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3년 전 겨울에 그 애를 처음 만났다.
진눈깨비가 흐리게 내리던 날, 눈 바로 아래까지 흰 마스크를 썼던 세영이의 첫인상을 기억한다. 상견례를 위해 들렀던 레스토랑, 홀에서 멀뚱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떡볶이코트 차림의 여자아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물끄러미 층수를 헤아리던 검은 눈. 같은 층에 내려 서로를 힐끔거리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을 때, 눈을 크게 깜박이며 천천히 마스크를 벗어내던 앳된 얼굴. 무릎 언저리로 올라온 교복 치마 위에서 꾸물거리던 얇고 긴 손가락. 세진 씨를 닮아 말수가 적던 입.
지금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첫인상이 오늘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그때처럼 세영이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학은 여기서 먼 곳으로 갈 거고, 이제부터 우리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거라고. 가냘픈 목소리와 다르게 무거운 선언이 공기를 짓눌렀다. 한숨조차도 찌르듯이 느껴지는 정적. 그 침묵을 깨뜨리고 세진 씨가 세영이를 말렸다.
“B대보다 A대가 더 좋고 가깝잖아. 등록금 걱정이라면 우리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B대는 장학금도 나오는걸. 이제 더 이상 오빠네에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신세라니 가족끼리에 그런 게 어딨어.”
“그치만….”
비스듬히 아래를 향했던 세영이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망설이는 듯한 세영이를 향해 나도 입을 열었다.
“세영아, 나도 오빠랑 같은 생각이야. 아직 독립하기엔 이른 나이잖아. 네가 대학 졸업하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될 때까진 이 집에서 지내도 돼.”
내가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말했지만, 세영이에겐 어떻게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세영이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양손을 꽉 붙잡았다. 머뭇거리는 세영이의 모습을 보고 세진 씨가 밀어붙였다.
“아직 결정할 시간이 더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자.”
세영이는 대답하지 않고 깍지 낀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세진 씨는 세영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식탁에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세영이와 그 앞에 마주 앉은 나, 둘만이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차양처럼 세영이의 얼굴을 가렸다.
말 꺼내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란 걸 나도 알았다. 정해진 직업 없이 대학생으로 완전히 독립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만류를 완전히 거절하지 못하는 건 그런 탓도 있을 터였다.
그렇게 힘든 결정을 왜 혼자서 내렸을까. 그것만은 그늘진 세영이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없었다.
세영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다고 생각한 건 오늘만이 아니었다. 세영이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늘 세영이의 표정은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세영이가 보고, 느끼는 것이 나에게는 잘 닿지 않았다.
나는 세영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활짝 편 손으로 세영이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면 세영이의 손이 머뭇거리며 내 손 위로 올라왔다. 약간 서늘하고 얇은 손이 피부에 닿았다. 손이 차가우면 혈액순환이 잘 안된다던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약이라도 지어올까 했지만, 항상 세영이의 힘찬 도리질에 이루어지진 못했다.
항상 그런 아이였다. 자신을 먼저 위하지 못하는 아이라서, 자기주장이 약한 아이라서 어렵지 않은 아이였다. 하지만 어렵지 않은 점이 도리어 눈에 밟혔다.
그런 세영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세영이는 잠깐 움츠러들었지만, 얌전히 나와 손을 잡고 있었다. 이렇게 맞잡은 손으로 진심이 전해지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이른 나이에 집을 나가려고 하는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진심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까.
세진 씨와 세영이는 열두 살 터울이었고, 세진 씨가 스무 살일 때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세영이를 길렀다. 여덟 살이라는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건 힘든 경험이었을 텐데도 세영이는 반듯하게 커 줬다. 내가 세영이를 직접 본 건 세영이가 열여섯 살 때부터였지만, 앨범에 끼워진 사진과, 세진 씨의 이야기 속 세영이는 어릴 적부터 속 썩이는 것 없이 얌전하게 자라온 아이였다.
순하게 자라온 만큼 너무 이른 나이에 홀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해서 첫 직장을 가지게 될 때까지는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담아 세영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식탁 위를 배회하던 세영이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나의 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담아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세영이는 내 미소를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 붉은 긴장이 느껴졌다. 섭섭한 반응에 살며시 손에 힘을 풀면, 세영이는 화다닥 손을 빼냈다.
