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찾는 여로에서 (1)
FGO, 아르주나X카르나
서번트 아르주나 X 마스터 카르나
카르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그가 탈탈거리며 끌고 가고 있는 자전거를 얻은 경위만 해도 그랬다. 본래 분실물이었던 그것의 주인을 카르나가 기어이 찾아내어 네 것을 가져가라 들이댔을 때, 앳된 얼굴의 주인은 겸연적게 웃으며 이미 새 걸 장만했으니 네가 가져도 좋단 소리를 하고 슬슬 내빼버렸다. 카르나는 그가 이 마을의 부유층 거주 구역에 사는 학생이며, 선심 쓰는 척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떠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카르나는 그에 대한 경멸이나 버려진 물건에 대한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여기저기 낡고 촌스러운 페인트마저 바랜 자전거가 그것에 질린 주인을 떠나 카르나의 손에 떨어졌고, 새로 사람을 싣고서 더 오래 달릴 수 있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잘된 일이었다. 카르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운이 좋다', 고.
하지만 그 자전거도 오늘 그 생명이 다했다. 터진 바퀴의 상태를 확인한 카르나는 이것이 수복할 수 없는 부상임을 깨달았다. 이미 탈것의 의무를 차고 넘치게 해준 물건이었기 때문에 카르나에겐 이 일이 불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알바처인 꽃 가게가 그가 사는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기에, 오늘 밤의 귀로가 다소 길어졌을 뿐이었다.
더위가 꺾인 늦여름의 밤은 예상보다 선선했고, 길가의 깨진 콘크리트 사이로 간간히 들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찬 기운을 머금다 만 바람을 맞으며 카르나는 약간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처럼 무감해 보이는 얼굴을 인간도, 그가 지난 주 압수한 낭만 소설의 도입부처럼 (그것을 읽고 있던 학생에게도 그 소설에 대해서도 카르나는 아무 유감이 없었다. 교칙상 반입이 안되는 물건인지라 어쩔 수 없이 가져갔을 따름이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렁이고, 좋은 만남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느끼는' 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좋은 만남. 인연.
하필 지금 마주친 들꽃처럼 빨간 색의 두 눈처럼.
그리고 카르나의 시야가 뒤집혔다.
그는 운동 신경이 뛰어났으나 인간 한계 안의 우수함이었다. 천벌이라도 내리 꽂힌 양 섬광과 굉음이 온 세상을 뒤흔들었고, 감각이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카르나의 몸은 으깨진 도로의 가장자리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사지가 격통에 벌벌 떨리는 게 먼저, 자신이 강한 힘에 내팽개쳐졌단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교통사고?'
그러나 카르나는 바퀴 소리도 경적음도 듣지 못했다.
'낙뢰?'
그러나 카르나는 오늘 하루 뇌우의 어떤 징조도 보지 못했다.
결국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상을 알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통각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팠으나 어쨌든 움직일 수 있었다. 자신의 소소한 '운 좋음'을 재확인하며 카르나는 으스러진 대지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았다. 일렁이는 광휘와 번뜩이는 신비를.
카르나는 친우에게 어깨를 잡혀 보게 된 스펙터클 영화의 웅장함을 기억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입체 음향에 귀가 먹먹해지고, 눈이 아릴 정도로 찬란한 그래픽에 온 시야를 빼앗겼던 때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금, 그의 목전에 펼쳐진 광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화의 스펙터클은 고작해야 현실의 위광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카르나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현실에 존재해선 안될 것이었다.
어두운 기운을 몸에 두른 자가 정체 모를 길쭉한 무기를 허공에 한 번 휘둘렀다. 그와의 거리가 꽤 되었음에도 카르나는 얼굴에 훅 끼치는 풍압을 느꼈다. 신중하게 태세를 가다듬는 그 존재는 강력했고, 아름다웠고, 또한 더없이 추악하고 두려웠다. 카르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짙은 색의 시선에서는 딱히 적의를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카르나는 동시에 그 사실이 그가 무해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 무심한 눈은 세계의 모든 생명을 가볍게 분류하고 있는 듯했다. 죽여야 할 것. 죽여도 좋은 것. 죽어도 상관 없는 것.
