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프란츠 카페에

Special Episode. [따뜻한 체리 핫초코 한 잔]

진짜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올리려고 했는데...

[오늘 가게 쉽니다]

프란츠 카페의 조명은 켜진 채였다. 가게 안에는 직원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뭐라뭐라 쑥덕이고 있었지만 유리문에는 '오늘 가게 쉽니다' 가 붙었다. 하이든은 심각하게 깍지를 끼고 아이디어만 무성했다가 전부 검은 연필로 좍좍 줄이 그어진 종이를 바라본다. 갑자기 시베리아의 공기와 함께 확 닥쳐온 한파를 맞고 온몸이 쑤셔오자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온 몸으로 느껴진 게 며칠 전이었다. 어제 하이든과 리스트는 모차르트의 차를 얻어타고 그 유명한 잘츠부르크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왔다. '여기 로컬이었어서 잘 안다' 면서 별 쓰잘데기 없는 전통 과자와 인형만 추천해주는 모차르트를 뒤로 하고, 하이든과 리스트는 눈에 보이는 종이별과 스노글로브, 대림초와 대림환, 가랜드, 조명, 선물상자와 포장지, 인형, 패브릭, 리본, 냅킨, 태슬, 리스, 카펫, 냅킨, 트리, 화분, 도자기, 호두까기 인형, 식탁보, 나무조각품, 초, 장식용 양말, 컵을 다 쓸어담았다. 뒤에 돈이 얼마나 나올지는 거의생각도 안 하고 쓸어담은 수준이었다. 이런 축제만 있으면 눈이 돌아가서 현관부터 욕실까지 벽지를 새로 도배하는 정도로 열정적인 모차르트조차 '파파 이건 좀... 텅장 되겠는데요...' 라고 할 정도로 샀으니 말 다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차르트의 차 트렁크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살리에리까지 불러야 할 정도였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한테 차를 빌려오기라도 할 걸 그랬다고 탄식했고 하이든은 접촉사고가 한 번 난 뒤로 운전대 가까이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조그만 간을 원망했다.

모차르트는 거의 2미터 가까이가 되는 트리와 앞서 언급된 다양한 장식들을 가게 내부로 옮겨준 뒤 마흔을 목전에 둔 사람으로서 체력 완전 방전됐어-라며 나중에 필요하면 불러도 좋지만 한 사흘간은 집에 뻗어만 있을 것 같다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었다. 노동력은 셋으로도 충분할 거라면서. 그리고 노동력은 사실 충분했다. 문제는 어제 하루 카페를 영업하는 내내 카페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어떻게 낼 건지 장식할 아이디어를 내 보라고 했으나, 단 한 사람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 리스트는 뭔가 수를 내긴 했는데 '뾰족한' 수는 아니었다. 하이든이나 슈베르트나 둘 다 딱 초등교사와 중등교사가 종이 오려서 만든 눈송이를 창문에 붙여 놓는 정도 미감의 소유자였지만 리스트가 시킨 대로 대충 장식들을 놓자마자 '이건 진짜 아니다' 라는 확신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나마 가장 트렌디하고 젊은 감성의 소유자니까 어떻게든 멀쩡하게 꾸며주겠지라는 믿음은 완전히 근거 없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창문 밖에서 내부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창문에 스티커를 빼곡하게 붙이자는 리스트의 말을 듣고 '미, 미쳤어?!' 라며 리스트에게 삿대질을 하고 그러면 평소에 그렇게 멀쩡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했다.

"아 그거. 엄마랑 베를리오즈 형이 코디해주는 대로 입고 다니는데요."

하이든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찰싹 때렸다. 중학생들도 안할 짓을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리스트의 미감을 보건대 '나도 이제 다 컸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라고 해놓고서는 빨간 양말 위에 은색 샌들을 신고 초록색 나팔바지에 진한 원색 빨강 티셔츠를 배바지처럼 넣어입고 파스텔톤 하늘색의 조끼를 걸쳐입고 다니는 모양새를 보다 못한 베를리오즈와 아담의 아내가 '너 지금 딱 이 세트대로만 입어 절대 다르게 입지 말고 벗어나려고 시도도 하지 말고 그냥 자아를 죽여' 라고 조언해준 모양이었다. 결국 가게를 꾸미겠다고 아예 하루를 통째로 뺐음에도 불구하고 진척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사온 카펫을 바닥에 깔겠다 정도가 끝이었다. 하이든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쉰다.

