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의 송가
"정치적 인간들" AU
그러니 언제든 고개를 높이 들고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
쥘 린드버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슨하게 기댔다.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벽걸이 시계에서 작은 문이 열리고 새 형상의 도자기가 튀어나오더니 여덟 번 울었다. 다시, 고요하다.
오후 여덟 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 중 하나였다.
블라인드 커튼을 친 이중 유리창 너머로 밤의 장막이 내리면 세상은 몹시 고요해진다. 거리의 인파는 차츰 뜸해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 각자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바쁘게 산다는 명목 하에 낮 동안 잊고 지낸 고독과 무섬증이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더러는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겨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끈질긴 거짓말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다른 이들은 술과 약물로 정신을 눅진하게 절여 또 한 번의 밤을 견딘다. 악몽. 불면. 머리맡에서 속삭이며 죄책감을 불어넣는 악마의 목소리. 그런 것들에 시달릴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외면한 존재들과 동등해진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이들, 자신이 지키려던 세상에게 배반당한 죄인과 추방자들. 기사단.
쥘은 고요히 웃음을 지었다. 언뜻 보기에는 애정이라도 묻어나올 듯한 얼굴이었다. 시선이 책장 위를 느리게 훑었다. 바닥에 깔린 두꺼운 암홍색 카페트는 마법부 표준 규정을 준수한 제품으로 양 옆의 사무실과 다르지 않았다. 옻칠한 벽걸이 시계도, 널찍한 마호가니 책상도. 금속 고리로 한 데 묶인 두꺼운 판례 뭉텅이와 만년필 역시. 그의 방은 무서울 정도로 틀에 박혀 있었고, 사람들이 마법 사법부 장관의 사무실을 생각하면 떠올릴 만한 모습 그대로였다. 사적인 삶이나 취향은 마치 절개당한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만일 그가 실각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쥘 딜루티 린드버그의 생애를 해부하려 든다 하여도 이곳에서 얻을 단서는 거의 없을 터였다. 책장 선반에 올려진 소라 껍데기나 액자로 보존되어 벽에 걸린 혹등고래 낙서 정도가 다일까. 그마저도 손때가 거의 타지 않아 개인적인 애착의 대상인지는 불명확했으나,
그것이 그의 의무임을 쥘 린드버그는 이해했다. 그가 선택한 그의 역할.
세상을 나아지게 하고 있는가? 아니오. 쥘 린드버그는 어리석은 민중이 행복한 민중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부류는 되지 못했다. 인간의 본성에는 탐구심이 존재한다. 진실에 대한 구도求道가 있다. 그는 민중의 삶을 적당히 버겁고 적당히 바쁘며 적당히 즐겁게 만듦으로써 인간 본성의 불가분한 부분을 목졸라 죽여버렸다.
그렇다면 그가 모두의 운명을 대리할 정도로 대단히 독보적인 존재인가? 이 또한, 아니오. 물론 이만한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다. 그는 영민한 편이다. 최소한 근 몇 년 영국의 마법 세계가 보아온 정치가들 중에서는. 그러나 유일하지는 않다. 그가 책상 앞에 앉아 수만의 목숨 위로 펜을 놀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어떤 가치, 어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시대정신에 충실히 부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부품이기에 언제든 교체당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으로 깎아낸 권력의 상아탑이 영원할 것인가?
쥘 린드버그는 급기야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환상이 아닌가.
“오 년,” 그가 되뇌였다. “오 년 안에 무너진다고 장담하죠.” 독백에 이어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어느덧 몸을 일으킨 쥘은 책들이 도열한 선반을 향했다. 지켜보는 이가 없음에도 그의 걸음은 소년처럼 경쾌했다. 불사조 기사단에 합류할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온 풋내기 마법사들의 정신을 으깬 감자처럼 만들어 놓았으면서, 약자의 손을 들어 다른 약자를 치는 간교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 나 또한 즐겁지 않았노라고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을 토로한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짓이다. 온순한 짐승처럼 목을 길게 뻗고 기다리진 않으리라. 참회하지 않을 작정이라면 적어도 가슴을 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오후 여덟 시를 좋아한 이유를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간성을 이해받을 여지를 약함과 고독을 거부하고 이방의 우상이 되자. 쥘 린드버그는 손을 뻗어 소라 껍데기를 문질렀다. 핀갈 모이레 모레이가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쥘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는 어둑하고 금이 가있었다.
