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 自覺
그럼에도 처음 한 입이 너무도 달큰했던 탓에.
Aether - Dear Lillie
들어선 안 되고, 봐서도 안 되며 알아서도 안 될 오직 나만의, …비밀이었다. 아무리 이기적이어도 나 한 명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그리 생각하며 겨우 제 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게 썩어 문드러진 과실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제 속에서 남아, 언젠가 보이지 않는 속부터 갉아먹어갈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럼에도 처음 한 입이 너무도 달큰했던 탓에 눈먼 아귀처럼 저주를 집어삼켰다. 과실의 씨가 살과 엉켜 제게 녹아들 만큼의 긴 시간을 착각과 함께 살아가며 스스로 안주하길 바랐다. 그게, 이런 결말이 될 걸, 모를 리 없었잖아. 고개를 들어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모든 것을 알아버린 자의 표정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해하기 힘들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한심한 표정. 하긴, 자신조차 우스워 피해왔던 진실에 어떤 의문이 필요할까. 오래도록 빛바랜 채 눈을 돌려왔던 사실이 억지로 제 앞에 내밀어진다. 날 것의 그대로, 처음 모습보다 더 뭉개지고 망가진 모습이 되어. 울컥, 또다시 이기적인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모든 건 네 탓이다. 네놈 때문이다. 그의 무덤을 짓밟고 태워버린, 내게 남은 유일한 흔적을 없애버린 너의 탓이다. 말아쥔 두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려버릴 만큼, 꽉 쥐어낸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이윽고 거친 호흡으로 내몰렸다. 분노, 증오, 애환 그리고 다시 분노로. 자신조차 어쩔 줄 모르는 악순환에 붙잡혀 해가 두 번의 천 년이 넘도록 매달려왔다. 나도 알아.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래서, 그래서 거부한 거다. 이 외에 어떤 선택지도 없었기에, 어떤 선택지도 보고 싶지 않아서. 두 갈래길 앞에 선 괴는 자신의 손으로 다리를 부수고 어둔 길을 택했다.
“네가 복수라 하며 달려든 이유가 이딴 하찮은 자기 위안이었다니.”
심심함을 달래려 했건만, 그럴 가치조차 못 됐군. 담담하고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귓속에 처박혔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내쉬던 거친 숨은 점점 뭉친 덩어리가 되었고, 가슴을 압박했다. 목구멍이 간격을 좁혀 스스로 목을 조른다. 살기 두렵다고 외치듯 그리 긴밀하고 농후한 숨을 내쉬며 울음을 죄었다. 흔들리는 시야가 전부 환상처럼 붕 뜬 것 같았다. 환상처럼, 전부 환상처럼 불타는 나무와 들. 나비의 날개는 찢겨지고 괴의 비명 소리는 더욱 고요한 세계로 제 영혼을 이끌었다. 그 사이에서 느낀 것은, …처음 인간의 피를 묻혔을 때와 같은, 기이한 후련함. 그림자가 되어 따라다니던 망령이 제 손도 아닌 다른 타인에 의해 사라졌다는 개운함은 단번에 혐오로 썩어 떨어졌다. 망령은 마치 저주처럼 또 다른 죄책감을 퍼부으며 사시사철 환청으로 정신을 갉아먹었다.
나의 죄였다. 그것은, 명백한 나의 죄악이었다. 가장 마주하기 두려웠던 사실을 다시 떠올리자 급히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그만,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질려버리도록 되씹고 되삼켰던 말을 또 게워내고 삼키며 창도 없는 우리에 가둔 나만의 죄악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린다. 어둡고 깊은 곳으로. 제 자신도, 그리고 아무도 못 보도록. 이 행위는 약과 같아서, 언제나 습관적처럼 되뇌던 짓이었다. 느른히 숨통이 트이려는 찰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쓸데없는 짓이란 듯 목을 틀어쥐었다. 숨만 잘못 쉬어도 그대로 꺾일 것만 같은 힘이었다.
