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 관련

악몽으로부터의 비호(庇護)

아킬레우스x헥토르/페이트 시리즈 (Fate)

Red camel by 스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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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작성.

이때는 FGO에 아킬레우스가 실장전이라 '실장되었다 라는 전제하에 썼습니다'라고 표기했네요.


꿈을 꿨다.

한 남자가 있었다. 신이 온 정성을 담아 빚은 조각상처럼 생긴 남자다. 나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다. 금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분노에 살해당한다고 생각했다. 도망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맞서 싸운 끝에 내 시선이 뒤집힌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죽음으로 다가왔다. 숨이 막힌다. 나는. 지금. 여기서. 그에게 죽는다.

알고 있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기억이다.

 

 

 

이곳 칼데아는 수많은 영령이 온다. 누군가는 이곳에 머무르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간다. 평소와는 다른 이러한 영령의 소환은 성배전쟁이 아닌 성배탐색을 목표로 했다.
     헥토르 역시 그렇게 소환된 영령 중 한명이었다. 그는 처음은 칼데아의 마스터의 적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칼데아의 마스터의 아군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헥토르는 그때부터 서번트로서 마스터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다른 서번트와의 관계도 모두 동료라고 생각했다. 동료가 있다는 점은 무척 든든했다. 혼자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싸움이었다. 기댈 이가 있고 지탱할 이가 있으며 지킬 이도 있었다. 헥토르는 정말로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나날의 끝에 그가 찾아왔다.
     새롭게 소환된 서번트는 그리스의 대영웅 아킬레우스였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헥토르에게 한가한 날이다. 그렇다고 마냥 놀고만 있는것도 헥토르의 성미가 아녔기에 수련장이라도 향할까 하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멀리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헥토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마치 처음부터 못들은 사람처럼 말이다.
     “후후. 당신답지 않네. 그래선 누구라도 알아차릴걸.”
     헥토르의 귀에 여유 있으면서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체구는 작지만 여신의 위엄을 가진 소녀, 에우리알레가 헥토르를 올려다보았다. 헥토르는 몸을 낮추어서 여신과 눈을 맞추었다.
     “역시 그러려나. 그렇지만 아저씨. 별로 저쪽이 알아차려도 상관없는걸.”
     “어머나. 의외네. 숨길거라 생각했는데.”
     여신은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일부러 놀란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다.
     “숨길 리가 없잖아. 아저씨가 적을 싫어해서 피하는 것 뿐인데.”
     어차피 그놈도 이미 잘 알고 있을걸?
     헥토르의 설명에 에우리알레 뒤에 있던 덩치가 큰 소년이 소녀에게 물었다.
     “적…. 싫어해…? 헥토르…한번 싸운…사람 싫어해?…그럼 나도….”
     “아앗, 그건 아냐. 싫지 않은걸.”
     “그렇지만…. 전에 우리 싸웠고……분명……나보고……우우.”
     아스테리오스가 무척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에우리알레가 정말이지 그런거 아니야 라면서 아스테리오스를 토닥여주었다. 헥토르도 쩔쩔매며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줘야했다.
     “그럴 리가. 싸웠다고 다 싫어하진 않아. 괜찮아. 괜찮아.”
     “우우………그렇구나……. 그럼 헥토르는 어떤 사람 싫어 하는 거야…?”
     “아저씨가 싫어하는 사람은 있지, 엄청나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제멋대로이며 강한 반신이야.”
     “우웅……….”
     “그러니까 그런 놈 보면 한 대 꼭 때려주기야. 약속해.”
     “웅…! 약속……할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테리오스에게 헥토르는 말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여신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머나. 정말 싫어할 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으려나. 여신님. 헥토르가 되묻자 에우리알레는 흥미가 없어졌다는 듯 손을 파닥이더니 아스테리오스의 어깨에 올라탔다.
     “충고를 하나 해줄게. 도망칠 셈이라면 단념해. 신이란 존재는 인간이 알기 어렵잖아.”
     고개를 갸웃하는 아스테리오스의 옆에서 에우리알레는 다시 매혹적으로 웃었다.
     “딱히…. 그런건 말 안해도 알고 있어.”
     누군가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어차피 거부할 수조차 없다. 악몽이 눈꺼풀 뒤에 박힌 듯이 떼어내 지지 않는걸. 헥토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어차피 서번트는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되니 몸에 피로가 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선택해서 쉬지 않는 것과 다른 영향으로 쉬지 못하는 건 느낌이 다르다. 휴식이 방해받은 기분이라 꽤 불쾌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헥토르는 이 좁으면서도 넓은 칼데아에서 아직 그를 마주한 적은 없었다는 부분이다. 만약 만나면 전력으로 도망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의 효력인지, 그를 직접적으로 대면할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헥토르는 완전히 안도하지 않았다. 꿈에서 나오는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굴을 실제로 본 세월이 참으로 먼데도 불구하고 꿈에서의 그는 바로 지금 막 본 사람처럼 손에 잡힐 듯이 생생했다. 그 꿈을 꾸며 언젠가는 분명 그를 마주하리라는걸 느꼈다. 애초에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을 쳤을 테지만 그러지 못하는 운명이 자신을 묶고 있었다. 그것은 헥토르에게 있어 아침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악몽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저씨…의 파티편성이….”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헥토르는 레이시프트 팀 편성 목록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적혀져있는 이름은 헥토르 자신의 이름과 아킬레우스의 이름이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지만, 이미 정해진 파티편성은 바꿀 수 없었다. 헥토르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끌고 집합 장소로 향했다.
