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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차품] 어느 날 만유인력이 암흑물질에게 말했다

잔차품 교류회 <제 8성계 독립기념전> 참여 원고. 린웨이 회귀 if, 로라 시점 외전

Macross Galaxy by 쉐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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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유인력의 꿈

 

 

어느 날 눈을 뜬 린웨이는 자신에게 운 좋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명령으로 백탑의 배신자를 격추시키며 자신의 마음도 죽였던 비겁한 사내는 온데간데 없고 점잔 빼며 속내를 숨기는 울란학원의 방구석 여포 도련님만 남아있었다.

죽었던 마음은 첫사랑과 함께 되살아났다.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그는 현재 시간을 파악하자마자 곧장 침대를 벗어나 ‘대항해시대’에 접속했다. 그의 마지막 기억속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서비스가 종료된 게임이었음에도 어제까지 접속한 것처럼 생생했다. 그의 영광의 시대가 이 게임을 켜는 순간동안 이어져온 탓일 터였다. 그런 애타는 마음과는 별개로 접속하는 속도는 빠르지 못했는데, 자꾸만 손에 땀이 배어나오고 긴장한 나머지 접속 패스워드를 몇 번 틀렸던 탓이다.

접속을 하고서도 위험한 순간은 몇 차례 이어졌다. 우락부락한 커마에 허접한 장비를 걸친 ‘암흑물질’을 마주하자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신이 이맘때쯤 암흑물질과 어떤 말투로 대화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되는대로 말해야 했다.

“안녕, 음. 메시지를 잔뜩 보냈던데.”

가까스로 그, 아니 그녀에게 무작정 달려들고 싶은 뜨거운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쌓여있는 30여 통의 메시지를 보고 놀란’ 연기를 하는데 겨우겨우 성공했다.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형편없게 나올 뻔했기에 어쩌면 평소보다 어색했을지 모르지만 암흑물질은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한 사람이니까.

 

로라의 정보는 다시 한 번 린웨이를, 나아가 미래에 연맹의 불꽃이 될 젊은이들을 구했다. 이미 한 번 살아남았고, 습격을 대비한 상태였음에도 린웨이는 필사적이었다. 이 습격에서 살아남아 돌아가면 에덴관리위원회가 주재하는 무도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회색 눈의 여자아이가 그곳에서 서빙을 하는 모습을 이번에야말로 봐야만 했다. 그런 필사의 노력 끝에 린웨이는 이전의 경험보다 조금 더 멀쩡한 모습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

 

✷ 

 

휴버트 울프는 한숨을 삼키며 유독 반짝거리는 린웨이를 복잡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고 따분하다는 태도는 비슷했지만, 이상하게도 숨길 수 없는 ‘기운’ 같은 게 있었다. 그 기이할 정도로 생동감 있는 기운은 어쩐지 린겔을 떠올리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은 평소 같았으면 린웨이의 이변을 캐내려 들었을 울프를 막아주는 방어벽 같은 역할을 했다.

무도회장에 도착한 린 도련님은 사냥감을 찾는 올빼미처럼 두리번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랫동안 연기해 온 도련님 역할이 몸에 밴 덕분에 경박해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아까워.’

지난 번엔 바보 같게도 암흑물질이 남자일거라 생각하며 애꿎은 남자 서버들만을 쳐다보느라 시간을 허비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서명을 확인했다면 그녀를 볼 수 있었을텐데. 다행히도 지금의 린웨이는 그녀가 누군지 알았기에 남자 서버를 쳐다보거나 창고로 들어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금세 단정하고 무감한 회색 눈동자의 여자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소녀 시절의 로라 거든을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리석게도 서로가 가장 찬란했던 시절에 용기를 내지 못한 죄로 그녀가 환상을 내려놓고 현실에 순응해 암흑물질이기를 포기한 순간에서야 만났으니까. 그때 내지 못했던 용기는 지금 이 순간 이성을 무력하게 만들며 폭주했다.

쿵.

“아……!”

“윽,”

정신을 차리니 발이 제멋대로 샴페인을 들고 있는 그녀를 향해 직진해 충돌해버린 상태였다. 까만 조끼 아래 받쳐입은 로라의 흰 블라우스와 린웨이의 회색 예복 소매가 샴페인에 젖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당혹과 함께 귀찮아하는 기색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단정한 얼굴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그 눈빛에 린웨이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새 잔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겉옷은 넘겨주시면 행사를 마치기 전에 세탁해드릴게요.”

