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더

九蓮宝燈

한 종류의 수패로만 완성하는 역.

커뮤로그 by 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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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부터 다섯째까지는 리디야가 너무 어렸기에 기억하지 못했고, 열한째까지는 이미 죽어 사라져서 세는 의미가 없었다. 열두째 오빠는 늘 삼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별로 친하지 않았고, 열셋째 언니는 어린 마음에도 자길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열넷째 오빠는 제법 친했으나 최근 들어 쭉 보질 못하다 갑자기 시신으로 돌아왔다. 짧은 장례에 엄마와 함께 자리하며 리디야는 물었다. 한창 왜? 가 많아지는 나이였기에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엄마의 무릎에 누워 내내 종알댔다. 집에 언제 가? 곧 갈거야. 왜? 여기 재미 없어. 장례식은 떠나보내는 자리라 재미가 없는 거야. 왜? 떠나보낼 때도 재밌으면 안 돼? 될 때도 있지만 오늘은 안 되는 날이어서 그래. 왜? ... 그러고도 다섯, 여섯, 일곱... 둥글고 짧은 손가락을 몇 개 꼽아보다가 리디야는 단 한 명을 찾는다.

"별이 오빠!"

리디야가 자신에게 안배된 노비코프의 아이들 중 가장 아꼈던 것은 열여섯째의 부현별이다.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리디야는 갖고 싶다는 생각을 스스로 할 수 있었을 때 부터 모든 것을 가졌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고 마른 몸으로 사람들 틈을 돌아다니며 멀끔한 얼굴로 물건을 훔치던 여덟 살의 부현별. 나들이를 나온 리디야와 가정교사의 뒤를 따르던 노비코프의 장정들도 깔끔하게 속여먹은 손재주와 말솜씨. 리디야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꽤나 비싼 것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봤던 것이 현별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훔친 리디야의 목걸이와 목숨을 같이 내놓든 아니면 얌전히 따라오든. 둘 중 하나를 고를 때에는 늘 더 나쁜 쪽을 고르던 부현별도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죽거나 죽지 않거나, 라는 질문에는 답이 정해져있지 않는가.

그래도 부현별은 그때 목걸이를 내놓고 함께 제 목을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둘은 같이 자라며 많은 것을 배웠다.

소매 밑에 필요한 패를 숨기는 법

드레스에 어울리는 구두를 고르는 법

사람의 목과 그 아래 한 뼘 길이를 재고 노리는 법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감사나 미안함을 표하는 법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법

활과 줄의 마찰로 높고 고운 소리를 내는 법

그리고

뼈가 부러지고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 법.

그래, 이런 날을 위해서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현별이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 거세게 뺨이 내리쳐졌다. 그 날은 리디야가 현별의 손을 잡고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며, 붙들려서 온갖 놀이를 함께 해주었어야 하는 날이었다. 그 과정에서 커다란 도자기 장식이 올려져 있던 장식장에 리디야가 부딪힌 것은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여린 장식품이 바닥에 떨어지며 깨지는 소리에 크게 울어버린 리디야를 찾아온 것이 양부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양부의 시선은 놀라 우는 아이를 한참 달래고 다른 이의 손에 들려 방으로 보내고 나서야 현별에게 닿았다.

늘 끼고 다니는 결혼반지의 양각이 어린 뺨을 거칠게 스치고 지났다. 붉게 부어오르는 뺨 위에 긴 선을 그리며 피가 묻어나왔다. 길거리의 소년들에겐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별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왼손으로 내리친 것은 나름의 배려일까? 웅웅 울리는 머리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듯 상황에 맞지 않는 한가한 생각이나 했고,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는 이어질 폭력을 예감하며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듯 양부는 포켓의 손수건을 꺼내 손을 한 번 닦았고,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발로 한 번 훑어 치우곤 그대로 걸어나갔다. 조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현별은 직감했다.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맞은 이유가 시키는 일을 그르쳐서도 아니고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도 아닌 그저 당신의 딸이 다쳤을지도 모를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도 한참을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비척이며 일어났다.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고 무심코 도자기 조각을 손 끝으로 건드렸다. 예리한 날이 손가락을 스치고 그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자꾸 생기기만 하는 상처에 도망치듯 홀로 남은 방에서 빠져나왔다.