     “어라. 왔군. 헥토르. 다행이다.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담배를 문 채 공명, 로드 엘멜로이 2세가 손목시계에서 헥토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그는 가끔 손에 일리아스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관계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둘을 흘끔 바라보기만 하고 더 이상 말을하지 않았다.
     로드 엘멜로이 2세의 뒤엔 헥토르에게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초록색 머리에 가려진 금색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칼데아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우스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소환되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서 도망 다니곤 했으니까.
     헥토르는 아킬레우스를 보자마자 어깨가 당겨지는 긴장감이 몸을 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악몽 속에서 튀어나온 듯 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악몽 같던 아킬레우스가 떠올랐다. 정작 아킬레우스는 발을 바닥에 비비듯이 끌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가 마지막이야. 늦다고.”
     “하하. 그랬어? 미안. 아저씨는 너처럼 빠르질 못해서.”
     헥토르는 최대한 그럴싸하게 말하려 애썼다. 헥토르는 평소 자신의 말투가 어떠했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아 힘들 정도로 긴장했다. 그와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흘깃 볼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좋아. 오늘 올 사람은 다 왔네.”
     “오늘의 레이시프트는…. 평소에 가던 그대로야. 달라질 사항 없으니까 침착하게 행동하고.”
     “선배. 파이팅입니다!”
     “하…. 또 일이네.”
     서번트 여러명의 말소리에 섞여 헥토르도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최대한 태연하게 웃으면서 헥토르는 사람들 사이로 아킬레우스를 흘깃 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 어디에도 거짓은 없었다.
     설마 긴장하는 건 나뿐일까.
     헥토르는 왠지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훅 꺼지는 느낌이 들면서 그대로 레이시프트에 들어갔다.

 

 
     몇 번이나 했던 레이시프트다. 이제는 일상이 된 정도였다.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지만 멀미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로 익숙했다. 그런데. 그래야했는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시야가 검게 물들어갔다. 분명 이상하다. 보통의 레이시프트는 시야가 밝게 변해야한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평형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 시각이. 청각이.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 정신 좀 차려봐. 괜찮아?”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강하면서도 힘 있으면서도 시원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기나긴 악몽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헥토르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어찌나 갑자기 일어났는지 헥토르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킬레우스에게 이마를 크게 박았다.
     “아야야. 아파! …거참, 아저씨. 정신 한번 요란하게 차리네.”
     “아이고…. 아픈 건 아저씨도 마찬가지거든?”
     헥토르는 아픈 이마를 문질렀다. 그렇지만 저놈은 어차피 불사의 가호가 있으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잖아. 헥토르는 자신이 왠지 손해 본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왜 거기 있었어?”
     “왜냐니. 아저씨가 일어나지를 않으니까…. 걱정되어서가 당연하잖아.”
     “네가 아저씨를 걱정 했다고? 퍽이나 그랬겠네.”
     정신이 없어서 긴장이 풀어졌는지 술술 말이 잘도 알아서 기어 나왔다. 비꼬는 듯 한 헥토르의 말에 아킬레우스가 어금니를 물었다.
     “나참. 이 상황에도 비꼴 여유가 있다니. 됐어. 아저씨. 멀쩡한가 보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반응에 기분이 좀 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토르도 뒤늦게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레이시프트 계획대로라면 매번 오던 숲속으로 왔어야 했는데…. 이곳은 숲은커녕 허허벌판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지평선 가득하게 회색의 모래만이 먼지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여긴 어딜까.”
     “그건 나도 모르지.”
     “마스터는 괜찮으려나.”
     “글쎄다.”
     “집히는 부분 없어?”
     “전혀.”
     헥토르의 질문에 아킬레우스는 무엇 하나 확실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헥토르는 더 묻지 않았다. 헥토르 또한 무엇하나 명확하게 알기 힘들었다. 이것은 정말 악연이 겹친 사고였다.
     “레이시프트 할 때 칼데아에 문제가 있었나보네. 아아…. 어쩐담. 마스터가 걱정이야….”
     헥토르가 걱정을 담아서 밑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킬레우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저씨는 이 와중에도 마스터 걱정을 하네.”
     “그거야 당연하지. …아니. 너에게도 마스터잖아? 걱정되지 않아?”
     “난 아냐. 아무리 마스터라지만 본인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오히려 이정도의 사건에도 수습하지 못하면 실망이야.”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 달리 냉정하게 말했다.
