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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다빈] 편히 쉬어요

FGO 로마니 아키만x레오나르도 다 빈치 전연령가 글

2021.06.26 포스타입 게재했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로마니와 다빈치의 여유로운 한 때로 리퀘 받아서 작성

1부 종장 스포일러 있음


때로는 영웅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아, 정말! 못 해 먹겠네!”

난폭한 어투에 로마니 아키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씩씩거리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열 받은 티를 내다니 별일이 다 있다. 다 빈치 짱 답지 않은 태도라고 해야 할까.

“이제 나도 몰라! 쉴 거야!”

“으, 응. 그래.”

“그러니 너도 쉬도록 하게나, 로마니 아키만!”

“어? 난 아직…….”

“대답은?”

“아, 알았어. 쉬면 되잖아, 쉬면!”

아무래도 자신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막 집중이 잘 되기 시작했는데. 로마니는 억울함을 표현하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러니까 천재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거라니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것도 ‘내밀한 대화’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만능천재에게는 어느 때라도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기술국 명예 고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들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한마디라도 내뱉는다면 칼데아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지고야 말겠지.

그러나 때로는 영웅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만능인이라도 금강불괴는 아니고, 마력으로 짜여 쇠하지 않는 몸을 지닌 영령이라 해도 정신은 소모되기 마련이다. 인간은 죽어서도 인간의 방식을 놓지 못한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고, 하소연과 푸념을 늘어놓고 싶을 때 정도는 누구에게라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자신만이 유일하게 레오나르도에게서 약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일 것이라고, 로마니는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마니 아키만은 인리계속보장기관 칼데아의 임시 지휘관이자 의료 섹션 톱이므로. 스태프의 정신건강 관리 역시도 그의 의무 중 하나다. 다소 불합리한 폭거도 건강 관리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듯싶었다. 실제로 기분도 의외로 나쁘지 않다. 모처럼 집중하던 것이 깨졌는데도 도리어 조금은 흐뭇한 마음마저도 드는 것만 같았다.

“좋아, 그럼 티 타임이라도 즐겨 보실까!”

쭈욱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켠 레오나르도가 히죽 웃으며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로마니는 덩달아 몸을 쭉 늘리며 크게 하품했다. 생각보다도 몸이 굳어 있었는지 관절부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고 좌우로 고개를 움직이자 겨우 근육이 풀리는 듯했다.

“운동 부족이야. 로마니. 내내 그렇게 앉아만 있다간 금세 뱃살이 두둑한 아저씨가 돼 버릴걸?”

“좀 봐 줘. 여기서 운동까지 하려면 하루가 최소한 30시간은 있어야 한단 말이야.”

로마니는 눈썹을 모으며 항변했다. 그러나 내심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무심결에 지방의 부재를 증명하려는 듯 배를 만지작거리는 로마니를 보며 레오나르도가 하하, 웃음소리를 내었다.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면 간식부터 끊어야 하지 않겠어? 비만은 각종 성인병의 주요 원인이라고. 이십 대에는 어찌어찌 버텼을지 몰라도 삼십 대부터는 순식간에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그, 그건…… 그렇지만.”

로마니는 불만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레오나르도의 말은 분명 현대의학적 소견으로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분고분히 받아들이기에는 몹시 심사가 뒤틀리는 것도 사실이다. 당질과 지질의 가호 없이 이 중노동을 어떻게 버티라는 소리인지. 이래서 천재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소리가 온 칼데아에 공공연히 나도는 거라고! 입술을 비죽거리는 로마니의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 쌉싸름한 카카오 향이 한 차례 비강을 간지럽힌 후에는 들쩍지근한 분유 냄새가 희미하게 달라붙어 온다. 로마니는 토라진 척을 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짜잔~ 다 빈치 짱 특별 레시피로 만든 획기적으로 맛있는 창작 빵 3호와 코코아라네! 역시 티 타임에는 간식이 필수지!”

“좀 전까지 살찌니까 먹지 말라고 타박해놓고 이러기야?!”

그러나 항의하는 듯한 말투와는 반대로 로마니는 눈을 빛내며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찰랑찰랑하게 흔들리는 갈색 액체를 보기만 해도 저절로 뺨 근육이 느슨해지는 듯했다.

“뭐얼. 마음만 같아서는 칼로리를 쫙 뺀 특제 건강 요리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참이지만…… 아무래도 칼로리는 맛의 척도라는 말은 좀 부정하기 어려워서 말이야. 담백하고 건강한 요리로 맛까지 챙기기는 쉽지 않다고나 할까. 안 그래도 극한 상황에 처한 너희에게서 먹는 즐거움까지 빼앗는 건 아무리 천재라도 좀 마음이 켕긴다고나 할까. 아니, 그야 다 빈치 짱에게 불가능은 대략 없는 편이지만? 온갖 일을 다 벌였다가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테니까. 그럴 바에는 주방은 에미야 군에게 맡겨두는 쪽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으음…… 분명히 너, 생전에 식당 열었다가 쫄딱 망했던 적도 있다고 그랬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실험이었어, 실험! 그런 식으로 안 좋은 부분만 과장해서 기억하지 말아 줄래? 천재는 요리 솜씨도 천재적이거든?”

