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
제목과 등장인물 이름은 윤하 - 혜성에서 따왔습니다. 직장인 백합.
나는 오랫동안 그 빛을 잊고 있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수천 년을 넘어서 다시 찾아오는 별의 반짝임을.
처음에는 바짝 긴장해서 몇 번이고 되짚어보던 일도 3년쯤 지나면 화장실의 휴지를 풀듯 치워버리고 만다. 입사 면접 때 의욕을 넘어 구걸처럼 비치던 열정도 부풀었던 빈자리를 남기고 현무암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이제 나와 이 회사와의 유대감은 매월 정산되는 급여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거기에 유감은 없었다. 그것이 직장이니까.
그렇게 오늘도 가라앉은 기분으로 매상 차트를 처리할 때였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리는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 인사팀의 승우 씨가 들어왔다. 뉴페이스와 함께. 동시에 모니터 너머로 가늠하는 시선이 모였다. 다들 일손이 부족한 시기에 새로운 인원은 환영할 일이었다. 그 사람을 누가 데려가느냐가 문제일 뿐.
또각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승우 씨와 나란히 걸어오는 신입은 차가운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은색 치마 정장과 곧게 늘어뜨린 긴 생머리와 잘 어울리는 무표정이었다. 그것이 긴장에서 비롯되었는지, 혹은 원래 성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작은 수군거림이 따라붙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승우 씨는 내 옆으로 걸어왔다. 그의 방문처가 밝혀지자, 안도와 허탈함의 한숨이 교차했다. 그 소리를 뒤로 하고, 승우 씨는 옆에 똑바로 선 신입을 소개했다.
“하성 씨, 오늘부터 새로 들어온 서혜윤 씨예요.”
다행히 채워지는 자리는 내 옆자리였다. 따가운 시선에도 매끄러운 미소를 띤 승우 씨에게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신에게 감사해야겠네요. 이렇게 빨리 신입이 들어오다니.”
“신에게 감사하지 말고 인사팀에 감사해 주세요. 혜윤 씨, 이분은 이하성 씨예요. 하성 씨가 혜윤 씨를 가르쳐줄 거예요. 모르는 게 있으면 부담 없이 물어보세요.”
“서혜윤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신입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반듯한 직모가 찰랑거렸다. 굳은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미모를 가리기엔 부족했다. 먹으로 그린 듯이 아름다운 머릿결에 감탄하며 내가 손을 내밀었다.
“이하성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혜윤 씨는 접촉을 꺼리는 것처럼 살짝 내 손을 잡았다 놓았다. 아무래도 무표정은 차가운 성격 탓이라는 쪽이 정답인 듯했다. 섣부른 추측을 하며 나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끝내 웃음을 되돌려주지 않는 혜윤 씨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를 지켜보던 승우 씨가 말했다.
“혜윤 씨는 여기가 첫 직장이라고 하니까 하성 씨가 친절하게 가르쳐주세요. 혜윤 씨도 궁금한 점이나 혼자 안 되는 게 있으면 바로 물어보시고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문제를 공유하는 게 훨씬 빨리 해결되니까요. 그럼 열심히 하세요.”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뼉을 마주친 승우 씨가 팀으로 돌아가고, 남겨진 혜윤 씨는 꼿꼿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딱딱한 자세는 긴장 탓일까. 하지만 그보단 본래 성정에 각이 잡힌 사람처럼 느껴졌다. 곧은 가로수처럼 직립한 혜윤 씨를 향해 나는 그의 자리가 될 곳을 가리켰다.
“혜윤 씨는 앞으로 이 책상에 앉으면 되고, 일은 천천히 가르쳐줄 테니까 오늘은 패스워드 설정 같은 것들만 해봐요.”
“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내가 가리킨 자리로 간 혜윤 씨가 의자에 앉았다. 바르게 편 등이 평생 도수치료는 받지 않을 것만 같은 자세였다. 실제로 이렇게 앉는 사람이 있었다니. 만만치 않은 내공을 느끼며 나는 혜윤 씨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회사 서버에는 이렇게 접속하면 되고, 서버랑 메신저 계정 만드시고 저 불러주세요.”