     “어디 그래서야 나를 사역하겠어? 난 그렇게 꼴사나운 마스터를 내 위로 모시고 싸우고 싶지 않아.”
     헥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헥토르에게 있어 마스터는 소중한 존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이 의견차이가 불편했다.
     그렇지만 헥토르는 바로 납득했다. 그래. 아킬레우스. 이자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왕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던 전사이며, 신들의 앞에서도 운명에 거스르려 했던 반신이다. 그러니 서번트로 와도 달라질 리가 없었다.
     헥토르가 애써 평정을 찾을 때 다시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아저씨는 스스로를 걱정 하면 어떨까 싶은데. 지금 위험한건 다른 사람보다도 아저씨잖아.”
     날아와 꽂힌 말은 창처럼 헥토르에게 박혔다. 헥토르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무척 경직된 표정으로 아킬레우스를 응시했다.
     “너…. 그게 무슨….”
     “…뭐야. 표정 풀어. 아아…. 그런 의미 아냐.”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실언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바꾸었다.
     “아저씨 말대로 우리는 마스터와 떨어지면 마력이 없어지잖아. 여기서 죽으면 칼데아에 자동으로 간다지만 지금은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했을 뿐이야. 오해하지 말라고.”
     “어…. 그래. 그 말이 맞아.”
     헥토르는 억지로 아킬레우스의 말에 억지로 동의를 표현했다. 그렇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해였을까? 정말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말이 영 껄끄러웠다. 차라리 정말로 아저씨의 과민반응이었다면 편하겠지. 헥토르는 스스로의 팔을 쓸었다. 팔엔 소름이 돋아 있었다. 헥토르는 바람이 차가워진 탓이라 생각했다. 해가 지고 있기도 했다.
     “마스터는 걱정 하지마. 서번트가 꽤 많았잖아? 후열의 누군가는 마스터와 동행했겠지.”
     헥토르의 표정이 계속 좋지 않자 아킬레우스는 그가 마스터를 걱정한다고 여긴 모양이다. 헥토르는 그 말에 맞춰 답했다.
     “그럴려나….”
     “그렇다니까. 걱정마. 당장에 로드라고 불리는 공명도 우리쪽에 없잖아. 아마 마스터랑 있을거야. 잘은 몰라도 그 사람 머리 좋은 군사라며? 아마 알아서 어떻게든 마스터를 챙기겠지. 그러니 너무 염려 마.”
     헥토르는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웠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아킬레우스가 말이다.
     아킬레우스, 그는 생전 헥토르를 죽였다. 헥토르의 동생들을 살해 했다. 헥토르의 가족을 유린했다. 그리고 헥토르의 나라 역시 멸망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헥토르를 위로하는 말이 나왔다. 이 얼마나 웃기지도 않는 촌극인가. 헥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얼씨구. 웃는 걸 보니 대충 정신이 드나보네.”
     “하하. 그래. 덕분에 말이지. 그렇네. 네 말이 맞아. 낙담해서 뭐하겠니. 아저씨는 단서가 될 만한게 있나 이 주변을 좀 둘러볼래.”
     “그러면 같이 가. 위험하다고.”
     누가. 내가?
     무엇에게서. 너에게서?
     헥토르는 더 묻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찾아왔다. 고요한 적막이 밤의 휘장을 걸었다. 그 시간 동안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는 걷고 또 걸으며 이곳이 어딘지 추측하려 했다. 그렇지만 단서가 너무 적었다. 발밑에 차이는 건물의 잔해가 그나마 이곳에 있는 전부였다.
     “무너진 성벽 같긴 한데…. 이것만 봐선 딱히 어디 양식인지 모르겠네.”
     “굳이 따지면 로마 쪽 아닐까?”
     “가능성 있어 보여. 으음…. 그렇지만 마스터는커녕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안보이네.”
     “마스터의 기척 같은 건 아저씨도 모르지?”
     “응. 전혀 느껴지지 않아…. 조금만 더 가보자.”
     “잠시만, 저기. 아저씨!”
     헥토르가 먼저 걸어가자, 아킬레우스가 다급히 헥토르의 팔을 잡아 당겼다. 헥토르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팔을 뺐다. 경계심 가득한 굳은 표정으로 아킬레우스를 노려보았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그 반응에 조금 놀란 듯 했다.
     “아…. 그…. 별건 아니고….”
     마주친 시선이 흔들렸다. 헥토르는 자신의 실수라 생각했다.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그나마 맞춘 저울의 평행이 흔들렸다. 조심스레 걷던 살얼음판에 금이 가듯이 와장창 무너졌다. 헥토르는 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무언가 말하려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아무렇지 않게 농담조로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보나마나 입을 열면 목소리가 떨릴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아킬레우스였다.
     “저기에 무슨 건물 같은 게 보여서 말이지. 저기로 가보면 어떨까…해서….”
