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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 by 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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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리가 덜걱이는 집이었다. 그거 전에 살던 사람이 고장내놓고 갔다던데. 너는 누렇게 뜬 벽지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럼 고쳐달라고 해야지. 그건 안 된다더라, 대신 방이 싸잖아. 요령껏 열어봐. 나는 대답 대신 문고리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긋나 조금 돌아간 손잡이가 엉성한 폼으로 박혀 있었다. 그래도 현관문은 멀쩡한데. 내가 언짢은 줄 알았는지 네가 괜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나도 알거든. 어이가 없어 웃자 너는 작게 따라 웃었다. 일이 겹쳐 바빴던 나 대신 홀로 어떻게든 예산에 맞춰 최대한 괜찮을 집을 찾느라 고생했을 테니 불평할 생각까지야 없었다. 그래도 우스운 건 우스운 것이다. 아, 이게 어떻게 이러지. 나중에 다시 달지 뭐. 웃음으로 무마된 해프닝 뒤 우리는 문고리를 다시 달지 않았다. 요령껏 문을 여닫는 법을 터득했을 뿐 그 누구도 부품을 사오지는 않았다. 주말에는 바꿔 달자, 말뿐인 소리들도 차츰 사라져 갔다. 문고리는 그저 불편한 채로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반 년이든, 일 년이든.

 

바람 빠진 풍선이 반쯤 눈에 파묻혀 나뒹구는 겨울 낮. 공원의 바람이 차고 코트엔 아침에 먹은 빵에서 튄 크림이 묻어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오후 두 시. 별로 세지 않던 태양까지 머리 위에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참이었고 나는 덩그러니 벤치 위에 놓여지고 만다. 나는 날씨처럼 찬 걱정을 뱉는다. 봄의 피크닉도 이 자리였을 터다. 한 입 베어물던 샌드위치의 맛도 지금처럼 싸늘했나, 한 차례 꽃샘추위를 지나 그곳에 있었을 텐데. 곧 더워질 테니 아무래도 좋았던 걸까. 펜스 너머 잔물결이 반짝였다. 따릉, 지나가는 자전거가 울었다. 떨어진 고무풍선에 바퀴자국이 길게 남는다. 문득 하늘은 맑지 못하다. 구름은 바퀴자국만큼이나 길다. 헬륨 풍선을 들고 우르르 저편으로 뛰어가는 아이들과 눈구름 가득한 위가 어지럽다.

어제는 사실 밤을 샜다. 고질병 탓이다. 걱정은 쉽게 몸집을 부풀리고 세상을 집어삼킨다. 우리는 세상보다 어리기에 그 앞에서는 쉽게 두려워할 수 있다. 나만의 핑계일지 모르므로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였잖아. 한 번도 그런 단어로 묶여본 일 없는 사람들과는 다르잖아. 우리는 아무렇지 않아. 그렇지, 우리는 영원히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변명은 헬륨을 들이마신 목소리처럼 우스꽝스럽다. 나의 걱정은 겨울같은 부분을 덜어내고 바닥에 껍질처럼 떨어져 나뒹군다. 인상을 찡그린다. 그 순간 풍선을 나눠주던 삐에로가 나에게도 손을 내민다.

 

작년 봄 즈음엔 황사가 심하지 않았다. 여기 자주 올까. 분위기가 좋아. 받은 말에 그럴까, 한 마디를 건네는 일은 쉬웠다. 너는 자주 지적당하던 발음을 막 고친 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 입밖으로 뱉을 일 없을 악마의 이름을 외우는 일을 해내지는 못했다. 애초에 누구도 악마가 아니었다.

체크무니 돗자리를 새로 산 건 순전히 너와 피크닉을 가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대충 사먹으면 되니까. 토요일에 보자. 그래도 너는 굳이 샌드위치를 싸들고 왔다. 혼자 준비하게 둘 수는 없잖아. 엄지를 치켜드는 네게 간만에 장단을 맞춰주었던 것 같다. 신난 네가 새 돗자리를 펄럭이며 펼쳐내는 동안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떠들썩한 아이들의 공놀이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한숨 낮잠을 잤다.