한 번에 이것저것 가르치려고 하면 사람도 에러를 일으킨다는 것을 입사 동기의 탈주로 알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비록 혜윤 씨는 무엇이든 금세 해내 버릴 것 같이 보였더라도.
“이렇게 하면 되나요?”
“네. 잘하시네요. 다음에는 이 프린트 보고 따라 해주세요.”
혜윤 씨는 내가 알려준 지시 사항을 곧잘 따라왔다. 첫인상처럼 내가 준 과제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고, 아직 혜윤 씨를 판단하기에는 일렀다. 조급해하지 않고 오늘은 혜윤 씨에게 기본만 알려주는 것으로 끝냈다. 아직 첫날이니까 이 정도로 충분할 테다.
내 일을 처리하는 틈틈이 혜윤 씨를 체크하다, 문득 흘러간 시간을 확인하면 어느새 퇴근 시간 5분 전. 시계를 본 내가 혜윤 씨에게 말했다.
“오늘은 첫 출근이라 피곤했을 텐데, 일찍 들어가세요.”
날카로운 눈매로—노려보려는 게 아니라 천성적으로 보였다—나를 돌아본 혜윤 씨가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오늘부터라도 실전 업무를 배워보고 싶어요. 매뉴얼이 있으면 공부하겠습니다.”
나는 난감해졌다. 나는 입사 초기에도 내 사수가 일찍 들어가라고 하면 냉큼 집에 갔는데. 어떻게 이렇게 의욕적인 사람이 이런 누추한 곳에. 기특하긴 하지만, 페이스를 올리면 그만큼 지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해 온 나는 혜윤 씨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그만 퇴근하세요. 일은 내일부터 가르쳐줄게요.”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던 혜윤 씨는 내가 몇 번 더 설득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혜윤 씨를 배웅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한 잔업을 처리하며, 나는 드문드문 날 선 듯이 빠진 눈매와 구부러짐 하나 없는 머리칼을 생각했다. 이제부터 피곤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알 수 없는 기대도 반짝였다.
기대했던 대로 혜윤 씨는 빠르게 회사 생활에 적응했고, 동시에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신입답지 않은 능숙한 일 처리와 근면함은 금세 좋은 평판으로 돌아왔다. 직장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재란 혜윤 씨를 말하는 것이리라. 딱 한 가지만 빼고.
“자, 올 한 해 수고 많았고, 내년도 힘내자!”
맑은 잔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띠고 주위에 맞춰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몇 해가 지나도 회식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입사가 해를 넘기지 않은 혜윤 씨도 마찬가지인지, 내 옆에서 척추 모형처럼 앉은 모습을 보면 술자리가 아니라 다도회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더 있었다.
“혜윤 씨는 왜 항상 그렇게 딱딱한 얼굴이야?”
옆 팀의 김 대리가 대뜸 물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말을 고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고를 필요가 없는 걸지도. 내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끼어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혜윤 씨는 직선처럼 말을 꽂았다.
“일을 하는데 굳이 남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좀 웃고 다니면 좋잖아. 혜윤 씨는 얼굴이 예뻐서 웃으면 남자들도 좋아할걸? 그러다가 결혼 못 하면 어쩌려고.”
“자자, 김 대리님 취하셨나보다~! 요즘은 그런 말 하면 성희롱이에요.”
듣기 거북해지는 말에 내가 재빨리 끼어들었지만, 혜윤 씨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김 대리를 똑바로 쳐다봤다.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꼿꼿함이 느물거리는 김 대리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가 그 사이에서 식은땀을 흘릴 때, 혜윤 씨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남자한테 관심 없어요.”
당당한 선언에 김 대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무슨 헛소리가 나올까 내가 조마조마해하는데, 김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 웃었다.
“그런 소리 하다가 혼기 놓쳐서 후회하지 말고 잘 생각해. 주위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꼭 잡고.”
어디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왜 꼭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고, 그러기 위해서 아등바등해야 하나. 지겨운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많아서 지겨울 정도인 거겠지.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혜윤 씨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일 없으니까 신경 끄세요.”
