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처형물 조각 (1)

"나는 슈만이 보여준 몽환과, 쇼팽이 보여주었던 환상, 그리고 자네가 보여준 꿈을 부러워했어.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 그래서 내게 이런 능력이 있는지도 몰라. 자네의 엘리야를 처음 봤을 때도 나는 감탄했어. 꼭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불태운 뒤 남은 것들의 광경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더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아름다운 능력이 왜 이런 끔찍한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펠릭스 멘델스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멘델스존은 목에 맺힌 땀을 훔치고 이불을 걷어냈다. 임시 침상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바그너가 성을 불태우기 얼마 전부터 비밀리에 임시 거주지를 마련해 놓았기에 진보파가 원하는 것에 비해 불편은 크지 않았다. 일어나 대야의 물로 얼굴을 훔치다가 가만 대야를 바라보자 긁힌 자국이 채 낫지 않은 제 얼굴이 비쳤다. 리스트가 낸 상처는 그리 깊지 못했다. 그와 정면승부를 벌였음에도 대부분의 상처가 참을 만했다. 바그너가 본인의 검을 찔러넣어 치명상을 입고 죽을 뻔 했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길어야 한 달이면 다 나을 상처뿐이었다. 리스트의 유언을 생각해 보면 그가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음은 명백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표면에 파동이 일었다.

멘델스존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리스트까지 처리했으니 남은 것은 성을 재건하는 일과 잔당을 처리하는 일뿐이었다. 이제 가장 힘겨운 싸움들은 다 끝난 셈이었다. 수뇌부를 잃은 진보파 잔당 처리는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아마 그 작업은 브람스와 제 누이에게 맡겨 놓아도 될 정도일 것이다. 잠시 앉아 붕대를 갈고 옷을 챙겨입은 뒤 멘델스존은 바깥으로 나선다.

파니와 브람스는 정신없이 사람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둘 앞에 줄을 서 배급을 받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볍지만도 무겁지만도 않은 마음으로 멘델스존은 브람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쉬세요, 브람스 군. 나머지는 내가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사령관님. 어제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으셨는데 쉬셔야죠."

"그래, 펠릭스 너는 쉬어야지. 괜찮아, 우리가 할게."

멘델스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침식사는 했습니까?"

"네, 일찍 했습니다. 고문관님께서도 든든히 챙겨드셨습니다."

브람스가 대답했다. 멘델스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에 팔을 끼워 넣는다. 옥수수죽이 바닥을 드러내고 배식이 끝나자 브람스가 솥을 어깨에 메고 말한다.

"오늘 아침 보고 드리겠습니다. 리스트는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사령관님. 성벽 해체 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고 목조 건물들을 우선적으로 복구 중입니다. 군에서도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투입해 재건에 힘쓰고 있습니다. 슈만 장교님께서는 외곽에서 아직 잔당을 처리 중이신 듯한데, 별도의 연락은 없었습니다."

"클라라가? 연락을 빼먹는 법이 없는데. 긴장이 풀렸나 보군요."

멘델스존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바위에 걸터앉는다.

"그나저나 브람스 군."

"예, 사령관님."

"나는 배급 안 줍니까?"

"아! 죄송합니다."

브람스는 그릇을 가지고 와 옥수수죽을 멘델스존에게 퍼담아준다. 멘델스존은 나무숟가락으로 가만 죽을 씹어넘기며 생각에 잠긴다.성이 재건되면 할 일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타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해야 했고, 당장 겨울 동안 먹을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며, 포로들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 포로들.

멘델스존은 숟가락질을 멈춘다. 많이 먹어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죽이 목에 걸린 듯 넘어가지 않았다.

"바그너 이후 포로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설마 감옥에 아직도 구금되어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고문관님께서 통솔해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도주 시도도 있었으나 문제 없이 총 인원 180명으로 잘 도착했고 밤낮으로 보초를 서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포로들끼리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모범수들에게 통솔을 맡겨 관리하고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이고 그릇의 바닥을 싹싹 비운다. 모범수라. 그 사람이 모범수였던가. 멘델스존은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진보파의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지. 비록 중간에 진보파를 배신하고 제 발로 걸어들어와 포로가 됐지만.

