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갱_Detective

Defective.1

잠식과 전환

트리거까진 아닌 거 같은데 일단 트리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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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흙같은 어둠 속에서도 예준은 빛을 보았다. 달이 밝은 만큼 어깨에 짊어진 보이지 않는 짐 또한 무게를 더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으니 이제야 진정한 혼자가 되었다.

예준이 그토록 나가고 싶던 보육원은 종말 직전인 시대를 살아가기엔 꽤 만족스러웠다. 남아도는 방들, 널찍한 주방, 드넓은 마당, 작물을 기를 수 있는 뒷마당의 작은 텃밭과 가을이면 별 공을 들이지 않고도 특별히 맛볼 수 있는 달콤한 홍시와 같은 것이 그러했다. 특히나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예준을 언제나 살게 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새벽이 오면, 예준은 이따금 침묵에 삼켜지고 싶었다. 내일이면 이 재앙이 끝나게 해주세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빌어도 소용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아마 희망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던 때부터, 아니, 미래를 위한 다른 길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 그때부터, 예준은 그저 알 수 없는 어떤 것의 먹이가 되고 싶어졌다.

근래 들어 그 생각이 더욱 강해지고 있음을 예준도 느꼈다. 하루라도 그 생각이 가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예준도 본인이 이상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하루는 예준이 연속적인 피로에 지친 나머지, 조금만 더 누워있다가 밖을 돌아보기로 마음 먹었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하고 있었는데, 하민이 예준이 쓰는 독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놀란 눈치로 예준을 바라봤다. 예준은 큰일이 생긴 건가 싶어 하민을 바라보며 먼저 물었다.

'왜 그래? 뭔일이야?'

'죄송해요. 형 안 나간 거 알고 있었는데... 형이 방 함부로 들어오는 거 싫어하는 것도 아는데... 그냥 너무 오래 안 내려와서 걱정돼서요.'

하민의 말이 진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보니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민에게 곧 내려가겠다며 대충 답을 줘 돌려보내고는 예준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정신 차려야 돼, 정신.

그 뒤로 예준은 더욱 자신의 몸을 혹사시켰다. 아예 사색에 잠길 시간이 없도록. 매일 그렇게.

그럴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백팩 두 개를 양 어깨에 매고 낡은 자전거를 굴리며 생수를 구하기 위해 허벅지에 쥐가 날 정도로 달렸건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심지어 팔뚝에 상처까지 생겼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예준은 중심가와 많이 떨어진 외지에 있던 작은 편의점을 발견했다. 늘 그래왔던 대로 기척을 살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의심 없이 진입을 했고, 차마 문 뒤에 숨어있던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심히 왜소한 체격의 중년여성이 손에 칼을 쥔 채 예준을 향해 휘둘렀고, 그렇게 예준이 다쳤다.

다행히 위협용이었는지 여성은 예준을 더 찌르지는 못했다. 대신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칼을 잡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 모습이 예준의 눈에도 여간 애잔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 나도 학생 찌르기 싫어... 하지만 나도 살아야지!! 제발 돌아가!! 학생은 건강하고 체격도 좋으니까 어디든 가서 먹고 살 수 있을 거 아냐... 나는 못해... 학생이 이해해줘... 정말 미안해...'

'..., 아주머니. 다음부턴 그냥 찌르세요. 그렇게 남 목숨 동정하다간 조만간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할 거에요.'

세상은 험하다. 특히나 법이 있으나 마나 한 지금은 더. 저런 어중간한 태도는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걱정하진 않았지만 동정했다. 그건 예준 자신을 향한 동정이기도 했다.

아, 차라리 목을 관통했다면. 예준은 갑자기 등장한 궁금증을 가장한 아쉬움의 근원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발길을 돌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예준의 뒤를 장식했다. 모든 것의 처음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한번 시작해 길을 들여놓으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죄책감도 마찬가지리라. 그녀는 남에게 칼을 겨눴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준은 다시는 그 편의점에 발길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준이 고대하던 무언가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 뒤로 종일 허탕을 쳤다. 물이 끊기고 난 뒤 죽음에 바로 직면한 사람은 아주 재빨랐고, 또 아주 영악했다. 약점이 드러나면 물고 늘어졌고, 조금의 선의도 베풀지 않았다. 방문하는 편의점 마다 개인이, 또는 단체가 꽉 잡고 있으니 더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담배를 태우고 싶어 그러니 라이터 좀 줄 수 없겠냐 말하면 편의점에 누가 있든 오히려 담배를 얹어주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라이터쯤은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 사이의 그런 묘한 유대감마저도 각박해져 편의점 열군데를 돌고 나서야 겨우 하나를 예준이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것도 땅에 떨어져 있던 것으로.-참고로 예준은 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라이터라도 얻었으니 잠깐 동안의 식수야 근처 냇가에서 뜬 물을 가열하여 사용하면 될 듯했다.