“새 잔은 됐습니다. 세탁은 좀 부탁하죠. 세탁실이 어딘가요?”

“……?”

굳이 세탁실까지 따라오겠다는 이 도련님을 로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느새 그와 함께 홀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수직적인 상황에 별다른 유감 없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 탁월했기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마법의 주문 ‘까라면 까야지’를 되새기고 뇌를 비운 로라의 뒤에는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엉망인 셔츠 차림 린 도련님이 뒤따라 걷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지.

내가 만유인력이다?

대항해시대 좋아하세요?

여기 재미없지? 나갈까?

실제 사람과의 소통보다 대항해시대 커뮤니티에 더 오래 노출되어있다보니 낡고 시시한 인터넷 밈 같은 것들만 머릿속을 떠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까 샴페인을 뒤집어 쓴 뒤로 이성이 약간 돌아온 덕에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별로 좋지 않다는 것 쯤은 파악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건넨 가짜 울란학원 생도의 사진 뒷면에 적은 메모를 떠올렸을 때 암흑물질 또한 만유인력에게 품은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이 시점에도 만유인력을 좋아하고 있었을까?

언제부터 만유인력을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린웨이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는 사이 로라의 거침없는 걸음은 금세 세탁실에 도달해 린웨이의 겉옷을 세탁하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걷던 로라는 그제야 린웨이를 돌아보았다. 무감한 회색 눈동자는 ‘네 비싼 옷 가져다가 팔아먹지 않고 얌전히 세탁하고 있으니 의심하는 거면 이쯤 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오디오가 빈 상황을 못 견디기보단 오히려 주도하거나 즐기는 타입인 린웨이는 자기가 미친 게 틀림 없다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빈 오디오를 채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무작정 입을 열었다.

“아르바이트?”

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덤덤하고 정갈한 회색 눈동자에 또다시 스치는 귀찮은 기색을 린웨이는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마지못해 설명을 덧붙였다.

“거든 가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피후견인들은 관리위원회를 종종 이렇게 도와드리기도 해요.”

물론 다 아는 이야기였다. 암흑물질이 메시지로 설명해 주었으니까. 별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그런데도 로라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린웨이는 자신이 미쳤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몇 달이 지나고나니 린웨이의 들뜬 마음도 어느덧 진정되어 자연스럽게 원래의 린 도련님이자 만유인력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암흑물질에게 ‘고백’을 하는 것도 전처럼 전처럼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다만 용기가 없어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를 댔던 전과는 달랐다. 남아도는 용돈과 고급 인맥을 동원하니 곧 백탑 신입들의 인턴십이 시작되는 시기가 다가오는 듯 했다. 린 도련님은 게임하는 시간을 아껴서 사진을 새로 찍었다. 울란학원 생도의 단정한 제복을 걸치고 머리도 단정하게 만진 채로.

신성력 시대에 들어서며 인간의 2세는 원초적 성행위 대신 유전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택되는 유전자는 당연히 결함 확률이 가장 낮고 건강하며 우수한 쪽이었기에 인류의 평균적 외모는 점점 보편적 미의 기준에 수렴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덕분에 본인이든 타인이든 외모 같은 것에 관심이 없던 린웨이도, 처음으로 자신이 평균적인 인간의 외모 중에서도 좀 더 보편적 미의 기준에 가까운 외모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 실제 사진 교환할까?”

덕분에 기다려왔던 로라의 말에 넙죽 사진부터 던질 뻔한 것을 참느라 제법 애를 먹어야 했다. 로라가 먼저 사진을 내밀자 린웨이는 기억을 쥐어짜 여자였냐며 놀라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외면하며 새로 찍은 자신의 사진을 내밀었다. 차마 예전에 합성 사진을 내밀며 농담처럼 던졌던 말처럼 미모를 노리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그 합성 사진보단 자신이 보편적으로 더 괜찮은 모습이라 생각했고, 생도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빗은 뒤에 나온 사진을 봤을 땐 제법 만족스러웠는데……. 어쩐지 암흑물질의 앞에서는 점점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불안한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암흑물질은 사진을 받고서 말이 없었다. 결국 정신이 나간 입술이 제멋대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왜, 반했어?”

이어지는 암흑물질의 말은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린웨이는 어쩐지 그 말이 뾰족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너…… 며칠 전에 관리위원회의 무도회에 오지 않았어?”

