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BY rinnya
원문 :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4965592
소울마크는 상당히 미묘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 운명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운명과의 만남은 보장해 주지 않았다. 소울마크를 아무리 들여다 보더라도 운명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따위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다만 소울마크는 색채로 나타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색채 속에서 제 운명의 반짝이는 초록빛 눈동자나 물결치는 밀밭 같은 머리칼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는, 왼쪽 손목에 새겨진 새빨간 흔적을 보았다.
소울마크는 상당히 미묘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 운명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운명과의 만남은 보장해 주지 않았다. 소울마크를 아무리 들여다 보더라도 운명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따위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소울마크는 운명을 찾는 일에도,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일에도 실질적인 영향력이라고는 거의 없는 흔적, 단지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는 소울마크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사람들은 소울마크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바쳤고 피부를 영원히 물들인 이 색깔들이 법률이며 인생의 굴곡점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반쪽일 그 사람, 어쩌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고작 한 단어를 위해서 더 많은 인연들을 포기하고는 했다.
다중 우주 이론에서도 소울마크는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어느 우주에서는 소울마크가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은 정설이 된 지 오래였다. 색깔 대신 운명의 이름이나 첫 마디 같은 문자로, 또는 운명의 삶 일부분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기호로, 혹시 소리처럼 무형의 감각으로, 어쩌면 소울마크 따위 존재하지 않을지도....
다만 이 우주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소울마크가 나타났다. 물감 적신 붓이 왼쪽 손목을 한 차례 긋고 지나간 듯한 색채로. 검붉은 핏빛일 수도 있고 연하디 연한 푸른색일 수도 있었지만, 색의 스펙트럼 사이 어느 부분이 칠해진 것이든 결국 운명의 색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색채 속에서 제 운명의 반짝이는 초록빛 눈동자나 물결치는 밀밭 같은 머리칼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꼭 운명의 신체 일부분의 색이란 법은 없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누군가는 벽안으로 태어난 사람만을 염두에 두어도 되겠지. 머리카락을 보라색으로 염색한 사람 중에 운명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운명이 회색 셔츠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운명을 찾는 사람들을 더 힘겹게 하는 것은, 분명 어딘가에는 영혼의 반쪽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그 사람임을 확인할 도리는 전혀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색깔을 갖고 있더라도, 설령 완벽하게 맞는 상대라고 느끼더라도, 이렇게 사랑하는 연인이 운명의 그 사람이 아닐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와 같은 소년은, 손목을 물들인 자그마한 붓 자국이 운명의 징표가 되는 이 세상을 더욱 힘겹게 살아가야만 했다. 그는 색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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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이야."
버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아파트의 철제 비상계단에 나란히 앉아 놀고는 하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짙어도 아주 선명한 빨강이네. 예쁜걸."
소년은 그렇게 말해 주었었다.
"네 운명은 분명 굉장히 멋진 사람일 거야. 어쩌면 이건 그 사람의 드레스나 립스틱 색깔인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않겠어?"
그러면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멋진 색이라고 치자.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내 것도 멋있어, 정말이야. 연한 파란색이지만 조금은 초록이 섞여 있지."
버키는 그렇게 말하며 스티브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했었다.
"딱 네 눈동자 색이다, 스티비."
그러면 스티브는 이렇게 응수했던 것이다.
"재미없어, 너. 내가 네 운명일 리가 있겠냐. 방금 네 입으로 내 색이 빨강이라고 했잖아."
"아아, 그랬었나."
그렇게 말하는 버키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어쩐지 듣기에 서글퍼서, 그제서야 스티브는 말하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겨 보고는 했었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한 버키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 따위는 곧바로 흩어져 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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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바라보는 페기의 눈빛은 언제나 그렇게 부드러웠다. 그리 날카로운 말들을 쏘아붙이는 동안에도, 그에게만은 언제나 그렇게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한 올이라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이 늘 완벽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페기 카터라는 사람은 생기 넘치는 갈색으로 아름다웠다. 스티브는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운명이라면 필시 발랄하고 우아한 갈색을 손목에 갖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스카인의 기계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온 순간 시야에 들어찬 것은, 고동색 머리칼이 아니라, 다갈색 눈동자가 아니라. 그녀의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 사이 분홍빛 혀끝.
