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길화림] 들판에 봄이 오듯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버려졌을지라도, 자신을 ‘우리’라 부르는 이가 있다.

기억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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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머리는 저렇게 열었지만 ncp에 가깝습니다. !!!과거 완전 날조!!! 첫만남 피셜 떴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읽기 전에 썼습니다……

기억이 더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날조하는 것이지만 회차를 돌지 못했으므로 소소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序. 주마등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건 무속인이 아니더라도 쉽사리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봉길은 이를 악물고 방 안으로 들어가 어른들을 깨웠다. 관에서 뭔가, 뭔가 나왔어요. 인상을 쓰고 뒤척거리던 어른들은 그렇게만 말해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나갈 채비를 하는 사이, 봉길은 다시금 창고를 향해 달렸다.

무척이나 낡은 절간이라지만 감히 터줏대감이라 말해도 무방할 보살님이 살해당했고, 무엇보다… ‘그것’은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훔쳐본 것에 불과할지라도 빙의가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신주 노릇을 몇 번을 했는데, 그걸 구분 못해서 쓰겠는가. 어디 가서 선생님의 제자라 말하며 악수를 받지도 못할 테다.

문득 봉길의 발이 멈췄다. 형체가 있다. 그것은 분명 무당에게는 크나큰 문제다. 무당이 어르고 달래거나 화를 내고 속이는 건 실체가 없는 혼의 영역이지 실체를 지닌 존재들의 영역이 아니다(의뢰인 등을 제외하고). 그렇기에 선생님이 걱정되는 한편, 그런 생각도 들었다.

형체가 있으면, 무언가로 때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선생님보다는 내가 더 잘 때릴 수 있지 않나?

공격이 먹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라면 당연히 자신에게는 벅찬 일이다. 섣불리 나서는 건 일을 키우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것’의 관심이 선생님이 아닌 자신에게 쏠렸을 때, 봉길은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님이 저토록 겁에 질린 건 예상외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공격이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놀랍지 않다.

그럼에도, 뭐라고 해보겠다고 날붙이를 꼬나들었던 이유는….

봉길은 밭은 숨을 겨우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起. 병원

찌는 듯한 여름이었는데도 오한이 들어 땀이 나지 않았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땀이 나지 않는다는 건 봉길에게는 신기하다기보다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야 지금까지의 삶은 소위 ‘엘리트 체육인’이라 불리는 삶이었으니 이런 날에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게 맞는 일이었다.

봉길은 겨우 나무 그늘이 얄팍하게 진 곳을 찾아 무릎을 세워 쪼그리고 앉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입안의 여린 살을 씹으며 욕설을 뱉어도 시도 때도 없이 오르던 열은 오르지 않는다. 정말 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워낙 용하고 바쁘다는 사람이라는 건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중에 여비가 얼마나 남았는지도 가물하고, 제정신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봉길은 팔로 머리를 꾹꾹 누르고는 눈을 감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봉길은 ‘멀쩡했다’. 말 그대로, 몸도 마음도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어렸을 때 야구장에 가서 흥미를 보인 걸 계기로 시작한 야구는 의외로 재능이 있었기에 지금껏 계속 해 왔다. 성과를 보이면 주변이 거는 기대도 그럭저럭 기껍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본인만 잘하면 프로로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멀었던 꿈이 목표에 가까워졌을 만큼.

비상은 수차례 날갯짓해야만 할 수 있었는데도, 추락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건 예삿일이었다. 관중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같기도 했고, 헛된 꿈을 꾸고 있느냐며 비웃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소리가 주변에 존재했다. 야구의 신이라도 된 듯 배트가 손에 착 달라붙는 날이 있는가 하면, 공 하나 들기도 어려울 만큼 신경이 곤두선 날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가위를 눌리는 빈도가 잦아졌고, 무엇보다도 끔찍한 건 시합 당일만 되면 고열이 올라 출전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는 일이었다.