괜찮지 않아? S랑 같이라서 좋아. 나는 괜찮냐고만 물었는데. 난 그 이상이었는데. 시답잖은 말이 오가던 벚나무 밑엔 날아갈까 동전으로 묶어둔 풍선이 있었다.

 봄의 삐에로들은 헬륨을 넣은 풍선을 한아름 안고 나타나곤 했다. 연인들에게 건네는 건 투철한 직업정신의 서비스. 너는 가끔 그걸 받고 놀란 듯이 기뻐했다. 하트 모양이야, 예쁘지 않아? 널 향한 내 마음처럼. 됐습니다, 거절할게요. 농담에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무슨 말을 해도 웃음이 났다. 넌 빨간 하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와줄까? 왜, 풍선 받고 싶어서? 그것보단, 익숙한 게 없으면 어색할 것 같아서. 영화처럼 그때 우린 꽃샘추위의 야멸찬 바람에 삐에로가 놓쳐버린 서너 개의 풍선들과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어린 손들을 마주했다. 그 광경이 무심코 예뻤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우리는 생각보다 공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 체크무늬 돗자리는 고이 접혀 서랍 속에 들어가 있었다. 너는 샌드위치 대신 편의점 빵을 씹으며 수화기 너머로 농담을 했다. 오늘도 내가 보고 싶어서 어떡해, S는. 오늘은 단 한 번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럼 어제는 했구나? 아니, 어제도 딱히. 네 말을 막고서도 마이크에 대고 퍼붓는 쪽쪽 소리가 들렸다. 난 하려던 말을 잊고 침대로 전화기를 던졌다.

 경찰을 관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K는 죽지 않았다. 이부키 역시 그랬다. 다만 S라는 사람은 배 위에서 죽은 것과 다름 없었다. 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고 나는 누군가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고려하지 않고 사실상의 오발탄을 던졌다.

일찍 눈을 뜬 네가 나를 끌어안고 배 안을 구르지 않았다면, 우여곡절 끝에 누군가의 머리가 먼저 날아가지 않았다면, 흥분한 네가 잘못 조준한 탄이 쿠즈미의 어깨를 꿰뚫지 않았다면.

 꼬리 끝에서 달랑거리는 작은 과장을 쳐다보다 고개 돌린다. 언제나 간신히 열린 문 안으로 다리 내미는 것이 일상임을 알았다. 닫히지 못한 엘리베이터가 늘 아쉬운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음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말을 뱉으면 간혹 정말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적이 있었다. 괜한 생각이지. 태생이 블루하지 못해 털어내고 나서도 실밥은 남았다. 신경쓰지 마, S. 다정히 손을 잡아오는 네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너는 다정은 했으나 부드러이 상냥할 때는 적었기에 낯선 기분에 손을 떨 뻔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종종 동조하지 않는 말에도 긍정을 표할 때가 있다. 욕실 벽 틈새의 오랜 때 같은 일이다. 머리가 아프도록 진동하는 락스 냄새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런 것. 미안하게도 일상적이며 유치한 표현들은 사실 너보다 나의 특기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별에도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말밖엔 하지 못한다.

 얼굴을 본 게 집에서도 밖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범죄는 주말과 연휴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고 오히려 그 즈음이 피크였다. 네가 퇴근하지 않을 빈 집의 불을 켜다 한숨을 쉬었다. 퇴근길 문득 생각나 들러본 공원에 삐에로는 없었다. 무심코 대신 사온 헬륨 없는 늘어진 고무들은 돗자리 위에 놓여 잠들었다. 그런 여름도 있었다.

