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추락은 곧 절망이었다.
* 백설기님(@SaSam_GH3)님 그림 3차창작입니다.
* 낙원 다음화입니다. 읽지 않을 시 내용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 다윗과 마리스빌리가 그리 좋은 역할로 나오지 않습니다. (필자는 다윗과 마리스빌리 모두를 애정합니다.)
* 전편과 마찬가지로 여러 트리거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망소재, 약간의 고어)
* FGO 1부 종장 스포 주의. (FGO와 내용이 상당히 다릅니다.)
* 작품 내 등장하는 특정 인물의 사상은 필자와 매우 다름을 밝힙니다.
*7800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로마니 아키만은 이스라엘의 한 공항을 나섰다. 맑은 하늘, 길가에 피어있는 꽃까지. 이스라엘은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웠으며, 그렇기에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옥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원래 달려갔던 길에서 되돌아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돌아갈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나의 걸음엔 늘 자신감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13년 전과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세월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토악질이 나왔다.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내리누른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 왔니? 해야하는 것은 거기 적어뒀어. "
" …네. "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아버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집. 로마니에게 어머니는 없었기에 반겨주는 것은 다윗 뿐이었다. 다윗 홀로 앉아있는 거실을 지나 방으로 향한다. 레오나르도와 같이 살 때와 다른 고요함이 집안을 맴돌았다. 13년 전의 자신에겐, 지독히도 익숙했던 풍경일 것이다.
조용히 걸어 방으로 들어갔다. 바뀐 것이라곤 침구의 크기 정도일까. 다윗은 로마니가 돌아올 곳이 이곳임을 알고 있었다. —로마니조차 몰랐던 그 사실을.
방 정면에 화이트보드 한 개가 붙어있다. 다윗은 늘 이곳에 로마니가 ‘해야하는 일’을 적어두었다. 어릴적엔 매주 주일 성당에 가는 것이었으며, 조금 나이가 들고 나면 어느정도의 학업 성취 요구였다. 로마니는 그 ‘해야하는 일’을 늘 지켜왔다. 단 한 번이라도 어긴 적이 없었다. 어겼을 때의 시선이, 다윗이 취할 행동이 두려웠던 것일수도 있다.
화이트보드엔 한 문서가 붙어있었다. 아, 이것이 이번에 ‘해야하는 일’이구나. 13년 전과, 지금. 바뀐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신학교 입학지원서]
나의 길은, 예전부터 정해져있었다.
지옥
어느덧 30살이 되었다. 로마니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6,7년이 걸리는 일을 4년만에 끝내버렸다. 아마, 뒤에서 다윗이 무언가 한 것이겠지. 로마니는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 로마니는 심히 지쳐있었다.
" 준비하고 나오렴, 로마니. "
" 네. "
방 밖에서 다윗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로마니가 신부로서 처음 교단에 서는 날이다. 온 몸을 검은색으로 도배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로마니는 온 몸을 흰 색으로 물들였었다. 그것이 온통 검게 변하는 데에는 고작 4년이 걸렸다. 흰 색으로 물들이는데엔 13년이 걸렸는데.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수단(가톨릭교의 신부복)의 단추를 목 바로 밑까지 채웠다. 33개의 단추는 예수의 고행을 나타낸다고 한다. 로마니에게 그 단추란 속박을 나타냈다. 목에는 로만 칼라(Roman Collar, 목에 끼우는 하얀색 띠)를 끼워넣었다. 목줄을 찬 듯 했다. 이 목줄의 주인은 분명 아버지, 다윗일 것이다.
방 문을 나서 거실로 향했다. 다윗은 신문을 읽으며 로마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니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너는 더이상 도망칠 기력조차 없지 않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더이상 갈 곳은 없다. 이제 이곳이 로마니의 낙원이다.
" 가자. "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윗이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긴장감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서, 비참해서 아무런 말도 못한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라면 자신은 절대 주인공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의 역경으로 이렇게 무너져내렸으니.
다윗이 준비한 차에 올라탔다. 아마 오늘 로마니의 예배를 들으러 올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 다윗의 아들의 첫 예배이다. 다윗의 예배를 한 번이라도 들은 자라면 오늘 반드시 참여할 것이다. '호기심'이란 단어로 감싸여진 채로. 손이 떨린다. 비참하다.
