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강독

들뢰즈 강독 2일차 : 서론 『반복과 차이』

진정으로 반복에 대해 사유한다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불가능했는가? 등에 대한 이야기.

반복을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개념은 “일반성”이다.

반복에 법칙이나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우리들. 규칙에 따라서 행동, 실험 등을 반복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일반성과 실제 반복은 다르다! 일반성과 반복의 구별.

반복을 일반성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1. 행동의 관점에서

2. 법칙의 관점에서

3. 개념적인 차원에서

1. 행동의 관점에서

행동, 즉 실천적인 관점에서 일반성으로 착각한다. ex) 환경을 고정해놓고 실험을 반복하는 과학.

임의적 조건 하에서 행동을 반복하는데, 그 안에서 우리가 반성적으로 반복을 발견하는 것에 불과한다.

2. 법칙의 관점에서

칸트를 공격하는 대목. 칸트의 정언명령. ‘우리의 준칙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칸트에게 거짓말이란 결코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준칙에 머물러 있음.

↳다른 사람을 도울 필요는 없다?

들뢰즈는 이런 법칙을 비판한다. 사람들이 일반성에 비추어서만 자신의 행동을 허용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법칙에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적용시켜서 그에 맞도록 행위하는 것을 의미함. 특수한 행위에는 특수한 행동만의 의미가 있다! 이런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반복이다~

3. 개념적인 차원에서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하나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 (ex. 개, 고양이)

개념은 이후 다시 3가지로 나뉜다.

1) 명목상의 개념: 일반적인 개념으로의 환원. 명목상으로의 개념은 ‘이산적’이다.

2) 자연개념: 개념이라는 것이 자연적인 개념이라면, 무엇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생명체가 그 개념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라는 주장. 우리가 생각하는 개의 개념이 실제 개와 같다고 정해져 있다면, 우리의 정신은 왜 필요한가? 우리 생각과 아무런 상관 없이 실제 개만이 모든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 이때 항상 우리의 정신은 일반성으로부터 소외된다. 자연개념은 소외적이다.

3) 자유개념: 우리 정신이 이것을 ‘개’라고 부르기로 정했다는 주장. (우리의 의식은 자유롭다) 우리 의식의 자유 개념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프로이트 왈, 자유는 억압으로부터 생겨난다. 무의식에 있는 억압이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모든 의식적인 존재자라면 이럴 수 있다.

이 개념들이 전부 진정한 반복과 차이를 사유할 수 없게 만든다.

[책 서문 4절]

명목상의 개념적 동일성, 동일한 억압으로부터 자유가 생겨난다는 등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차이가 사유되지 못한다.

차이는 개념으로 얘기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인데, 그것을 ‘차이’라고 부르자고 한다면 그 모든 차이들이 동일한 것이 되어버린다. 차이는 비개념적이어야 한다~

‘억압이 반복하게 만든다.’ 때문에 억압되었을 때 계속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실패한다는 말.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을 발견한 프로이트.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거대한 전환점을 만듦. ‘죽음본능(죽음충동)’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우리는 죽고 싶어한다’라는 충동을 말함. 우리에게는 성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에로스)과 죽음에 대한 욕망(타나토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 그런데 우리는 왜 당장에 죽지 않나요? > 우리는 단계적으로 죽습니다. 언제나 충동 자체는 작동하고 있습니당. 이 죽음충동 때문에 우리는 공격성을 가지게 됨.

초월론적 원리. 경험을 조건짓는 차원을 transendental한, 초월론적인 차원이라고 말한다.

헐벗은 반복(동일성의 반복)과 옷 입은 반복(차이의 반복). 우리는 우리 사회가 부여하는 역할들에 따라 갈아끼운다는 것. 역할들을 입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역할을 벗어던졌을 때 순수한 ‘나’라는 것이 있는가? 옷 입은 반복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가면 뒤에는 가면만이 있음. 경험을 통해 반성적으로 규정된 충동이 헐벗은 반복에, 죽음충동이 옷 입은 반복에 해당된다고 함. 사회가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아님. 원래 옷이나 가면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연극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발견해놓고, 쾌락원칙의 반복, 헐벗은 반복으로 계속 회귀하려는 한계를 가진다고 본 들뢰즈. 죽음충동을 무기적 물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죽고자 하는 충동이라며 충동을 규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가면들을 끊임없이 바꿔끼는 것, 가면에서 다른 가면으로 넘어가는 반복 그 자체가 반복이다. 원본적인 첫 항 같은 것은 없다!

representation 재현, 표상; 다시-나타나게 하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 들뢰즈가 차이의 철학을 하면서 가장 분명하게 반박하는 것이 바로 이것. 반복이란 표상될 수 없다. 원본 되는 항이 없으니까!

[책 서문 5절]

들뢰즈의 중요한 ‘기호’ 개념이 등장한다.

인과성의 과정. (흄이 이전에 사용했었던 방법) 인과성보다 먼저 있는 것이 신호화. 신호체계 속에서 사용하는 것이 기호(signe)다.

기호란? 원인을 상정하고 결과를 상정하는 인과성의 과정이란 동일성의 원리 속에서만 가능하다. 차이의 체계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을 기호와의 마주침이라고 한다. 들뢰즈는 우리의 인식론을 ‘기호'론’이라고 부른다.

동일성의 형식으로 사유하는 경우… 우리는 대상을 보고 표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둘 사이의 유사성을 상정함.

하지만 기호론에서 우리는 항상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의 형식 속에서 차이나는 것들만 마주한다. 이 속에서 동일성, 유사성은 찾을 수 없다. 차이나는 것끼리의 항만이 생겨난다. 기존의 인식론을 완전히 파괴함.

> 그렇다면 우리는 사과라는 것을 보고 ‘사과’라는 개념이 떠올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기호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사유할 때에만 진정한 차이를 사유할 수 있다. 아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사유가 아니다. 기호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진정한 사유를 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정해져 있는 답은 없다. 차이는 문제 그 자체이지, 답이 아니다. 언제나 물음으로 끝나는 것이 차이의 철학이자 사유의 본모습이다.

응답의 운동이란, 언제나 응답하는. 대답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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