영하의 얼음 같은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진 김 대리를 두고, 혜윤 씨는 자신의 물품을 차근차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는 혜윤 씨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도 허둥지둥 혜윤 씨를 따라 나갔다.
“혜윤 씨! 같이 가요!”
혜윤 씨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혜윤 씨를 뒤쫓았다. 메트로놈 같은 구두 소리를 남기는 혜윤 씨를 따라 겨우 그 보폭에 나를 맞췄다.
어둑한 밤 위를 덧칠하는 거리의 인공조명. 그 사이를 걷는 혜윤 씨에게선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음영이 도드라진 옆모습을 자꾸만 힐끔거리며, 나는 혜윤 씨 옆에서 걸었다. 술집이 늘어선 거리에는 사람의 말소리, 웃음소리, 차의 소음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혜윤 씨의 일자로 닫힌 입술을 보고 있으면 온 거리가 고요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넘치는 거리의 소음을 가르고 나아가는 흐트러짐 없는 걸음을 내가 엇박자로 따라간다. 선배는 나고, 혜윤 씨는 배우는 입장인데,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 당당함이 혜윤 씨에게는 있었다. 무엇도 깎아내릴 수 없을 듯한, 수묵화의 바위 같은 무게감이 혜윤 씨에게선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싫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바른 걸음걸이를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침침한 빛이 깔린 거리는 이제 더 넓은 도로로 이어졌다. 역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아쉬워질 때쯤, 갑자기 혜윤 씨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혜윤 씨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숨을 죽이고, 멈춰선 혜윤 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부연 가로등 빛 속에서 혜윤 씨의 입술이 열렸다.
“별이 보이지 않아요.”
“네?”
대뜸 말을 꺼낸 혜윤 씨를 나는 멀뚱히 쳐다보았다. 취한 걸까. 평소에는 하지 않는 별 이야기였다. 하지만 취했다기엔 멀끔한 얼굴로 혜윤 씨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나는 밤을 들여다보았다. 백탁이 낀 것 같은 밤하늘은 빈틈없이 희부연 검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단색의 흑색에 하얀 골은 없었다. 빛 한 점 뚫고 들어오지 않는 하늘을 보며 혜윤 씨가 말했다.
“원래 이 시간이면 별자리가 보여야 해요.”
보이지 않는 별을 그리는지 두 눈을 내리지 않는 혜윤 씨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간판과 가로등에서 쏟아지는 빛이 혜윤 씨의 얼굴에 밝고 어두운 우물을 만들었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숨도 하얗게 색을 입었다. 그 속에 우뚝 선 혜윤 씨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 혜윤 씨는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겨울에는 큰개자리, 작은개자리와 오리온자리가 보이죠. 하지만 도시는 너무 밝아서 겨울의 대삼각형조차 볼 수 없어요.”
나는 그런 혜윤 씨를 눈에 담았다. 늘 기계처럼 딱딱 일을 해결해 내는 혜윤 씨라서, 이렇게 별을 말하는 감성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에서 반짝이는 열정이, 오히려 혜윤 씨에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밤을 머금은 머리카락 사이로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서늘한 밤바람이 스쳤다. 혜윤 씨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 차가운 얼굴에도 조금은 쓸쓸함이 비치는 듯이 느껴져서, 혜윤 씨를 바라보는 시선에 문득 따뜻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솟아오른 감정을 꾹 눌러 담아 나는 혜윤 씨에게 말했다.
“그럼 보러 가요. 천문대에 가면 아직 볼 수 있잖아요.”
그 말에 고개를 내려 나를 쳐다보는 혜윤 씨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미 그러고 있어요.”
그리고는 혼자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혜윤 씨는 개찰구에 카드를 찍었다.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머쓱하게 식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잠깐이나마 남들이 모르는 혜윤 씨를 엿본 게 아닌가 하는 은밀한 기쁨은 어느새 날아가 버렸다. 혜윤 씨가 완전히 멀어져,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나서야 나는 걸음을 옮겼다.