차가 멈춰선다. 달칵, 문이 열렸다. 다윗의 신도가 열어준 것이다. 로마니는 구역질을 억눌렀다. 아, 그래. 이런 곳이었다. 이곳은. 누구든 다윗을 떠받을고, 다윗은 그를 당연히 여긴다. 이 성당 내에서라면 그는 왕이었다. 지독히도 역겨웠다.
" —하여, 오늘 처음 방문한 사도를 소개합니다. 로마니 아키만, 아직은 부족하지만 신실한 아버지의 종을 소개합니다. “
“ 앞으로 낭독을 맡게 될 로마니 아키만이라 합니다. ”
“ 자, 새로 온 우리 형제를 위해 모두 기도합시다. ”
다윗의 말에 성당을 빼곡히 채우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인 채로 두 손을 모았다. 기이했다. 옆에서 눈치를 주기에, 로마니 또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았다.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기도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 서 그 기도를 이끄는 사람.
다들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정상이 아닌건 나 일수도 있다.
" —하여,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아멘. "
“ 아멘. ”
예배가 끝났다. 이 감옥같은 곳에서 나갈 수 있으리란 희망도 잠시. 예배 끝나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윗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부가 된 이유는 처세술에 있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모르겠다. 몇 분? 아니면 몇 십분? 은근하게 지어야 하는 미소 때문에 입 근처의 근육이 아파왔다. 앞으로 이런걸, 평생. 쉬지 않고 해야했다. 다윗의 나이가 된 내가 이러한 것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나 자신이 지독히 혐오스러워졌다.
아, 현실은 그 어떠한 것보다 지독하구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처음은 힘들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째엔 할만해졌다. 쓸데없이 좋은 두뇌를 원망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점점 적응해나가는 내가 너무나 싫었다. 증오스러웠다. 내 속마음과 달리 겉은 늘 옅은 미소를 띄고 있었으며, 신도들을 축복하는 말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
-요한복음 14장 6절.
무엇을 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길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길이 다시 생기더라도, 로마니는 그 길을 달릴 힘을 잃었다. 여호와는 길잃은 자들을 구원한다고 한다. 길을 걸을 의지를 잃은 자들이 아닌.
몇번째인가의 예배가 끝났다. 시작할 때는 봄이었던 것이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밝게 빛나던 존재들은 사라졌으며, 이젠 삭막하게 바뀐 풍경만이 그 자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나에게도 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윗의 성당은 아름다웠다. 수많은 신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커다란 것은 물론, 석제벽돌과 목제, 스테인드 글라스의 조화로 낮에는 자연광 덕에 언제나 밝았다. 신부의 자리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햇빛은 언제나 신부를 향해 내리쬐었으며, 신도들은 그를 신성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이 성당은 신부를 신성하게 보이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상황이 달라졌다. 극도의 자연광만을 추구한 성당의 예배실은 은근한 달빛만이 들어와 어두웠다. 주변의 촛불에 아무리 불을 붙여봤자, 낮의 신성함을 아는 자들에겐 부족할 뿐이었다. 하여 이 성당은 야간 순찰이 의무화 되어 있었다. 보통은 신임 신부들이 그 자리를 맡기에, 아직 이 성당에서 지낸 시간이 1년조차 되지 않은 로마니가 그 역할을 맡은 것은 당연했다.
터벅, 터벅
조용한 성당에 단 하나의 발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로마니는 등불을 들고 어두운 성당을 배회했다. 야간의 순찰엔 늘 정해져있는 순서가 있었다. 로마니는 단 한번도 그 순서를, 그 규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
아아— 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같기도, 무언가를 떠받드는 소리 같기도 했다. 혹은 그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그 근원지로 향한다. 5분은 걸었나, 비명은 꽤나 먼 곳에서 들린 듯 했다. 그 근원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소리는 구체적으로 변했다.