“그럼 저는 이만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잰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늘한 손의 감촉이 사라진 자리에 그보다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나는 조용히 미소를 거두었다.
알고 있었다. 오빠가 결혼해서 나라는 아내가 있는 가정에 있는 게 불편하다는 것쯤은.
상견례 자리에서 세영이는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세진 씨의 말이 이어질 때면 잠시 나의 얼굴에 시선이 머무르다가, 대화가 끊기면 금세 내려앉는 검은 눈동자를 지켜보았다. 세영이에 대해서는 이미 세진 씨에게 들었다. 사이좋은 자매나 이모처럼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쉽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어색해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상심이 들었다.
상견례 내내 먼저 말을 붙여보려고도 했지만, 세영이에게 던진 물음은 항상 단답식으로 끝났다. 그러면 세진 씨가 거들어 다시 대화가 이어지고. 그런 한 방향의 대화만이 빙빙 돌았다.
잘 맞물리지 않았던 상견례 자리에서 나와서 세진 씨가 차를 가져오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에, 처음으로 세영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입술….
응?
예쁘세요.
희미한 목소리가 끝나자, 세영이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치맛단에서 꾸물거리는 손가락. 네일 하나 발라져 있지 않은 손을 보고, 나는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냈다.
가만히 있어봐.
네?
쉿.
그리고 세영이의 입술에 나와 같은 색의 입술을 덧그렸다.
자, 이제 같아졌지?
한순간에 둥글게 커진 눈을 바라보며 나는 웃었다. 고개를 들면 이렇게나 밝아 보이는걸. 방금 그려진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입술이, 굳게 일자로 다물렸던 선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까까지 무거웠던 가슴이 가벼워졌다. 그때만큼은 어색했던 공기도 금세 누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진 씨와 결혼하고, 길지 않은 신혼여행을 갔다 오고 난 뒤에, 나는 바로 세진 씨의 집으로 이사했다. 세진 씨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계속 비워뒀던 안방을 우리가 쓰고, 세영이는 원래 쓰던 방보다 좀 더 큰 세진 씨의 방으로 옮겼다. 한 사람분의 짐을 가져오고, 세 사람분의 짐을 옮겨와야 했다. 이미 살던 집을 쓰는 건데도 이사는 길었다.
세진 씨가 안방의 인테리어를 다시 하는 동안 나는 세영이의 방을 구경했다. 부드러운 난색의 벽지가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한켠에 소품이 장식되어 방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세심함이 느껴지는 방에 감탄하고 있으면, 세영이가 부끄러운 듯이 소품을 집어 상자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열심히 꾸몄는데 아깝다.
그래도 방이 넓어져서 좋아요.
세영이는 센스가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 어김없이 세영이는 손을 감추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살짝 웃고, 부드러운 빛을 퍼뜨리는 벽지를 더듬었다. 세진 씨, 아니면 살아계셨을 적의 부모님이 꾸며주셨을까. 어느 쪽이든 따뜻한 채도의 벽지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언니.
나지막한 부름에 천천히 손을 떼고 돌아보면 세영이가 손에 발레리나 조각상을 들고 있었다. 발레리나는 화려한 클래식 튀튀를 입고, 길게 팔다리를 뻗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발레리나가 발을 디디고 있는 우아한 세공품에서 세영이가 태엽을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쯤 감고 세영이가 손을 놓자 맑은 오르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르골이었구나.
꿈꾸는 듯한 멜로디가 조금씩 풀어지며 태엽은 천천히 돌아갔다. 수줍은 미소를 지은 세영이의 얼굴로, 창문을 넘어 밝은 양달이 들었다. 부드러운 음색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아래로 살짝 기울이고, 옅은 미소를 지은 세영이에게도 양달과 같은 기운이 퍼졌다. 나도 저절로 지어지는 웃음을 누르지 않고, 세영이의 작은 방에서 오르골이 연주하는 노래를 들었다.
천천히 돌아가던 태엽이 멈추고 다시 고요해진 방에서, 발레리나의 받침을 매만지던 세영이가 불쑥 그 조각상을 내게 내밀었다. 닿지 않는 하늘로 손을 뻗고, 다리를 우아하게 휜 발레리나가 뽀얀 색으로 빛났다.