"별아, 아빠한테 혼났어?"

낮에 울음을 다 그친 리디야가 늦은 밤 현별의 방 문을 열고 고개만 반쯤 빼꼼 내민 채 물었다. 오빠나 언니들이 아빠한테 혼날 때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별은 리디야가 가장 좋아하는 열여섯째 오빠니까.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답이 없는 모습에 주춤거리며 망설이더니, 이내 방 안으로 후다닥 들어온다.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온 탓에 엄마한테 걸릴까 싶어 문도 조심스럽게 닫았다.

"별아아~..."

리디야는 현별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휙 기울였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보곤 헉, 하고 짧게 놀랐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망설이다가, 성장이 느려 또래보다도 한참 작은 리디야의 손이 뻗어진다. 길게 핏자국이 말라붙은 뺨을 가만히 만져주다가 그 위에 쪽, 짧게 입을 맞추었다.

"오빠, 이제 안 아파?"

현별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아직 걷거나 뛸 때 몸을 잘 가누지 못해 여기저기 잘 부딪히고 넘어지던 여섯 살의 리디야는 늘 바닥에 주저앉아선 바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면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모를 양부는 매번 바로 다가와 품에 안아올려선 엄살을 부리고 내미는 부분에 잘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면 소리내어 울던 리디야도 간지럽다며 금세 웃고 마는 것이다.

겨울 밤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몰래 숨어들어간 심야의 영화관. 훔쳐 보았던 영화의 필름처럼 장면과 장면이 뚝뚝 끊어진 채 양부와 리디야를 보던 기억이 멈추지 않고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가차없이 얻어맞은 뺨은 여전히 화끈거렸고 부은 뺨은 며칠을 갈 것이며 긁힌 상처의 흉이 남지 않더라도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입맞춤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면 이토록 조그만 너는 세상이 얼마나 쉬울까. 마른 손이 리디야의 부드러운 뺨을 감쌌다. 이렇게 작아서는 때릴 곳도 없어 보이는데. 현실을 계속해서 자각시키듯 제 뺨의 고통은 여전히 몸을 울렸다.

현별이 제 얼굴 위에 표정을 한 겹 둘렀다. 뺨에 남은 통증과 열감 피와 상처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의 부드러움 가족 또 동생이라는 것... 재생을 멈출 수 없는 영상이 계속해서 돌아갔다. 현별은 떠오르는 수십개의 단어들을 말로 옮기려다 결국 포기했다. 풀 수 없는 방향으로 엉킨 필름을 풀지 않고 두었다. 이것은 애초에 말로 명확히 표현할 수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대충 한 단어로 뭉뚱그려 지칭하고 마는 거니까. 현별은 조금 웃었다가 또 잠깐 슬픈 표정을 했다가 입술을 뭉개며 다시 웃었다가 결국 짧게 답했다.

"... 그으래, 리디야야. 이제 안 아프다."