그래 봤자 잠깐이었다. 그저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예준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큰 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폐에 깊숙이 박힌 답답함은 영 가시지 않았다. 내일을 생각하면 머리에 번개가 꽂히는 듯한 편두통이 오곤 했음에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한다고 다 예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팔이 잘 나아야 할 텐데..."

다친 팔에서 화기가 느껴졌지만 제대로 된 약이 없어 치료할 수도 없었다. 천으로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혼자서 대충 동여맸지만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벌어지지 않게 막는 용도일 뿐이었다. 사실 남아있는 진통제가 몇 알 있었지만 아이들이 언제 아플지 모를 일이었기에 예준은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예준은 꽤 오랜 시간 밖을 서성였다. 여름 바람의 향기가 예준의 코끝을 간질였다. 바람이 불자 싱그러운 풀꽃의 향이 드러났다. 향의 흔들림에 예준의 머리칼이 함께 나부껴 이마를 간질였다. 그제야 예준은 허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예준은 팔에 바짝 솟아있는 솜털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슬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의 초입이라 하지만 아직 밤공기는 쌀쌀했다.

아니, 분명 들어가려고 했다. 아주 작고 미세한 발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예준은 원래도 청각이 꽤 예민한 편이었는데 NV 발생 후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소리에 민감해졌다. 지금 살짝 둔탁하면서도 일정하게 들리는 소리는 예준의 판단에 의거하면 사람의 발소리에 틀림없었다. 감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라면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날 터였다. 예준은 현관문 앞에 있던 배트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좀비 밀집 지역이 아니고서야 밤에 더 위험한 것은 감염되지 않아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차라리 도적질만 하면 모를까, 본인들의 죄책감에 못 이겨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살려면, 그리고 살리려면, 예준도 독해져야 했다. 그리고 독한 마음을 또 한 번 벼려야 했다.

소리는 점점 다가왔다. 예준은 다가오는 그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건물 외벽에 몸을 숨긴 채 희미한 소리에 집중했다.

점점 선명해지던 소리가 이내 멎었다. 보육원은 꽤 튼튼한 담벼락에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 쇠로 된 커다란 대문이 있는데 문틈 사이로 아무 형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담벼락을 통해 내부로 잠입할 생각인 듯했다.

잠시 무언가 설치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무거운 것을 발판으로 놓은 것인지 살짝 큰 소리가 났다. 예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어 대처를 해본 경험이 있지만 지금의 예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과거의 자신이 대단해 보이는 것, 그 뿐이었다. 식은 땀을 훔쳐내며 예준은 그가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현관문 앞까지 온다면 그때 소리 죽여 살며시 다가가 배트를 휘두를 생각이었다.

예준이 떨리는 손을 애써 모른 척 하며 배트를 어깨에 위에 올려둔 순간,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빵빵한 배낭이 담을 불쑥 넘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나무판자가 부서지지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의 큰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팔로 벽 윗부분을 집고선 가뿐하게 담을 넘어 들어왔다. 난데없는 기행에 예준의 미간이 실시간으로 좁아졌다.

'뭐, 뭐야...'

예준은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할 일은 또 다 했다. 불청객을 관찰하고, 그가 움직이는 동선을 눈여겨 보는 것. 그게 우선이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는지라 자세한 외관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예준이 그나마 안심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 불청객의 머리칼이 달빛을 닮아 있단 것이었다. 어쨌든 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는 점은 예준의 입장에선 대단한 메리트였다.

동선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본인의 가방 옆에 서서 자신의 머리칼을 손으로 한번 쓸어올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자신의 가방을 열고 무언갈 찾는 듯했다. 예준은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가방 속에서 칼 같은 흉기나, 스패너 같은 둔기, 여차하면 총까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조심하며 계속해서 야밤의 불청객을 주시했다.

