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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보충도 막바지였다. 갈수록 커지는 매미들의 울음을 들으며 나무 그늘 없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흰 운동화에 모래알이 채였다. 대강 맨 책가방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쇠 필통 소리가 났다. 집에 빨리 가고 싶다. 다만 느릿한 걸음은 야속했다. 가끔씩 부는 모래바람은 시원하지도 않았다. 집에 가면 뭐 하지. 숙제 뭐였더라. 아, 개학하면 모의고사 볼 텐데 이번 언어 성적 또 바닥치면 엄청 깨지겠지. 시답잖은 생각이 돌았다. 흙바닥은 계속 까끌거렸다. 다시 부는 바람에 눈을 깜박이고 발을 내딛을 때 몸이 별안간 뒤로 쏠렸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가방끈을 잡아챈 선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야. 왜 전화 안 받아? 주머니를 뒤져보니 휴대전화가 없었다. 집에 놓고 왔나 봐요. 선배의 입이 비죽거렸다. 내가 전화 꼭 받으랬잖아. 집에 같이 가자고 매일 말해야 알아? 우리 이제 집에 같이 갈 기회 별로 없어. 어, 그러네요. 너 엄청 안 아쉬워 보인다. 귀찮게 하는 사람 떨어지니까 좋아? 음… 조금요? 요게 진짜. 오가는 대화에 천천히 활기가 찼다. 선배의 걸음은 한 발이 빨랐다. 맞추려니 숨이 조금 빨라져 심장 소리가 들렸다.
겨울 여섯 시는 어둑한데 여름 여섯 시는 엄청 밝은 거 가끔 신기하지 않냐. 운동장을 넘어 교문으로 향할 때 선배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에 구부정한 손날을 대고 하늘을 쳐다봤다. 목덜미에서 땀이 흘렀다. 더우세요? 아이고, 물을 것도 많다. 이 날씨에 안 더우면 인간이 아녀. 그쵸. 덥네요. 내 이마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희 그늘로 갈까요? 묻자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햇빛 좋잖아. 몇 달 있으면 또 햇빛 그립다고 난리일 걸. 있을 때 즐겨야지. 그리고 난 원래 햇빛 좋아해.
한 달쯤 전 1차 여름 보충이 시작됐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다. 왜 굳이 해 드는 데로 가세요? 땀 엄청 나시는데. 그러네, 엄청 찝찝하다. 근데 어차피 습해서 그늘에서도 땀은 나. 난 원래 햇빛 좋아하니까 괜찮아. 이상하게 나는 쉽기만 한 게 싫더라. 참 선배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튀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사람이구나. 선배의 첫인상은 이상했고 두 번째 만남은 더 이상했었다. 보통은 이상한 사람을 멀리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선배가 그렇듯 나 역시 원래 이상함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처음 손을 잡은 날은 입학식이었다. 의례적 행사였다. 선배는 내 옆에 선 채 지루한 축사를 듣다 길게 하품을 했고 간혹 뒷사람과 키득거렸다.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입학식은 왜 이렇게 길지. 눈을 양옆으로 살짝씩 돌리다 지루함에 모은 손을 꼼지락대며 한쪽 발을 바닥에 가볍게 문지르고 있을 때 선배가 나를 툭 쳤다. 너 되게 산만하다. 네? 선배님이 더 산만하신데. 지지 않고 대답하자 작은 웃음이 흘렀다. 난 원래 그래. 교장 연설 존나 지루하지? 한 이 분만 더 있음 끝나. 다른 꼰대들도 솔직히 저 인간 연설엔 못 버티거든. 끝내라고 눈치 줄걸? 좀 참아라. 내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 선배가 꼬물대던 손을 잡았다. 이것도 고만 해. 정신 사나워. 정말 연설은 이 분 뒤에 끝났다. 전체 차렷, 소리가 들리자 선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바로 하고 앞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 눈을 돌렸을 땐 식순이 거의 다 끝나 끝 반의 선배들부터 차례로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한 뒤였다.