-

리디야가 열 일곱, 부현별이 스물이 되는 해에 둘은 처음으로 멀리 떨어졌다. 미국에 있는 기숙사제 예술고등학교에 부현별이 따라갈 수는 없었으니 동갑이었던 열 일곱째가 새롭게 리디야의 곁에 붙었다. 별아, 별이 오빠. 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리던 자리에는 다른 이름이 채워졌고, 새로운 나라며 학교에 간다는 생각에 들뜬 리디야가 더이상 부현별을 쫓아다니지 않으니 둘의 관계는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노비코프의 아이들 중 한 명이 현별에게 드디어 아가씨 유모 노릇이 끝났냐며 비꼬았다. 몇몇 이들의 키득이는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소리가 멎을 때 쯤에 느리게 고개를 기울인 현별이 헤에, 하고 뒤늦게 따라 웃었다. 왜 너도 내 젖 받아 마시고 싶어? 하긴, 그거라도 없으면 너 조만간 굶어 죽겠지? 하고 되묻는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먼저 긁어댄 쪽은 자신이지만 더한 모욕에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이가 받아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떴다. 현별은 여전히 키득이며 리디야가 같은 물음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에? 별이는 유모 아닌데? 오빠인데? 단순하게도 답하는 목소리나 얼굴을 쉽게도 떠올릴 수 있었다. 웃기를 멈춘 현별이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마지막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부를 진정 아버지로 여겼던 적이 없는 것처럼, 리디야 노비코프 또한 정말로 부현별의 동생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배신당하거나 혹은 죽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적절한 돈과 인맥을 가진 채로 혼자 남았다. 작은 아가씨를 십여년 간 상처 하나 없이 보살핀 값과 동시에 온갖 지저분한 일을 배우고 해낸 값 중 일부인 작은 아파트가 현별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충분히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길 수도 있었겠지만 위치와 건물은 현별이 직접 골랐다. 길에는 겨우 구색만 갖춰놓은 곳에서 질 나쁜 고기를 들여놓았고, 또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값싼 향신료를 들이부어 다 똑같은 냄새가 났다. 촘촘히 세워진 건물 사이사이 골목은 햇볕 한 줄 들기도 쉽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 길거리를 헤매며 보았던 얼굴들과 엇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어린애들이 그 틈마다 숨어 있었다. 돌고 돌아 적당한 만큼을 쥐고 처음으로 돌아왔으니 새로 시작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름 모를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이러한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내 허락도 없이 떠나!"

너는 그 자리에 있었어야지, 나를 기다렸어야지, 너는 내 거잖아! 리디야는 되는 대로 악을 썼다. 노비코프의 외동딸이 짜증을 내고 발을 구르면 불가능한 일이 없었으나 단 둘만 있는 지금은 푸른색 교복 자락이 무릎 위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현별은 식탁 의자에 앉아 컵을 쥔 채로 멈춰서 집 안으로 쳐들어온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리디야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방법이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리디야는 여전히 성난 얼굴로 현별을 노려보았다. 구두를 벗지 않고 그대로 들어온 탓에 발자국이 바닥에 이리저리 남았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훌쩍 자라는 키 때문에 짧아지는 값비싼 치마가 항상 같은 길이의 새 것으로 교체되는 것, 부현별이 키릴 문자로 적힌 이름과 성씨를 끝까지 갖지 않았던 것과 리디야 노비코프가 취미에도 맞지 않는 수억짜리 바이올린을 던져둔 채 칭얼대는 것,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들 수 있는 것들은 많았으나 현별은 자신이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없는 이유를 리디야가 언제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영 짐작이 안 갔다. 그래서 평소처럼 웃으며 늘 그렇듯 쓸데없는 말이나 했다. 헤... 못 본 사이에 아가씨가 다 됐네. 성격은 여전하고. 이죽이지 않고 웃는 법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괜히 제 뺨을 한 번 문질렀다.

"깜찍아~ 남의 집에 올 때는 신발은 벗고 들어와야지."

리디야는 혼자 한참 성을 내고 엉엉 울어버리더니 배가 고프다며 투정을 부리다 이젠 남의 침대까지 고스란히 차지했다. 침입자는 쇼파에서 자겠다는 집주인의 의사도 허락해주질 않아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억지로 눕게끔 했다. 리디야는 현별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키가 지금의 반절도 오지 않았던 어린 시절 잠들기 전의 모습과 꽤나 닮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 뼘 넘게 길어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둘 다 훌쩍 커버려선 작은 침대가 꽉 찼다.

"별아, 별이 오빠."

중국어나 러시아어에는 '별'에 완벽히 들어맞는 발음이 없었으므로 너덧살의 리디야가 부르는 부현별의 이름은 어쩐지 조금 달랐다. 고작 대여섯개의 단어로 애써 문장을 구사하던 어린애, 스스로도 무엇인지 모르는 추상적인 질문을 쉬지않고 던지던 꼬마, 몇 달이나 신을까 싶은 손바닥만한 구두를 신은 아가씨. 품에 묻혀있던 고개를 들고 어느새 많이 자란 얼굴이 현별을 올려다본다.