“어…… 어?”

“나 기억 안 나?”

잠시 머리가 굳었던 린웨이는 그제야 말투에 묘하게 돋친 가시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라는 자신의 사진을 받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저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듯 했다. 린웨이는 솟구치는 입꼬리를 내리누르곤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무도회…… 맞다, 너 서빙했댔지. 그 샴페인이 너구나!”

“어쩐지 도련님같다 했더니 정말 도련님이었네. 난 얼굴에 특징이 없어서 잘 기억이 안 날만도 하겠다.”

순간 린웨이의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특징이 없다고? 이게 무슨……. 누굴 놀리나? 린웨이는 아직도 그녀의 서명과 모습을 처음 보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터질 뻔 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한 가운만으로도 눈에 띄는 주제에…….

“특징이 없다고? 웃기지 마. 이 사진이 네 얼굴을 너무 못생기게 담아 놔서 못 알아봤을 뿐이야. 그때 실제로 본 네 얼굴은 이것보다 훨씬 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린웨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우락부락한 암흑물질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 그 투박한 캐릭터의 너머로 하얗고 섬세한 얼굴의 소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 소리가 귀에서 들렸다.

“아, 점호 한다. 난 갈게.”

“……어, 그래…….”

밤 9시도 안 됐는데 점호를 할 리가 없었지만 이 상황을 무마할 핑계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게임을 끄고 침대로 기어 들어간 린웨이는 이불을 마구 발로 찼다.

 

 

이후론 격동의 시대였다. 로라의 인턴십, 린웨이의 장거리 임무, 로라의 프로젝트 등으로 그들은 이전과 똑같이 게임에 접속할 물리적인 시공간에 제약이 있었다. 덕분에 동시접속 대신 인게임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펜팔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이 기간의 단절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린웨이에게는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완벽히 똑같은 흐름이 아니기 때문인지 암흑물질의 메시지는 만유인력이 기억하는 내용에서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런 것을 하나하나 짚어내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이미 한 차례 이뤘던 성과를 내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노력하는 것은 몹시도 지루했다. 그 때문인지, 제8성계로 떠나는 날이 목전에 다가왔음에도 이전처럼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절절한 고백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간결한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오면 만나자.]

 

 

대항해시대에 접속하지 못하는 린웨이는 제8성계 수복 임무 내내 암흑물질에게 받은 사진을 손바닥만한 형태로 인화해 휴대하고 다녔다. 그 회색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곳이 어디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 되새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죽을 고비가 찾아오면 로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의 로라 또한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린웨이의 고백을 듣고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어 애가 탔다.

하지만 보토 귀환 후 높으신 분들의 결혼 중개 플랫폼에서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의 로라 거든을 보는 것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맞아, 그랬다. 관리위원회는 로라 거든이라는 매물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이곳저곳과 혼담이 오간다는 내용을 흘렸고, 그녀에 대한 수요와 함께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이전엔 질투로 미칠 것 같았다면 이제는 그녀처럼 빛나는 사람이 경매장의 희귀매물처럼 취급당하는 것이 불쾌했다. 그제서야 린웨이는 암흑물질이 아주 옛날에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거든 가를 선택했으니까, 관리 위원회의 소나 말처럼 일해도 최소한 보토의 외양간에 있는 거잖아.’

‘별이 빛나는 드넓은 하늘도 볼 수 있고. 솔직히 이 정도만 되어도 엄청나게 운이 좋은 거야.’

상관없다는 듯 담담하게 가축과도 같은 처지를 ‘운이 좋다’고 말하던 모습에 들었던 죄책감. 불합리를 보고서도 힘이 없어 순응할 수밖에 없음에도 옳고 그름이 흔들리지 않았던 모습.

‘누구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태어날 기회를 얻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소중하게 생각해, 도련님.’

린웨이가 조금 더 용감했다면 피라미드를 무너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기회까지 잃고 싶지 않았기에 피라미드를 무너뜨리는 위험까지 무릅쓸 수는 없었다. 그녀를 피라미드의 최고층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대항해시대에 접속해 보낸메시지함을 확인해본 린웨이는 암흑물질에게 보낸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뜨는 것을 보고 안도와 동시에 낙담했다. 그가 충동적으로 돌아오면 만나자고 보낸 메시지에는 언제 돌아오는지,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실제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것이 전해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기지나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도 ‘내일 만나자’는 표현으로 으레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린웨이는 또다시 알쏭달쏭하고 간결한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왔어. 만나러 갈게.]