지금 ○○행,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역은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으므로 열차를 타고 내리실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노란 선 바깥으로 물러서자 더운 바람이 일었다. 플랫폼을 채우는 도착음에 귀가 멍멍했다. 오른편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폰 화면을 누르던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어, 열차 왔네. 가자. 가득 찬 열차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을 지나쳐 미지근한 내부로 들어올 때 손이 잡혔다. 나는 무심코 선배의 목덜미에 시선을 꽂았다. 땀에 젖어 탁해진 옷깃이 구겨져 있었다. 문득 저 덥고 습한 데에 얼굴이 묻고 싶었다. 왼팔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괜히 그를 불렀다. 저, 선배. 작은 소리가 구겨진 등판에 막혔다. 선배! 다시 부르자 열차의 문이 탁 닫혔다.
왜 그래? 나 어디 안 가. 뭘 그렇게 다급하게 부르고 그러셔.
웃음기 묻은 말이 흩어지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 꼭 영영 떠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혀 끝에 고인 긴장을 넘기고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아니, 그냥요. 싱겁기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선배, 그 말도 거짓말이지 않나요. 내년이면 떠날 거면서 무슨 영원히 이곳에 함께할 사람처럼. 당신이 영영 날 떠나진 않겠지만 이제 보충날 함께 하교할 사람 같은 건 없는 건데. 집에 같이 갈 기회가 별로 남지 않았다고 먼저 말하던 건 선배였잖아요. 생각을 두드려 둥글게 뭉쳤다. 구울 수도 튀길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잡내 나는 덩어리. 내가 이상한 것들을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멍한 깜박임이 있었다.
첫 종업식엔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하지 않았다. 담임은 귀찮아하는 눈으로 열한 시까지 자습을 시키더니 대강 청소 검사를 마치고 종례도 없이 퇴근을 해버렸다. 삼삼오오 모여 피씨방 노래방 분식집으로 향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집에 가면 게임을 해야지 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방학 기간이다. 다음주 월요일이면 여름 보충이 시작될 거고, 쉬는 날들까지 착실하게 공부를 하기엔 그쪽에 둔 흥미가 없으므로 남은 할 일은 게임이었다. 그간 사야지 벼르고는 있었으나 평판이 전작보다 좋지 않아 구입을 망설이던 게임이 마침 할인 중이었다. 오래 써 터치 반응이 느린 휴대폰을 만지다 검색창에 게임명을 입력했다. 추천글과 욕 뿐인 글이 반반 비중으로 떴다. 화면을 내리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잉? 그거 사게? 돈 낭빈데? 멀뚱히 쳐다보다 그건 그쪽 취향이잖아요. 대답하니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거 진짜 돈 낭빈데 얘가 호구짓 방지를 시켜줘도 못 알아먹네. 와서 해보면 알 거 아냐. 함 해볼텨? 놀러와, 시켜줄게. 초면에 게임을 시켜주겠다는 미친 놈이 있구나. 함부로 남 따라가면 위험하다지만 입고 있던 교복이 같았다. 얼굴을 가만히 보니 어디선가 봤던 사람이었다. 아, 입학식. 그럼 선배구나. 명찰 색을 보니 한 학년 위였다. 생각이 회로를 다 돌기 전에 나는 고갤 끄덕였다. 시켜주세요. 순전히 선의로 호구방지 시켜주시는 거면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과잉 친절이긴 한데 감사한 건 감사한 거니까 일단 고맙습니다. 선배는 그 말에 반쯤 울듯이 웃었던 것 같다.
그 날도 손을 잡았었는데. 더운 숨이 끈적거렸고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 땀이 짙었다. 굵은 픽셀 도트로 찍힌 GAME OVER가 검은 화면을 떠다니는 동안 우리는 두 손을 겹쳤다. 긴 머리가 흘러내려 바닥을 훑었다. 매미가 울었고 공기는 습했다. 오래된 선풍기가 시끄럽게 덜덜거렸다. 생각보다 나 되게 예쁘지 않냐.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비뚠 안경에 콧등이 닿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게임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가 없었고 어려웠으며 정말로 돈이 아까웠다. 그 재미없는 게임을 이겨보겠다고 얼굴을 찡그리며 열중하던 선배가 재밌었고 해는 점차 뒷산을 넘어가고 있었으며 다음 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었을 뿐이다. 뜨겁던 해가 져서, 그러나 여전히 습해서. 우리는 어쩌다 입을 맞췄던 것뿐이다. 나는 뻔뻔한 투로 입을 열었었다. 저 예쁘죠.