"페기."
스티브는 숨을 들이마시고, 처음부터 손목에 칠해져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눈에 담을 수는 없었던 그 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총성이 울리기 직전 그렇게 스티브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였다.
군 조직이라도 운명을 금기시하지는 않았다. 필립스는 그들을 짐짓 노려보다가 자신의 손목을 툭툭 쳐 보이는 것으로 경고를 전달했을 뿐이었다. 그곳은 이런저런 사소한 사항들을 살필 겨를이 없는 전장이었다. 모든 사람의 손목이 제각기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어 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제 짝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많은 인원이 밀집해 있는. 사람들은 전선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운명을 찾아내고는 했다. 동시에 서로를 겨누고 발포한 직후 눈이 마주치며 운명임을 깨닫고 만 어느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이야기가 나돈 적도 있었다.
스티브는 이제 운명을 노래한 시와 소네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인이 묘사한 꼭 그대로 그의 영혼이, 온몸이 소리쳐 말하고 있었다. 그녀라고. 바로 이 사람이라고. 자신의 왼손목을 그의 금발과 대어 보고는 이렇게나 똑같다며 까르르 웃는 페기의 웃음 소리가 종달새가 지저귀는 듯, 교회의 종이 울리는 듯 낭랑하게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페기는 그 붉은 자국을 스티브의 목에 또 가슴에 또 온몸에 남겨 주었다.
그러면 스티브는 온몸으로 그 붉음을 맛보았다.
빨갛고 붉은 그 색이 스티브의 혀를 희롱했고 페기의 손끝을 타고 그의 심장을 물들였고, 페기의 치마를 걷어올리다 똑같은 색의 속옷을 보아 버린 그의 얼굴에도 번졌다.
"이 색으로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페기가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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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노에서, 버키의 피는 그렇게 짙고 아주 선명한 적색으로 얼굴에서 팔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버키! 나야, 스티브!"
스티브는 혼곤히 늘어진 버키를 흔들며 소리쳤다. 제 얼굴을 올려다보는 버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을 때는 안도 섞인 한숨이 나왔다. 반 죽어가는 상태로도 그 애가 제 말을 재치 있게 받아쳤을 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버키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붉은색은 벌써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스티브는 입을 열었고. 그저 닫아 버렸다.
"나, 찾았어."
그리고 스티브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부대로 복귀하는 길, 스티브는 낙오자들을 챙기러 가지 않고 버키는 전우들 사이에 있지 않은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누구지?"
버키는 그렇게만 물었다. 달빛을 받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 이제 색맹 아니야."
스티브는 숨 가쁘게 털어놓았다.
"페기라는 사람이야. 마가렛 카터 요원. 그녀가 쓰는 립스틱이 이 빨강이고, 내 머리카락 색도 그녀의 손목에 있어."
"잘됐네, 친구."
버키는 그렇게만 말했다. 억지로 쾌활한 척하는 목소리였다. 스티브는 그 기저에 깔린 슬픔을 감지했지만 버키가 그에게 기대더니 눈을 감아 버려서,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건 아마 피곤 때문에, 이 전쟁 때문에, 그간의 고문 때문에, 맴도는 죽음 때문에, 그런 것들 때문일 테니까. 버키의 손목을 물들인 운명의 색이 스티브 자신은 거울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눈동자 색과 닮아 있다는 그런 이유 때문만은 절대로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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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각도 추락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 시야를 새빨갛게 물들였던 선혈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때였다.
어째서 전에는 제 손목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어째서 그의 운명이 페기일 거라고, 버키일 거라고,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전쟁이 아닐까. 스티브의 운명은.
이제 그는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언젠가 거리에서 넘어져 까진 손바닥에서도 걷어차여 구르다 아스팔트에 긁힌 이마에서도 이런 색의 피가 났던 거겠지.... 어쩌면 그렇게 매사를 부딪혀 가며, 싸우려고 태어나 싸우다 죽을 것처럼 살았는지.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바로 운명의 본질이다 싶었다. 운명이란 게 그렇다. 삶을 함께 겪고 또 바치고 그 끝까지 같이 가야만 운명이다.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 피가 아니면 이런 붉음은 없다. 싸움, 싸움 뿐이다.