어쩐지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린웨이는 지구 시대의 인간들이 왜 꽃이라는 것을 선물하기 시작했는지 관심도 없었고, 이해도 하지 못하는 부류였다. 그래서 인터넷 뉴스 포탈에서 ‘성간 안개’라는 품종의 장미가 유행한다는 헤드라인을 클릭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로라의 눈을 닮은 회색과 흰색, 하늘색이 오묘하게 섞이고 작은 진주로 장식된 장미 다발을 품에 안는 순간 어쩐지 그들의 낭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백탑의 연구원인 그녀에게 실용적이지도 못한 꽃다발 따위는 전혀 달가운 선물이 아닐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린웨이는 암흑물질이 대항해시대의 광채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녀라면 인류의 사랑과 낭만이 만들어온 관습과 상징을 읽어내고 기뻐해주겠노라고 믿었다.

그가 백탑에 방문신청을 넣은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로라 거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입찰이 들어오는 최고의 매물이었기 때문이다. 린웨이 중장쯤 되는 거물도 입찰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정도였을까.

하지만 로라에게는 놀랄 일이었을 것이다. 대뜸 찾아온 린웨이가 꽃다발을 내밀었으니까.

분명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손발이 차가워지고 넋이 나갔었지. 하지만 로라의 눈은 그때처럼 차갑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생기와 놀라움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린웨이는 어리석은 결혼 흥정 대신 꿈속에서, 생사의 분기에서, 그녀가 건네준 사진을 쥐고 몇백 번이나 연습했던 그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좋아해, 결혼하자.”

린웨이는 고개를 들었다. 꿈속에서 고백받은 그녀는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냉담하고 무덤덤한 얼굴이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피라미드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자신의 곁에서 안전하게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게, 설사 그것이 자신이 태어난 피라미드를 부수는 길이 되더라도, 이번만큼은……

그랬어야 했는데.

“린 장군. 오늘은 손이 많이 떨리는 모양이야.”

안돼.

그녀가 불길 속에 있었다.

린웨이가 내밀었던 꽃다발은 로라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녀가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귀가 먹먹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가까스로 그 목소리를 붙잡았을 때, 그녀는 잔인하게도 작별을 고했다.

“지옥에서 다시 만나기를.”

안녕히.

 

어느 날 눈을 뜬 린웨이에게 운 좋은 두 번째 기회 따위는 없었다. 그는 영원히 가면을 벗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멍청이로 살았다.

 

 

 

 

 

 

 

 

 

2. 암흑물질의 절망

 

 

‘완전히 미쳤다.’

서둘러 빠져나온 로라 거든은 귀를 의심했다. 울란학원의 이름 모를 유망한 생도들이 살해당할 위기였다. 순간 로라는 이 사주가 옳지 않다는 생각 이전에 울란학원에 다니는 자신의 친구 만유인력이 괜찮을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쓸데없는 도덕적 고민을 했다. 무용한 고민을 중단하고 내린 결론은 ‘어떻게든 해야 한다’였다. 하지만 상대는 관리위원회의 맥아담스였다. 무려 울란학원의 성간 훈련 좌표를 빼돌리고 역외 해적을 사주할 수 있는 사람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일개 학생인 그녀의 선택지에는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만유인력에게 연락해 좌표를 전달하고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방법 뿐이었다.

“젠장, 맞다…….”

그러고보니 만유인력이 얼마 전 특훈 때문에 바빠서 접속률이 떨어질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짬이 나는 오후 내내 게임을 켜두었지만 만유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로라는 할 말이 있으니 접속하면 말하라는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만유인력은 접속하지 않았다. 로라는 짬을 내서 접속할 때마다 언제 들어오냐는 내용의 쪽지를 퍼부어댔고, 인터넷에서 특정 유저 접속 알림을 개인 단말기로 띄워주는 프로그램까지 설치해 만유인력의 접속을 챙겼다.

만유인력과 연락이 닿지 않는 날이 길어지자 기갑이 격추당하는 악몽까지 꾸기 시작했다.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머리까지 아팠다. 로라는 병가를 내고 쉬면서도 개인 단말기의 알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프로그램을 사용한 보람이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유인력의 접속 팝업이 떴다. 저도 모르게 마음 속의 아무 신에게나 감사하며 로라는 암흑물질이 되었다.