이거….
혹시 나한테 주는 거야?
네, 언니한테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고맙지만, 세영이 네가 마음에 들어서 모은 거잖아. 나한테 줘도 돼?
나의 물음에 세영이가 움츠러들듯 살짝 내민 팔을 당겼다. 세영이의 손가락이 움직여 조각상을 쓸었다. 그러나 이내 꾸물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다시 손을 뻗어 내게 발레리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잠시 마주쳤던 눈동자는 전하고 싶은 말이 끝나자 다시 내려가 버렸다. 앞머리 아래로 세영이의 눈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완전히 숨지 않은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나는 손을 내밀어 조각상을 받았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그 대답에 세영이는 웃었던가.
짐 정리가 끝나고, 한바탕 대청소도 마치고, 깨끗해진 안방의 장식장 위에 나는 세영이가 준 발레리나 조각상을 올려놓았다. 그것이 세영이의 것임을 알아본 세진 씨가 말을 걸었다.
그거 세영이가 준 거야?
응, 나한테 주겠다고 해서.
세영이, 자기 수집품이면 엄청나게 애지중지하는데.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봐.
그러려나.
장식장 위에서 팔을 쭉 내뻗은 발레리나를 바라봤다. 문득 조각상을 들어 태엽을 감았다. 맑은 오르골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넘실거리는 음색 속에서 나를 향해 조각상을 내밀던 손과 곧게 바라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이 설득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세영이가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그날 밤에 세진 씨가 그렇게 말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난감해졌다. 우리에게서 독립하겠다고 말하는 세영이는 드물게 고집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고집을 부리지 않던 세영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지간한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 아직 함께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은 굳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는 잘 잡히지 않았다.
“내가 말한다고 세영이가 들어줄까.”
“그래도 얘기해 봐야지. 혼자 살면 이런저런 불편함도 있을 거고, 요즘 세상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걱정되는데.”
세진 씨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둑한 방에서 흐릿하게 세진 씨의 눈동자가 빛났다. 눈살을 찌푸린 표정에서 근심이 느껴졌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세진 씨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과 세영이는 통하는 게 있잖아. 당신이라면 잘 설득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세진 씨에게 붙잡힌 손을 움찔거렸다. 나와 세영이 사이에 통하는 것. 그런 것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세진 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듯이 잠드는 세진 씨를 옆에 두고, 나는 한숨을 삼켰다. 가슴이 술렁거려서 눈을 감아도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세진 씨, 만약에 세영이가 떠나려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어쩌지.
내가 이사 오고 몇 개월 뒤에 세영이와 함께 발레 공연을 보러 갔었다. 짧은 여름 교복을 입고 땀을 훔치며 가방을 내려놓는 세영이에게 내가 먼저 티켓을 내밀었다. 의아한 빛으로 물드는 세영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는 부러 웃었다.
세영이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안 될까?
검은 눈동자를 깜박 감았다 뜬 세영이가 조심스럽게 티켓을 받아서 들었다. 그 모습을 나는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매끄러운 종이 티켓을 만지작거리던 세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러 갈래요.
그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놀란 듯이 둥그렇게 커지는 세영이의 눈을 보고도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발레는 처음 보러 간다는 세영이에게 공연 설명이 담긴 팸플릿을 내밀었다. 세영이 옆에 나란히 앉아 팸플릿을 같이 들고, 그 안에 실린 공연 사진을 가리키며 이것저것 설명했었다.
기대된다. 그치?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보는 나에게 세영이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세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세영이를 보며 뿌듯함이 차올랐다.
높이 솟아 탁 트인 콘서트 홀의 천장에서 따스한 조명이 쏟아졌다. 티켓을 보여주고 앉은 자리에서 은은한 탈취제 냄새가 났다. 돌아본 세영이의 옆모습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살며시 손을 잡자 서둘러 따라온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가라앉았다. 언제나처럼 내리깐 세영이의 눈을 보고 약간 섭섭함을 느꼈지만, 그저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조명이 꺼졌다. 앞의 무대에 막이 오르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뒤부터는 우아한 안무와 아름다운 선율만이 홀을 채웠다.