“그 동안 내게 네 죄를 덧입히며 즐거웠나.”
제대로 보라며 그대로 꺾을 기세로 목젖 위를 눌러 시선을 들어올린다. 무기질적인 뱀의 동공엔 같잖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들어차 있었다. 색 바랜 한쪽 눈에서 시큰한 환상통이 일었다. 그 동안 편했느냐고 물었다. 그리 되묻는다. ―그래. 편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널 죽이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위안에 몸을 뉘였기에 그보다 편한 게 없었다. 책임 전가, 회피. 모두 좋았다. 어떻게 불려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알려지기 싫었던 상대에게 가장 처음 진실을 후벼파이며 가장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라 종용한다. 목을 잡아챈 그의 팔을 바들거리는 손가락이 작은 벌레마냥 조금씩, 조금씩 쥐어낸다. 보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분노를 없애고, 증오를 없애고. 자신의 작각이며 환상을 전부 까뒤집어서. 모든 꺼풀이 벗겨진 채 그를 바라보는 것은 제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해지리라고. 본능적으로 느낀 거겠지. 혐오적인 멸시감은 이윽고 큰 아가리가 되어 저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낸다. 하, 재밌다는 듯한 웃음이 들려왔다.
“네 꼴이 같잖아 마지막으로 읊어주마.”
번뜩, 눈에 홉뜨이며 그를 향해 고개를 처들었다. 안 돼. 그에게서 벗어나려 팔을 할퀴고 살점을 파낸다. 손톱 사이사이에 살갗이 맺혔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짓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하지마, 네가 말해야 할 게 아니야. 네게서 들어야 할 게 아니란 말이다. 비난 받는다 하여도 죽어서 제 친우에게 들을지언정 네게 들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조용히 하라는 듯, 손아귀에 든 힘이 더욱 목덜미를 죄었다. 그럼에도 사형장에 내몰린 이처럼 몸을 비틀며 반항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울부짖음과도 같은 외침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는 조소와도 같은 어조로 제게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난 네 환상의 산물이 아니다.”
볼일이 끝난 듯 그의 손아귀에 툭, 힘이 풀리고. 칼이며 손톱이며 무엇도 상관없었다. 오직 하얀 형상을 향해 달려들어 짓누르듯 그를 바닥에 밀쳐 그 목덜미를 쥐었다. 바닥에 쿵, 무너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퍼졌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겠다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방어였다. 그래봤자 산산조각나 망가져버린 얼굴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냐만. 아마 그래서였을 테다. 그가 우습다는 듯 제 달려듬을 용인했던 건. 두 팔이며 손가락은 이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붉은 동공이 애잔하리만치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흔들렸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이 퍽 흥미롭다는 얼굴 위로 무너져내린다.
“그만, 해… 제발…, 더 이상은…. 이대로, 그냥 이대로….”
죽일 수 있다며, 죽이면 모두 괜찮아질 거라며 혼자 착각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른 척해. 모른 척해줘. 그저 미친 사람처럼 협박하는 자의 모습으로 빌었다. 머릿속이 이상하게 확장돼서, 아무것도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위기만이 그 날처럼 붉은 불꽃을 피어내며 자욱한 연기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바짝 마른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느껴졌다. 다시 채워넣어야 하는데, 방식에 무지한 자는 단지 그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난 그 방법밖에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어. 더 이상 무얼 해야 해. ―어린아이. 손에 친우의 피를 묻혔을 그 당시에서 아무것도 커지지 않은 채. 모든 꺼풀을 벗기자 드러난 건 단지 어린아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올 리 없는 웃음이 자꾸만 잇새에서 비죽거려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내려다보는 얼굴에선 어떤 악감정도 없었다. 어찌할 바 몰라 바들거리는 손만이 그에게 닿아있었다. 고통이다. 이 상황 자체가. 어째서 제 아픔은 온통 그에게 맺혀있는지.
“이대로 모른 척해줘….”
환상에서 깨어난 자는 차라리 눈이 멀어버리기만 바라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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