버키가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찾게 되기를 바랐다. 페기가 가을 햇살 같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리고 스티브는 핏물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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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하게 꾸며진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손목의 붉은색은 유일하게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한복판으로 뛰쳐나갔을 때, 그 붉음은 자동차의 후미등으로 어지러운 네온사인으로 상가의 간판으로 머리에 쏠리는 혈액으로 변했다.
운명으로 인해 인생이 바뀔 거라고 그렇게 말들을 했었지.
인생이 바뀌길 바랐던 게 아니었다. 팔을 타고 손끝으로 흐르는 선혈에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이게 맞다. 익숙한 건 이 색이다. 하얀 타일 위에 툭툭 떨어지는 핏방울을 내려다보던 스티브는, 어느새 달려온 간호원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입술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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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금속 슈트가 그렇게 붉었다.
"캡틴."
스타크가 왼손을 슥 들어 인사했다. 그 손목의 발그스름한 노란색에서 스티브는 어렵지 않게 페퍼 포츠의 금발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목도 스티브의 손목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는 많이 다르네."
저도 모르게 스티브는 그렇게 말했다.
"아?"
토니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뭐,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까지 칭찬을."
그 목소리가 꽤 따뜻해서, 다정해서, 눈만 감으면 하워드가 말했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워드 스타크의 손목은 갈색이었고 마리아의 손목은 하워드의 머리카락처럼 검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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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각도 비행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이 가는 대로, 양손에 창과 권총을 쥐고 외계인의 등을 넘나드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우아하고 날렵한 동작과 흐트러지고 말리고 풀려가는 저 붉은 머리카락.
스티브는 그녀가 바닥을 나뒹굴기 직전에 그녀를 받아냈다.
나타샤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손목에 깨끗한 하늘색이 선명했다.
비명과 잔해와 폭음 한가운데서 스티브는 자신이 전장에 있다고, 지금은 외계의 군대와 싸우는 중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나타샤가 성큼성큼 다가와 스티브의 왼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장갑을 벗겨 그의 붉음에 입 맞추고, 씩 웃었다.
"아까 저쪽에서 블랙 위도우랑 뭐 했어?"
저녁을 먹자며 그들을 박살 난 식당으로 끌고 온 토니가 조소했다.
"캡, 나 진짜 캡틴이 그럴 줄은 몰랐다. 직장 동료랑 자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짓 아니었냐고, 역사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 없었는데."
그를 노려본 나타샤가 보란 듯이 왼손목을 들어 올려 스티브의 눈 옆에 가져다댔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가에 흐트러져 있었다. 토니가 입을 딱 벌렸고, 스티브도 왼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아하...."
클린트가 나직히 말했다. 어쩐지, 조금은 버키가 떠오르는 목소리였다.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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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타샤는 쉴드 요원이었고 스티브는 시간의 미아였다. 나타샤는 나타샤의 일로 바빴고, 그는 그의 시간을 찾느라 바빴다.
나타샤를 다시 만난 것은 그 빨간 곱슬머리가 더 차분해지고 곧게 펴지고 색은 더 옅어졌을 때였다. 그러나 입술에 발린 립스틱이 그렇게 강렬했고, 나타샤는 언젠가 페기가 하던 것처럼 그의 손목에 입 맞춰 붉음을 더해 주었다. 이렇게 겹쳐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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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포인트가 눈동자에 팍 찍히고. 곧 총상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날아가는 방패에서는 유난히 붉은색이 눈에 튀고, 방패를 붙잡은 윈터 솔져의 왼팔을 따라 시선을 올려보면 어깨에서 붉은 별이 반짝 빛나고.
입을 맞춰 오는 나타샤의 입술도 그렇게 붉은 빛이었다. 한시가 급하지만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알지만 두 사람은 주유소의 화장실에서 온몸으로 서로의 색을 맛보았다. 나타샤의 입술로 스티브의 목에서부터 배꼽에까지 붉은 선이 길게 그려지고, 스티브의 눈동자는 그를 받아들이는 나타샤를 창백한 별빛과 달빛과 새벽 하늘빛으로 흠뻑 적시고.
그때 그 숲길에서는 버키의 얼굴에서 팔에서 배어 나오는 피가 그렇게 짙고 선명하게, 그렇게 붉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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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의 윙슈트가, 날개가 그렇게 붉었다. 왼손목은 진한 검정이었다.
