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약혼자를 얻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어찌 됐건 그는 대단한 부를 소유한 남자였고, 과거가 비밀스러울지는 모르나 박식하며 정중한 인물이었다. 그에 더해 상당한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감춰진 과거 정도야 신비주의를 심화해주는 요소로 볼 만도 했다. 그런 그에게 약혼자라고? 파리 사교계가 뒤집히진 못할망정, 한 번 크게 흔들리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문제의 약혼자에 관한 추측은 무성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파리지앵일 리 없다는 것이었다. 파리 출신이었다면 이미 이름과 신분부터 가족 관계며 즐겨 들르는 의상점, 좋아하는 와인 빈티지까지 죄다 까발려졌을 테니까. 백작이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 여행 중 만난 여성이라는 설이 우세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백작의 은인이라던데, 아냐, 난 동방의 공주님이라고 들었어…….
오래잖아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함께 산책하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베일을 쓴 탓에 누구도 얼굴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높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까마귀 깃털처럼 세련된 검은빛이더라고. 운 좋게도 두 연인을 가까이서 스쳐 지나간 자의 증언에 따르면 둘은 프랑스어가 아니라 완전히 낯선 언어로 대화하고 있더랬다.
하필이면 평화로운 시기였다.
새로운 화제에 목말라 있던 귀부인들이 이러쿵저러쿵 쑥덕이기 시작하자, 대저택의 하인들이 말을 이어받고 퍼뜨리기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저택을 드나드는 미용사며 잡상인들에, 살롱과 레스토랑의 종업원들마저도 죄다 약혼자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 여자의 진짜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보름치 봉급이라도 내놓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결국 그 행운은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어느 수습 직원에게 돌아갔다.
소년은 한창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음악에 발소리를 숨긴 채 박스 석에 들어섰다가, 문턱에서 잠시 멈칫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중 왼쪽은 소년에게도 꽤 익숙했다. 보랏빛 화려한 예복 차림에, 큐 형태로 단정히 묶은 은발이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눈에 띄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모두가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연관 짓게 되었던 모습이었다.
그 옆에 앉은 것은 흰 드레스 위로 레이스 숄을 덮은 여자였는데, 소문대로 흑발이었고 머리 장식으로는 화살 모양 금제 핀을 꽂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큐피드의 화살’인 듯했다. 퍼뜩 흥미가 일었다.
그 사람이겠지?
얼음에 담긴 샴페인과 잔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도 소년은 몰래 둘을 흘낏거렸다. 그간 여러 번 지나치긴 한 백작보다 약혼자 쪽이 더 호기심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이길래 ‘그’ 몽테크리스토 백작에게 청혼까지 받았을지 알고 싶을밖에.
아쉽게도 여자는 오페라글라스를 눈가 가까이 댄 채 무대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글라스와 거기 달린 손잡이에 얼굴의 위쪽 절반은 반가면처럼 그대로 가려져 버렸다. 하지만 콧날이 오똑한 데다 뺨은 우윳빛이고, 앵두처럼 붉은 입술은 어린 소년의 가슴마저 설레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사슴 같은 목이 어쩐지 좀 병약한 인상을 주기는 했지만 뭐, 백작의 취향이 그럴지도. 주문한 샴페인이 유독 도수가 낮아 거의 포도즙이나 다름없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몸이 좋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서빙을 마친 소년이 다시 숨죽여 몸을 빼려 할 때, 문득 백작이 그를 돌아보며 불렀다.
“잠깐.”
소년은 몹쓸 짓이라도 하다 들킨 듯 화들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약혼자를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객석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쳤다. 드리운 손끝이 여자의 둥근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흠칫, 작은 움직임과 함께 오페라글라스가 떨어졌다.
토끼처럼 크게 뜨인 눈이 드러났다. 쌍꺼풀 없는 단아한 눈매와 검은 눈동자, 한쪽에 눈물처럼 맺힌 점. 소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확 시선을 돌렸다가,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슬금슬금 다시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백작은 수습 직원 따위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엄지로 약혼자의 어깨를 쓰다듬던 백작은 나지막이 무어라 말했는데, 웬만한 웅얼거림은 알아듣도록 단련된 소년도 그 말만큼은 분간할 수 없었다. 여자가 좀 더 큰 소리로 대답하고 나서야 소년은 비로소 두 사람이 외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만스러운 듯 입꼬리를 비틀던 백작은 소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명령했다.
“여기 담요가 있나? 내 피앙세께서 추위에 떨고 계시는군.”
음, 그렇게까지 떠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님의 요구라면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고, 방금 본 장면만으로도 극단 발레리나들의 환심을 살 얘깃거리를 넘치게 얻었는걸. 구석 서랍 안에 쌓인 담요 한 장 꺼내드리는 것쯤 기꺼운 마음으로 해주고 말 일이었다.
박스 석 문을 닫고 물러나기 직전, 소년은 문틈으로 딱 한 번 더 두 사람을 엿보았다. 옆으로 몸을 숙인 백작이 약혼자의 귓가에 꾹 누르듯 입을 맞추고 있었다.
“흥.”
정민은 뾰로통하게 턱을 쳐들었다. 도로 건네받은 오페라글라스는 그 와중에도 긁힌 데 하나 없이 멀쩡했다.
“기껏 재미있는 부분이었는데, 방해나 하고 말이양.”
“하하, 미안하게 됐군.”
말의 내용과는 달리 전혀 미안하지 않은 태도였다. 정민은 다시 한번 흥 콧방귀를 끼고는 몸을 기울였다. 이렇게 된 김에 암굴왕을 사이드 쿠션쯤으로 쓰겠다는 의도가 만만했다. 가볍게 웃은 암굴왕은 한쪽 팔을 들어 정민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담요까지 고쳐 덮어주었다.
암굴왕의 옆구리로 파고든 모양새가 된 정민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극장 안이 썰렁하기는 했지만 춥다고 할 정도는 못 되었다. 그러나 담요도, 암굴왕의 체온도 이렇게나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조금 추위를 느끼고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암굴왕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도 알았을까? 그건 앞선 두 가지보다도 더 반갑고, 또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생각이었다. 정민은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으며 암굴왕의 품에 뺨을 비볐다.
사랑을 노래하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솟아오르고, 오케스트라는 때론 부드럽게, 때로는 웅장하게 날개를 펼친다. 허공에는 보석 가루 같은 먼지가 떠돌았다. 이곳은 암굴왕의 세계였다. 복수를 마치기까지, 혹은 그 너머까지 머무르게 될.
암굴왕을 따라 파리로 온 것을 정민은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샴페인은 어찌할까?”
암굴왕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귓바퀴를 스치더니, 곧 그 위를 감싸 덮고는 조심스레 매만지기 시작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조금 화끈하다시피 느껴져 정민은 헤실헤실 웃었다.
“이따 마시면 좀 어땡. 시간은 많잖아?”
“시간은 많지.”
꼭 막간에도 다다르지 않은 오페라를 가리키는 말만은 아니었다. 정민과 암굴왕 앞에는 끝도 없이 기나긴 미래가 펼쳐져 있었고, 두 사람이 함께하는 한—
그 미래는 분명, 완벽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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