"아는 미대생 없니?"

"신학과 학생에게 그런 걸 물어보셔도..."

리스트는 입술을 쭉 내밀고 한숨을 쉰다.

"우리 프란츠는 이런 거 좀 도와줄 만한 친구 없니?"

"다들 연말연시라고 지금이 커미션 마감 기간이래요."

하이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이면 중학교 동료 교사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기말고사 시험 출제 기간이고 생활기록부 입력 기간이라서 이런 한가한 카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정말 이 미감을 어떡하면 좋지."

하이든은 한숨을 푹 내뱉는다. 리스트보다 미감이 죽어서 면접을 오렌지색 넥타이 매고 보러 갔다는 프로코피예프에게 도움을 구해도 소용이 없을 테고, 슈트라우스 부자 가운데서는 누구를 골라잡아도 어차피 디스코볼이 반짝이는 노래방 조명 모양으로 꾸며놓을 테고, 결국 모차르트에게 싹싹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 연로하신 스승님이 조금이라도 불쌍하지 않느냐 비는 수밖에 없었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때 풍경종이 딸랑이는 소리에 셋은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오늘 영업 안 합니다!"

"어서오세요!"

하이든과 리스트는 서로를 바라본다. 아니 얘, 문짝에다가 오늘 쉰다고 붙여놓았는데 거기서 '어서오세요' 라고 인사를 해 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고. 그 순간 하이든의 눈에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것 같은 작은 여자아이가 들어온다. 하얀색 바탕에 오색 사탕이 가득 그려진 패딩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는 마찬가지로 스키장갑까지 끼고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험한 중학생만 보다가 이런 천사같은 미취학 아동을 보니까 마음이 녹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이든의 '오늘은 장식만 한다' 라는 결심은 '꼬마숙녀를 실망시키는 건 전직 교사가 할 짓이 아니다' 로 변해 버렸다.

"영업 끝났어요?"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물었다. 이런 평일에 아이 유치원 등하교를 시켜주는 게 아버지 쪽이라니, 지금쯤이면 보통 근무시간일 텐데. 아이를 정말 아끼는 모양이군. 하이든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면서 딸과 아버지를 편안한 쿠션이 있는 의자 쪽으로 안내한다.

"아뇨, 아뇨. 음료 한두잔 정도는 괜찮습니다."

카페 꾸미기보다는 음료 꾸미기에 훨씬 흥미를 가진 슈베르트는 벌써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서서 눈을 반짝였다. 저기 슈베르트야, 보통 아이들은 커피를 마시면 안 돼요. 내가 중학생 애들도 웬만하면 커피 마시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음료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버지 쪽은 몸을 낮추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슈슈는 뭐 먹고 싶어? 스무디 먹을래?"

'슈슈' 라 불린 아이는 눈을 메뉴판에서 떼지도 않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호불호가 명확한 아이인 것 같았다.

"싫어. 차가워."

"그럼 유자차?"

"오늘은 유자차 먹을 기분 아니야. 아빠도 무슨 마음인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저 핫초코 주세요."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똑똑한 아이구만. 유치원에 다니는 나잇대임에도 불구하고 퍽 발음이 정확했다. '오늘은 유자차 먹을 기분 아니야' 라는 말로 기분이 상했을 법도 한데 딸바보 아버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이든은 아버지 쪽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은 어떤 음료로 하시겠어요?"

"전 괜찮습니다."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한다. 딸을 보다가 하이든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변화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일어났다. 이만하면 자연의 신비라 이름붙여도 될 듯했다. 1인 1음료가 의무는 아니었으니 음료를 시킬 필요는 없었지만, 음료를 시키지 않는 데 이유가 있을지 궁금해하며 하이든은 소리친다.

"프란츠야, 핫초코 한 잔!"

"네!"

슈베르트가 답한다. 하이든은 다시 테이블에 쌓인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 상자로 고개를 돌린다. 이 산만한 박스에 쌓인 장식들을 어쩌면 좋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 슈베르트는 빠르게 핫초코 만들기에 착수한다. 핫초코는 핫초코지만 사실 가격이 핫초코치고 저렴한 편은 아니다. 코코아 파우더에 우유 넣으면 끝인데, 왜 이렇게 가격이 비싸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이든의 '아무리 내가 돈이 좋다지만 어디 가게에서 코코아 가루 스틱 하나 사 온 뒤에 그거 대충 머그에 붓고 우유에 넣는 게 무슨 손님 대접이냐,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수업시간 사이 짬짬이 먹는 음료랑 다를 게 뭐냐'는 감상으로 인해 초반에는 파우더도 좀 쓰던 프란츠 카페는 티백과 믹스커피 등 패스트드링크랄까, 그런 건 지양하는 편이었다.