시합에 나갈 수 없는 선수가 팀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처음 한두 번은 같은 팀의 동료들도, 감독과 코치 선생님들도 언제나 만반의 컨디션일 수는 없고 그렇기에 후보 선수가 있는 것이라며 무려 위로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될수록, 봉길은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 열이 난다는 건 다 거짓말 아니야? 괜히 쫄리니까 이름만 올리고 싶은 거지… 그것이 운동계 ‘특유’의 말과 행동, 분위기와 섞였다. 꽤 촉망받는 선수에게 쏟아지던 애정 어린 시선과 동경의 말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경이 곤두세워진다. 그러면 훈련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가슴을 앓는다고, 무고함을 호소하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도, 운동장의 나비 한 마리도 없었다.

그 이유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봉길은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각지의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의사는 봉길의 병을 몰랐다. 그는 무척이나 건강하다며, 현대 의학으로 발견할 수 있는 병증은 없다 말했다. 정신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우울과 불안은 아픔에서 찾아온 것으로 보이기에 이건 정신과가 아닌 다른 과를 찾아가야 한다고. 어디에서도 아픔은, 병은 없다고 했는데도 의사들은 그리 말했다.

선수로 키웠다는 이유로 학창시절 내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운동만 하던 자식이 목표에 거의 다 와서 불능不能이 되었다는 건, 집안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그러나 이 지나친 아픔에도, 이 지나친 피로에도, 봉길은 화를 낼 수 없었다. 팀의 동료에게, 감독님과 코치님에게, 가족에게. 그들이 자신을 탓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으며… 화를 냈다가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막연하고도 불길한 감각이 있었다.

그렇기에 봉길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봐요.”

“…….”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까무룩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늘에 있었는데도 식은땀이 줄줄 흘러, 옷은 이미 땀에 젖었다. 봉길을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자신은 목적지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들은 것보다 심하네.”

“……예?”

“너도 참 인생 지랄 맞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걸어간 뒤 닫힌 주택의 대문을 열었다. 봉길은 꿈벅꿈벅, 바보처럼 눈만 깜빡이다가 허겁지겁 일어섰다. 딸랑딸랑,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울린 것도 같다.

 

承. 초인

대문을 넘으니 여러 색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게 왜 지금에서야 보인 건지는 모르겠다. 봉길은 가방을 품에 안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자의 뒤를 따랐다. 여자는 지금껏 찾아간 무당들과 달리 까만 셔츠에 까만 슬랙스를 입고, 새까만 머리를 하나로 질끈 내려 묶고 있었다. 정말 무당이 맞긴 한 걸까? 그러나 고명하다는 스님도, 무당 몇몇도 이름을 언급한 이였기에 믿어보기로 한다. 한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처지니, 하늘에서 동아줄이 어른거리면 냉큼 잡아야만 했으므로.

집 안은 꽤 화려하면서도 깔끔했다. 봉길로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도구와 장식들이 먼지 하나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붉고 파랗고 하얗고 노랗고… 그 중심에 앉은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었기에 외려 이질적이었다. 백화난만을 압도하는 고요. 나이는 저와 엇비슷할까, 혹은 조금 어릴까. 아무리 봐도 또래로 보이는 검은 여자에게는 그 모든 걸 누르는 무게가 있었다.

자신을 화림이라 소개한 여자는 자신이 찾아온 경위와 그간의 일을 말하는 동안 내내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세워 앉아 연초를 재떨이에 비비고 있었다. 스트레스의 해소인지, 그저 피우고 싶지만 참느라 그러는 것인지 습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림은 봉길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찾아올 거라고 듣긴 했는데. 다시 들어도 이름 한번 죽이네.”

…칭찬인가?

“들은 것보다 훨씬 꼬질꼬질한 상태긴 한데.”

…욕이었나?

“지금은 좀 어때요. 계속 들려요, 그거?”

“…아뇨, 지금은.”

그러고 보면,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가 들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멀쩡했다. 식은땀도 흐르지 않았고, 에어컨을 틀어놓아 적당히 선선해진 공기도 선명히 느껴졌다. 봉길이 제 뺨에 손등을 대었다. 열도 느껴지지 않는다.