난 갖고 싶은 거 못 가진 적 없어.

그건 잘 알지.

부현별도 내 거야.

나는 못 가질텐데?

아니? 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건데?

하이고~ 리디야야, 언제 다 클래.

리디야는 밤새 자신의 유학생활에 대해서 떠들었다. 미국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참 떠들다가도 학생 식당의 식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바이올린이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아빠는 왜 나한테 일을 안 시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거나... 함께하지 않아 비어있던 시기를 대화로 다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현별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고 적절한 반응을 해주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

"일단 200, 칩 추가해."

뒤로 빼어주는 의자에 앉으며 한 쪽으로 다리를 꼬았다. 몸을 따라 흘러내린 긴 치맛자락 사이의 슬릿이 허벅지를 훤히 드러냈다. 리디야는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검지 끝으로 테이블을 두어번 두드리고는 카드를 받았다. 검고 빨간 그림들을 진지하게 훑어보는 척 한다. 현별이 앉아있는 쪽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귀걸이가 유리 샹들리에의 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일부러 바로 옆자리에 앉아놓고선 시선 한 번 안 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는 현별이 참지 않고 웃었다. 그래도 리디야에게 늘 한 번은 져 주었기에, 이번에도 한 번 먼저 굽혀주었다.

"노비코프가 웬일로 이런 작은 판까지 와~?"

"참 나, 내가 카드 하는 것도 오빠 허락 받아야 해?"

"너는~ 걱정을 해줘도 뭐라냐?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지~"

"무리이~? 무리는 오빠가 하는게 무리지? 내 배팅을 오빠가 따라와?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다이 해."

현별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리디야가 우다다 쏘아붙였다. 그 톡 튀어오르는 반응도 웃겨서 킬킬대던 현별이 익숙하게 제 앞에 놓여진 카드를 다시 내밀었다. 하이 롤러로 유명한 아가씨가 자리에 앉자 진행되던 게임도 멈추고 새로운 판이 시작됐다. 동시에 삼십 분 남짓밖에 서있지 않았던 딜러가 바로 교체되었다.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서 있던 딜러 대신 능숙한 딜러가 다시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더 안 걸어?"

붉은 네일이 칠해진 손 끝이 칩을 꾹 내리누르며 추가로 밀었다. 현별은 리디야가 그런 자세를 할 때에는 본인 패에 제법 자신이 있을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리디야의 입술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는 채로 내려가지 않았다. 현별도 다시 딜러를 보며 제 앞에 놓인 칩 더미를 앞으로 밀었다. 한 번은 져 준다면서 매번 한 번씩 다 져주는 꼴이 된다.

"헤에... 그렇게 나오면 걸어야지."

"헉, 진짜 어디서 크게 한 탕 했나보네."

"한 탕? 글쎄? 빈털터리가 되서 길거리에 나앉을 때 쯤 되면 귀여운 아가씨가 반지 하나 쯤은 선물로 주고 가지 않겠어?"

"... 악! 또 놀리고!"

결국 리디야의 주먹이 옆에 앉은 부현별의 팔에 내리꽂혔다. 100 더, 칩 추가. 콜, 핸드 줘. 나 하이 왔는데? 별아, 크라잉 콜? 그럴까? 콜드 콜. 아부현별완전짜증나진짜. 짧게 킬킬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고액의 칩이 아무렇게나 오가는데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얼굴의 두 사람이 멈추는 것 없이 콜과 레이즈를 오갔다. 아슬아슬 주고 받던 판도 어느새 끝을 향해 간다. 도중에 샴페인 한 잔을 받아마시고 빈 잔을 만지작대던 리디야가 먼저 물었다.

"오빠, 저녁에 뭐 해?"

"일 가야지~"

"나랑 밥 먹어."