특히나 크리스마스에 시즌 메뉴로 파는 핫초코라면 더욱이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하이든이 누누이 말했던 만큼, 이번 핫초코도 신경을 써야 했다. 대학가에 있어 초등-미취학 아동을 거의 볼 수 없는 프란츠 카페의 특성상 꼬마숙녀님께는 뭐라도 더해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슈베르트의 옆에서 핫초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던 리스트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뭐라도 좀 더 드리고 싶지 않아요?"

슈베르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머그잔에 가나슈를 붓는다. 아마 칼로리 폭탄, 달아서 이가 썩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메뉴는 전에 와서 기말 공부를 하던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가 시험해 준 리스트의 (하지만 슈베르트의 조언으로 약간의 수정이 들어간) 레시피였다. 초코 홀릭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딱 맞는다, 너무 좋다, 초콜릿 어디 거냐 하고 물었었다. 초콜릿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의 단맛이었지만 핫초코를 시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초콜릿을 어느 정도 이상 좋아할 테니까.

"그거 어때? 전에 우리 몰래 먹겠다고 그 우유곽들 뒤에다가 웨하스 한 통 숨겨놓았잖아. 그거 이거랑 맛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 너무 좋다! 딸기웨하스였던가요? 아니 바닐라였나? 바로 갖고올게요."

리스트는 창고 쪽으로 사라졌고, 이번에 슈베르트는 설탕에 절인 체리를 듬뿍 떠서 잔에 담아 준다. 커다란 체리가 두 개 통째로 들어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띠게 된 가나슈 위에다가 뜨거운 물을 가나슈와 1대 1 비율로 부어 준다. 가나슈를 잘 녹인 슈베르트는 가나슈를 젓던 유리막대를 머그컵 끄트머리에 두 번 톡톡 쳐 물을 털어낸다. 따뜻한 우유를 부어주자 카푸치노나 라떼를 만들 때처럼 바닥의 코코아가 우유와 함께 소용돌이치며 표면 위로 섞여올라온다. 다시 한 번 유리막대로 잔을 저어주면 일단 일차적으로는 완성이다.

리스트가 웨하스 네 개 (보니까 두 개는 딸기 두 개는 바닐라였다) 를 예쁜 도자기 접시 위에다가 올려놓는다. 슈베르트는 생크림 토핑에 아몬드 분태를 살짝 올려주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머그컵 손잡이를 잠깐 데운다. 리스트가 트레이 위에 웨하스와 머그컵을 올리고 손님들에게 컵을 가져다 준다.

컵을 든 꼬마 아가씨 슈슈가 핫초코를 홀짝인다.

"아빠, 여기 '진짜'야. 마셔봐봐."

미취학 아동의 입에서 나올 듯한 발언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이길래 애가 말투가 저런가 싶었다.

"아냐, 아빠 배 안고파."

갑자기 마음이 찌르르했다. 저렇게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한 번 만들어 주겠다고 배를 곯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우동 한 그릇도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오씽의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물론 실제로 저 아버지가 배가 안 고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가 컵을 아버지 쪽으로 밀어 준다.

"아빠 생각해서 주는 거 아닌데. 진짜 맛있어서 먹어 보라는 거야. 아빠 카페만 가면 음료 맛없다고 다 뱉어버리잖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공주님."

하이든은 삼각형 가랜드를 꺼내 벽에다가 걸어 본다. 창가에다가 걸려 하니 너무 길고 벽에 걸자고 하니 너무 짧았다. 하이든은 한숨을 내쉬고 슈베르트에게 몸을 돌린다.

"이걸 일단 사오긴 했는데 어디다가 써야 할까?"

"글쎄요... 음... 벽난로 같은 거에다가 두 번 세 번 해서 걸어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벽난로가 없네요."

"그러니까."

슈베르트는 패브릭 포스터를 꺼내서 벽의 튀어나온 기둥 부분에다가 가져다대본다. 역시나 기둥에 덮기에는 너무 크고 넓었고, 창문에다가 붙일까 하니 바깥쪽에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장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반에다가도 헝겊 인형, 액자, 양말 어떤 걸 걸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이 눈 앞에 주어지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진 셈이었다. 잼이 5개 정도 있으면 '와, 정말 선택권이 다양하네!' 라고 생각하지만 잼이 20개나 눈 앞에 놓이면 '이걸 언제 다 먹어보고 언제 다 골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냥 일단 놓고 볼까요?"