사실 이 사무실에는 개인적인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누구도 개인적인 이유에서의 보관이라고 짐작치 못할 테니 그의 소소한 일탈에 불과하지만은.
그는 구겨지지 않게 책들 사이에 반듯이 끼워둔 팜플렛을 꺼냈다. 그것은 에스마일 시프와 세실 브라이언트의 합작품인 프로파간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짓밟힌 약자들을 대신해 분노를 말하는 젊은 피. 언젠가는 이 사무실까지 밀려들 혁명의 불길이 보내는 전언. 그 얼굴을 쥘 린드버그는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눈은 불꽃같고 표정은 무섭도록 굳세서, 꼭 그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나요?’ 쥘은 의문했다. ‘변화가 있다면 반동도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환영받을 테지만 그 다음엔 염증이 따라붙을 거예요. 사람들이 우매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내가 상징하는 시대의 정신은 몇 번이고 재발하는 병증이 될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나요?’
그래. 이곳에 부재한 이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울렸다.
자기 확신. 그것이야말로 세실 브라이언트가 지닌 최악의 강점이었다. 그 원동력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결코 정치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히 그에게 이끌렸다. 그가 내리는 용서 없는 단죄에 매료되었다. 쥘 린드버그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준 것 또한 바로 그 확신에 찬 언동이었으니, 그들이 바라는 목자는 화평이 아닌 칼을 내리는 자라. 기어코 관념이 될 셈입니까. 자리에 없는 상대를 향한 말에선 희미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유감은 없었다.
만일 쥘 린드버그가 보다 드라마틱한 성정이었다면 세실 브라이언트를 숙적이라 칭했을 것이다. 감상적이었더라면 이해를 구했을 것이고, 유약했다면 두려움에 떨었겠지. 아니다. 지금도 화상으로 얼룩진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쥘은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생리적인 반응을 관찰했다. 두려운 건가. 고통이?
언제든 고개를 높이 들고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
그는 손을 가볍게 움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숙적, 옛 친구, 종말. 다 좋지만 이 세계의 그는 세실을 다르게 칭하고 싶었다.
다음 순번.
당신은 결국에 왕관을 쓰게 될 겁니다, 쥘은 독백했다. 세상을 손아귀에 가둔 기분이 들겠지요. 단죄를 원없이 실행할 수 있을 겁니다. 나도 그 대상이 되겠죠. 분명 그곳에도 정의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결국엔 무용할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권력이란 괴물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취한 수많은 얼굴 중 하나일 뿐이에요.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지는 중요치 않죠. 권력은 권력을 영속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며, 재산도, 사치도, 희락도 권력 앞에선 무의미해집니다. 개인이란 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세포 하나가 사멸하면 유기체 전체는 활력을 얻죠*. 그것이 내가 계속해서 이 거대한 권력에 부역한 이유기도 합니다. 손톱을 잘랐다고 목숨이 끊어지겠습니까? 나와 당신은 다르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기를, 그래서 너무 멀리 가기를 소원합니다. 아마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혜성처럼 빛나는 사람이니까. 때론 유능한 것도 탈이 되지 않습니까. 나는 벌써 당신이 나를 죽이고 에스마일을 죽이고 수없이 많은 죄인을 죽이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신이 정말로 성공하는 모습이 궁금하긴 하네요.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누구도 불합리하게 박해받지 않는 세상, 그래서 명명백백히 정의가 실현된 세상이 온다면…….
마지막에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군요.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진 않겠지만은.
쥘 린드버그는 웃으며 기다린다. 다음 순번이 언제든 이어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성 없는 사무실을 단정히 예비해 둔 채로.
* “1984”,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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