 언제인지 가물한 주말 아침 눈을 뜨자 옆에 네가 없었다. 거의 비슷한 일상이었으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기지개를 켜며 문을 열자 불 앞을 우두커니 지키며 면을 끓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일어났네. 계란 먹을래? 얹으려고? 국물에 풀 건데. 맘대로 해. 작은 접시가 대답 없이 냄비 위에서 뒤집혔고 두 개 분량의 계란 껍질이 쓰레기 봉지로 떨어졌다. 하품하며 작은 탁자 앞에 앉자 앞에 젓가락 두 개가 있었다. 너는 부엌장갑 둔 데를 잊었는지 급한대로 옷소매를 늘려 잡고 냄비를 들고 왔다. 보지 않는 잡지를 빼 대강 던져두면 그 위에 냄비가 놓였다. 아, 뜨거워. 손을 털고 자리에 앉는 모습을 졸린 눈으로 지켜보다 늘어나 쭈글해진 티의 목 부분이 눈에 밟혔다. 옷 새로 사지. 집에서 입는 거니까 괜찮잖아. 뭐, 그래. 알아서 해라. 인스턴트 우동만도 못한 맛의 대화가 오갔다. 여름은 늦자락이 가장 후덥지근해서 앉아만 있어도 짜증이 났다. 땀 흘리며 먹던 면이 질리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덥다는 핑계로 우리는 떨어져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에어컨 틀어야 하나. 난 고개를 저었다. 저번 달 전기세 봤어? 넌 대답 없이 채널을 돌렸다.

 메론빵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늘 귀찮았다. 노랗고 커다랗고 부드럽지만 퍽퍽한 것. 합성착향료의 맛이 간혹 씁쓸했다. 사실 무엇이든 바쁜 일정에 한 입 가득 음식을 밀어넣고 입을 움직일 때 딱히 기분이 좋은 적은 없었다. 특히 빵 종류란 더 그랬다. 메론빵은 좋아하지도 않는데. 팔자에도 없는 메론빵 판매 트럭을 타게 됐을 때는 팔짱을 끼고 한참을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정작 그 차에 탈 때는 메론빵 따윈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붕 뜬 단맛이 녹기 전에 쉴새없이 턱을 놀려야 해. 이따금 우유를 들이키며 막힌 목을 눌러야 해. 나는 그 차에서 해방되고 나서야 편의점에서 메론맛 커스터드 크림을 가득 채운 빵을 하나 샀다. 그리고 퀘스트처럼 빵을 씹어댔다. 먹다 보니 그런 것도 맛이라는 건 있었다. 억울할 정도였다.

빵은 왜 맛있을까. 처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멍하니 묻자 새 직장의 파트너에겐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기술도 연구도 그래요. 어떻게 처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주 생각하거든요.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겠고 집요한 탐구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대단한 결과라는 건 변치 않죠. 하긴 그래. 같은 말을 네게 했더니 너는 한 마디를 했다. 정성이야! 공장제잖아. 척 하면 척이지, 아무튼 그것도 기계가 정성으로 만든, 음, 아마도 그런 걸 거야. 얼씨구, 소설을 써라. 툭 말을 던지고 탁자에 빵 봉지와 노란 부스러기들을 남겨놓고 일어서자 너는 휴지를 세 칸 손에 말아 흔적을 닦았다. 땡큐, 가벼운 인사가 튀면 가끔의 만남 속 간식 타임은 끝이었다. 그런 시간마다 늘 우리는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다만 인사는 차츰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 탁자를 치워주는 네가 당연해졌다. 같은 답이 지루해졌고 비슷한 말들도 시시해졌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꾸 까먹었다. 여름 이후로 여전히 돗자리는 서랍 속에만 있었고 사왔던 풍선은 반이 남아 그 옆을 뒹굴었다. 자꾸만 속이 퍽퍽했다. 간혹 나는 네가 집에 있는 것이 어색해졌고 넌 자꾸 퇴근길에 빵을 사왔다.

 자주 가던 상점은 문을 닫았다. 함께 달았던 커튼봉 한 쪽이 망가져 커튼을 끝까지 칠 수가 없게 됐다. 고장난 문고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같이 샀던 커플 파자마 대신 우리는 목이 늘어난 티와 고무줄 빠진 바지를 입고 잠을 잤다. 점차 넌 중요한 일에도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난 늦게 퇴근하는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제 나는 네게 삐에로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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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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