"아니 뭐, 운명이란 게 꼭 애인은 아닐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샘은 어깨를 으쓱이며 왼손목을 들어 보였다.
"저랑 평생 갈 친구들이 있거든요. 하나는 머리가 검은색이고, 하나는 눈이 검은색이고, 하나는 팔을 진짜 웃기게 생긴 타투로 덮어놨는데 그게 검은색이고."
"페기에게도 이런 빨강색이 있었지요. 토니에게도, 나타샤에게도. 그리고 이제는 샘 당신에게도."
"운명이란 게 그런 거겠죠. 어디 있는지도 모를 사람 하나 찾으면서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는, 지금 곁에 있어 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워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들이 영혼의 반쪽 같은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없어도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약 반쪽인 애인을 찾았다고 해도요. 친구들은 늘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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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임무 직전에는 그 붉음이 그렇게 그리웠고, 그래서 다시 맛봤고, 그러자 다시 그리웠다.
"어떻게 해도 죽을 확률이 더 높겠네."
그녀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근데 다 알 테니까, 뭐."
그런데 윈터 솔져의 어깨에서, 총알에 관통당한 복부에서, 수면으로 추락하는 시야에서 자꾸만 그 색이 보였다.
나타샤는 강둑에서 그에게 인공호흡을 했다. 폐 안으로 뜨거운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샘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버키. 버키, 벅-"
나타샤의 입술과 눈가가 젖어 있었다. 스티브는 숨을 몰아쉬며 기억 속 색채들을 더듬더듬 찾아갔다. 페기의 입술과 버키의 전청색 눈동자와 윈터 솔져의 왼팔에 그려진 붉은 오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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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음에 휘감겨 스티브는 무릎 꿇었다.
눈 뒤편에 그 붉음이 아른거리고, 적포도주가 하얀 셔츠를 적시고, 샴페인 코르크가 날아가고, 홀 한가운데 서서 손을 내미는 페기의 미소는 붉게, 붉게만.
그때 완다의 섬세한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오던 마력도 그렇게 붉었다.
그리고 그 붉음은 피에트로의 가슴에 피어난 수십 개의 총상으로 검붉게 만개했고 완다의 찢어지는 절규를 새빨갛게 물들였고, 그들이 구하지 못 한 수백 명의 소코비아인들의 마지막까지 벌겋게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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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붉음은 아마도 오래 전에 페기의 입술을 떠났다. 그런데 페기의 관을 덮은 유니언 잭이 그렇게 붉었다.
멍하니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곧 그의 손목에 새겨진 붉은색이 휘날리는 성조기를 그려냈다.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혀에 씁쓸한 맛이 감겼다. 그래, 그런 거겠지. 애초에 조국을 위해 살고 죽을 운명이었던 거다. 붉은 피를 흘리고, 붉은 국기에 덮이고.
세상이 공정하게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이 색깔은 차츰 흐려지다 아주 희미해져 버리겠지. 물감처럼 씻어낼 수도 있겠지. 어느새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소울마크는 그렇게는 작동하지 않았다.
소울마크는 운명이 죽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왼손목에 도드라지게 남아 언젠가 운명이 같은 하늘 아래 존재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뿐이었다. 그러면 남겨진 사람은 살결이 썩어 문드러질 그 순간까지 누군가 이 색채로 자신의 삶을 물들였음을 기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실은 소울마크는 사라질 수 있는지도 모르지. 정말 진짜 운명을 찾아내는 순간이 온다면. 이건 그저 아직도 영혼의 반쪽을 만나지 못 한 사람에게, 그런 속 편한 환상 따위 앞으로도 영영 만나지 못 할 사람에게 가해지는 채찍질인지도 모르지.
하나의 소울마크가 반드시 하나의 운명만을 가리키고 있으리라는 법도 없다. 샘이 털어놓은 생각처럼, 친구나 가족이나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에 영향을 미칠 사람들의 색채일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소울마크가 하필 색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유는 설명이 된다. 사람이 변하면 그 사람의 색깔도 변하기 마련이니까. 더 차분하거나 밝은 색의 셔츠를 찾고, 머리를 염색해 보기도 하고, 컬러 렌즈를 끼기도 하고. 페기가 빨강색 립스틱을 내려놓는 순간 스티브의 손목에 새겨진 빨강은 의미 일부를 잃는 셈이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색이 없으므로.
