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카자

#후루카자_전력_180분 <상처>

얻어먹은 입장에서 예의상 한 모금 마셨을 뿐,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다. 카자미는 애꿎은 창밖만 노려봤다. 아이스 커피는 긴 침묵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후루야는 커피를 들고 온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엉덩이가 따끔할 정도로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상대는 흔한 안부도 서로 건네지 않는 어색한 동석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화가 울린 것은 점심시간으로 카자미는 전철역 밑 지하도에 있었다. 그곳엔 오래된 노포가 즐비했는데 외근을 나오면 종종 들러 끼니를 해결했다. 서서 먹는 라멘집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카레 가게가 나왔다. 낯선 도시를 알아갈 마음이 없는 그는 혀가 적당히 아린 매운 카레를 파는 가게를 찾았을 때 오랜만에 기뻐했다. 가게는 에어컨을 놓을 자리가 없어 낡은 선풍기가 열을 식혔다. 카자미는 땀을 흘리며 입안에 통각을 부지런히 날랐다. 밥알이 행위에 부서지는 동안 의미 없이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 주요 기사를 훑었다. 우연히 눈에 띈 것은 오키노 요코의 복귀와 콘서트 발표였다. 천연 아이돌의 부활이란 화려한 타이틀과 환한 웃음이 가득한 사진을 감흥 없이 내렸다. 아직 풀지 못한 짐에 오키노 요코 콘서트 DVD를 떠올렸다. 주말에 중고샵에 팔아볼까, 생각했을 때였다. 화면이 전환되며 <발신자 표시제한>이 시야를 가렸다. 카자미는 직감적으로 발신인을 떠올렸다. 전철이 지하도를 지나는 것보다 짙은 진동이 손아귀를 흔들었다. 적당히 울리고 말거라 생각했지만, 상대는 집요하고 끈질겼다. 굳이 수신거부를 누르지 않은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좁은 테이블에 스마트폰을 올려뒀다.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건 자신의 그릇 한 켠에 자리한 백색 락교 때문이었다. 무의식에 남은 습관은 아직까지 생활을 지배했다.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

선전포고와 같은 문자에 한숨을 쉬었다. 나가지 않으면 저쪽은 밀고 들어올 것이다. 온건하게 나올 때 얌전히 잡혀줘야 함을 한번 겪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제 와서.

5년 전, 신흥 종교 집단이 계획한 테러는 나라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수많은 사상자를 남겼고 종교 집단에 잠입해 있던 카자미는 테러를 막지 못한 죄로 죄수복을 입었다. 국가는 카자미에게 테러에 굴복한 변절자란 수식을 내리며 책임을 물었다. 10년 형을 받은 카자미가 모범수로 채택되어 나온 것은 3년 하고 2개월이 흐른 뒤였다. 파헤치지 않아도 뻔한 얘기였다. 이 해방을 기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지켜온 자긍심은 산산이 부서졌고 죄의 파편은 가슴에 꽂힌 채였다. 평생을 몸 바쳤던 나라가 자신을 버리는 순간 마음이 아팠던가. 이름으로 분명 납득하지 못한 결과에 분노하고 소리쳤던 것 같지만, 어느덧 홀로 감당한 시간은 흉터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후루야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카자미는 그를 기다렸다. 병원에서도, 재판장에서도, 구치소에서도. 카자미가 굳게 기다린 이는 끝끝내 투명한 가림막 앞에 앉지 않았다. 경찰이 아닌 자신이 쓸모가 없음을 증명했다. 출소 후 찾아온 이는 익히 아는 공안이었다. 카자미보다 경찰 몇 기수 아래인 그는 사무적인 얼굴로 <히다 단로쿠>라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목숨을 바친 삶이 국가에 위협될 수 있다는 이유로 끝내 버려졌다. 카자미 유우야가 남긴 것은 망가진 몸뚱이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끝내 굽어버린 새끼손가락이었다.

"할 말 없으시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복귀해.”

"이제 와서 상한 장기짝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명령이야.”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위치도 아닙니다만. 애초에 가능하기나 합니까?”

“불가능하지. 하지만, 히다 단로쿠라면 내 직속 정보원이 될 수 있는 거 알잖아?”

“모르겠는데요.”

후루야는 긴 망설임을 지나온 것치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날붙이 같은 목소리를 뱉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수 접기로 했는지 눈썹을 누그러트린 채 시선을 피했다.

“…받아들일 줄 알았어.”

곤란한 표시로 이마를 매만지기까지 하며. 카자미 유우야였다면 어쩔 줄 몰라했겠지만, 여기는 도쿄가 아니며 하물며 상대는 카자미도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대답마저 후루야가 짜놓은 연극처럼 느껴졌다.

“왜요?”

“내가 카자미를 버린 것을,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으니까.”

이해. 카자미는 모래알 같은 단어를 따라 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해했다. 수년간 후루야 레이의 오른팔로 지내며 그와 위법 작업을 수없이 하며 카자미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잘 알기에.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 처박혀있으면서 수백 번 곱씹었다. 왜 자신이어야 했는가. 곱씹을수록 책임을 물을 희생자가 된 이유를 잔인할 만큼 납득했다.

“눈물이라도 흘려보시지 그랬어요.“

“내가 울면 돌아올거야?”

“아뇨.”

“이제 네게 선택지가 없는 건 잘 알잖아.”

“그렇게 하세요.”

카자미가 굽히지 않자 후루야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 고집스러운 얼굴을 좋아했는데 이제 오키노 요코만큼이나 무색으로 느껴졌다. 영업사원이 된 후로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이 돋았다. 메마른 침을 삼키자 오히려 목구멍이 뻣뻣해졌다. 눈앞에 커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잠시 들었지만, 컵에 한없이 맺힌 물기를 손바닥에 적시고 싶지 않았다. 채우지 못한 욕구에 짜증이 돋아 무의식적으로 팔뚝을 벅벅 긁었다. 푸른 시선이 분산됐다.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카자미는 팔을 꽉 잡아 행위를 멈췄다.

“몸은 괜찮아?”

“세 번이나 수술했으니까요. 흉터가 커서 한 여름에도 긴팔을 입어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요. 물건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데 제가 쓸모있겠습니까.”

부서진 것은 자신의 몸이건만 눈동자 안에 긁힌 수많은 자국을 읽어냈다. 홀로 지내며 당신도 힘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 끝에 마주한 순간에, 정작 찰나에 드러난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굶주린 배에 한계가 다가오자 카자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무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카자미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작정 걸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 한낮과도 같았다. 한참을 걷자 어느덧 셔츠가 땀에 한껏 젖었다. 셔츠에 살갗이 달라붙어 간지러웠다. 카자미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긁었다. 그때 <히다 단로쿠> 신분증을 내민 사람이 후루야였다면 이 고집도 달라졌을까. 후루야가 끼워줬던 반지를 언젠가 돌려받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이미 지나온 길만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흘렀기에 의미 없는 생각을 흘려 보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는 끝내 새살이 돋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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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1


  • 움직이는 카피바라

    ㅠㅠ상처를 입은건 카자미인데 제가슴이 찢어지는것같은 아픔은 뭘까요 근데 그래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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