"알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브람스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난다. 멘델스존은 빈 그릇을 땅에 내려놓고 턱을 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당장 가서 이능력으로 복구를 도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엘리야를 몇 차례씩 쓴 여파였는지 약간 어지러웠다. 당분간 이능력을 쓸 일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의 부담이 덜했다.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자 파니가 다가온다.

"괜찮아? 몸은 좀 어때?"

"보이는 것보다 괜찮습니다. 리스트..."

'리스트에게는 전의가 없어 보였다' 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을 삼킨다. 굳이 파니에게 그런 말을 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전까지는 파니가 고문관이었으니 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이야기했지만 이제 전쟁이 대체로 종료된 마당에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더군요."

"그렇니? 하긴,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긴 했지."

파니는 목에 걸린 로켓을 연다. 매형과 조카의 얼굴이 들어 있는 로켓은 파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었다. 멘델스존은 미소를 짓는다.

"돌아갈 생각 하니까 좋아요?"

"좋지. 애초에 네가 빌헬름이랑 제바스티안 생각해서 나를 후방에 놔뒀던 것도 알아.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할 때도 있었지만 난 홀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파니가 로켓을 닫고 다시 멘델스존 쪽으로 돌아앉는다.

"오래는 못 쉴 거야. 우리 군을 총동원하고 있는데도 인력이 충분치 않아. 포로들을 동원할까도 생각중이야. 사실 포로들 좀 배식 안 해 줘도 될 것 같은데 너는 너무 물러서 다 배부르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단 말이지."

멘델스존은 작게 웃으며 손깍지를 낀다. 멘델스존의 머리 속 바그너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굳이 진실을 알 생각도 없었다. 아마 소중한 밀밭을 다 태워 버린 걸 보면 크게 진실과 다르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바그너를 제외한 모두에게는 한 번쯤은 더 기회를 줄 생각이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우리 정훈장교님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너무 잔인했나?"

멘델스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아직 지어야 하는 집이 끝도 없어. 원래처럼 튼튼한 집은 못 지어주더라도 비바람 막아줄 벽은 만들어 줘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괜찮았으려나 모르겠네, 네 '엘리야' 가 좀 파괴적이어야지."

뼈가 있는 말이었다. 멘델스존은 아프게 웃으며 뺨에 손을 가져다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어차피 바그너가 시작한 화재였는걸요."

"그래, 뼈대도 안 남을 정도로 태운 건 네가 한 일이지만."

파니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제 3중대랑 함께 복구작업 하고 저녁에 돌아올게. 그동안 드보르작 소위와 함께 여기 사람들이랑 포로들 좀 잘 지키고 있어 줘. 네가 지금 부상당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부상이어도 드보르작 소령보다는 네가 강하겠지."

멘델스존은 눈을 살짝 굴린다. 아직도 어질어질하고 조금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달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때 로베르트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드보르작 소위는 어린아이들에게 감자를 구워주다가 멘델스존을 보고 일어나 경례를 한다.

"소위 드보르작, 멘델스존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앉으세요. 어렵게 대할 것 없습니다."

멘델스존은 쪼그리고 아이들과 드보르작 소위 사이에 앉는다.

"사흘 정도 내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고문관님께서 능숙하게 분란을 처리하셨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멘델스존은 감자 한 알을 입에 집어넣는다.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임시 사령부로 찾아오세요."

"예!"

드보르작은 씩씩하게 답하고 다시 경례한다. 멘델스존은 경례를 받아주고 포로 수용 막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닭장같은 수용소에 있으면서 얼마나 불만이 도지지 않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원래는 체조도 시키고 노동도 시켜야 했으나 대부분의 인력이 성 재건에 투입된 상황에서 그런 여유를 부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이백 명이 조금 안 되는 포로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누워 있었다. 게을러터진 것들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부상당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정말 맨주먹으로 죽도록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멘델스존의 눈이 흐릿한 청회색 눈과 마주친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라고 물으려고 했다가 이 사람이 투항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낸다. 평범한 회색 옷을 입고 다른 수감자들과 누워 있는 그를 구분하는 것은 저 벌건 머리카락 하나뿐이었다. 다른 포로들은 자고 있었고 베를리오즈만이 눈을 뜬 채였다. 멘델스존의 인기척을 느낀 건지 포로 몇 사람이 뒤척이고 베를리오즈는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그에게 리스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르쳐 줘야 할까? 어차피 가르쳐 주거나 말거나 상관없겠지만. 멘델스존은 자신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베를리오즈의 시선을 느끼고 손을 까딱까딱 해 자신을 따라나오라는 뜻을 전한다.