그러나 예준이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그가 꺼내 든 것은 알 수 없는 동그란 원통형의 어떤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만한 물건이란 건 알았다. 갑자기 드는 일시적인 안도감에 예준은 몸에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예준은 아예 배트를 어깨에서 내리고 그것에 기대서 엉뚱한 불청객이 하는 행동을 전보단 좀 편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더니 바스락 대는 소리와 함께 동그란 원통형의 무언가를 펼쳤다. 펼치니 꽤 컸다. 사람 키만 했고, 꽤 넉넉해 보였다. 그가 그것을 땅바닥에 깔더니 자신의 몸을 그 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는 미동도 없이 한참을 가만히 그러고 있었다.

아, 침낭이었구나.

예준이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그대로 뱉어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이 위험한 시국에. 예준은 짜증과 동시에 생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조심 불청객에게 다가갔다. 고요한 가운데 살아있음을 알리는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예준은 그를 깨워서 내보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랜만에 듣는 타인의 숨소리에 맥이 풀렸다. 다 살자고 하는 짓인 것을 이렇게까지 야박할 필요 있을까. 그게 이유였다.

예준은 그를 깨워 폭력을 주고받는 것 대신 충동적으로 다른 것을 선택했다. 그를 침낭째로 안아 올려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이름도 모를 불청객은 자신을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지만, 졸음을 이기지 못한 건지 이내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그날 밤, 천하의 남예준이 한 미친 짓을 본 사람은 달과 예준 본인 뿐이었다.

상처 입은 팔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분명 팔의 상처가 벌어진 탓일 텐데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뜨거움이 가슴을 터트릴 것 같았다. 외부의 상처가 심장에 전이될 수도 있는 걸까?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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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원래도 누군가와 함께 자지 못하는데 하물며 초면인 사람 옆에서 잠들 수 있겠는가. 어차피 그를 감시할 생각이었지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예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에 찾아온 손님인지, 밤손님인지 모를 그는 색색 달게 잘도 잤다.

예준이 그의 얼굴을 정확히 보게 된 건 동이 트기 직전, 하늘에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때였다. 생각보다 준수한 외모에 놀라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고생하나 해볼 것 같지 않은 맑은 피부와 눈을 덮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 뚜렷한 콧대, 생기 가득한 입술, 거기다 꽤 긴 금빛의 단발머리는 얼핏 스쳐 지나가듯 그를 본다면 예쁜 여성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조금만 그를 눈여겨 본다면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예준은 그런 드러난 화려함 보다는 그의 눈 아래 콕 박힌 점 하나가 더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오래도록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명백히 불청객이었지만 예준이 그를 방에 데리고 들어온 순간부터 손님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예준은 동도 텄으니 자신의 손님이 금방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허기가 져서 어제 하민이 쪄둔 찐 감자를 두 개 들고 올라와 한 개를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남은 한 개는 그가 깨어나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민이 올라와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애들이 깨기 전에 그를 돌려보내려 했던 예준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조차 없게 됐다. 예준은 한숨을 쉬며 방문을 열었다.

"형, 아직 있... 어? 저 사람은 누구예요?"

"나도 몰라. 어젯밤에 담 넘어서 보육원 마당에 침낭 깔고 자길래 그냥 데려와 버렸어."

하민은 예준이 그렇게까지 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냥이라니? 이상했지만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는 그 의문을 지워버렸다. 애초에 해가 될 것 같았으면 벌써 자신의 몸을 날려 그에게 몽둥이찜질을 했을 것이다. 예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을 구하기 위해 얼마든지 불구덩이에 뛰어들 그런.

하민은 로프로 손과 발이 돌돌 묶여있어 어쩐지 안쓰러워 보이는 그를 잠시 보다 예준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을 걸었다.

"근데 왜 안 일어나요? 시간이 몇시야. 아, 우리 시계 이제 고장 났지. 설마 죽은 거 아녜여?"

"아냐, 숨 쉬고 있어."

"감염자는 아니죠?"

"몰라서 묶어뒀어. 옷 벗겨서 확인 해보고 싶었는데 깰까 봐 못하겠더라고."

괜히 건드렸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는 것보다야 예준의 판단이 현명했다고 하민은 생각했다. 역시 형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하민이 말을 이었다.

"잘했어요. 형, 밥은?"