현별은 부러 리디야의 말을 무시하며 느릿느릿 일어났다. 어차피 리디야가 그러기로 원했다면 그렇게 될 테니, 이정도는 가벼운 장난이었다. 얘들아, 칩 챙겨라~ 대충 벗어둔 자켓을 다시 걸치면 여기저기 구김이 있다. 휘적이며 손짓하고는 멀어지려는 것에 리디야가 벌떡 일어나 뒤를 따랐다. 부현별 바보! 리디야의 입에서 어렸을 때와 똑같은 외침이 나오며 구부정한 등 위로 또 주먹이 내려쳐진다. 이번엔 각진 알이 박힌 반지가 마른 등을 아프게 때린다. 어억, 과장된 소리를 내며 앞으로 휘청이는 것에 팔을 잡아당겨 마음대로 이끌었다. 이어지는 것은 자신과의 식사 약속을 위해 줄 선 남자가 몇인 줄이나 아냐며 별이는 영광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리 얘기를 해둔 듯 리디야를 위해 움직이던 검은 장정들 중 한 명만 둘의 뒤를 따라붙었다.

"어이구, 이제 너 만나려면 번호표라도 뽑아야 쓰겠다?"

"내가 오빠는 표 없이도 만나 준다잖아."

"그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양부께 딸 착하고 예쁘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도 전해드리고."

리디야가 한 대 더 때렸다. 억, 하는 소리가 또 뒤따랐다.

+)

붉은 드레스를 걸친 리디야가 흰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몸을 기울여 드레스 룸 중앙에 열을 맞춰 놓여진 장신구들을 살펴볼 때, 헤이즈는 리디야의 어깨선에서부터 늘어진 옷자락을 잡아 가볍게 당기며 몸에 딱 맞추었다. 골반 위쪽에서 달랑거리는 작은 지퍼를 잡아 천천히 올렸다. 헤이즈는 이전에 딱 붙는 드레스의 지퍼 끝만 잡고 올린 탓에 리디야의 등을 아프게 집었던 적이 있었다. 아야!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돌아보는 것에 곤란한 얼굴을 하는 헤이즈 쉐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폭 쉬던 리디야 노비코프. 바보! 먼저 두 손으로 옷을 잡아서 위치를 맞춰야지. 지퍼를 맞대고 나서 올리란 말야.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간단한 행동으로도 지시를 할 수 있게 된 어린 주인, 감각이 무딘 손 끝으로도 부드러운 몸을 상처내지 않고 만지는 것에 적응한 개. 리디야는 옷매무새를 다 만져주고 나서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 새 강아지에게 돌아서며 물었다.

"이거랑 이거 중에 뭐가 더 예뻐?"

헤이즈는 손에 들린 두 개의 목걸이가 아닌 리디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붉은 시선을 따라 손가락 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리디야의 입술 양 끝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리며 뺨이 동그랗게 올라갔다. 헤이즈, 보기랑 다르게 목걸이 보는 눈이 있어? 속이 뻔히 보이는 사람. 그래도 안전한 위치의 사람. 꺄르르 웃는 소리가 뒤를 이으며 리디야는 헤이즈가 고른 목걸이를 그대로 목에 걸었다. 선택받지 못한 목걸이를 유리장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곤 짧은 손짓 한 번에 가까이 다가온 헤이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튼튼한 유리장이 짧게 우는 소리를 내며 리디야의 무게를 지탱했다.

헤이즈의 입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일전에 입을 벌리게 해서 확인한 사실이라, 둘은 꼭 어린애마냥 입술 위만 가볍게 부볐다. 잘린 혀 때문에 키스를 못하는 것은 리디야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제 팔을 잡아 안은 손이나 허벅지 사이에 들어찬 단단한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다행인 일일까. 높은 힐이 허공에서 흔들리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늘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오빠를 만나러 갈 거야. 헤이즈도 알고 있는 사람일걸? 짧은 문장이 들뜬 숨과 섞여 흐른다.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더 해야 해... 분홍빛으로 칠해진 손톱 끝이 어깨 위를 파고들었다. 헤이즈는 명령대로 남은 시간을 가늠하다가, 끈적한 립스틱이 목덜미 위에 닿으며 문질러지는 것과 동시에 눈을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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