     아킬레우스도 어색하게 말을 더듬더듬 이었다. 헥토르는 자신을 책망했다. 평범하게 타인이 그러했듯 돌아봐야했는데. 괜히 해도 되지 않을 반응을 보였다.
     “저쪽이야. 보이지…? 내가 먼저 가고 있을 테니까 아저씨는 천천히 따라와.”
     아킬레우스는 애써 태연히 말하고는 헥토르의 앞에 걸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보다 앞서 걷지 못했다. 그가 등 뒤에서 따라오는 일이 무서웠다. 두려웠다. 따라잡혀 죽을 것 같았다.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문제는 아킬레우스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지금 아킬레우스는 어색하게나마 최대한 헥토르에게 맞춰주려 하고 있었다. 헥토르에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정작 저놈이 오히려 평온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내쪽이 흔들리고 있다니. 아저씨. 어떻게 되어버린거 아냐?
     헥토르는 정말로 비참했다. 헥토르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듯이 때리고는 아킬레우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거의 다 무너지는 벽돌로 된 건물로 들어섰다.이 건물은 대리석으로 기초 공사를 했기에 아직 형태는 남아 있었지만 안에 있는 것들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말그대로 뼈만이 남은 건물이었다.
     “으음…. 건물이 있어서 혹시 했지만 역시나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네….”
     아킬레우스는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하려고 애쓰듯 말을 이었다. 정말 노력이 가상했다. 헥토르도 숨을 골라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이런. 꽝이었네~ 하하하.”
     “웃을 때가 아니야. 아저씨…. 휴…. 어쩐담.”
     아킬레우스는 난처한 듯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세수하듯 쓸었다. 점점 시간이 흘렀다. 아무리 아킬레우스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초조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옆얼굴을 봤다. 지나칠 정도로 미려한 아름다운 얼굴이 조각상같이 보였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봤지만 그는 헥토르의 기억 그대로였다. 기억 속 그대로 자신 있고 당당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행동은 시원시원했고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났다. 눈도. 코도. 입도. 모든 것이 헥토르의 기억과 일치했다.
     그렇기에 헥토르는 그가 더 꺼려졌다. 헥토르는 아직도 선명히 그릴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을 죽일 때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금색 눈이 어떻게 미친 채 자신을 내려다봤는지. 올라간 입꼬리는 어떠했는지. 그렇기에 지금도―.
     “…는……. 아저씨!”
     헥토르의 코 앞에 아킬레우스의 그 얼굴이 있었다. 헥토르는 놀라 말했다.
     “어? 미안해. 뭐 말하고 있었어?”
     “와…. 아저씨 상태 좀 위험하지 않아? 혹시 마력이라도 부족해?”
     “아냐. 허리가 아파서 그래. 요새 듀린다나 던질 때 영….”
     헥토르는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변명을 했다. 그 말이 먹혀들었는지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답을 곱씹었다.
     “그래? 그건 큰일이네. 그렇지만 왜 그렇지? 아저씨 투창 자세는 무척 괜찮잖아.”
     “너 아저씨가 어떻게 창 던지는지 기억하는거야?”
     “당연하지. 내가 아저씨에 대한 걸 잊을 리가 없잖아. 심지어 아저씨가 어떻게 싸우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의외였다. 이 남자도 나에 대한 걸 전부 생생히 그려내고 있었던걸까. 헥토르, 자신뿐만이 아니라 아킬레우스, 그도 역시 말이다.
     헥토르는 잠시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가 겨우 이어 붙였다.
     “으으. 뭐래니. 그거. 진짜 싫다.”
     “아, 왜 싫다는 거야….”
     버럭 화를 내듯 나온 말은 진심보단 장난기가 섞이게 들렸다. 헥토르는 억지로 생각을 더 잇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도 그를 기억하듯이 그 역시 자신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거기서 끊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뭐 말 하고 있지 않았어. 너?”
     “맞다. 온 김에 아저씨. 좀 쉬는 건 어때? 안색 영 안 좋아.”
     “음. 솔직히 너 때문에 내 상태가 안 좋은 거거든…?”
     “정말 그런것 같으니까 뭐라고 못하겠네.”
     헥토르의 말에 아킬레우스는 쓰게 웃었다. 헥토르는 눈을 깜빡였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저런 표정은 잘 보지 못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드문 표정을 수집하듯이 바라봤다.
     그동안 아킬레우스는 혼자 걸어가더니 건물 벽과 벽 사이에 앉았다.
     “여기서 돌아다닌다고 어쩔 도리도 없잖아. 그러니 좀 쉬어둬 아저씨. 아저씨 완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야.”
     “그러면 아저씨는 쉬고 있을테니까…. 네가 그 빠른 다리로 돌아다니면 되겠네.”
     “기각. 여기서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르는데. 혼자 갔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어라. 아저씨가 그걸 노리고 말한다는 생각은 안하나보네. 그러면 아저씨만 이득이거든~”
     “아아- 정말~!”