별이라. 확실히 도시에서는 보기가 어려웠다. 삶에서 쏟아지는 노이즈 속에 찬란하게 타오르는 별은 가려지고 만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휴대폰 케이스에 매달린 별 장식이 흔들렸다. 어린 시절 누군가와 나누어 가졌던 증표. 눈부신 성흔을 남겼던 기억도 흘러가는 시간에 바래졌다. 이제는 관성이 되어 의식에조차 들지 못하고 한구석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혜윤 씨 덕에 오랜만에 떠올렸다. 나는 닳아버린 장식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기억의 바닥에서 길어 올려진 추억이 그리움을 풍겼다. 그 향수를 나는 오래도록 맡았다.
일이 벌어진 것은 아주 바빴던 어느 날이었다.
혜윤 씨는 이제 팀에서 독자적인 업무를 맡았고, 내가 따로 시간을 내서 혜윤 씨를 봐주진 않았다. 이미 혜윤 씨는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의 책임이 혜윤 씨에게도 오롯이 생겼다. 그걸 혜윤 씨가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었던 오후, 사건은 사색이 된 과장님과 김 대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제품 발주 담당 누구야?!"
과장님의 호통에 긴장이 섞인 시선이 오갔다. 곧바로 혜윤 씨가 자리에서 일어서 대답했다.
"접니다."
"너는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과장님이 소리를 지르며 종이를 혜윤 씨에게 내던졌다. 당황한 내가 과장님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 진정하세요. 설명을 해주셔야 수습이든 뭐든 하죠."
곧 김 대리가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서 유통하는 망원경의 제작 의뢰가 주문량보다 2배로 들어가서 재고가 남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되는 것이 혜윤 씨라는 것. 설명하는 도중에도 혜윤 씨를 힐끔거리며 이죽거리는 김 대리가 꼴불견이었지만, 심각한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할 거야?!"
붉으락푸르락하며 노성을 지르는 과장님 앞에서도 침착한 얼굴로 혜윤 씨가 답했다.
"제작 의뢰는 받았던 주문량 자료와 일치하지만, 그 과정 중에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제품은 도착했으니, 추가로 주문을 받아줄 거래처를 알아보겠습니다."
"알았으면 빨리 해결해!"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는 김 대리를 거느리고 과장님은 물러갔다. 혜윤 씨는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불러온 거래처 명단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곤란한 상황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 혜윤 씨를 향해 내가 말했다.
"저도 도울게요."
"아닙니다. 제 소관 업무니, 신경 쓰지 마세요."
"회사가 왜 회사겠어요. 서로 도우면서 해야죠. 저도 전에 맡았던 업무인걸요."
썩 내켜 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혼자 감당하려고 하다가 일을 키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지 혜윤 씨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대로 의지해주는 혜윤 씨를 향해 웃어 보였다. 거기에 혜윤 씨는 미적지근한 시선으로 답했지만, 내가 돕는 것을 더 말리진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던 하루가 이어지던 때, 외근을 나가려는 우리에게 김 대리가 말을 걸었다.
"애쓰네. 처음부터 일거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빈정거리는 김 대리를 혜윤 씨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나도 둘 사이를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김 대리에게 단호히 말했다.
"애초에 그 일거리, 김 대리가 만드신 거 아니에요?"
내 말에 김 대리가 씨익 웃었다. 부정하는 시늉도 안 하는 뻔뻔함이 절로 혀를 차게 만들었다. 능구렁이 같은 사람. 인상을 쓰고 쳐다보는 나에게 김 대리는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그래서 증거라도 있어?"
"있습니다."
여유 있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김 대리를 향해 혜윤 씨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회사 클라우드를 뒤져서 당신이 주문량을 조작했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그 기록은 윗분들께 전송했습니다. 곧 당신한테도 연락이 올 거예요."
혜윤 씨의 말이 떨어질수록 김 대리는 사색이 되어갔다. 변명을 꺼내려는지 입을 벌렸던 김 대리는 때마침 울려오는 핸드폰 벨 소리에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속이 다 시원해지는 모습을 보며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마음 좀 잘 쓰지. 치졸하게 무슨 짓인지."
"다 하성 씨 덕분이에요."