리스트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하이든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최소한으로는 만들어 두는 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뭘 좀 아는 집이네, 코코아에 체리를 넣고. 잔도 따뜻해."

슈슈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하이든, 슈베르트, 리스트 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없었고 슈슈만이 다시 아버지 앞에서 잔을 가지고 왔다.

"체리가 새콤해서 딱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초코케이크 위에 체리 올려서 먹고 싶어졌어."

역시나 이 말도 듣지 못한 리스트는 바깥에 눕혀 놓았던 커다란 트리를 가지고 와서 화분 안에 꽂는다. 대충 흙을 채우고 나자 트리가 살짝 기울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쓰러지지 않고 세워졌다. 리스트는 겁도 없이 반짝이는 금빛 태슬과 빨간 리본을 트리에 마구 두르기 시작했다.

"나무 쓰러지면 큰일난다, 조심해서 하렴. 그쪽으로 넘어지면 산재 처리 해줘야 할 테니까."

하이든은 커튼 행거에다가 종이별을 달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종이별을 달 때 갑자기 하이든의 앞치마를 작은 고사리손이 잡아당긴다.

"간격이 안 맞아요."

순간 의자에서 휘청해 떨어질 뻔한 하이든은 다시 자세를 잡고 눈을 깜박인다. 패딩을 벗고 빨간 스웨터만 입은 슈슈였다. 의자에서 내려와 종이별들을 보자 과연 슈슈의 말대로 종이별들끼리의 간격이 약간 어긋나 있었다. 파란색 별과 금색 별과 빨간색 별 사이 두 개의 간격이 벌써부터 달랐다. 전부 다 간격을 똑같이 달면 그것도 인위적이어 보이겠지만 지금은 간격이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면서 맞는 것도 아니었다. 하이든은 턱을 만지작만지작거리다가 슈슈에게로 몸을 낮춘다.

"그럼 이 종이별들을 어떻게 꾸미는 게 좋을까요?"

"종이별을 달기 전에 유리창에 눈송이 스티커랑 빨간 리본 스티커부터 붙여야 할 것 같아요."

하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혹시 스티커 붙이는 걸 도와줄 수 있어요?"

슈슈는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진 표정이었다. 반짝이는 갈색 눈으로 슈슈는 뺨이 발그스레해져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근데 저 키가 작아서 높은 데에다가는 못 붙여요."

꼬마 숙녀가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는 듯이 부끄럽게 이야기한 말에 하이든은 웃음을 터뜨릴 뻔하지만 아이들은 본래 꼬마로 보이기보다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는 편을 선호하기 때문에 간신히 웃음을 참아 본다. 하이든은 괜찮다는 뜻으로 미소를 짓고 슈슈에게 창문 장식용 스티커를 건넨다.

"괜찮아요. 높이 있는 거는 저기 있는 잘생긴 오빠한테 부탁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한 번 해보겠다고 하면서 슈슈는 신이 나 구석의 작은 의자를 가지고 와 창문에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한다. 하이든은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눈송이 스티커를 한 장 꺼낸다. 예순셋의 하이든이 여섯 살 정도의 꼬마의 지도를 받으면서 스티커로 창문을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간다. 눈이 송이송이 창문 위로 내리며 투명하던 창을 채워간다.

한편,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오너먼트와 새쉬를 잔뜩 둘러놓고 한 쪽에는 동그란 오너먼트, 한 쪽에다가는 산타와 루돌프 오너먼트, 한 쪽에는 다른 모든 모양의 오너먼트를 때려박은 리스트는 입술을 매만지며 슈베르트를 바라본다.

"이거 안 예쁘죠?"

"뭐 꾸몄으면 된 거 아냐?"

"그런가?"

아마 가게 맞은 편 아주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하얀색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놓은 상표사 사장이 봤다면 자기 백금발을 쥐어뜯으며 이런 형편없는 트리는 트리라 부를 수 없다고 노발대발했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상표사 사장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자체적으로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스페인으로 다녀온다며 가게를 닫은 참이었다. 리스트가 카운터 뒤로 돌아가 아까 봉지를 깐 웨하스를 슈베르트와 함께 나눠먹으려고 하는 순간 슈슈의 아버지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기. 청년들."