     아킬레우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헥토르의 팔을 강하게 잡아 끌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헥토르도 반사적으로 팔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 탓에 헥토르의 몸은 완전히 넘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헥토르는 땅바닥에 굴렀다.
     “아야야. …이번건 정말 아팠어.”
     “미안. 그렇게 쉽게 넘어질 줄은 몰랐어. 아저씨 약하지 않잖아.”
     네네. 그렇지요. 아저씨는 평균 중에서도 엄청나게 상위권이랍니다. 그렇지만 네 괴물 같은 힘을 좀 생각해주면 안될까? 헥토르는 넘어진 채 아킬레우스에게 불평했다.
     “저기 말이야. 아저씨한테 좀 상냥하게 대해주면 안 돼?”
     “………뭐?”
     헥토르의 말에 이번엔 아킬레우스가 예상외란 표정으로 돌아봤다.
     “으음……. 내가 말했지만 영 이상한 말이네…. 네 말대로 아저씨 좀 피곤했나봐. 말이 헛 나왔어. …못 들은 걸로 해줘.”
     헥토르는 누운 상태로 일부러 반바퀴 돌아 아킬레우스를 등으로 외면했다. 그리고는 땅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헥토르의 무게 중심이 뒤로 밀려났다. 헥토르가 지금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아킬레우스가 다가와 헥토르의 뒤에서 끌어안듯 그를 자신의 두 팔로 어깨를 잡았다. 아킬레우스의 두 팔이 헥토르의 어깨를 감아 포옹하듯이 헥토르의 가슴위로 교차되어 있었다. 헥토르는 당황했다.
     “자, 잠시만.”
     헥토르가 벗어나려 했지만 오히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더 꽉 안았다. 그 힘 탓에 헥토르는 뒤로 넘어져 아킬레우스의 품에 쓰러졌다. 졸지에 아킬레우스에게 더욱 더 안긴 모습이 되었다.
     헥토르는 등 뒤로 아킬레우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하기보다 뜨거운 그의 맥박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아킬레우스가 뱉은 숨이 헥토르의 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고동을 느끼며 오히려 자신의 심장을 멈추고 싶었다.
     온 몸이 경직되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머리 끝까지 공포가 밀려왔다. 사고가 이어지질 않았다.
     나는 죽을 거야. 살해당할 것이다. 이곳에서. 이 자에게. 또 다시 그때처럼. 잔인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헥토르는 그 외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좀 낫네. 좀 쉬라니까. 또 어딜 가려고…하는…. 어랍쇼…. …아저씨?”
     아킬레우스는 흡족해 하면서 헥토르에게 말을 걸다가, 헥토르의 반응이 없자 의아해했다. 그러고보니 강제로 뒤에서 껴안은 상태인데 너무 얌전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헥토르를 내려다봤다.
     “저기…. 아저씨?”
     아킬레우스의 목소리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헥토르는 자신의 목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뜨거운 몸과는 다른 차가운 기운이 목부터 시작해 등을 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기억과는 다른 전혀 다른 다정한 말투가 오히려 불쾌했다. 헥토르는 외쳤다.
     “이거 놓아. 놓아달라고!”
     “아, 거참. 왜 그러는데.”
     “뭐라고? 왜 그러냐니. 너 머리 좋잖아. 한번 생각해보라고. 아저씨가 어떤 기분일지 말이야. 신경 써본 적 있기나해?”
     헥토르는 인상을 쓰며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려했지만 그의 팔에 막혀 잘 되지 않았다. 결국 헥토르는 아킬레우스를 보지 않고 앞만을 보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살해당했어.”
     “그랬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내가 또 죽일 것 같아?”
     아킬레우스의 이사이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헥토르의 등 뒤에서 으르렁대듯이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나도 아저씨 불편해. 껄끄럽다고. 그렇지만 안 죽여. 지금은 안 죽인다고. 우리가 서로 아군인걸 내가 파악도 못했을 것 같아? 그렇게까지 내가 바보로 보여?”
     아, 이 자식 화났구나. 헥토르는 알아차렸지만, 지금은 헥토르도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헥토르, 그 역시 화가 나 있었다. 이 남자의 무덤덤한 신경에. 그리고 그걸 거부할 수 없는 자신에 말이다.
     “네가 내 옆에 있는데 아저씨가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어. 나를 죽인 사람이 옆에 있는 상황이라고.”
     “뭐? 내가 분명히 안한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아저씨는 믿지 못 하겠다는 거지, 지금?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스틱스 강에 맹세라도 할까? 아니면 어떻게 해야 안심이 되겠어. 말해봐. 혹시 내가 죽으면 아저씨가 마음이 편해질까?”
     아킬레우스의 말에 헥토르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헥토르가 한 무언의 답은 긍정이 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성난 채 자신의 품에 있는 헥토르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는 억지로 얼굴을 바라봤다.
     “이봐. 헥토르! 적당히 해.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라는건 내가 할 말이야. 나보고 너의 옆에 어떻게 있으라는거야.”