“신병이 뭔지는 설명 들었고.”

“네.”

“그래서?”

“…그래서라뇨?”

적당히 시선을 내리고 있던 봉길이 고개를 들었다. 화림은 거리낄 것 없다는 양 봉길을 직시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이 작은 여자가 자신에게 섣불리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봉길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다들 마지막으로 한 번 찾아가 보래서 온 건데.”

허. 화림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뭘 해야 하는지는 얘기 들었을 거 아냐. 내림굿을 받든가, 누름굿을 받든가. 언니들도 그렇고, 절도 다녔다며. 어딜 가도 비슷하게 얘기했겠지. 지금 상태가 그 정도니까.”

“순 똑같은 말을….”

“근데, 무당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다른 대답 듣고 싶어서.”

이딴 말을 들으려고 대낮부터 기다린 줄 아느냐고, 울컥 화를 낼 뻔했던 봉길이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찔린 셈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 있지만 않았어도 무당이니 굿이니 하는 건 잘 봐줘야 생판 남의 일,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비와 미신에 가까웠다. 기껍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부모님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고 있는 연이 당장 끊겨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사랑했다고, 소중하다고 여긴 모든 이를 두고 혼자, 어디로. 이 고원에서 어디에 무릎 꿇어야 하나.

하지만 화림의 말은 어찌 보면 희망적이었다. 다른 대답을 듣고 싶다면 다른 대답을 해줄게. 그러나 희망만큼 잔인한 것도 드물기에, 봉길은 애매하게 웃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웃는 것이 낫다고 지난날의 경험이 알려주고 있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표정이 필요하다.

“그건 내가 눌러줄 수도 있고, 다른 방법도 있어. 근데 다들 굿 얘길 한 게 왜인지 알아?”

아, 웃을 수 없게 된다는 예감이 든다.

“너, 원래 생활로는 못 돌아가.”

억지로 씌운 웃음은 금방 떨어져 나간다. 봉길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뭘 해야 한단 말인가. 여름인데도 설원 한복판에 홀로 놓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영영 이 상태로, 이 기분으로 살아야 하나. 구깃해진 표정을 숨길 도리가 없었는데도,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 분명한데도, 화림은 굳이 언급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너 무당을 할 재목도 아냐. 무당, 하지 마.”

“다들 내림굿 받고 신 받는 게 제일 낫다고 했는데요. 해야만 하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 재능은 있을 텐데, 너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거든. 무당이 신만 받으면 다인 것도 아니고.”

화림은 다시금 한숨을 쉬며 이번엔 두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똑바로 시선을 들어 봉길을 쳐다보았다.

“다시 물어본다.”

“네?”

“그래서, 무당이 하고 싶어? 진심으로?”

봉길은 문득 생각했다. 뭔가를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은 게 언제적이었더라. 잘 기억나지는 않아도 아주 까마득한 날이었던 것 같다. 야구를 시작한 뒤로는 언제나 해야 할 것이 존재했다. 치고, 달리고, 연습하고, 운동하고, 던지고. 다음 날이면 또다시 치고 달리고 연습하고 운동하고 던지고. 시간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아파서도 안 됐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연습에 빠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봉길의 시선이 화림의 시선과 맞닿았다.

이 사람은 생전 처음 본 자신에게 의향을 묻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내내 이런 질문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목소리로, 감독님과 코치님의 목소리로, 가족들의 목소리로. 그러나 천고의 뒤에 오는 건 그 어떤 초인도 아닌 그저 작고 검은 무당 한 명뿐이었다.

그래도 원하던 질문을 들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무책임한 확신에, 자신의 등을 떠미는 듯한 올곧은 시선에, 봉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같았다.

 

轉. 선생님

봉길은 차츰 이 작은 ‘선생님’에게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상명하복에 익숙한 것도 있었고, 이야길 들어보니 어머님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낫기도 했다.