발레 공연이 끝나고 다시 홀에 조명이 켜졌을 때, 나는 한동안 공연에 대한 여운에 잠겨 있었다. 천천히 좌석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이제 나갈까, 하고 세영이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면 세영이의 옆얼굴이 난감한 색을 띠고 있었다.
저, 언니, 손….
그 말에 손잡이를 내려다보자, 내 손이 세영이에게 겹쳐있었다. 뜻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며 손을 떼어내었다. 세영이는 손잡이에서 손을 들어 올려 다른 손으로 주물렀다. 내가 계속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 불쾌했던 걸까.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세영이와 함께 로비로 나갔다.
공연 재밌었어?
어색해진 공기를 얼버무리려 세영이에게 애써 밝게 말을 붙였다. 낮게 깔린 시선에 초조함을 느낄 무렵, 세영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세영이를 보고도 마지못해 긍정한 건 아닌지 멋쩍어졌다. 어깨에 멘 손가방의 끈을 매만지는 사이, 세영이가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홀을 돌아보았다. 아주 흥미가 없었던 건 아니구나. 그 모습에 겨우 안심했다.
왠지,
어딘가에 주의를 빼앗긴 목소리로 세영이가 운을 떼었다.
오로지 몸짓과 음악만으로 모든 걸 표현해내는 것이 대단해 보여요.
한숨처럼 말을 흘리는 세영이의 관자놀이에서 뺨으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런 세영이의 땀을 닦아주었다. 옆얼굴에 닿는 손수건으로 눈길을 돌린 세영이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각자 느끼는 건 달라도 결국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정서가 있어서일까?
땀을 닦아낸 손수건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접어 가방 속에 넣었다. 조용히 따라붙었던 세영이의 시선은 다시 아래, 어딘가쯤에 낮게 깔렸다. 그런 세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레에는 정해진 줄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개인의 몫이니까. 세영이는 세영이의 감정을 소중히 하면 돼.
공연장을 나와 돌아가는 길에 세영이는 계속 생각에 잠겨있었다. 조용히 차창 밖만을 내다보는 세영이를 가만히 두고 나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날로 세영이와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웠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휴일이라 느지막이 방에서 나온 세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갓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세영이의 긴 생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주며 말했다.
“언니랑 데이트하자. 어때?”
세영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긴장되는 마음에 점점 단념이 깃들 때쯤에 세영이는 입을 열었다.
“갈래요.”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세영이는 불만 없이 따라왔다. 하지만 궁금함도 없는지 차에 올라탄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영이가 관심 있어 할 만한 화제를 찾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오는 계절. 9월의 거리가 서서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기나긴 가로수 길을 지나 우리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적지 않은 사람이 호수 주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간간이 자전거가 지나가고, 우리는 느린 걸음을 떼어 산책길을 걸었다.
“어느새 단풍이 드나 보네.”
내 말에 세영이가 고개를 들어 가로수를 올려다보았다. 세영이는 찬찬히 나뭇잎을 바라보며 조금씩 내 옆을 따라 걸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세영이가 먼저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꽃이 지고 나뭇잎도 떨어지잖아요.”
찬찬히 나오는 세영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흩어져버릴 듯 야윈 목소리. 하지만 분명 가벼운 얘기는 아닐 거라서, 나는 무어라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세영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스쳤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사람의 감정도 피었다 지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
세영이가 걸음을 멈추고 높이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흘러넘쳐 등 언저리로 떨어졌다. 가을바람에 사각거리는 단풍. 그 속에 나도 가만히 멈춰서서 세영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지 않아서, 그래서 떠나기로 했어요.”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는 세영이와 눈을 마주쳤다. 잡히지 않았던 세영이의 사고가 이제서야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복잡해지는 감정에도 세영이는 솔직하게 표현했다.
“언니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나에게로, 세영이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세영이가 먼저 내 손을 잡은 건 처음 아니던가. 그런데도 솔직하게 좋아할 수 없는 나를 두고 세영이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항상 낮게 깔려있던 세영이의 눈이 지금은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잡힌 손을 움찔거리다가, 세영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영이는 손을 빼내고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세영이의 가슴에서 고동이 느껴졌다. 그 빠르고 일정한 리듬을 헤아리면서 나는 한동안 세영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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