"예!"

슈베르트와 리스트는 반사적으로 뭔가 잘못한 아이 포스가 되어서 웨하스를 등 뒤로 숨긴다. (그래봐야 입가에 부스러기가 다 묻어 있었지만...) 슈슈의 아버지가 검지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자기 쪽으로 와보라고 손짓한다. 가끔 이런 손님들이 있었지만 아까 딸하고는 아주 오씽을 찍길래 이럴 사람이 아닌 줄 알았건만 사람이라는 건 참 양면적인 생물체였나 보다. 어쨌든 슈베르트와 리스트는 슈슈의 아버지에게로 다가간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누가 저렇게 해? 메이폴 만들어? 우리 딸래미 유치원 친구들이 저것보다 트리 잘 꾸며."

아야. 갑자기 꽂히는 날카로운 말. 리스트는 뺨을 문질렀고 슈베르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모루 잘 쓸 자신 없으면 그냥 치워. 저 좆-같은 핑크색이랑 형광파랑을 누가 쓰냐고. 미감이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영혼이랑 하이파이브 하고 계시겠다."

아야야. 슈베르트는 으, 하고 아랫입술을 깨문다. 아직 계산도 안 한 사람한테 왜 우리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딸래미가 귀여워서 웨하스까지 더 얹어준 건데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유세를 부려. 슈베르트는 리스트를 흘깃, 쳐다본다. 젊은 혈기로 눈이 이글거렸다. 그 바그너도 친구로 둔 리스트였지만 이건 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간 모양이었다.

"벽에다가는 패브릭이랑 리스로 아주 떡칠을 해 놓으셨네. 덕지덕지 붙여 놓으니까 잘 꾸민 것 같냐? 잘은 무슨, 크리스마스 마켓을 카페에다가 재구현하고 앉아 있어? 야, 바로크 때도 이 정도로 떡칠하지는 않았어."

"아니 그렇게 훈수만 두실 거면 직접 하시든가요!"

결국 참지 못한 리스트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리스트는 이를 드러내고 화난 개처럼 슈슈의 아버지 위로 허리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잡아먹을 듯한 눈이었다. 슈슈의 아버지는 조금도 겁 안난다는 표정으로 리스트의 가슴팍을 한 손가락으로 툭 쳐 민다.

"그럼 나와 봐봐, 해 줄 테니까."

"에?"

하라고 진짜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의 리스트가 뒤로 물러난다. 슈베르트도 길을 비켜준다. 저렇게 호언장담 하는 인간 치고서 제대로 하는 인간 못 봤지만, 어차피 지금까지 한 일이 0에 수렴하는 자신들보다는 낫겠지, 낫지 않더라도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겠지 하고 금방이라도 슈슈의 아버지를 한 대 칠 듯한 리스트를 진정시키며 슈베르트는 슈슈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리스트의 주먹 꽉 쥔 손등에는 금방이라도 핏줄이 터져나올 듯 불거져 있었다. 한 대 맞으면 골로 가겠다 싶었다.)

한편으로 마지막 종이별까지 창가에 단 하이든은 슈슈와 함께 LED 조명을 한 개 한 개 켜 본다. 예쁜 금색, 빨간색, 주황색, 하얀색 별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창가를 밝혔다. 슈슈가 먼저 천진하게 미소를 짓고 하이든도 뒤따라 비슷한 미소를 짓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살 때보다도 더 예쁘게 꾸며진 종이별들이 하얀 눈송이 스티커들과 함께 어우러져 아기자기한 축제 분위기를 제대로 내 줬다. 슈슈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멋지죠!"

"너무 멋지네요! 나중에 커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도 되겠는걸요."

하이든은 곰손들 사이 금손 한 명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며 손뼉을 친다.

"페렌츠야, 프란츠야! 이것 좀 봐봐라..."

예쁘게 꾸며진 유리창을 자랑하려던 하이든은 다시 한 번 입을 떡 벌린다. 2미터짜리 트리는 휑한 나무에서 혼란과 질서 사이를 줄타기하는 아슬아슬한 화려함을 자랑하는 모습의 나무로 변했다. 꼬마전구와 크림색의 모루, 각양각색의 트리볼, 그리고 군데군데 더해진 눈 스프레이, 꼭대기의 별까지 누가 봐도 감탄하고 압도될 만한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하이든은 크리스마스 처음 맞아보는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리고 우와, 한다. 슈슈의 아버지는 꼭대기의 별에 빨간 리본을 달아준 뒤 의자에서 내려와 꽤나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편다.

