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린] 존재와 물성物性

제8성계가 이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디를 봐야 했을까?

기억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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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iest 작가님의 <잔차품> 2차 창작, 짧은 글입니다. 외전까지 완독했지만 본 글은 11권 제4장 2챕터 부근의 상황을 100% 날조했습니다. 그러니 맞지 않으신다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포스타입에는 다른 계정으로 업로드했습니다~.~

* 쓰면서 들은 곡: 


노총수들을 배웅하고 돌아선 루비싱은, 위층에 있는 침실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인류 연합군 회의가 길어져 피곤해졌다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골치가 아팠던 건 아니다. 업무는 잘 분담되었고, 각 성계는 느리더라도 차츰 원래의 궤도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니 이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무사히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숨겨둔 이유 하나를 끝끝내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제8성계를 대표하는 루 총장은 성계 사이의 외교 법칙과 복수는 무의미하다며, 노총수들의 객쩍음을 달랬다. 물론 루 총장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듯, 광활한 우주 속에서 성계 하나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안다면 더더욱. 각 성계가 이전의 차별을 딛고 서로 교류하고 도와가며 함께 발맞춰 걸어간다… 물론 그 정도까지 되려면 자신은 은퇴하고 성해 학원을 다시 차려 루 교장 선생님이 되어 있겠지만, 그는 이 이상적인 목표를 믿었다.

―한편 그는 제8성계를 대표하는 총장이면서도, 누군가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루 총장이 아닌 루비싱은 생각했다. 연맹을 부수고 싶었으면서도 지키고 싶어 했던, 나고 자랐기에 어쩔 수 없이 연맹을 사랑하고야 말았던 연인에게 그 모습을 돌려주고 싶다고.

루비싱은 하염없이 급한 상황에서도 일단 생각이 나면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는 습관 아닌 습관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에서, 시선이 잠깐 먼 곳의 별로 향했던 그 찰나에 떠오른 하나의 질문.

제8성계가 이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디를 봐야 했을까?

그의 린 장군이 제6성계의 소행성에 갇혀있던 그 시절, 린징헝은 이천 번을 실패했고, 실패할 때마다 옥상으로 올라가 별을 봤다고 했다. 제8태양의 빛을 볼 때면, 그 빛이 혹여나 루비싱을 지나친 빛이 아닐까 상상했다고도 했다. 린징헝에게는 제8성계라는 확실한 목적지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그는 제8성계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을 것이다… 공전과 자전에 의해 조금씩 바뀔지라도, 그가 아는 제8성계는 오롯이 그곳에 존재했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모르지만 꿈만은 커다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겠노라 약속한 루비싱이 있고,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독안응이 있고, 루비싱을 쫓아다니며 린징헝을 무척이나 신경 쓰던 성해 학원의 아이들이 있는… 그런 제8성계.

하지만 린징헝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제8성계의 붕괴였다면, 그는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그럴 때도, 그는 이천 번의 실패를 감내하고 다시 한번 옥상에 올라가 먼 우주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이 우주 어딘가에 루비싱이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만으로?

루비싱은 쉽고 빠르게 ‘못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제법 단단하고, 부딪혀도 빠르게 회복한다고 생각했던 루비싱 본인마저도 부재를 간신히 버텨내지 않았나. 머리카락 한 올로 그의 복제를 만들겠다고 눈이 돌아간 자신을 강압적으로라도 말린 잔루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루비싱은 그쯤에서 만약의 상상을 그만두고, 한 가지 감상만을 도출했다.

사랑하는 것의 존재,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물성物性은 중요하다.

그러니 사랑하는 그의 장군에게, 그가 못내 사랑하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빠르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모든 성계가 힘을 합치는 게 마땅했다. 이 얼마나 개인적이고도 사소하며, 그렇기에 중요한 이유인지는 루비싱을 제외한 모두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린징헝이 사랑했던 세상과 재건될 세상의 모습은 다를 것이었고, 달라야만 했다. 쌍둥이 오빠를 쫓다가 넘어져 엉엉 울던 소녀가 뛰던 도로는 누군가의 정원이 될지도, 개가 뜯어먹은 것처럼 엉망으로 보이던 누군가의 정원은 공공 도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대수로운 일일까? 설령 변했더라도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사랑했던―티는 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것, 추억할 장소가 남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위안을 얻는 법이었다. 루비싱이 언젠가부터 독안응의 묘소에 찾아가 떠나보낸 이를 상대로 혼자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물며 그의 린 장군은 그런 변화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14년 동안 깎이고 깎였음에도 여전히 그가 사랑하는 루비싱이 증거였다.

가장 큰 변화는 가뿐하게 계단을 올랐다. 나중에는 이 벽면에 그 저택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걸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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