"…아아, 일반인이 하나 있었다. 네 탐지가 어긋나다니 별일이군. …아니, 보잘 것 없어."
그것이 카르나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란 것은 훨씬 알기 쉬웠다. 그 신비한 자는 모종의 수단을 통해 멀리 있는 누군가와 연락하는 듯했다. 손에도 귀에도 전화기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나. 카르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그가 '일반인'인 자신을 길가의 돌 보듯 하자 카르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마저 일으켰다. 눈 앞의 신비에서 고개를 돌리니 가엾은 자전거가 두 토막이 되어 있는 게 보였다. 저 상태로는 집까지 가져가기도 힘들 터였다. 그런 생각에 잠시 한 눈을 파느라, 카르나는 서번트를, 그것도 얼스터의 광견을 목격하고도 압도되지 않은 청년을 바라보는 붉은 시선이 살짝 가늘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포식? 마력이 급하진 않다만, …좋다. 그러길 바란다면."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이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이 '죽어도 상관 없는 것'에서 '죽여도 좋은 것'이 되는 그 찰나의 순간도 포착하지 못했다.
아르주나는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것은 눈을 뜨는 행위보다, 새로이 구성된 신체를 느끼는 것보다, 자신이 종자로써 운명의 게임판 위에 내던져졌단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나는 활. 마스터의 서번트. 충성스런 아처.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르주나.
염신의 활이 새파란 불꽃을 일으켰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미사일처럼 날아 제 주인을 꿰뚫기 직전의 가시창에 돌진했다. 두 서번트 모두 진명을 개방하지 않은 채 보구를 사용했으나, 격돌의 여파는 이미 파괴된 거리를 더한 황무지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둠와 모래 먼지 사이에서 마스터의 생존을 확인한 아르주나는 바로 다음 저격을 준비했고, 상대 역시 곧장 창의 방향을 돌렸다. 거기서부터 보구의 2차 충돌까지는 또 다른 찰나였다. 만약 그곳에 관련 없는 민간인이 하나 더 있었다면, 그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불가해한 재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배전쟁이었다.
가시를 두른 광전사는 미쳐 있으면서도 정신이 또렷했기에, 난입한 적수를 지금처럼 상대해선 안된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전력을 다해 싸워야만 결착을 지을 수 있는 강자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죽여야했다. 그러나 전쟁은 죽음만이 멈출 수 있는 맞대결과 다르고, 광견일지언정 어쨌건 목줄 쥔 주인이 있었다. 이미 갑작스런 마력 소모에 항의 섞인 전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서는 진명을 드러낼 수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쿠 훌린은 혀를 찼다.
사랑하는 서번트와 가능한 오래오래 허니문을 즐기고 싶은 버서커의 마스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섣불리 진명 개방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아처 역시 동일했다. 지고의 대영웅은 그가 쏘는 화살 하나 하나에 소모하는 마력이 어마어마했고, 불쌍하게 폐허를 뒹굴고 있는 그의 마스터는 아무래도 제대로 된 마술사가 아닌 듯했다. 자칫 잘못하면 보구 사용 한 번에 영기가 날아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르주나는 호흡을 골랐다. 실제 숨을 내쉰 게 아니라 판단을 가다듬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두 전사는,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가 비슷한 상황에 있음을 눈치챘다.
