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카야] 달, 검, 꽃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이었지만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온기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즐거움이, 웃음과 대화가 있었다.

기억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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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te/Samurai Remnant(페사렘)의 3루트 '아름다운 밤하늘에 바라며' 엔딩 이후 카야를 상상하며 썼습니다. 당연히 '아름다운 밤하늘에 바라며' 엔딩 및 5장 일부 내용의 스포일러, 미야모토 이오리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담고 있으니, 플레이하시지 않은 분들의 감상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3루트 해주세요…)

* 쓰면서 들은 곡


――헉.

달이 맑은 새벽이었다. 둥글게 차오른 달은 에도 전경을 비추고, 공기도 쾌청해 주변이 흉흉하지만 않았다면 밤놀이를 즐기고 느지막이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을 법한 밤. 그 평화로운 새벽녘에, 오가사와라 카야는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깨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 덥지도 않았건만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꿈은 꾸었던가, 꾸지 않았던가. 꿈도 꾸지 않았다면 이 식은땀은 대체 무엇인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카야는 그저 손가락으로 제 뺨과 눈이 멀쩡한지 더듬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곤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창 너머로 창백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무릎으로 기어 창가로 향한다. 새벽 공기가 뺨에 와 닿자, 그제야 살아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소리도 없이 사라진 것만 같은 서늘한 감각. 그러나 자신은 멀쩡하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오라버니…….”

여동생은 오라버니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자고 있겠지. 나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일부러 생각을 목소리로 내뱉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술렁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카야는 가슴 앞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무가의 여식이 움직이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적어도 동이 튼 뒤에, 적어도 사람들이 눈을 뜬 뒤에. 그때, 오라버니를 찾아가 보자.

 

 

장례식은 조촐했다. 조촐했다는 말도 부족할지 모른다. 유령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낡아빠진 집에서 치르는 상에 손님이 많을 리가 없었다. 카야도 오며 가며 종종 보곤 했던 이름 모를 도우신과 몇몇 상인들, 언제 연을 맺은 건지 모를 다유의 대리인 정도가 전부였다. 카야는 자신을 걱정해 오가사와라에서 보낸 하인 몇을 물리고는 집과 공방 사이에 대강 설치한 벽에 머리를 기댔다.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이었지만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온기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즐거움이, 웃음과 대화가 있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는 눈을 감는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남았을까.

그 맑은 새벽에도 동은 터왔다. 이른 아침부터 다짜고짜 찾아간 오라비의 집에는 온기가 남아있지 않아, 주변을 헤매다 도착한 곳이 센소지 본당이었다. 숨이 턱 막혀오는 광경이었다. 이미 말라버린 핏자국과 싸늘하게 식은 시신 앞에서, 카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적었다. 고작해야 주변에 알리고 허겁지겁 달려온 이들에게 시신을 맡긴 뒤 오라비의 검 두 자루만 겨우 받아 돌아올 수 있을 만큼, 무척이나.

하급 관리들은 오라비를 살해한 범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난처함을 드러냈지만, 카야에게 범인은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저 상을 치를 수 있도록 시신을 돌려달라 요청만 했다. 그들은 찜찜해하면서도 미련 없이 오라비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귀찮은 일을 하나뿐인 유족이 거절했으니 잘 된 셈이다.

양어머니는 그렇게 해도 괜찮겠느냐며 염려를 표했지만, 기실 양어머니와 오라비는 연고가 없는 존재다. 카야가 괜찮노라 대답하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양아버지는 꽤 실력이 좋았던 낭인이 안타깝게 되었다며, 예의상의 위로를 건넸다. 카야는 그 말은 순순히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오가사와라 카야는 오라비의 실력을 알고 있다. 그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녀였고, 그 미야모토 이오리의 의매였다. 그러니 모를 리 없다. 이 에도에서 미야모토 이오리를 단칼에 찌를 수 있을 만한 실력자는 많지 않다. 오라비가 자신을 죽인 이에게 미소를 보일 만한 이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리고 그 ‘한 명’은 이제 이 세상에 없을 테니, 범인을 쫓는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어느 순간 나타나 오라비와 함께 다니던 아름다운 검사는 사라졌다. 커다란 여우를 데리고 다니던 꽃 같은 무녀도 자취를 감췄다. 두 번쯤 얼굴을 맞댔을 뿐이지만 넘치는 생기 속에 쓸쓸함이 서려 있던 이국의 귀인도, 즐겁게 이야기 나누던 홍옥 할아버지도, 오라비의 손등에 새겨져 있던 붉은 문양도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모순되게도 전쟁이었기에 활기 넘치던 나날은 오라비의 미소와 함께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하여 에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밤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지도 않았고, 괴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았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유령의 집 바깥을 지나다니는 걸 들으며, 카야는 종종 스스로에게, 그리고 들을 리 없는 오라비에게 질문했다.

오라버니, 나를 떠올리기는 했어?

