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憤怒
검붉은 불꽃 속에서 타오르던 은빛을, 잊지 못한 채.
처음 합은 피했다. 두 번째 합은 목덜미를 내어줬다. 세 번째는, ……실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건지. 실력 차는 확연하다. 오랫동안 한 산에서 포식자로 살아가던 감이 그리 외치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우습구나. 원수의 목을 치기 위해 그리도 칼을 갈았건만 세 합도 되기 전에 조소를 사다니. 아직까지도 제 검에 목이 조이던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숨이 차오르고, 턱이 꺾여서. 그대로 무방비하게 당해버렸다. 검은 제쪽에 있었을 텐데도. 문득 화에 데이기라도 하듯, 움찔거린 손끝이 점점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흡사 백사의 독니에 물린 마냥 무딘 손톱 위로 하얗게 질린 색이 떠올랐다. 겨우 며칠 남짓으로는 좁혀지지 못하는 차이. 하지만 두 번 다시 없을 기회. 복수, 불, 친우. 모든 것이 다시 반전되어서, 눈앞에 불이 타오르고, 눈시울은 빳빳하게 건조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목숨이었다. 그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리던. 그의 목숨을.
분노로 치장하여 우위를 잊고, 적의로 무장하여 검을 들이밀어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앞을 디딜 때마다 숨소리가 점차 간격을 좁혀갔다. 가슴 안쪽에서 퍼져나가는 강렬한 감각이 기분 좋아서,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젠 알 것도 같아.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든 것이 그날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나의 죄마저 그의 피로 속죄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뒤를 모르는 호랑이처럼, 먹이를 찾아 달리기 시작한다. 불꽃 속에서 찾아낸 은빛이 이젠 머지 않은 곳에 있다. 제 먹이는 저곳에 있다. 살을 뜯고 피를 마시며 뼈를 취하리라. 무엇보다 검으나 무엇보다 붉은 요기가 단숨에 퍼져 검신에 물들고 단숨에, 터진다.
“네 놈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래, 막을 줄 알았지. 쉽게 손으로 막아낸 그의 얼굴은 이전처럼 조소에 물들어 있었다. 잇새를 으득거리며 익숙하게 검의 궤도를 비튼다. 이번에도 쉬이 막히리란 건 안다. 하지만 네 핏방울을 조금씩 떨어뜨리다 보면, 언젠가 땅을 물들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흥분에 찬 숨 소리를 제대로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숨길 필요가 없는 거겠지.”
모든 분노를 그러모은 듯 새빨간 붉음이 오롯이 그를 노린다. 황무지에서 먹이를 찾아낸 짐승처럼. 환희과 맹목이 뒤섞인 시선이 그를 담는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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