갑작스러운 혜윤 씨의 칭찬에 내가 혜윤 씨를 돌아보았다. 한치의 과장도 없다는 것처럼 진지한 혜윤 씨의 표정을 보니 갑자기 쑥스러워졌다. 부끄럼을 얼버무리려고, 나는 머리를 매만졌다.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샜다.
"아니죠. 저는 심증을 말한 것뿐이고, 밝혀내는 건 혜윤 씨가 다 했으니까."
"하지만 증거 찾기도 도와주셨잖아요."
"원래 다 돕고 사는 거라니까요. 이 얘기는 그만! 우리는 남은 일을 열심히 합시다."
괜히 낯간지러워지는 느낌에 내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아, 재빨리 뒤돌았을 땐 무표정의 혜윤 씨가 있었다. 이번엔 혜윤 씨의 웃음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아쉬웠지만 아직 이어지는 인연이 언젠가 그 미소를 볼 수 있게 해주리라고 믿기로 했다.
다행히 쌓였던 재고는 무사히 바닥을 드러내고, 김 대리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 위기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마지막 거래처인 천문대에서 야외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는 나에게 혜윤 씨가 사이다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늘 딱딱한 목소리에 약간은 부드러운 기색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나는 웃었다. 감사히 캔을 받아서 들며 내가 대답했다.
"혜윤 씨도 수고했어요."
수고했다는 말을 부정하진 않는지 혜윤 씨는 그저 내 옆에 앉았다. 혜윤 씨의 손에는 배즙 음료가 들려있었다. 혜윤 씨는 깔끔한 동작으로 캔을 따고 소리 없이 음료를 마셨다. 이럴 때마저 정갈한 느낌이 들어 나는 잠시 웃었다.
"하성 씨는,"
갑자기 운을 떼는 혜윤 씨를 바라봤다. 먼저 나를 보고 있던 혜윤 씨와 눈을 맞추고 경청했다.
"자주 웃으시네요."
그 말에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할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별것 아닌 이야기라도 혜윤 씨의 말이니까 귀 기울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혜윤 씨에게 말했다.
"혜윤 씨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봐요."
말을 꺼내고 나서야 다소 수작 부리는 것처럼 말이 나갔음을 느꼈다. 왠지 부끄럽다. 따끈해지는 뺨을 가리는 것처럼 내가 사이다를 쭉 들이켰다. 옆에서 가만히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당장 우주로 탈출하는 버튼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개를 숙이고, 내가 차가운 손으로 뺨을 식힐 때였다.
"그러면 저랑 같이 혜성 보러 가실래요?"
예상 못 했던 제안에 내가 퍼뜩 고개를 들어 혜윤 씨를 보았다. 혜윤 씨는 진지해 보였다. 내 쪽으로 내밀어진 손에는 티켓이 두 장. 별이 수놓아진 밤하늘의 티켓에는 혜성 관측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멍청히 바라만 보는 나의 손에 혜윤 씨가 한 장의 티켓을 쥐여주었다.
"바람맞히지 마세요."
진담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혜윤 씨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거짓말 같아서, 나는 티켓을 양손으로 들고 살피다가, 다시 혜윤 씨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바보 같았을까. 점점 인상을 쓰는 혜윤 씨를 보고, 나는 혹여나 빼앗기지 않게 티켓을 황급히 품속에 넣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내가 웃으며 말했다.
"둘이서 혜성 관측이라니, 꼭 데이트 같네요."
"데이트 맞아요."
당황을 숨기려 너스레를 떨었던 나는 되려 굳어버렸다. 혜윤 씨는 여전히 진지했다. 내가 도망칠 수 없게 혜윤 씨는 못을 박았다.
"데이트 신청하니까 거절하려면 지금 하세요."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뺨에 올랐던 홍조가 채 식기도 전에 열을 높여갔다. 티켓을 넣은 주머니 위를 더듬으며,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애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남자에 관심 없다고 했지, 여자에는 관심 있어요."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면 혜윤 씨가 서예처럼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티켓을 넣은 속주머니 아래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한 걸음 내디딘 혜윤 씨에게 다가가는 것만은.... 나는 숨을 깊게 삼키고, 또렷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도 혜윤 씨와 함께 가고 싶어요."