     헥토르는 눌러 담았던 감정을 꺼내 집어 던지듯 외쳤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에게 살해당할 때 알고 말았어. 알기 싫은데 알아버렸다고.”
     “알았다니. …뭘 말하는 거야. 말이 분명하지 않잖아. 제대로 말하라고.”
     아킬레우스의 질문에 헥토르는 숨을 삼켰다. 헥토르에겐 아직도 어제일처럼 또렷히 남아 있었다.
     죽음은 비참했다. 전사로서 죽음을 언제나 가까이 했기에 죽음에 대해 나름의 준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각오와 달리 끔찍할 정도로 비정했다. 비참했고, 잔인했다. 헥토르가 그때 아킬레우스에게 잃은 건 단순한 목숨이 아녔다.
     “죽고 나서 우리의 인생을 담은 모든 역사가 말하지. 빛나는 영웅인 헥토르를 죽인 대단한 영웅인 아킬레우스를.”
     “그것이 뭐.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후대의 역사는 헥토르를 위대하게 묘사했다. 누가 봐도 질 것 같은 싸움을 계속 이끌어간 명장이며 나라를 위했던 헌신적인 왕자라 평했다. 그렇지만 헥토르의 그러한 설명들 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남은 사실이 있었다. 헥토르가 아킬레우스 손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헥토르를 죽임으로서 아킬레우스는 불완전한 영웅이 아니라 완전한 영웅이 되었다.
     “나는 너를 위한 제물이었어.”
     헥토르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가 신에게 만들어진 아킬레우스의 반쪽과도 같았다. 시대를 결판 지을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의 대칭으로 헥토르는 존재했다. 그것은 헥토르에게 있어 전혀 좋은 얘기가 아녔다. 헥토르를 죽임으로서 아킬레우스가 완성된다는 얘기는 헥토르라는 존재가 아킬레우스를 위해 존재하듯이 평해졌다. 제단에 바쳐진 산제물과도 같이 말이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살해당할 때 알게 되었다.
     내가 해왔던 모든 노력은. 내가 쌓아올린 모든 업적은. 모두 다 너에게 의해 파괴당하기 위해 존재했다.
     내가 이룩해낸 모든 일들이. 너에게 짓밟히기 위해 존재했고
     내가 숨쉬어온 모든 나날들이. 너에게 살해당하기 위해서였다.
     “내 인생 자체가 너를 위해 존재했던 거야.”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손에 잃은 건 그가 살아온 인생 전부였다.
     헥토르는 두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나오진 않는다. 다만 헥토르는 이 말을 하는 자신의 표정을 아킬레우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제일 망가진 얼굴을 안다. 죽어가면서 그에게 빌고 또 빌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왕자는 자비를 구걸할 사람으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영웅을 택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저씨.”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불렀다. 노기가 사라진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헥토르는 그 말에 답하기 싫었다.
     “헥토르.”
     아킬레우스는 다시 그를 불렀다. 이번엔 조금 더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지만 헥토르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아들인 빛나는 투구의 헥토르. 내 부름에 답해.”
     그 호칭에는 헥토르도 답할 수 밖에 없었다. 헥토르가 고개를 들어 아킬레우스를 보면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헥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격정과도 같은 그의 감정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들어줘. 나는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아들이자 준족의 아킬레우스다.”
     “알고 있어. 그러니 말해.”
     아킬레우스는 평소와 다르게 가볍지 않은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헥토르, 네가 죽고 나서 라오메돈의 아들인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를 만났다.”
     “아바마마….”
     “그래. 네 아버지이지.”
     그 이야기는 헥토르도 죽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킬레우스에게 직접 찾아가서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 달라 청원했다고 한다.
     “프리아모스 왕은 무척이나 용감했다. 그의 아들 중 열여덟을 죽인 내 앞에서 다른 아들을 돌려달라고 말하기 위해서 그 험한 적진을 뚫고 왔으니.”
     “……….”
     별로 내가 듣기엔 좋은 얘기는 아닌데. 그렇지만 헥토르는 굳이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반신이 차분히 얘기를 이어갔다.
     “상상할 수 있겠어. 헥토르? 네 아버지는 늙은 몸을 이끌고 혼자서 아카이아족의 함선을 뚫고 자신의 백성을 죽인 병사들 사이를 걸어 왔다.”
     “아아……. 실로……. 어려우신 걸음이셨겠네.”
     헥토르는 비통함을 씹어 삼켰다. 자신이 이 반신에게 죽어가면서 기원하듯이 아버지 역시 그리하셨다. 헥토르는 아버지의 심경을 생각하면 정신이 끓을 듯 했다. 그 마음은 얼마나 비통하셨을것인가. 그렇지만 말을 하는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태평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지. 헥토르. 너를 돌려달라고.”
     아킬레우스는 그때를 회상했다. 신들이 간청했어도 듣지 않았던 아킬레우스였다. 헤르메스가 제우스의 얘기를 전하고, 어머니인 테티스마저 난처해하고 있었다. 아폴론의 분노야 이미 산지 오래였다.