“선생님.”

물론 적응이 됐다는 건 입 밖으로 뱉는 호칭과 일을 따라다니며 배우는 것 정도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까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하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역시 어색하기도 하고, 선생님과 제자라고 함께 살아가는 것도, 그리고….

“어, 왜.”

“……의뢰비가 너무 많지 않나요?”

첫인상과 달리 화림은 꽤나 돈을 밝혔다. 살고 있는 곳도 방범 시설이 잘 갖춰진 고급 아파트였고, 입고 다니는 옷이며 대수롭지 않게 고르는 먹거리도 고급이었다. 어쩌면 처음 봤을 때 입었던 옷들도, 자신이 몰랐을 뿐 엄청난 고급품이었을지도 모른다. 막연히 생각하던 무속인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봉길은 화림을 순순히 따르면서도 의문을 던졌다.

“봉길아.”

“네.”

“우리가 나이가 많아 보여?”

“네? …아니죠.”

픽 웃던 화림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어린 축이니 빈말로도 나이가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걸 갑자기 왜?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얕잡아 보이기 딱 좋거든. 어린 여자애가 나댄단 소리 듣기 얼마나 좋게?”

“…….”

무당이 신만 받으면 ‘다’가 아니라는 걸, 봉길은 화림을 따라다니며 알게 되었다. 의뢰인을 상대하는 건 당연히 사교 행위다. 판을 벌일 때는 무당만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화림은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싶으면, 전국 각지 어디에서라도 원하는 사람을 섭외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농담을 늘어놓으면서, 때로는 험악한 얼굴로 겁박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면서. 이건 혼자만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화림은 얼마나 걸렸을까.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시간을 거쳐서 지금의 이화림이 된 걸까. 무당이 되겠노라 말했다면, 자신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그 정도는 우리를 지키는 대가도 겸사겸사지.”

“…우리요.”

“어, 우리.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같이 다녀야 할 거니까.”

그리고 너 들이고 식비가 얼마나 늘었는지 알아? 화림이 쯔쯔, 혀를 차더니 짧게 하품했다. 슬쩍 몸을 트는 걸 보니 도착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자려는 모양이었다. 봉길은 주무세요, 짧게 답하고는 앞을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집중하려 했다.

우리, 우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버려졌을지라도, 자신을 ‘우리’라 부르는 이가 있다.

 

“지켜주신다면서요.”

“지켜줄 건데?”

화림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래, 선생님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전직 운동계였던 봉길은 순순히 새끼줄을 몸에 감았다. 혼 부르기 의식에서 신주를 잡아끈 적은 있어도 직접 신주가 되어 혼을 받는 건 처음이다. 떨리지 않을 수가 없어 한숨을 푹푹 내쉬자니 화림이 봉길의 등을 힘차게 두드렸다. 쫄지 마. 네 몸의 주인은 너야. 그것만 기억해. 그것만 기억하려 애쓰며, 봉길은 경문을 외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봉길은 툭 의식이 끊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몰려드는 한기. 이상했다. 주변을 넓게 응시한다. 분명 내 몸인데, 나라는 것을 인지할 수도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단 말인가. 이 한기를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오싹함? /봉길아, 쫄지 말라고 했다./ 화림의 목소리가 들리고, 자신의 목소리도 들리는데 대화가 무척이나 생소했다. 아니, 내용뿐만이 아니다. 저기서 말하고 있는 목소리가 진정 내 목소리이긴 한 건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몸은 내 것인가. /봉길아./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더 해야 할까.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 육체에서부터 유리되어 벽 하나를 두고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은 낯선 기분. 몸에 다른 혼이 들어온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건 영영 모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하긴, 살면서 몇이나 겪을 일이겠는가. 자신은 순전히 운이 안 좋을 뿐이다. 신병에 걸린 것도, 야구를 그만둔 것도, 야구를 하게 된 것도, 주변의 모든 시선도,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다 그만두는 게, 어쩌면… /윤봉길!/

떠다니던 혼에 닻이 걸렸다.