 

 

피라미드의 아래쪽에서 태어난 로라 거든은 행운과 재능이 모두 따라주는 케이스였고, 점차 피라미드의 위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법이다. 로라 거든은 보고 싶지 않은 것과 보이지 않던 것까지 보게 되었다. 기적과 영웅, 인간성과 우주의 광채를 동경했던 그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실로 피곤한 나날들이었다.

이렇다할 취미도, 친구도 없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이라고 하면 대항해시대의 친구 만유인력이 부재중에 보내놓는 메시지 정도였다. 울란학원 출신이라는 그 청년은 로라가 백탑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녀의 일과에 어느새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아하니 졸업하며 본격적으로 입대한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은 비밀과 일상을 모두 공유했다. 물론 상대가 깍쟁이 도련님처럼 구는 모습을 보면 숨긴 것이 있을 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로라는 그랬다.

그랬기에, 그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적힌 메시지를 기대하며 대항해시대에 접속한 로라는 일순 숨이 멎는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시콜콜하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훨씬 더 뜨겁고, 절절하고, 열렬하고, 오래 감춰온 마음이었다.

“……!”

놀라서 저도 모르게 게임을 종료해버린 로라의 하얀 얼굴이 드물게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쿵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소리가 뒷전에서 들렸다. 문득 로라는 막연히 자신의 일상 일부라고 생각했던 이 게임 친구가 사실 자신의 마음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을 보내야 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다음은?

보토의 사랑은 피라미드 층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권리다. 층을 마음대로 고르지 못한다면 능력과 뒷배를 어필하며 몸값을 올리면서 피라미드 층 수를 높이는 방법 뿐이었다. 로라 거든은 후자에 속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맺어질 수도 없는, 관리위원회가 기르는 가축.

차라리 로맨스 소설에 나온 것처럼 정략혼 상대와 운명적인 만남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로라 거든은 태어나서 몇 번 해 본 적도 없는 비이성적인 망상을 만유인력의 고백에 할애했다. 하지만 상대가 울란학원의 도련님이라는 정보가 실낱같은 희망을 주었다. 울란학원쯤 되는 곳에 입학할만한 자제라면 거든 가의 사위 목록에 들 만 했으므로.

 

‘안 되는데…….’

그런 이유로 로라는 백탑의 서버와 모아둔 돈 일부를 이용해 특정 기간 울란학원의 생도 명부를 손에 넣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떨리는 눈으로 수백 개의 얼굴들을 쳐다봐도 그녀가 만유인력에게 받은 사진의 주인공은 찾을 수 없었다.

‘피로 탓일까.’

결국 육안으로 찾아내는 것을 포기한 그녀는 자신이 가진 사진과 명부에서 얼굴 일치 비율이 90퍼 이상 되는 것을 목표로 인공지능 검색을 돌렸다.

[일치하는 결과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물론 울란학원에 다닌다는 만유인력의 이야기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었지만, 로라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은……

[일치하는 결과가 5건 있습니다.]

“!”

인공지능은 만유인력이 보내준 사진과 울란학원 명부의 연관성을 검색하더니 낯선 남성 다섯의 사진을 띄워주었다. 만유인력의 사진과 일치하는 것은 없었지만, 어쩐지 모두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분석결과가 적혀 있었다.

[합성 사진일 확률 99%]

로라는 탄식했다. 그녀가 사랑해마지않던 소년의 얼굴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린겔 원수의 핏줄, 울프 원수의 후계자. 울란학원 출신의 린웨이 중장에게서 혼담이 들어왔다. 관리위원회가 한껏 몸값을 올려놓은 보람이 있게 그녀가 최고가에 낙찰된 것이다. 거부권은 없다. 그녀가 유일하게 품은 낭만적 희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년의 얼굴이라는 사실에 박살난지 오래라, 새삼스럽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에게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가짜임이 분명한 그 소년에게 입을 맞춘 그녀는 소년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사진을 교환할 게 아니라, 이름을 교환할 걸 그랬을까. 그랬다면 네 진짜 계정을 내가 찾아낼 수 있었을텐데.”

소년은 답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거야, 바보 같으니.”

소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나도 답을 하지 못한 바보인건 마찬가지구나.”

로라는 소년의 사진을 뒤집었다.

 

안녕, 널 많이 좋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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