"아까 허기져서 감자 대충 주워 먹었어. 애들은 아직 자?"

"벌써 먹을 거 다 먹고 또 감자 캐러 간다고 신나서 나갔어요."

"하하, 아주 농사에 맛 들였나 보네. 우리 하민이도 같이 감자 캐러 가지 왜 안 갔어?"

"아니, 형 왜 자꾸 저 애기 취급해요!! 저 완전 어른이라고요!!"

"그래그래, 어른 하민아. 가서 애들 지켜보고 있어. 난 이 사람 깨면 내보내야겠어."

종종 예준은 자칭 어른인 하민을 놀려먹곤 했다. 하민도 아직 열여덟의 언저리로 키만 컸지 예준의 입장에선 애나 다름없었다. 하민도 예준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영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예준을 바라보다 자신은 간다며 뒤를 돌아 나갔다. 예준은 혼자 킥킥 웃고는 다시 제 손님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일어나면 그를 내보내고, 자신도 밖에 나가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전히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꿈나라에 갇힌 게 아닐까 싶었다. 하루를 이대로 버릴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생각에 예준은 점점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국에 잠을 이렇게 길고 깊게 자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물론 예준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를 흔들어 깨우려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조금만 더 인내해보자...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거 좋게 끝내자... 예준이 속으로 되뇌기를 여러 번 했을 때였다. 갑자기 옅은 신음이 들려 예준이 돌아보니 그가 슬며시 눈을 뜨고 있었다. 예준은 제 옆에 지니고 있던 배트를 얼른 손에 쥐고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그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신지 눈을 꽉 감았다 뜨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눈을 완전히 뜰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고개를 돌려 예준과 눈을 맞추며 다 잠긴 목소리로 상큼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모닝도 아니었고, 다 떠나서 한잠도 자지 못한 예준에게 건넬 인사는 아니었다. 잠시 울컥한 예준이 울분을 삭히는 동안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아 예준을 향해 묶인 손을 내밀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풀어주면 안되나? 쓸려서 좀 아픈데."

"제가 그쪽을 어떻게 믿고요?"

예준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음... 그 말은 좀 모순인 거 같지 않아? 본인이 나를 믿어서 이곳에 들여놓았을 거 아냐."

"......."

"아니면, 뭐... 나를 믿고 싶었다거나? 둘 중 하나겠네."

허를 찔린 사람처럼 예준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전부 정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부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자신의 배고픔을 빌미로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걸까? 예준은 그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정신을 놓고 살면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불안할 때가 근래 들어 많아졌다.

이제껏 보육원을 무단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배곯다 못해 정신까지 상해버린 자들이었다. 그래서 남의 것을 갈취하려 했고, 사람을 죽이려 흉기를 휘두르고, 어떤 이는 죄 없는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까지 협박했다. 자신의 배를 채우라고. 스스로 움직이는 꽹과리 같은 그런 요란스러운 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예준의 눈앞의 그는 달랐다. 밤 중에 살며시 내리는 도둑눈처럼 고요했고, 평온했다. 처음이었다, 이런 사람은. 아마 예준이 그를 들여놓지 않았더라도 그는 아침이 되면 바람에 흩어지는 싸라기눈 마냥 제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예준이 그를.

사람이 사람을.

"어찌 됐건 덕분에 잘 잤어. 내가 원래 사람이 옆에 없으면 잠을 못 자거든. 그래서 거의 한 삼일? 정도를 못 잤는데 진짜 미치겠더라고. 너무 고마워. ...아, 기지개 켜고 싶다."

예준은 아무 답 없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그의 앞에 앉아 로프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얌전히 예준이 로프를 풀어주길 기다렸다. 살갗에 닿아있던 로프의 틈 사이로 빨간 자국이 남아있는 게 보였다. 어두울 적에 묶은 것이라 잘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가 없어 좀 세게 묶은 듯했다.

"감염자예요?"

로프를 단단히 묶은 탓에 푸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틈을 이용해 잽싸게 예준이 그를 추궁했다.

"팔다리는 잘만 묶어놓고는 옷은 또 안 벗겨봤나 봐?"

그가 킥킥 웃으며 답하자 예준의 얼굴이 빛깔 좋은 자두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 때문에 로프를 풀던 예준의 손이 거칠어지자 그가 아야, 하며 아픈 체를 했다. 예준의 손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대답해요."