"별 수 없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창을 겨눈 쪽이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고자 하는 그의 광증은 소멸할 때까지 낫지 않을 터였으나, 살육의 선후를 바꿀 만큼의 이지는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가시창은 조금 덜 잔혹한 형태로 바뀌었다. 한담을 나눌 만한 거리가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기에, 아르주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상대를 주시했다. '다음에 만나면 죽여주마', 하는 늠름하고도 서슬퍼런 빛이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버서커의 실체가 어그러지고 현장에서 흉흉한 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그것이 전사의 자세고, 영웅의 기상이며, 서번트다운 충성이기에…
아주 짧은, 화살과 창이 맞부딪힌 순간보다 더한 찰나 동안 아르주나의 시선이 기울어졌다. 그것은 진정 찰나였기에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못했다. 목격되지 못한 것은 진실이 될 수 없었다.
아르주나는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아래로 향했다. 하얀 예복을 입은 그 모습은 신의 사도처럼 보였다. 지상에서 계시를 받는 자는, 성배가 그의 주인으로 정해준 보잘 것 없는 현대인이었다. 신대의 영웅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 없는 이를 성심껏 섬길 준비가 아르주나는 되어 있었다. 우아한 첫 인사말도 물론.
"서번트, 아처, …“
그리고 그의 고상한 음성은 말하는 중간에 멈춰버렸다. 겨우겨우 일어나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드는 그 남자, 자신의 마스터가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시린 색깔인 탓에. 콘크리트 파편과 흙과 먼지에 더럽혀진 머리칼이지만 본디 가진 순백까지 감추진 못한 탓에. 터져 피를 흘리는 창백한 입술이 지나치게 눈에 익은 탓에.
카르나가 거기에 있었다.
…아르주나의 안에서 심장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곧 하나의 질문으로 정제되었다.
왜?
그는 피를 토하며 묻고 싶어졌다.
어째서?
"…아처…"
네놈이 여기에, 그토록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컥! 흡, 커헉, 쿨럭! 으헉, 헉!"
그리고 바로 그놈께서 갑자기 죽을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아르주나는 이성이 돌아왔다. 일련의 난장을 겪고 폐에 먼지가 찼는지, 카르나는 허리를 굽히고 가슴을 치며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폐병에 걸린 사람 같은 꼴에 자기도 모르게 아르주나는 몸을 숙였고, 아무래도 아직 성년이 지나지 않은 듯한 어린 주인을 굽어보았다.
"괜찮으신가요, …마스터?"
아르주나가 그토록 유한 반응을 보인 데에는 격앙된 감정도 잘 감출 수 있을 만큼 예의바른 태도가 몸에 밴 덕분도 있었지만, 사실 눈앞의 사람이 사레 들린 양 기침하는 순간부터 '그 남자'로 보기 힘들어진 탓이 컸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하지 않나.
강자들의 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되어 가련하게 흙바닥을 구르는 카르나. 웬 바퀴 달린 쇠 토막을 손에 쥔 채 그게 무기라도 되는 양 멍청하게 휘두르는 카르나. 눈에 모래가 들어갔다고 눈물을 흘리고 허파에 잘못 들인 흙 때문에 각혈할 것처럼 쿨럭대는 카르나.
그런 게 카르나일 리가 없었다. 그 남자가 그럴 리가... 그 생각은 마침내 기침을 멈춘 마스터가 물 고인 눈으로 다시 자신을 봤을 때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서, 번트, …그리고 마스터, 란 건… 무얼 의미하지?"
그의 용모는 확실히 아르주나의 숙적과 닮아 있었다. 조각처럼 가지런하면서도 창백한 이목구비, 깃털 같은 머리카락과 섬뜩하게 옅푸른 눈의 색은 분명 카르나의 그것이었다. 억세지만 가느다란 몸 선에 심지어 목소리까지 상당히 흡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아르주나의 카르나가 아니었다. 아르주나가 죽이고 싶은, 죽여야 하는 남자의 시선은 저렇게 무디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만난 재해가 운명을 원망할 새도 없이 종료되어 얼떨떨해진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저런… 멍청한 눈빛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의 마스터는 불운하게도 카르나와 형상이 (다소 많이) 닮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르주나는 빠르게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왠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은 가시질 않았고, 은근슬쩍 마스터의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지만.