아아—-오…
아악—-아—- 아아…
아————…
소리가 점차, 점차 작아진다. 여성의 목소리도, 남성의 목소리도 섞여있던 소리가 점차 단조로워진다. 등불의 빛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떨리는 손으로 그 빛을 꺼뜨렸다. 남은 빛이라고는 저 멀리 문틈 사이로 삐져나오는 것 뿐이다. 으슥한 복도를 더욱이 두렵게 만드는 빛이었다. 로마니는 머뭇거리다가 그곳으로 향했다.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 비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터벅,
터벅
복도를 걸어간다. 아주 짧은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두려움에 몸이 떨린다. 이 감정은 사명감일까, 호기심일까. 아니면 이기심일까. 로마니는 문 틈 사이를 쳐다본다. 갑작스런 빛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도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현실을 마주한다.
붉다. 벽이, 천장이, 이 빛이. 그 방을 채우는 모든 것이 붉었다. 온통 붉은 것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흰 색의 털이 보인다. 검은색으로 장식된 옷이 보인다. 그리고, 붉은색 눈이 보인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저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뇌가 거부한다.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로마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힘이 빠져 풀려버릴 듯한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 뿐이었다.
“ 호오? ”
노이즈가 낀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두렵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도망조차 그럴 의지가, 그럴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음을 로마니는 뒤늦게 깨달았다. 로마니에게 도망이라는 길은 없었다.
“ 네놈, 이름은? ”
절로 벌어지려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이 존재에게 이름을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로마니 본인의 입으로 그것을 말하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두려운 마음을 내리 누르며 겨우… 겨우 입을 다문다.
“ 크,크하하하하! 그정도 의지는 있다는 말이냐! 좋다. 지켜보도록 하마, —아키만. ”
“ —!! ”
허나 그 모든 반항은 소용없는 것이었다는 듯, 성이 불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름만은 불리지 않았다는 것일까. 모르겠다. 성이 불린 순간, 무언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영혼이 붙잡힌 듯한 느낌. 더이상 그것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 나는 솔로몬. 72가지의 악마를 다스리는 총괄식이다. 앞으로를 기대하마, 계약자여. ”
“ 나는, 계약따위…! ”
“ 푸하하핫! 네놈에게 거부권따위는 없다. 원망하려면 네놈의 운을 원망하도록 해라. ”
그 말을 마무리로 금빛입자와 함께 사라졌다. 겨우 긴장이 풀려 주저 앉는다. 그제야 방의 광경을 눈에 담는다. 온통 붉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피였다.
아마 성당에서 가장 큰 방의 벽 가득히 칠해져있는 붉은 피. 얼추 70여개가 되어보이는 무언가의 시체. 시체는 그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려있었다. 두개골 뼈로 보이는 듯한 것들의 개수만을 셀 수 있었다. 로마니는 쓰러질 듯한 몸을 붙잡았다. 어딘가에 두고 온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이제서야 고개를 든다. …신부 로마니 아키만이 아닌, 닥터 로마니 아키만으로서 방으로 향한다.
큰 창문을 가리던 커튼을 걷어낸다. 은근하게 내리쬐는 달빛은 방의 풍경을 더 확실히 보여주기만 한다. 곧 5시다. 새벽 기도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다. 로마니는 그 잠깐만 쉬기로 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방 안 가득 찬 비릿한 냄새를 날리고, 몇 개만 켜져있던 전등을 전부 켰다.
지독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로마니가 이 방에 서있는 것을 본 것이겠지. 순찰을 마무리하지 못한 죄를 묻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바깥’에 새어나가지 않게 이 일을 수습하기만 할 것이다. 이 성당의 존재들은 참으로 지독했다.
시체들을 방 바깥으로 옮긴다. 멀쩡한 것은 없었다. 대충 세어보니 두개골은 73개였다. 완벽한 인간의 두개골이었다. 이 상황에서 헛구역질을 참는 것은 로마니 뿐이었다. 이 지독한 광경은 이미 익숙한 광경이었다. 로마니는 시신들을 향해 잠시 묵념했다. 저 멀리서 아침 해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 빛이 그들을 조금 더 편한 곳으로 이끌기를.
“ [호오? 저 놈들이 어쩌다 죽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
“ 읏…?! ”
목소리가, 들렸다.
“ [저 놈들은 ‘나’를 소환하기 위한 제물이다.] ”
노이즈가 잔뜩 낀, 몇시간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였다.
