로서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라면 어떨까…

아르주나는 누워 있는 마스터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유리창의 조각난 귀퉁이가 잠든 얼굴에 달빛을 던져, 소년의 창백한 낯은 더더욱 시린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찬연한 그 형상은 이승의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끝내 자신을 해치러 찾아온 망령과도 같은 이 모습을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까, 아르주나는 무심결에 잠시 고민했다.

‘실은 상대가 망령인 게 아니라 자신이 망집에 빠져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그는 아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의 감정은 결코 망령된 것이 아니니까. 이 소년이 정말로 카르나라면, 하다못해 그 남자와 가까운 존재이기라도 하다면, 아르주나가 이토록 정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당연했다.

카르나는 영원히 아르주나의 숙적이고 아르주나는 영원히 카르나의 숙적이다. 설령 인세를 살아가는 어린 아이의 유순한 자아 밑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도, 그 아래 잠들어 있는 것이 진정 카르나, 네놈이라면 내게 응답해야만 한다.

아르주나의 손 끝이 카르나의 가슴을 감싼 셔츠에 닿았다. 뻗은 손이 저절로 그쪽을 향한 까닭은, 전생에 카르나가 부여받은 신성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 거기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나 서늘한 눈빛과 대조적으로 매우 강렬한 붉은 빛깔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던 보옥. 피부를 검게 물들인 오염을 몰아내려는 듯 심장 위에 자리를 잡은 그것은 눈 부시게 반짝이는 황갑과 더불어, 마치 태양의 위광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조형물의 일부처럼 보였다. 사실 카르나라는 인간 자체가 신성이 빚어낸 인형 같은 존재였지만…

어쨌든 마스터가 정말 그 남자라면, 이 몸에도 태양이 남긴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아르주나의 손이 마스터의 가슴 위를 샅샅이 더듬었다. 그러나 흉부 중앙에 박힌 보석 같은 것은 물론 느껴지지 않았다. 주저하다 직접 셔츠를 벌려 확인도 해보았으나 상흔은커녕 특별히 눈에 띄는 반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손에 닿은 피부의 체온이 따스했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상대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아르주나는 그의 옷을 도로 여며주었다.

…어째서 성배는 나를 이 자에게로 인도한 거지.

이것은 아르주나에게 남아있는 또 하나의 의문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그의 마스터가 진정 카르나인가, 카르나가 아닌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마술 세계와 관련 없는 일반인이 성유물도 소환 의식도 없이 마스터로 지목되었고, 서번트로는 무려 인도의 대영웅, 뇌신의 완전무결한 아들인 아르주나가 배정되었다.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날 리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종 간의 상성을 따져보았을 때 두 사람의 합은 너무나 별로였다.

 우선, 아르주나는 영원히 고독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그 누구의 선망도, 비난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 내면의 추악한 어둠을 영영 숨기고 싶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꿰뚫어보는 시선에 그는 지독한 살의를 느끼곤 했다. 헌데 그런 그를 카르나와 닮은 눈을 한 마스터 앞에 데려다 놓다니, 대성배 안에는 지독한 귀축이라도 들어 있단 말인가? 성배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진영 하나가 작살나는 자극적인 전개를 바랐던 것인가?

성배의 판단으로 짝이 지어진 사이라면, 처지건 수준이건 성향이건 적어도 하나 이상은 잘 어울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번 성배 전쟁의 아처 조는 그중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둘의 처지에는 탑의 가장 아래와 가장 위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서로의 역량은 당연하게도 전혀 대등하지 못했다. 게다가 근본적인 성질이 아주 끔찍이도 달랐다. (당연했다. 카르나 같은 자니까!) 마스터가 아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임할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동경하는 시선까지 내비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슬프게 하겠지.

…아르주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내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 ‘사랑’처럼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마스터의 미숙하고 융통성 없는 행동이 전장에서는 매우 부적절하다는 사실만 상기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전사도 아니면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내던지며, 함정일 게 뻔한 언약에 스스로를 묶어서 서번트를 곤란하게 만든다고. 아르주나는 그런 일에 슬픔씩이나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이런 남자와 엮은 성배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와 자신을 반드시 만나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아르주나의 손가락은 이제 카르나의 목에 닿고 있었다. 생전 아르주나는 이곳에 화살을 박아넣었다. 피에 젖은 머리가 대지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화살을 몸에 지닌 채였다.

그것은 아르주나의 과오였고 수치였다. 그가 씻어내지 못한 단 한 가지 오점이었고, 그렇기에 아르주나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만약 카르나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번에야말로’ 올바르게 쓰여야 했다. 즉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그의 숨을 끊어 놓아야 했다.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합당한 대적자로서 공정한 승부를 펼치거나, 아니면 ‘아르주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거나. 어찌됐든 그의 화살을 자신의 표적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한다, 항상.

그렇다면.

‘설마.’

설마 나의 화살이 표적을 찾아낸 건가.

설마 이 목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인가.

그가 나를 부른 것도, 성배가 자신을 내던진 것도 아니란 말인가? 이 아르주나가, 스스로 그에게 다가갔다고?…

“……아.”

문득 아르주나는 그의 손가락이 닿은 피부 아래의 혈류를 느꼈다. 안정을 되찾은지 얼마 되지 않은 맥이 가늘게 뛰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과 비슷했지만, 가져다 댄 손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위태로움은 이쪽이 더했다.

“…아처.”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낮잠을 자다 깬 아이처럼 어느새 눈을 뜬 마스터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목에서 손을 거둘 타이밍을 놓쳐버렸지만, 어째 맥을 짚는 것과 비슷한 자세가 되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네, …네, 마스터. 저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아처는 마스터가 잠에서 일어나서, 자신을 바라보아서, 다시금 그만의 충직한 서번트로 돌아갈 수 있음에 자신이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를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일이 잘못되면 살해하면 그만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을 때보다 더.

“곁에 있었나. 나쁘지 않군…”

이 카르나는 카르나답지 않았다. 그는 간혹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무구를 들고 싸우기보다는 가능한 평화롭게 일이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제 서번트를 아군으로서 신뢰하고 또 동경했다. 종종 부족한 사회성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잘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슨 분야의 어떤 일을 하건 간에, 대영웅과 승부를 겨루기에는 너무 어리고 평범했다.

그러니 설령 ‘그런 이유’로 자신이 소환되었다고 해도, 굳이 이 남자에게 화살을 겨누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곁에 있어달라고 청하는 이가 아닌가. 나를 슬프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던가…

아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 알아채지 못한 채, 카르나는 두어 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불과 수 시간 전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람치고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온화해서, 아처는 무엇 때문에 마스터의 기분이 저리 좋아졌나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항상 곁에 있어드리겠습니다, 마스터. 표정을 보니 좋은 꿈을 꾸신 것 같군요. 하지만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꿈… 확실히 꿈을 꿨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데,”

시선이 묘하게 허공을 향한다 했더니, 마스터는 잠시 꿈 속의 풍경을 더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일몽에 잠긴 카르나는 정말이지 카르나답지 않았기에 아처는 조금 더 평온해졌다. 그는 어린애가 알아서 간밤의 꿈 이야기를 자기에게 횡설수설하기를 기다렸다.

“…너에 관한 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아처의 입에 걸려 있던 미소는, 이 집 창문처럼 귀퉁이가 부서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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