"마스터, 소환 의식을 통해 이 아… 처를, 부르신 게 아닙니까?"
"소환… 의식이라 함은,"
"……"
그나저나 이 마스터는 이상했다. 3기사 중 아처, 그것도 인도의 대영웅 아르주나를 불러낸 자치고 너무나 어리고 약해보이는데다, 성배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조차 알지 못해 하나 하나 자신의 서번트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근처 일대가 초토화되었기에 확인을 할 수 없었으나, 소환에 필요한 절차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성배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지요?"
"성배전쟁이란…?"
그것으로 모든 게 확실해진 아르주나는 하마터면 한숨을 쉴 뻔 했다.
"마스터, …아무래도 아는 바가 전혀 없으신 모양이군요."
"…미안하다."
달리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아르주나에겐 제 마스터가 주눅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좋지 못했다.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 것 없는 소년이라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 타의건 자의건 이미 전쟁에 뛰어든 주군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에 적절한 조언을 하는 것 또한 서번트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일일히 시무룩해지는 카르나라니 이상했다. 바보 같았다. 조금 기분이 나쁠지도.
어쨌든, 마술사조차 아닌 일반인이라지만 이 특급 서번트의 영기를 유지할 만큼의, 어쩌면 진명 개방한 보구의 사용도 어렵지 않을 만큼 우수한 마력을 가진 마스터였다. 아는 바가 없으니 전적으로 서번트의 역량과 판단에 의지할 것이고, 자신의 고집이나 프라이드 때문에 신대의 영웅과 갈등을 빚는 어리석은 자들보단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즉, 군사의 역할을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썩 나쁘지 않은 주인이었다. 아르주나는 헛기침을 했다.
"제게 미안해 하실 일은 아닙니다. 다만, 마스터께서는 이미 전쟁의 한복판에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성배에 의해 선택된 이상 - 당신은 한 사람의 마스터로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싸우셔야 합니다. 만능의 원망기인 성배에 바랄 소원을 두고, 신화와 전설 속에서 불려나온 6기의 서번트들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 성배의 선택. 최후의 승자. 만능의 원망기. 카르나가 듣기엔 그가 별로 접할 일 없는 판타지 소설이나 장르 영화 따위에나 나올 법한 시놉시스였다. 아무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라도 이런 정보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의 서번트, 아르주나는 인내심 있게 주인이 납득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소환한 이 아… 처는 단언컨대 최고의 서번트, 가장 우수한 궁사니까요. 그러한 자가 누구도 아닌 당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솔하게 섬기는 것만이 저의 기쁨이므로."
말을 마친 아… 처는 제법 드라마틱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금 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카르나는 눈부신 자태의 서번트를 속내 모를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르주나는 그가 여전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가 약간 염려했으나, 그의 마스터는 곧 그를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단, 더 늦기 전에 귀가하는 것이 좋겠다."
"......"
이번에는 아르주나가 상황을 이해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아아, 그렇지요… 싸움에 앞서 기지를 구축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달리 준비가 없다면 마스터의 거주지가 곧 본진이 될 것입니다. 경쟁자에 의해 발각되기 전에 방비를 마련해야겠지요."
"? 그건, … 그렇군. …과연 그렇다. 하지만 당장은, 내일의 등교와 아르바이트가 우선이다. 늦게 잠들면 다음의 하루가 엉망이 되고 말아."
아르주나는 대답할 말을 고르느라 시간을 조금 더 썼다.
"…… 그… 렇군요.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학업은 중요하지요. …생업도… 말입니다."
