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7 관성 드리프트
1차 창작
세실리아의 삶은 화려한 왕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얼어붙은 영토만큼이나 처절한 삶을 살아온 그는 세상에 나온 지 고작 10년,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종교에 몰두하며 딸을 괴롭히던 어머니. 무책임하게 씨 뿌린 아버지. 사생아라고 무시하던 왕궁의 모든 사람들…
이제 그중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성직자에게 전 재산을 바친 어머니는 실족사했다. 도박에 빠져 왕궁의 재산을 탕진하던 아버지는 단두대에 목이 날아갔다. 왕궁의 시녀들은 도망쳤고, 종자들은 전쟁 중에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오직 세실리아만이 살아남았다. 나라에서 얼마 없는 ‘전리품’ 명목으로. 제국의 황제는 젊지만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세실리아의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제국은 ‘폭정을 저지르는 왕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민심이 바닥을 치던 왕인만큼 평민들은 황제를 지지했지만, 단순히 주인이 바뀐 거다. 결국 자원 전쟁. 왕국 국민의 지지를 얻어 피 흘리지 않고 이익을 챙기고 싶었을 뿐이지.
“세실리아 왕녀, 어때.”
세실리아가 제국에 끌려온 뒤, 황제는 ‘심문’ 명목으로 그룰 이리저리 떠보았다. 겉으로는 다정한 말만을 늘어놓지만, 하루아침에 왕국의 정통성을 짊어지게 된 그를 구워삶으려는 셈이다. 이대로 혼란 속에 왕국을 내버려 두어도 되겠지만, 황제는 철저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세실리아라는 괴뢰 여왕을 내세워 왕국을 안정시키고 헐값에 자원을 캐 제국의 강병을 이루겠다. 고작 열 살의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는 거지. 그러나 반응할 힘도 없다. 세실리아는 무엄하게도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서 왕국을 다스려준다면 좋겠어. 왕의 폭정으로 신민들이 많이 지쳐있으니까. 그렇지만 어린 그대에게 이런 짐을 떠넘기기에는 나의 마음이 너무 아프군. 제국의 명예를 걸고 그대를 도울 테니…”
“…마음대로 하세요.”
오랜 침묵이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황제는 세실리아의 텅 빈 눈을 볼 때마다 공허를 느낀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옳지 않다. 그렇다고 행하지 않을 황제는 아니었지만, 사소한 죄책감이 심장 한 구석을 쿡쿡 찌른다. 그 이후, 그는 세실리아의 편의를 봐주기 시작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은 물론, 제국에서도 고급품으로 쳐 주는 달달한 간식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모든 게 조금도 의미 없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간식을 갖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인형을 찢어 분풀이를 하는 것도 아니다. 세실리아는 그 모든 걸 그냥 내버려 두었다. 동시에 자기 자신도 내버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거나, 침대에서 자거나. 매 세끼 주어지는 밥은 깨작대다 대부분을 남겼다.
“… … …”
황제도 순탄한 삶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혁명을 일으켜 즉위한 그다. 온갖 고생 끝에 자리를 쟁취한 이 남자, 고작 어린아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망해가는 왕국의 사생아 왕녀 따위, 다시 제 나라로 보내 죽든가 내버려 둬도 상관 없을 텐데. 그 관심은 세실리아에게 좋지 않았다. 황제가 괜히 세실리아를 챙겨줄 때마다 황궁 사람들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혼자 살아남은 데다 폐하를 홀리다니 저 여자애, 마녀나 저주받은 아이가 틀림없어.”
사소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요리를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소금을 치거나, 방문을 잠가 나올 수 없게 하거나.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세실리아는 견뎌냈다. 아니, 견뎌낸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세실리아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흔적만이 여기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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