혜윤 씨의 단단한 표정이 천천히 허물어져 미소를 그렸다. 처음으로 본 미소는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그 앞에서 몇 번이고 지었던 미소를 또다시 띨 수밖에 없었다.
혜성 관측이 시작되는 저녁 전에 먼저 만난 우리는 먼저 전시관을 돌았다. 이전 회식 후 돌아가는 길에 보여주었던 혜윤 씨의 지식은 단편적인 것이 아니었는지, 혜윤 씨는 해설가 못지않게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성실하게 해석해 주는 혜윤 씨를 보고, 나는 어느새 궁금하지 않은 점까지 끌어내어 혜윤 씨에게 묻고 있었다.
"그럼 혜성이 돌아오는 이유는요?"
그렇게 묻는 순간, 혜윤 씨의 표정이 잠깐 누그러졌다. 그 단편은 금세 사라졌지만, 거기서 느껴진 그리움이 왠지 나의 마음에도 파장을 일으켰다. 숨죽이고 혜윤 씨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면, 섬세한 선을 그리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혜성도 태양계의 다른 천체와 마찬가지로 중력에 의해 궤도를 가지고 태양 주위를 도는 거예요. 우리 태양계에 있는 천체가 혜성을 끌어당겨서, 혜성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거죠."
듣고 보면 천문학을 구성하는 아주 간단한 원리였다. 하지만 존재함으로써 외계의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힘에서 나는 낭만을 느꼈다. 혜윤 씨도 같은 것을 느꼈을까. 잠깐이나마 혜윤 씨에게 감상이 비쳤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심히 손을 뻗어 혜윤 씨의 손을 잡았다. 내뻗은 손은 거절당하지 않고, 그대로 맞잡아졌다. 따뜻한 고동이 마주 닿은 피부로 느껴졌다. 그대로 손을 잡은 채로 혜윤 씨가 말했다.
"어렸을 때도 여기에 왔었어요. 지금처럼 혜성을 보러."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혜윤 씨가 시작할 이야기가 아주 익숙한 무언가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남은 한 손으로 주머니 속에 든 핸드폰 고리를 만졌다. 이제는 색이 바랜, 뾰족하게 빛나는 별 장식. 나의 동요에도 혜윤 씨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전시관에서 길을 잃어버렸었는데,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을 아이가 저를 도와주었어요.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기념으로 같은 열쇠고리를 나누어 가졌죠."
말을 마친 혜윤 씨가 주머니에서 별 장식 고리를 꺼냈다. 카드키와 연결된 장식은 나의 핸드폰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았다.
오랜 마라톤을 마친 것처럼 맥박이 가쁘게 뛰었다. 혜윤 씨와 이은 손을 놓지 않고, 나는 내 몫의 별 장식도 꺼냈다. 그것을 확인한 혜윤 씨가 빙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가 그리운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내 심장도 뜨거워져 감을 느꼈다. 내가 혜윤 씨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회사에서 볼 일은 많았어요. 하성 씨는 핸드폰 자주 꺼내두니까. 하지만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샀을 뿐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처음에는 말 안 할 생각이었어요."
혜윤 씨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내 반응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면 확신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하성 씨가 절 도와주었을 때, 꼭 여기에 같이 오자고 마음먹었어요. 아니어도 하성 씨가 절 도와준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하성 씨가 맞다고 하니까 이렇게 기쁜걸."
말을 마친 혜윤 씨는 이때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환하게 웃었다. 눈부신 미소였다. 그걸 보고 마주 웃지 않는 법 따윈 알지 못했다. 혜윤 씨가 힘을 주어 단단히 손을 잡는 걸, 나도 따라잡았다.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온기에 추위도 잊어버렸다.
그렇게, 다시는 놓지 않도록 나는 꼭 붙잡았다. 우리의 존재에 이끌려, 시간을 넘어 다시 돌아오는 혜성을.
- 카테고리
- #오리지널
- 페어
- #G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