“ [72개의 인간과 1개의 소환자. 그것들이 ‘나’를 소환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물이지. 저 놈들은 그 사실은 모른 채로 72개만 준비한 모양이더군. 크하하핫, 그러니 전부 죽은 것이다.] ”
정신이 멀어진다.
저 존재는 '실수로 이곳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곳에 ’불러낸 것‘이다. 인간이 불러낸, 인간이 책임져야할 재해였다.
“ [때마침 발견한 적당한 ‘계약자’가 네놈이다. 네놈이 없었더라면, 퇴거 했을 것이다.] ”
그 재해를 땅에 붙들고 있는 것은 나였다. 더이상 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졌다. 몸이 점차 땅에 가까워졌다.
—추락은 곧 절망이었다.
로마니가 정신을 차린 것은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변한 것은 없었다. 방에 앉아 있으면 다윗이 부른다. 그를 따라 성당으로 향하고, 예배를 한다. 종종 노이즈가 잔뜩 낀 목소리가 말을 건다. 최대한 무시하며 기도를 한다. 나의 기도는 닿지 않는다. 성경을 읊는다. 코웃음소리가 들린다. 목에 건 십자가를, 손에 쥔다. 비웃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몇달이 지나도. 로마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존재와 함께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몇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났다. 계절은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겨울이었으며, 로마니는 그 방에 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마슈가 원한 것은 이런 천장이 아닌 하늘일 것이다.
로마니는 성당의 첨탑으로 향했다. 종을 울리곤 하는 그곳은 평소엔 막혀있었다. 허나, 로마니 ‘아키만’은 열 수 있었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으니. 첨탑에 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면, 마을의 풍경이 보인다.
그리고 맑은 하늘. 아주 맑은 하늘이 보인다. 겨울의 하늘은 차갑게 시렸지만, 그럼에도 맑았다. 이것을 대체할 것은 없으리라. 마슈는 끝내 보지 못했던 것을 로마니는 보고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했다. 동이 터오는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 게티아. ”
“ [호오?] ”
“ 네가 원하는 것은, 들어줄 수 없어. ”
솔로몬이란 이름을 말한 존재를, 로마니는 알고 있었다. 칼데아에 있을 무렵. 마슈를 살리기 위해, 지식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던 적이 있었다. 칼데아 소속 도서관 한 구석에 꽂혀있던 그 책을 기억한다. 악마에 대해 소개하던, 솔로몬이란 존재가 쓴 ‘게티아’를 기억한다.
소환에 필요한 제물은 72개의 인간의 시체와 소환자 자신. 소환자는 자신을 대가로 악마를 소환시켜 —이 세상을 완전히 뒤바꿀 무언가를 얻는다. 그것은 소원이라고도 말하며, 구원이라고도 말한다. 누군가는, 멸망이라 하기도 한다.
로마니는 알고 있었다.
이 존재가 받은 소원은 ‘멸망’이란 것을. 그를 위해 로마니 곁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다는 것을. 그 일이 있은 후로 딱 1년이 되는 오늘 정오면 모든 힘을 모은다는 것을.
“ 이 세상은 구역질이 나. 인간들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달려나가지. 그 한켠에 치여 죽는 아이들이 분명 존재해. ”
“ 네놈에게도 좋은 것 아니냐, 멸망은. ”
“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 말해줬어. ”
“ 맑은 하늘을 보고싶다고. 인간의 생은, 아름답다고. ”
로마니는 게티아를 마주보며 웃었다. 게티아가 처음 보는 미소였으며, 로마니는 참으로 오랜만에 짓는 미소였다. 스물여섯의 로마니 아키만은 자주 짓던 미소였지만, 서른 하나의 로마니 아키만은 간만의 미소였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추락.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렇다고 로마니 아키만이란 한 인간은 생각했다.
아름다운 종소리가 저 멀리까지 울렸다. 그건 한 인간의 인생을 기리는 것이기도 했으며, 한 존재의 소멸을 기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 날, 로마니 아키만은 웃으며 생을 마감하였고 게티아는 눈 앞에서 소원을 놓쳤다.
로마니 아키만은 자신만의 길을 달렸다. 다윗이 알려준 길도 아닌, 마리스빌리가 알려준 길도 아닌. 로마니 자신이 생각해서 만든, 그런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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