보초병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와 함께 통나무에 나란히 앉는다. 베를리오즈는 수갑으로 묶인 양쪽 손을 꼼지락거린다.

"죽었지?"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는 말투에 멘델스존은 고개를 홱 돌린다.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거 아니면 뭐 날 불러낼 일도 없을 테고."

베를리오즈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시 제 손바닥을 바라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리스트의 시신은 지금쯤 어디 있을까? 그 자리에 버려두면 또 그것대로 진보파의 분노를 자극하고 결집을 유발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상관없으니 처리하라고 했으니 멘델스존도 모른다. 어디 강에 던져버렸을까. 아니면 어디에 깊숙이 묻어버렸을까. 태웠을까. 어찌 됐건 리스트의 영혼도 육신도 이제 이 세상에는 없다.

어깨동무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던 다섯 가운데 남은 것은 이제 멘델스존과 베를리오즈 뿐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베를리오즈도 이 세상에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상황이 이대로 흘러간다면 말이다. 베를리오즈는 수갑으로 묶여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두 팔을 다 들고 눈가를 꾹꾹 누른다. 빨개진 눈시울이 말을 대신했다. 전우이자 친구이자 동료였던 리스트를 잃은 슬픔에 이상하게도 공감이 갔다. 진보파의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든 무신경해지자 생각하고 있었지만 베를리오즈의 눈물만은 어딘가 가슴이 시큰해 오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슈만을 잃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겠지. 멘델스존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킨다.

"자세히 듣고 싶습니까?"

베를리오즈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그너가 죽은 것까지는 당신도 알 겁니다. 그 과정에서 리스트는 이미 중상을 입었습니다. 내가 예기치 못한 부수적 피해였지만 오히려 다행이었죠. 리스트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니까요."

"사실만 전달해 줬으면 좋겠는데."

멘델스존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몇 합을 주고받고 리스트는 포기한 듯했습니다. 내 공격을 막지도 않더군요."

"그리고?"

"...내 손에 죽었습니다."

멘델스존은 리스트가 자신에게 작은 '엘리야' 를 보여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 하늘을 가로지르는 황홀한 유성우가 내뿜던 빛을 본 이야기는, 그 꼬리에 대고 소원을 빌 뻔했던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리스트가 자신이 진보파 민간인들의 터전을 파괴한 것은 '아름답지 않았다' 고 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멘델스존이 말한 것 사이 모든 공백을 채운 것 같았다.

"무고한 민간인들의 터전일 밭이나 공방이나 공장이나 다 태웠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는군,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베를리오즈가 이야기한다. 수갑을 찬 채로 제대로 정리할 수 없으니 머리카락이 부슬부슬했다. 멘델스존은 잠시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넘겨주고 싶다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베를리오즈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었지만 필요했다. 진보파에게 부역할 시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멘델스존은 눈을 감고 얼굴에 힘을 줘 베를리오즈의 말이 잘 들리지 않게 하려 한다.

베를리오즈는 이해했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멘델스존은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눈에 밟히던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빼빼 마르고, 키가 크지도 않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아내는 아마도 그보다 동쪽, 슬라브 민족 출신으로 보였다. 그 부부의 주변 사람들은 불타고 있는 그들의 가죽공방을 걱정했지만 부부는 그곳에 아들의 무덤이 있다고 절규할 뿐이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의 무덤에 세운 비석이 다 타지도 않았을 것이다. 돌이니까. 멘델스존은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멘델스존은 고개를 끄덕인다. 베를리오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린다. 포로 막사로 돌아가는 그의 울음소리는 깊은 곳에서 공명하는 종소리 같았다.

리스트가 낸 팔과 옆구리의 상처가 쓰렸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