봉길은 갑작스레 정신을 차렸다. 의식이 든다. 그럼에도 몸이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침이 터진다. 기침과 함께 뱉어내는 침이 붉다. 시야가 붉은 것인지 침이 붉은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화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자신을 ‘내려다본다’. 화림의 얼굴이 흐릿해도 제대로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침이 붉었나 보다.

그리고 암전.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봉길의 주변은 이미 정리가 끝난 뒤였다. 의뢰인이 이불을 내주기라도 했는지 푹신한 감촉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봉길은 몸을 일으키고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멀쩡하다.

“윤봉길.”

“……아.”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봉길은 죄지은 강아지처럼 눈을 돌렸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화림의 모습이 이젠 익숙할 지경이었다. 처음 저 얼굴을 봤을 때가 아마, 한자를 하나도 모른다고 이실직고했을 때였던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멀쩡해지긴 했나 보다. 스스로 판단하며 봉길은 슥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쓰러진 거요.”

“네가 죄송할 건 그게 아냐.”

화림이 바닥에 대충 앉고는 봉길과 시선을 맞췄다. 어느 때고 흔들림 없는 당당한 시선. 여기서는 무조건적으로 내가 맞다고 고하는 듯한, 그런 눈.

“네 몸은 네 거야. 딴생각하지 마.”

“…….”

“어? 험한 게 아니라 그나마 이 정도지, 안 좋은 거였는데 너까지 허튼 생각했으면 이렇게 안 끝났어, 너. 알아?”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화림의 표정과 어조가 어찌 됐든, 제대로 걱정받고 있지 않나. 정말로 ‘우리’처럼, 정말로 가족처럼. 굳어있던 봉길의 표정이 풀리자 화림이 이마를 짚었다. 봉길은 그걸 보고도 웃었다.

“봉길아. 대체 뭐가 좋다고 웃어.”

봉길아, 윤봉길. 봉길은 다시금 웃었다.

“선생님.”

“어.”

몸도, 혼도, 마음도 모두 자기 것이다. 그 멀쩡한 몸과 혼과 마음으로 하는 선택도 오롯이 자기 것이리라.

그렇기에 봉길은, 다 그만두는 것이 아닌 머무름을 택한다.

저 목소리가 까마득한 너머에서 지표가 되어주었다. 두렵다고 생각하면 들렸고, 확신이 없을 때면 들렸고, 아슬한 찰나에서는 강하게 부르기까지 한 저 목소리가. 그러니 선생님의 곁에서 살아가리라고, 곁에 머물고 싶기에 머무는 것은 망망대해 같은 자유나 포기보다도 평온하리라고.

꼬여버렸다고 생각한 인생일지라도 멈추는 것은 아니니, 지표를 쫓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일지도 몰랐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진짜로.”

선생님 옆에 있으면 괜찮으니까, 무서울 게 없으니까.

 

結. 봄

아마 그때부터 선생님은 오롯이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이 아닌 형체 있는 것을 마주한 선생님은 오래전에 잊은 화림 같기도 했다. 자기보다 조금 작은, 조금 어린.

“도망가.”

무심결에 뱉은 말이 반말이었던 건 아마 그 탓이리라. 그러나 봉길은 체념한 채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곁에 머무른다면 괜찮노라고, 무서울 게 없노라 말한 건 분명 진심이었고, 진심은 그리 쉽사리 빛바래지 않았으니까.

그 짧은 찰나, 봉길은 어쩌면 안도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무엇을 마주하든 생각을 멈추지 않고, 결국에는 해결책을 찾는 사람. 지금까지 보아왔으니 확언할 수 있다. 선생님은 당연히 답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이 악몽 같은 밤에도 닭은 울고, 겨울의 바람이 쌩쌩 불었던 들판에도 기어코 봄이 왔던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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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슈슈 창작자

    각 챕터마다 모두 다 알 법한 시들을 인유했습니다. 추가로 달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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