샤론이 신고 나타난 하이힐도 그런 빨강이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가 또각또각 울린다. 하지만 스티브는 영혼의 반쪽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운명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긴 소매 아래 감추고 있는 색깔 또한 궁금하지 않았다.
무슨 색이든 그저 색깔일 뿐이었다. 스펙트럼 가운데 어느 한 부분.
하지만 그 붉음은 버키의 왼팔에 별을 그려 넣었고 버키의 얼굴과 목을 타고 흘렀고, 토니의 울분으로 터져나왔고, 그리고, 스티브가 떨궈 버린 방패 위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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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붉음은 이제 나타샤의 머리카락과 입술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버키의 왼팔에서도.
그러면 그들 사이에 운명은 없다. 냉정한 감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티브의 탓은 아니다. 너무 오래 살아 버린 탓이다.
샘은 빨간 윙슈트를 훔쳐다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저 스티브의 삶을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인 사람이었다. 윈터 솔져도 그저 하이드라가 데려온 용병, 그 정도였다. 스티브가 죽여서라도 멈춰 세워야 하는. 그러나 그의 왼팔에는 붉은 별이 선명했고 피가 흐르는 그의 얼굴은 버키 반즈의 것이었다.
샤론은 한때 페기가 즐겨 바르던 립스틱만큼이나 빨간 하이힐을 신고 나타나 훔친 차 앞에서 스티브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샤론은 검은 플랫슈즈를 신고 있었고, 스티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 색의 의미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어떤 사람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드러날 무언가. 그런 신호. 마치 도심의 일부가 되어 버린 군중처럼, 삶의 배경에 가까웠던 이들이 강렬한 색채를 덧쓰고 나타나 주요 인물로 격상될 때가 왔다는 그런 직감.
나타샤는 그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 버키는 그를 끌어안았지만, 하지만 버키에게는 오른팔뿐이었다. 언젠가 시원한 하늘처럼, 스티브의 눈동자처럼 연푸른색으로 물들어 있던 손목이 이젠 없다. 스티브의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던 별도 이제는 사라졌다. 이제는 끝났다.
하지만 페기도 언젠가부터는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겠지. 샤론도 언젠가부터는 빨간 하이힐을 신지 않겠지. 언젠가는 나타샤가 염색을 그만두고, 토니는 짜증이 폭발하기 전에 진정하고, 샘은 민간인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윙슈트를 입을 일이 없겠지.
아마 스티브는 또 누군가를 떠나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이런 색깔놀음은 별 의미가 없는 것도 같았다. 나타샤와 샘이 그와 절교할 일은 없을 것도 같았고, 그거면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충만할 것도 같았고, 페기와 샤론이 그 붉음을 잃어 버릴 것도 같았다. 그리고 스티브는 다시는 그들을 찾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스티브는 버키를 그 어느 때보다도 힘주어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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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소울마크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사람들은 소울마크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바쳤고 피부를 영원히 물들인 이 색깔들이 법률이며 인생의 굴곡점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반쪽일 그 사람, 어쩌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고작 한 단어를 위해서 더 많은 인연들을 포기하고는 했다. 스티브로서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소울마크란 건 색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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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 붉음은 타노스의 건틀렛에 박혀 번쩍였고, 완다가 손짓하고 주먹을 쥐고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세상에 저항하는 순간마다 일렁였고, 인공 피부가 되어 비전의 신체를 덮었고, 혈액이 되어 머리에서 손으로 또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버키가 샘이 트찰라가 비전이 살아 있던 자리에는 그런 붉음이 남지 않았고, 토르의 망토와 나타샤의 머리칼과 브루스의 셔츠와 완다가 흘린 눈물도 그런 붉음은 아니었고.
빨강은 상처에서 배어 나오기 시작한 선혈의 색. 와칸다의 아름다운 황혼이 뿌리는 색. 격전이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 내려다보면 베이고 짓밟힌 풀잎들이 흠뻑 머금고 있는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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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에 스티브는 색맹이었다. 그 시절이 그립다,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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