"이해에 감사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학생 주제에 전사처럼 우직한 말투로 감사를 표한 카르나는, 팔다리의 움직임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럼, 남은 이야기는 마스터의 자택에서 마저 드리는 것으로 할까요. 길거리에서 계속 지체하다간, 언제 다른 진영에 포착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마스터, 그 지저분한 고물은 버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깨지고 구부러진 자전거의 다른 한쪽을 땅에서 집어드는 카르나를 보고 아르주나가 차분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양손에 바퀴를 하나씩 쥔 멍청한 포즈가 된 카르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물건이다. 파편이나마 재활용될 여지가 있다면 업자에게 넘기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폐기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자신의 서번트를 지나 집을 향하는 방향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르주나는 조금 혼미해졌다. 현대인의 감각에 맞춰 비유하자면, 대로에서 적들과 총격전을 벌이고서 속도 위반 딱지를 떼인 기분과 비슷했다.
"…네, 마스터의 생각이 옳… 네요. 그러니까… 이 시대에도 규범의 준수라던가, 자원의 절약은 몹시 중요한 문제이고, 마스터이신 당신이 이와 같이 올곧은 사람이란 사실에, 이 아처는… … 마스터, 그렇지만요,"
뒤뚱거리며 걷던 카르나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자신을 호명하는 음성은 다섯 걸음 이상 떨어진 곳에서 들렸는데, 아처는 어느새 카르나의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이런 일에 서번트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은 이상합니다. 부디 실례를 용서하시길."
그러더니 그는 카르나가 어렵게 옮기고 있던 자전거 토막들을 한 손으로 가볍게 겹쳐 들었고, 다른 팔로는 카르나의 가는 지체를 단숨에 안아올렸다. 신장 차가 거의 나지 않는 지라 허공 높은 곳에 머리가 위치하게 된 카르나는, 아처에게 안겼다기보단 거의 무등 태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주 약간 커진 눈으로 그가 말했다.
"…염려된다."
마스터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지시해달라 청하려던 아처는 그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너와 같은 장정이 매일 먹을 끼니와 여벌의 옷이 나의 집에는 없다. 어쩌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아봐야 할 지도 모르겠군."
"………"
그의 세계관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몰라 아처는 또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말투는 꼭, 우연찮게 어디 길가에 유기된 대형견이라도 주워버린 듯한 분위기를 풍겨서, 묘하게 또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이 남자와 계속 대화하면 그의 페이스에 끝없이 휘말리겠다는 생각에 아처는 그냥 대꾸하지 않고 곧장 대지를 박차올랐다.
협소한 바닥 위에 기어이 깔린 작고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아르주나는 대강의 이야기를 마쳤다. 침대라고 해봤자 높이 빼고는 매트리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상태의 물건 위에서 카르나는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터무니 없는 일에 휘말렸군."
성배전쟁에 대한 설명을 들은 카르나는 자신의 감상을 그것으로 일축했다. 그리고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자에게서 상황에 그럴 듯한 문장을 더 뜯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마스터, 그 밖에 하실 말씀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으니, 취침하는 것이 좋겠다."
"…… 이 아… 처에게 따로 분부하실 것이라도?"
"없다. 너도 자는 게 어떤가."
어느새 이불을 몸 위로 덮는 마스터를 보며, 아처는 자기 몫이라고 내어준 매트리스 위에도 요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느즈막히 인식했다.
"서번트에겐 식사와 수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보람 없는 생이 되지 않겠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런저런 위기들을 잘 넘겨온 아르주나도 그 말에는 그만 서번트로써의 본분을 잊고 발끈할 뻔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즐거움을 빼앗겼는데도 그렇게나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니 대단하다'는 거창한 속뜻 따위야 그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서번트의 보람은 마스터의 승리에 있습니다. 마스터, 성배는 어떠한 소원이건 이루어줄 수 있는 보물입니다. 마스터에게는, 이 아처의 힘을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이 없으신지요?"
"솔직히 말해, 성배에 그다지 흥미는 없다."
특별히 얻고자 하는 것이 없다. 빌고 싶은 소원이 없다. …자신이 보리수나무 아래의 각자覺者라도 된단 말인가? 무욕하며 냉담한 그의 태도에 아르주나의 안쪽에서 또 무언가 꿈틀거렸다. 내장을 기어다니는 불쾌감은 생전에도 느낀 적 있는 것처럼 익숙해서 소름이 끼쳤다.