     어차피 아킬레우스 본인의 운명은 여기까지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그가 헥토르의 아버지에게 감동해 마음을 접은 것이다.
     “그때의 내가 완전히 설득 당했냐고? 천만에. 나는 여전히 하데스의 집에 묵을 나의 친우를 볼 낯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역시 프리아모스를 죽이고 싶었어. 그러면 전쟁도 끝나잖아. 완벽하지.”
     “너…이 자식….”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죽이고 싶었지만….”
     아킬레우스는 의외로 그 답지 않게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는 연거푸 강조했다. 이미 아킬레우스에게서 헥토르가 기억하는 흥분한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가 한 말을 차마 다 담아내지 못했다. 그가 담기엔 힘겨운 이야기였다.
   “아킬레우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헥토르의 질문에 아킬레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바다 노인의 딸인 어머니와, 영웅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나의 신분을 보장해주었던 제우스를 걸고 맹세한다 해도 지금의 네가 나를 신뢰할리 없겠지.”
   “……….”
   헥토르는 부정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역시 그럴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 아저씨.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아킬레우스는 마주보고 있던 헥토르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는 헥토르가 뒤를 가지 못하게 하듯이 헥토르의 뒷머리를 한손으로 잡았다. 헥토르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킬레우스의 이마가 헥토르에게 와 닿았다. 가까워진 얼굴이 헥토르에게 말했다.
   “헥토르.너는 네 말대로 나에게 죽임을 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너무나도 당당한 아킬레우스의 말에 헥토르는 눈을 떴다. 어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분노보다도 기가 먼저 막혀 언짢았다.
   “…웃기지마. 나는 네 전리품이 아냐.”
   “한 번도 아저씨를 전리품 따위로 생각한적 없어.”
   아킬레우스는 조금 쓰게 웃었다. 아. 아까전에도 봤던 표정이다. 헥토르는 두 번째 보는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아저씨의 운명이 내것이듯 내 운명도 아저씨 거니까.”
   “무슨 소리야…. 아저씨 운명은 아저씨 소유고. 아저씨는 널 가지기 싫어.”
   “가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아킬레우스는 그 자세 그대로 헥토르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마주 닿았던 이마를 떼었다. 그래도 헥토르에겐 여전히 가까워진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아킬레우스는 태연해보였다.
   “너를 죽이는 존재는 나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건 나야. 그것이 운명이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말을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무시하고 싶었다. 농담하지 말라며 가볍게 넘겼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말을 하는 아킬레우스는 진중하고 무게가 있었다. 마치 신탁처럼 그 말을 거역하기 힘들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난 아무도 아저씨를 죽이게 하지 않아. 아저씨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나니까.”
   아킬레우스는 지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럴 사이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대립하기 위해 존재했다. 인간의 수가 너무 많아진 한 바다에서 땅위의 사람을 소각하기 위해 태어나 자랐다. 그 둘로 인해 천칭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쪽을 운명이 택하고나서야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저씨를 죽이지 않아.”
   이곳의 운명의 천칭은 평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는 둘이 서로를 죽일 전장이 아녔다. 그렇다면. 지금은 둘이 서로가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내 옆에 있는것이 역으로 가장 안전한 사람 옆에 있는거야.”
   내가 아저씨를 해치려는 모든 것을 모조리 없애버릴테니까.
   아킬레우스의 말에 헥토르는 그제야 조금 평소처럼 미소지었다.
   “제정신이니? 그거 이상한 논리라고. 완전 억지야.”
   “하하. 그래?”
   아킬레우스는 따라 웃더니 헥토르를 잡았던 손을 놓고 그 대신에 헥토르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억지일지라도 믿어보면 어때? 운명보단야 믿음직하잖아.”
   헥토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얼굴이 베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카로운 칼에 다친 듯 확하고 피가 몰려왔다. 정말로 어디 다친게 아니려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래. …귀찮기도 하니까. 알았어.”
   헥토르는 납득하기로 했다. 아킬레우스는 거짓을 말하거나 남을 속이는 성격은 아니다. 정말로 밉다면 그 미움을 분출할 사람이다.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 성정이 그의 단점중 하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헥토르는 그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저씨가 너를 믿는다는 얘긴 아니지만.”
   헥토르가 일부러 날선 듯 말했지만 아킬레우스는 오히려 웃었다.
   “그거 좋네. 언제나 경계하고 있어줘. 아저씨는 그 점이 더 귀여우니까.”
   “…헛소리 좀 하지 않아주면 안될까?”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팔을 쳐냈다. 얼굴에서 아킬레우스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헥토르의 얼굴은 불에 달구어진 듯이 뜨거웠다. 헥토르는 무거워진 머리를 밑으로 내렸다.
   “몰라. 지쳤어…. 아저씨 쉴래.”
   “그래도 괜찮겠어? 내가 옆에 있는데?”