나 참. 레오나르도가 툴툴거리며 제 몫의 차를 홀짝거렸다. 로마니도 딱히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처음으로 스파게티 면을 발명했다고도 알려져 있으니까. 게다가 이 창작 빵 역시도 훌륭한 맛을 자랑했다. 15세기 프랑스에서 공수한 밀로 만들었으니 현대식으로 개량된 밀빵보다는 품질이 떨어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드럽고 쫄깃쫄깃한 식감은 유명 빵집에서 줄을 서야 살 수 있는 한정판 빵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거기에 따끈따끈한 코코아를 곁들이니 당분과 탄수화물이 딱 적당한 조화를 이루어 뇌에서 행복 호르몬을 콸콸 내뿜게 만드는 듯했다. 고된 일로 지친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을 느끼며 로마니가 중얼거렸다.

“아, 맛있어…….”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네. 역시 만능천재 다 빈치 짱이십니다.”

영혼 없는 칭찬에도 레오나르도는 흐흥, 코를 울리며 웃었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술과 대조적으로 푸른 눈만큼은 요만큼도 웃지 않은 채 이쪽을 흘겨보고 있었으나, 로마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잠시간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이 방을 메웠다.

“그래서, 기분은 좀 어때?”

“응?”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로마니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어 레오나르도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차를 마시며 시선을 받아넘기는 표정이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별 이유 없는 잡담인 듯해 로마니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뭐……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누구 씨가 집중 흩트려 놓지만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 같지만.”

“그랬어?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분명 아주 사려 깊고 아름다운 만능무적 천재겠네.”

“너 너무 뻔뻔한 거 아냐?”

가볍게 핀잔해도 레오나르도는 조금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다. 외려 턱을 추켜올리며 우쭐대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로마니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어째서인지 자연스레 한숨이 새었다.

“나쁘지 않다……라고 해도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안 될 건 뭐야?”

반문 역시도 가벼웠다. 로마니는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러게. 안 될 건 뭘까. 의문의 끝에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북미 특이점에서 귀환하자마자 쓰러져 버렸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에게는 더없는 강행군이었을 터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문득 숨이 갑갑해 로마니는 코코아를 들이켰다. 미지근하게 식은 액체가 식도를 적셔도 여전히 가슴은 꽉 막힌 듯했다.

“……생각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어.”

“누가, 네가?”

“뭐라고 하면 좋을까……. 따지자면 별로 그렇게까지 괴롭진 않거든. 엄청 슬프지도 않고. 아니, 그야 아무 감정도 안 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놀라울 것도 없었고.”

반면 인류 최후의 마스터, 후지마루 리츠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처절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물들던 순간. 로마니 아키만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설명을 미룬 대가를 아직 치르지 못했다.

“올 것이 왔다고 해야 하나. 그게 다야. 어차피 누구한테나 끝은 오는걸. 불안하지 않은 건 아냐. 걱정도 되고. 그렇지만 고작해야 그 정도 감정이니까. 의외로 별것 아니라는 느낌이야. 음. 확실히 냉정한 소리네.”

나직하게 속삭이며 로마니는 머그잔을 계속 두드렸다. 툭, 툭, 손끝이 닿을 때마다 잔잔하던 액체에 미세한 파문이 인다. 갈색 음료에 어렴풋이 비치는 얼굴이 기묘한 형상으로 일그러져 로마니는 자신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애초에 침울해하고 있을 시간도 없으니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지만.”

그 말을 끝으로 로마니는 남은 코코아를 전부 들이켰다. 식어버린 코코아는 아까만큼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고, 다만 텁텁한 뒷맛만이 입안을 끈적하게 맴돌았다.

“그나저나 진짜 이러고 있을 시간 없거든?! 이제 다시 일하자, 일!”

탁, 잔을 내려놓은 로마니는 애써 분위기를 환기했다. 천재는 조금 쉬어도 여유로울지 모르지만, 평범한 인간은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도 휴식에 함께 어울려줬으니 레오나르도도 조금은 기분이 풀렸겠지. 그가 최대한 효율을 낼 수 있다면 자신의 시간쯤이야 조금 낭비해도 오히려 이득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위안하며, 로마니는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쉴 틈을 안 주네.’

레오나르도는 한숨을 쉬고픈 마음을 억누르며 잽싸게 식기를 치웠다.

때론 영웅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누구라도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고, 하소연과 푸념을 늘어놓으며 모든 긴장을 내려놓을 때가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팽팽하게 긴장한 채 일만 계속하다가는 언젠가 망가져 움직이지 못할 때가 올 터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영령조차도 그러한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건만, 하물며 살아있는 인간은 어떠하랴.

그럼에도 로마니 아키만은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양, 목표에 도달한 이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작정 내달리기만 할 따름이다. 몸과 마음이 전부 너덜너덜해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로마니가 가진 비장의 무기가 무엇인지 레오나르도는 모른다. 그저 언뜻 스쳐 지나간 이야기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어렴풋하게 그 결말만을 추측할 뿐. 로마니가 생각하는 끝에는 로마니 아키만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레오나르도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만 한다. 타인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약한 마음을 내비칠 수 있는 삶을. 그리하여 그것을 감미 삼아 로마니 아키만이 목표 이후의 삶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마저도 내 욕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오나르도는 또 다른 휴식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일한 휴식이 영원한 안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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