"아니. 근데 내가 아니라고 해도 믿을 수 있어? 어떻게, 끈 다 풀면 옷 벗어 줄까? 확인할래?"

"... 네.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그래. 알았어."

예상치 못한 단호한 예준의 답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예준은 눈도 못 마주치고 그저 자신의 손이 가 있는 곳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남자들끼리 서로 몸 보는 게 뭐 이상한 일이냐만은, 모르는 사람의 몸을 보게 해달라 요구하는 것도, 그가 흔쾌히 보여주겠노라 답한 것도, 꼭 이 모든 상황이 예준 자신을 변태로 만드는 것 같아 민망했다.

속박이 풀리자마자 그는 본인이 원했던 대로 시원하게 기지개를 한번 켰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상하의와 내의로 입은 티셔츠를 차례차례 벗어 내려갔다. 그의 살갗이 드러날수록 예준의 눈은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바빴다.

민망함의 데굴데굴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열심히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구경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정말 근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예준 자신도 하도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른 탓에 잔근육이 곳곳에 박혀 보기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탄탄하고 밀도 있게 박힌 근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근육을 구경하면서 할 일도 했다. 그는 어딘가에 물린 자국보다는 좁쌀 같은 작은 흉터들이 몸 곳곳에 있었다. 그건 감염자라고 하기에 의심되는 정황이 전혀 아니었다..

"확인 끝?"

어느정도 예준이 다 둘러본 후였을 때 그가 물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이 벗었던 옷을 쥐기 위해 손을 뻗으며 그 틈을 타 방 안을 한번 빙 둘러봤다. 그의 행동을 기민하게 알아챈 예준이 잠시 옆에 두었던 배트에 손을 대며 앙칼지게 외쳤다.

"허튼짓 하면, 죽... 죽일 수도 있어요!!"

"진정해. 가방 찾으려고 둘러본 거야. 내가 왜 재워준 은인에게 해를 입히겠어? 나는 자고로 까치보다도 은혜를 잘 갚는 사람이라고."

"그쪽 가방은 저쪽에 있어요."

예준이 손으로 벽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는 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더니 바로 자신의 가방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예준에게 등을 보인 채로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예준은 그를 계속 감시했다. 그러던 중 가방을 뒤지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가 예준을 겨냥해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튼짓은 본인이 해놓고 괜히 찔리니까 나한테 화내고..."

그 한마디에 예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한순간에 무뢰한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말에 예준이 지레 찔려 강하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의 유형을 만나보고 겪어봤지만 순수하게 입을 털어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허튼짓이라뇨? 그건 엄연히 감염자인지 아닌지 확인을 위해서, ... 아니, 그리고 그쪽이 보여준다고 했잖아요!"

"난 네가 확인만 하는 줄 알았지... 근데 내 몸 보더니 눈빛이 달라져서는,"

"제가 언제요? 그런 적 없어요!"

"침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어, 너."

"아니거든요? 잠깐만. 근데 아까부터 거슬렸던 건데 그쪽 왜 계속 저한테 반말하세요?"

"오늘 뒤져, 내일 뒤져, 염불 외는 시국에,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는데 힘들게 말 늘려야 돼? 꼬우면 너도 반말해."

"그래, 알았다!!"

그렇게 예준이 혼자 씩씩 대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가방을 뒤적였다. 아니,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아 웃음을 참는 듯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예준은 자신의 머리에서 혹시 김이 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했다. 텃세를 부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큰맘 먹고 재워줬더니, 얄궂게 굴기나 하는 그를 진심으로 한대만 콩-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잔떨림이 멈추기가 무섭게 그는 태연하게 예준을 돌아보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해해. 내가 몸이 좀 좋긴 좋아."

"이해 안 해도 된다고. 그런 적 없다고."

"근데... 도대체 네가 말하는 허튼짓이라는 거, 범위가 어디까지야?"

"...뭔 뜻이냐? 이상한 말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져서. 이름하고 나이 물어보면 그것도 허튼짓인가?"

푸른 눈동자가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혀왔다. 그의 눈이 살며시 휘어졌다. 눈가의 점이 호선을 따라 살짝 움직였다. 예준은 그 눈을 마주하자 물에 잠긴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미간을 찡그리고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예준의 반응을 본 그가 숨이 넘어가게 웃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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