열차가 십 분을 달리자 그나마 땀이 식었다. 끝자리에서 속닥거리며 저들끼리 웃던 커플 한 쌍이 다음 역 안내 방송에 자리를 비우자 선배는 잽싸게 자리에 가방부터 놓았다. 야, 앉아. 옷자락이 살짝 당겨졌다. 가방을 벗어 한 팔로 안고 자리에 앉았다. 앉을 데를 뺏길까 급히 앉은 탓에 선배의 가방은 등에 납작하게 눌려 숨이 막혀 보였다. 열차는 사람이 조금 빠져 아까보다 한산해지고 있었다. 선배는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휴대전화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바쁜 오른손 대신 왼손은 허벅지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나는 그 손을 잡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그때 굽은 선로를 돌며 차체가 흔들렸다. 폰을 놓칠 뻔한 오른손이 허둥댈 때 시들해진 햇빛이 창 너머에서 반짝였다. 몸이 흔들리며 손등이 맞닿았다. 건너편 자리에서 띵동 알람이 울렸다. 일곱시입니다. 나이든 할아버지 한 분이 폴더를 느릿하게 여닫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감고 스르륵 선배의 어깨로 기울어져버렸다. 닿은 손등을 떼지 않고 흔들림이 멎을 때까지, 멎은 후에도 기댄 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자?
눈을 뜨지 않았다. 네, 달싹인 입술이 뭉친 대답을 뱉자 헛웃음이 돌아왔다. 자는 놈이 대답을 하네. 여름 일곱 시의 태양. 여섯 시보다 시들하지만 아직 열기를 다 식히지는 못한 조리가 끝난 뒤의 기름 같은 것.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처음처럼 깨끗하진 않아도 언제든지 다시 달궈질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안에 들어온 나는 어쩐지 마구 숨이 들이쉬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물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조각해서 가득 끌어안고 싶었다. 우리는 두 번째 만남 이후부터 일 년을 함께 지냈는데. 어떤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혹은 특별한 우정이라도 나눴던 것처럼 같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의 입맞춤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저 함께 집에 돌아가는 것만이 청춘의 페이지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몽글한 조바심에 질문을 한다. 저희 내일도 같이 집에 갈까요? 선배의 시선이 느껴진다. 눈을 고집스럽게 감고 다시 물었다. 전화 하실 거죠? 받을게요.
다음 역은 □□역,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열차에 울리는 안내방송 너머로 숨죽인 대답이 지났다. 그래, 그러자. 말과 함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와 열차는 다시 조금 더워졌다. 나도 모르게 닿은 오른손의 검지를 움찔거렸다. 선배는 웃었던 것 같다. 내일은 꼭 전화 받아. 답하는 대신 조금 더 머리를 기댔다. 고개 아프게, 키도 큰 놈이. 혼잣말이 들렸지만 모른 체 했다. 지금이 좋았다. 다시 휴대전화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잠에 빠져볼까 했다. 어차피 이제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어도 상관 없을 것이었다. 선배는 내가 선배네 자취방이 이 역의 5분 거리에 있다는 걸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므로.
잠을 깨고 차에서 내릴 때쯤이면 뜨겁던 해가 지겠지. 선선한 바람이 불면 좋을 텐데. 오히려 오늘까지는 열대야여도 좋겠다.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았으면 했다. 오늘은 비에 적합하지 않은 날이다. 내일은 내려도 좋다. 일부러 우산 정도는 빼놓고 나와줄 수 있을 텐데. 난 젖은 머리도 좋아하는데. 잠이 왔다. 기분이 좋았다. 나도 참 변덕이지. 마음이 선선해 웃음이 났다. 여름인 탓인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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