"예쁘지!"

"너무 예뻐!"

슈슈도 감탄사를 내뱉고 제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안긴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딸의 뺨에 쪽쪽 하며 뽀뽀를 해주던 슈슈의 아버지는 슈슈를 원래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는다. 한 순간에 가게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찼다. 하이든은 '이 기회를 틈타'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부녀에게 다가간다.

"저기, 선생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장식도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귀찮습니다만."

"할래요!"

아버지의 건조한 대답에 슈슈가 밝은 목소리로 응수했다. 슈슈의 말을 듣는 순간 슈슈 아버지의 목소리가 금방 나긋나긋해진다.

"아유 그럼, 당연히 해드리죠."

"대신 일당 주세요!"

슈슈가 두 손을 쫙 펼쳐 하이든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무슨 미취학 아동이 일당이라는 단어를 알아. 하이든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처하게 웃음을 짓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음,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럼 오늘 하루 두 분께 음료값을 안 받도록 할게요."

"그럼 계속 여기 있어도 돼요? 집 추워요."

집이 왜 춥지? 하이든은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라디에이터가 잘 안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라디에이터가 고장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가능성도 하이든의 머리를 스쳤다. 물론, 그 가능성을 입밖으로 냈다가는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것 같아 하이든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한 시간 반 뒤, 카운터에는 가랜드가 달렸고 선반에는 호두까기 인형과 스노볼이 올라갔다. 사랑스러운 목각 인형들이 진열대 위에 앉아서 손을 잡았고 커다란 선물박스들이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와 화분들이 자리한 구석에 놓였다. 가게 문에는 꼬마전구로 장식된 호랑가시나무 리스를 달고 가게 안쪽 창가 턱에는 하얀색 폭신폭신한 솜을 깔았다. 그 솜 틈새에 저마다 길이가 제각각인 크리스마스 LED 양초를 달아 주자 금방이라도 산타가 일할 것 같은 공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이든은 드뷔시 부녀의 (성이 드뷔시였다고 한다) 테이블에 가장자리가 루돌프로 장식된 빨간 테이블보를 깔아준다.

드뷔시 부녀는 가게 문을 닫을 시간까지 앉아 있었고, 드뷔시 씨는 자기 입맛에 맞는 에스프레소를 한 곳이 몇 군데 없었는데 여기는 (각설탕을 넣어서 마신) 에스프레소가 참 맛있다고 하며 칭찬을 해 준 뒤 떠났다. 의도치 않게 연장근무를 해 버린 셋이었지만, 세 명이서 해결하지 못한 일을 부녀 둘이서 해결해 줬으니 어쩌면 두 사람은 프란츠 카페에 의도치 않은 산타가 되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오세요!"

리스트가 외쳤다. 자신의 미감에 대해서 드뷔시 씨에게 먹은 욕은 생각도 나지 않는 듯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드뷔시 씨와 슈슈가 나간 뒤 리스트는 턱을 괴고 중얼거린다.

"아아...애기들 진짜 귀엽다."

"그러게. 또 왔으면 좋겠구나."

하이든도 똑같이 턱을 괸다. 공짜 음료를 한 세 잔씩 제공해 주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부녀의 예술적 감각은 탁월했다. 특히 어린애인데도 슈슈의 미감은 어쩜 그리 예민한지. (참고로, 슈슈의 본명은 '클로드-엠마' 라고 한다. 별명은 슈슈, 그러니까 작은 양배추라고 하지만...)

"우리 크리스마스 날에는 쉬죠?"

슈베르트가 감상을 깨며 물었다.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고 카운터 앞에 놓인 호랑가시나무 장식을 만지작거린다.

"쉬지. 가서 데이트를 하건 가족들이랑 슈톨렌을 먹든 친구들이랑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클럽에서 춤추고 오든 맘대로 하려무나."

"앗싸!"

리스트와 슈베르트가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하이든은 작게 한숨을 쉬며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만나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할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또 혼자 보내자니 적적하고... 제자들을 부르기에는 제자들도 이미 일정이 있을 테고...

예순셋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올해도 고독한 솔로 크리스마스일 예정인 듯했다. 나도 딸 하나 있었으면 정말 잘 키웠을 텐데 말야.

아무튼, 프란츠 카페는 크리스마스 시즌 휴점이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