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더

가족

커뮤로그 by 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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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재앙이 휩쓸고 갔던 곳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비어 있었는데, 노비코프 가는 떠나지 않고 지역을 지킨 몇 없는 가족 중 하나였다. 오십 년도 더 넘은 집안 곳곳에는 그들의 손길 하나하나가 묻어났고, 짙은 갈색의 소파도 그중 하나였다. 군데군데 천 조직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닳아 솜까지 다 삐져나온 다 낡은 소파였지만 가족 모두가 그 소파를 사랑했다. 리디야 노비코프는 팔다리도 스스로 가누지 못할 어릴 때부터 소파에 앉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들었고, 아주 조금 더 자라서는 소파를 잡고 처음으로 일어서거나 등받이를 타고 기어오르는 놀이를 개발하기도 했다. 걷고 말할 때쯤에는 얇은 동화책을 끼고 누워 낮잠을 자는 장소가 되기도 했는데, 거실을 오가며 매번 다시 담요를 덮어주고 이마를 쓸어주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주 작은 사람 한 명분의 무게가 더해진 리디야 쉐넌이 소파에 앉아있다. 다 내려앉은 솜 탓에 깊숙이 파묻히듯 앉아선 아야야, 하는 소리를 냈다. 겉으로 보기에도 완전히 부른 배는 이젠 똑바로 앉기도 어려워서 조금만 움직여도 자연스럽게 앓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납작한 배에 헤이즈의 손을 끌어다 놓으며 신기하지 않으냐고 물음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빨라서 어색할 지경이었다.

뭐든 처음일 어린 부부를 챙기는 것은 먼저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라, 노비코프 부부는 일찍이 필요한 물건을 챙겨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출산 휴가로 쉬고 있는 리디야와 외출 일자를 맞추어 헤이즈도 함께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헤이즈가 아닌 다른 대원으로 변경하기 어려운 출정이 생겨 일정을 미룰 수도 없이 리디야 혼자 오게 되었다. 긴 원피스와 둥근 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발끝을 까닥였다. 빈 옆자리를 괜히 손끝으로 꾹 누르고 있으니 임신 중에는 호르몬 어쩌구... 감정 기복이 저쩌구... 하는 말들이 떠올랐다. 삼 초도 안 되어 위층에서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지만.

"정말. 리디야, 이거 혼자 들고 갈 수 있겠니~?"

"아이참, 엄마는 내 디 아더가 뭐라고 생각해~"

마리나 노비코프가 큼직한 상자를 하나 안고서 거실로 들어섰다. 마리나는 딸의 말에 맞다, 맞다. 요즘 못 보니까 자꾸 잊어.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의 사이에 상자를 내려놓고선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상자를 열어 보이니 그 안이 틈 없이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리나는 상자 안에 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기 옷, 양말, 천 기저귀, 모자, 손수건, 젖병, 세정제, 세척 솔, ...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처음에는 집중해서 듣던 리디야의 얼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설명에 금세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 아기들은 세정제도 따로 써?! 그리고 손수건~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해...~?"

"손수건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아. 너 어렸을 땐 이것도 부족했어.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녀서는~"

"아~ 몰라, 몰라아. ... 그런데 나 들어도 까먹을 것 같아...~!"

장난스레 눈을 꾹 감으며 입술을 내밀자, 마리나는 못 이기겠다는 듯 그 코를 살짝 쥐었다 놓아주었다. 리디야 너, 이럴 거 뻔해서 헤이즈도 꼭 같이 오라고 한 건데. 사정을 알아도 괜히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은 엄마로서의 애정이고 잔소리다. 리디야는 그제서야 히 웃으며 눈을 떴다. 긴 설명이 끝났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이즈는 설명 안 해줘도 보면 다 알 걸. 요즘 맨날 책 보고 공부해."

금세 웃는 얼굴을 보며 마리나는 어휴, 하고 딸의 얼굴을 쓸어주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알았어. 배고프지? 아빠 오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식사 하자. 물건 대충 보지 말고 꼼꼼히 보고 있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주방으로 향하면서도 종알종알 이어지는 말들은 누가 봐도 모녀 사이다. 리디야는 알았어어. 하고 비슷하게 늘어지는 대답을 하며 상자 안을 뒤적였다. 이런 건 확실히 헤이즈가 챙기는 게 더 나았을지도. 임신은 헤이즈가 아니라 내가 했는데 벌써부터 온갖 육아 책들을 읽고 있기도 했고, 아이의 이름 하나를 짓기 위해서도 며칠을 자료실에 틀어박히기도 했고...

... 그리고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잘할게...]

리디야는 짧게 키득였다가 어쩐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손 끝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그만 옷이 걸렸다. 그러니까 이건 호르몬에 의한 감정 기복이고 원래 너무 좋으면 되려 울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거실 너머 주방에서부터 베이컨이 구워지는 냄새와 함께 스튜 끓는 소리가 친숙하게 들린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고 사랑을 하며 가족이 되고, 서로의 곁을 내어주고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 집 안에는 그런 종류의 따뜻함이 가득 차있다. 그 안에서 리디야 쉐넌은 둥근 배를 쓸어내리며 감싸듯 안았다. 가볍게 토닥이며 익숙한 애칭들을 나열한다. 산달이 가까워지고 난 후로는 헤이즈가 적어준 이름도 잊지 않고 꼭 챙겨서 불러주곤 했다.

귀염둥이, 초콜렛, 솜사탕, ... 페루나 쉐넌.

... 너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해 줄 아빠가 기다리고 있어.

작게 속삭여도 태동은 잠잠하다. ...나는 뱃속에서도 시끄러운 아기였다는데, 너는 조용한 것을 보니 얌전한 아이일지도.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닮은 걸까? 그 애가 어렸을 때는 꼭 너처럼 소심했거든. 근데 어른스럽진 않아도 괜찮아. 아기는 그래도 돼... 답이 없어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조용한 대화도 이젠 익숙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첫 울음소리를 생각하고, 덜 자란 손과 발을 떠올리고, 눈도 제대로 못 뜬 작은 얼굴을 상상한다. 그리고 내 곁에서 그 아이를 안고 있을 너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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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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