검은 불길을 진정시킨 것은 이번에도 마스터의 시선이었다. 마스터의 앞에서 사악한 심보를 들켰다간 큰일이었다. 게다가 저 흐릿한 색의, 그러니까 '진짜'에 비하면 흐리멍덩한 눈깔에는 영웅에 대한 천진한 경외마저 담겨있지 않은가. 진짜 카르나와는 명백히 달랐다. 아주 달랐다.
"하지만, 네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이야기다. 너는 성배에 무엇을 바라지? …아니,"
가장 중요한 것에 이제야 생각이 닿았다는 듯, 질문하는 카르나의 목소리는 다소 탄성에 가깝게 들렸다.
"질문의 선후가 틀렸군. 너의 이름은, 정체는 무엇이지, 아처?"
물음에 아르주나 역시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자신의 진명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앞에서 '아르주나'일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의식 중에 그 점을 이용해, 지나치게 카르나를 닮은 소년에게서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스터. 오로지 지금의 제가 당신의 서번트라는 사실만을 기억해주십시오. 저를 믿고 의지하여, 최후까지 살아남으시는 겁니다."
아르주나는 서슴없이 거창한 말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기만적이나 기만은 아니었기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죄악감은 그렇게 무겁지도 끈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성배에 제가 빌 소원은…"
"…바라건대, 영원히 고독해지는 것입니다. 마스터."
그러고서 아르주나는 무척 대담한 행동을 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마스터의, 카르나의 두 눈을 똑바로 본 것이다. 그의 눈빛에서 충격이나 감탄, 혼란이나 경악, 하다못해 실망 같은 감정이라도 읽어내고자 아르주나는 시선을 곧게 마주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군. 그것이 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무감한지, 쓸쓸한지, 자신을 경멸하는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
하다못해 '농담인가?' 하는 반문이라도 돌아왔다면 나았을텐데.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나 짧게 반추한 아르주나는, 자신이 또 이 '평범한 소년'에게서 카르나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내가, 카르나의 반응을 보고 싶어한다고… 하마터면 자조의 소리를 흘릴 뻔했다. 진짜를 마주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닮은 것을 마주하면 그에게서 진짜를 끌어내려든다.
그러나 왜 그런 짓을 해야한단 말인가… 마침내, 어떠한 시선도 닿지 않는 세상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마스터께서 수면에 써야할 귀중한 시간을 소모했군요. 부디 쉬십시오."
"그래."
종자의 정중한 인사를 듣고서, 그의 마스터는 전등 스위치와 이어진 줄을 당겨 불을 껐다.
딸깍 소리와 함께 깔린 어둠 속에서, 아르주나는 비좁은 방을 둘러보았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먼지 낀 공기는 조금 습했고, 가장자리 벽지가 닳아 금방이라도 뜯어질 듯 매달려 있었다. 저렴하고 오래된 가전 제품들은 다소 불안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작은 책상 한쪽에 치워진 인쇄물과 노트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배어드는 꽃물처럼 아주 천천히, 아르주나는 이 가난하고, 성실하며, 우직하고, 무엇보다 불운한 남자의 삶을 느꼈다. 매일의 정해진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이 크게 개선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본인이 그에 불만을 표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뿐. 그러니 그는 아마 언제까지고 평범하고 조용히 불운할 예정이었다. 그게 아르주나의 마스터였다. 희미한 등불처럼 간신히 빛나는 무채색의 생명.
이런 것이, 이런 볼품 없는 존재가, 카르나일 리…
"아처, 하나 잊은 게 있다.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
갑작스레 들린 말에 아르주나는 침상에 누운 마스터를 쳐다보았다.
"나는 카르나라고 한다."
그리고, 칼에 찔린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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