오라비는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오라비를 보아왔지만 어쩜 그렇게 평온하게, 모든 걸 내려놓고 열반에 든 사람처럼 미소 짓고 있었는지… 오라비에게는 그 결말이면 충분했는지, 카야는 그것이 분하면서도 궁금했다. 본인에게 직접 물을 수 없으니 자신이 본 ‘미야모토 이오리’가 어떻게 생각했을지 곱씹고 곱씹는 것이 전부였지만.

얼핏 눈을 뜬다. 오라비의 유품이라 할 만한 검 두 자루를 본다. 달빛에 언뜻 스승님을 바라보던 어린 오라비의 시선은 어디를 향했던가. 매끈한 검에 비쳐 보이던 오라비의 눈은 어떠했던가….

 

 

시간은 더디고도 확실하게 흘러간다. 오라비의 초상도 끝이 나고, 낡은 집과 얼마 없는 가재도구들도 모두 처분했다. 남긴 건 오라비가 끝까지 가지고 있던 두 자루의 검뿐. 미야모토 이오리의 집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카야는 흥, 하고 크고 씩씩하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예전처럼 두 자루의 검을 품고 본가로 돌아갔다. 이오리의 검은 창가 밑에 가지런히, 받침대를 마련해 보관해 두었다.

돌아올 리 없는 답을 추측하며 의미 없는 질문을 곱씹는 건 그만뒀다. 마음이 처지는 건 둘째 치고, 오라비의 끝이 미소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야가 바라본 오라비는 언제나 검을 추구하며 사용할 일이 드물어진 검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검을 맞댈 수 있는 호적수―잠깐이었지만 카야가 본 세이버 씨의 검 또한 대단했기에, 호적수라 말하는 게 과연 적당할까 싶긴 했지만―와 겨루어 미소 지을 수 있었다면, 오라비에게는 만족스러웠으리라. 그렇다면 문제는 없었다.

…자신이 조금 쓸쓸해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마음은 비교적 빠르게, 많이 정리되었지만 그럼에도 울컥울컥, 분노처럼 치미는 쓸쓸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보름이었다. 달은 휘영청 떠올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꼭 그날 같은 밤이었기에, 카야는 잠을 청하다 말고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오라비의 검에 손을 댔다. 평소에는 검집을 쓸어내리는 정도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술렁여 검을 꺼내 머리를 기댔다. 오라버니는 바보야,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가고 가느다란 숨을 뱉고 있자니, 동그란 이마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날밑의 감촉은 아니고, 훨씬 더 부드러운 무언가. 카야는 시선을 들어 제 이마를 건드는 것을 확인했다.

“…아.”

오라비와 저가 함께 맞춘 장신구였다. 분홍색과 초록색 실로 엮은 꽃장식. 늘 오비에 매달고 다니는 그것. 오라비도 늘 검에 매달고 다녔으나 검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던 장신구.

비록 핏물은 빠지지 않아 고운 색이 얼룩덜룩하게 물들었을지언정, 장신구는 한결같이 오라비의 검에 매달려 있었다. 어째서 이제야 발견했을까 싶을 만큼.

“……아.”

오라비는 검의 길을 추구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는 한편, 카야와의 연 역시 끝까지 오라비의 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 또한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검성의 길을 추구했어도, 전쟁에서 무엇을 보고 싸우며 그 길의 끝에 어딘가에 다다랐어도, 차마 의매에게 내보이지 못한 속내가 있어도, 미야모토 이오리는 카야의 하나뿐인 오라비였다. 어린 카야를 업고 어르고 달래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어설프지만 다정하게 웃던 눈도 알고 있다. 혹여라도 위험에 빠질까 걱정하던 표정을, 의식을 잃은 카야를 구하며 걱정과 안도로 구겨지던 얼굴 역시 알고 있다.

결과 하나가 오라비를 완벽하게 대변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본인의 몸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카야의 식사와 건강은 걱정했던 사람이다. 마지막이 되었다고 자신을 잊었으리라니, 오라비가 들으면 서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라비가 반추한 삶 속에는 분명 자신도 있었으리라.

미야모토 이오리는, 종종 오가사와라 카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카야, 넌 충분히 행복해질 거다. 내가 없어도 말이지.

물론 오가사와라 가문에 폐를 끼치는 것부터 줄여야겠지만, 이라 덧붙이며 농조로 말하기는 했어도 거짓을 말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라비는 은연중에라도 내내 믿은 것이다. 본인은 어찌 되더라도 홀로 남은 여동생은 능히 행복해지리라고.

“오라버니는 정말 바보네….”

그렇다면 그 믿음에 응할 수밖에. 그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녀였고, 그 미야모토 이오리의 의매였으며, 이제는 무가의 여식이기까지 하니, 자신에게 맡겨진 믿음에 답하는 것이 도리이리라.

카야는 얼룩덜룩한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많이도 낡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라비의 애정을 느낀다. 오라비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이제야 훌쩍훌쩍 뺨을 타고 흐르는데도, 카야는 조용히, 온화한 달빛처럼 미소 지었다. 평온하게, 모든 의문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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