   얄미운 자식. 내 입으로 한번 더 말하게 하려는 속셈을 아저씨가 모를줄 알아? 헥토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킬레우스. 네가 말했잖아. 네 옆이 제일 안전하다고.”
   “응. 그랬었지.”
   “그러면…. 했던 말은 지켜주겠지? 제우스가 선택한 아이였던 준족의 아킬레우스.”
   헥토르는 일부러 짐짓 태연한 듯이 바닥에 누웠다. 자신의 망토를 정리하면서 평정심을 찾은 듯 굴었다. 아킬레우스는 그 옆에 앉아서 헥토르를 내려다보았다. 헥토르는 시선을 느끼고 아킬레우스를 슬쩍 봤다.
   “왜. 아저씨에게 뭐 할말 남았니?”
   “음음…. 그래도 아저씨는 역시 지금 얼굴이 더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까 전의 아저씨 얼굴 너무…….”
   “너무 뭐. 못생겼다고?”
   헥토르가 툭 쏘듯 말을 찔러넣자 아킬레우스의 표정이 바로 변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나 다른 건 몰라도 아저씨 얼굴 하나는 정말 맘에 드는걸.”
   “뭐?”
   “정말이야. 생전에도 생각했어. 성격도 입장도 행동도 다 마음에 안들지만 얼굴은 진짜 좀 많이 내 취향이라서….”
   “……뭐…뭐래. 미쳤나봐….”
   아악…. 듣기 싫은 말을 들어버렸어. 맞네. 너 내 여동생에게 청혼했었지.
   괜히 한마디 더 해서 속이 거북해졌다. 헥토르는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헥토르는 귀를 막기보다 눈을 감기로 했다. 그렇지만 눈을 닫아도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아킬레우스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헥토르는 무척 어색했다. 이러느니 차라리 저놈 목에 비수를 꽂는게 더 익숙하겠다. 헥토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헥토르는 몸을 돌리지 않고 누워서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헥토르의 예상대로 아킬레우스가 웃으면서 헥토르 옆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도 헥토르에겐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헥토르는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 한마디 물었다.
   “너는 괜찮아?”
   뭔가 말 앞뒤가 없어졌네. 헥토르는 뒤늦게 부연설명을 했다.
   “네가 계속 거기 앉아서 보고 있으니까 아저씨 영 신경 쓰여.”
   “신경 쓰지 말고 자면 되잖아.”
   “그냥 네가 다른 쪽 보고 있으면 안 될까?”
   “싫은데. 난 아저씨 얼굴 보는게 재밌으니까.”
   뭐가 재밌다는지…. 영 모르겠네. 헥토르는 얼굴을 구겼다.
   “뒷통수가 따가워. 꿈이 흉흉할 것 같아.”
   거짓말은 안했다. 이건 진심이라고. 헥토르의 말에 아킬레우스는 다시 웃었다.
   “그렇지만 계속 볼 수밖에 없잖아. 내가 기억하는 아저씨 마지막 표정은 최악이었으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누가 살해당하는데 웃고 있겠니? 말같지도 않은 말은 하지마. 헥토르는 속으로 지적했다.
   아킬레우스가 기억하는 헥토르의 마지막 얼굴은 절망에 물들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린채 빛을 잃어버린 인간의 얼굴이었다. 아킬레우스는 그 얼굴을 싫어했다.
   “아저씨는 빛나는 영웅이잖아. 기왕이면 어두운 쪽보다 빛나고 있는 쪽이 좋아.”
   “기분 나쁜 농담은 그만둬.”
   “진심이야. 지극히도.”
   아킬레우스는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아저씨는 영영 모르겠지. 내가 아저씨의 시체를 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글쎄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거든요. 게다가 그건 제우스님도 모를걸.”
   “하긴. 번개영감이라고 알겠어? 여자만 밝히니까 그 영감.”
   우와…. 아무리 신의 아들이라지만. 방금 그거 신성 모독인거 아니?
   뭐 어때. 어차피 우리 죽었는데.
   하긴. 그것도 그렇네.
   실없는 가벼운 얘기를 하면서 헥토르는 망토를 정리해 누웠다. 불안함은 사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스터는 괜찮을까. 칼데아에 문제가 생긴걸까.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까. 너무 많은 걱정이 헥토르를 누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 있는 영웅에 대해서는 이제 걱정이 되질 않았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말처럼 공포에 발을 담그고서야 편안해졌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가 소환되고난 이래로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아킬레우스 탓에 두려워 쉴 수 없었던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옆에서 마음을 놓고서야 편히 쉴 수 있다니.
    그렇지만 두려움의 실체는 아킬레우스 자체가 아녔다. 그에게 살해당했던 헥토르, 자신의 운명이었다.
   헥토르는 무의식중에 아킬레우스를 바라보듯 옆으로 누워서 잠들었다.
   “부디 조금이라도 좋은 꿈을 꿔. 프리아모스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여.”
   아킬레우스는 잠이 든 헥토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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