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갱_Romantico

Romantico. A

놔갱_로판

+ 로판 고증 안 맞아도 이해해주시길... 저도 로판 잘 몰라요. 그냥 보는 걸 좋아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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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준은 점차 낮아지는 바깥의 기온을 핑계 대며 마차 안에서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지난 한뎃잠을 청할 때까지만 해도 조금 선선한 정도여서 의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대공저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이 행차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두꺼운 털옷이란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되었다. 물론 예준을 제외하면 말이다. 예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천불만으로도 이미 더웠다.

예준은 황자였다. 그것도 황후 태생의 무매독자. 그러니 그가 황태자가 되고 차기 황제가 되는 것은 제국의 정통성 측면에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황후가 예준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지만 제국의 법상 황후가 자녀를 낳으면 황제는 더 이상 황후를 둘 수는 없었으니 더욱 더. 또한 황제에겐 정부가 여럿 있었음에도 그 정부의 태생인 황자, 황녀보다 예준은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검술이면 검술, 사교면 사교, 심지어 황자, 황녀라면 받아야 하는 필수 이론 수업까지 어느 하나 놓치는 것 없이 완벽했다. 예준이 가장 어려워하던 사교춤마저도 다른 황자, 황녀들과 비할 바가 되지 않았으니 귀족들은 전부터 예준과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려 안달이었고, 백성들은 황태자 책봉도 하기 전부터 예준을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시 예준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느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가 황태자가 되는 것에 이견이 있는 자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다고.

실제로도 예준은 성군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기대에 부응할만한 좋은 황제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겐 실로 성군이 될 자질이 있었다. 배움에 있어 잔꾀를 부리지도 않았고, 제가 부족한 면에 대해선 도움 받을 줄도 알았다. 백성들의 삶과 그들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고, 귀족들의 욕심을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지혜도 겸비했다.

다만 그런 예준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칭송받는 제 자식을 황제는 영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예준이 국무회의에 참여하여 유익한 안건을 제시해도 무시하기 일쑤인데다가 공식행사에서는 심지어 다른 황자나 황녀들을 치켜세워주기 바빴다. 사적인 자리에서 예준과 마주치면 황제는 예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인사도 건네는 일 없었다. 예준은 처음엔 제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행동거지를 조심하려 노력했으나 다행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 제 탓이 아님을 일찍 깨우쳐 더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황제가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끔 상황을 만들어갔다. 예준은 황제를 이리 평가했다. 여색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국가의 흐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추한 맹인, 그것이 현대의 황제라고.

그리고 그 황제가 기어코 일을 냈다. 웬일로 자신을 황제가 머무는 태양궁으로 부르기에 드디어 황제가 정신을 차렸나 싶었다. 그러나 황제는 예준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건넸다. 아주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어진 황제가 되겠다던 예준의 꿈은 바로 그날, 황제가 오래된 개 같은 약속 하나와 통보 하나를 건넴으로 완전히 어그러졌다. 대제국시대에 결혼동맹 협약이라니. 예준은 황제에게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던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마음 같아선 제 머리털을 죄 뜯으면서라도 항의하고 싶었다. 결국 그러진 못했지만.

결혼동맹협약은 제국과 대공국 사이에 체결한 것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졌기에 오직 황제와 그의 직계들만이 알 수 있었다. 그 기원은 대공국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과거 제국이 왕국이었을 때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마수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왕이 말하기를,

- 북방에서 내려오는 마수들 때문에 머리가 아파 살 수가 없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이에게 내가 귀천에 상관없이 대공의 지위와 그에 합당한 대공령을 내어주겠다.

그러자 귀족들은 지위와 땅에 눈이 멀어 마수 토벌을 시도하는데, 토벌에 참여한 모든 귀족이 마수와 싸우는 족족 패하기만 하고, 돈과 사병과 제 장자들만 잃은 채 귀환했다. 그야말로 목숨과 작위를 건 도박이었다.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귀족의 영향력이 줄어드니 왕도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설령 마수를 잡아 대공의 지위를 받는다 해도 그건 그거대로 귀찮은 일이 사라지는 것이니 왕은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이다. 욕심을 잃지 못한 귀족들은 점점 위태로워져 갔고 그와 반대로 왕권은 하늘을 치솟던 그때, 귀족의 방계 조차도 아닌 아주 평범한 소년 하나가 왕 앞에 섰다. 그 소년은 왕국민보다 피부가 허옇고, 머리칼의 색이 옅었으며, 왕국에선 보기 드문 청안을 가졌는데 그 미모가 사관이 보기에도 빼어나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게 하고, 가히 사람을 홀릴 정도의 미남이었다.'

그 소년은 다른 귀족들과는 달랐다.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에 찬 어조가 막연한 젊음의 패기로 보이거나, 야욕의 함정에 눈이 먼 자 같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왕에게 역으로 먼저 조건을 제시했다.

- 왕이시여. 제가 왕의 근심을 덜어 드린다면 제게 두 가지를 더 약조하여 주십시오.

묘한 기류를 풍기는 소년을 향해 왕이 말했다.

- 원하는 것을 말하라. 들어는 보겠다.

소년이 당차게 말했다.

- 첫째는 대공령을 차후에 대공국으로 인정해주실 것이고, 둘째는 왕비의 태에서 난 왕의 여식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하면 대공국이 폐하는 그날까지 왕의 땅을 험악한 마수로부터 지키겠나이다.

터무니 없는 조건이었으나 왕은 소년을 향한 의심을 거두고 별 기대없이 그러하겠노라 말했다. 욕심에 절어 온갖 비싼 갑옷으로 무장을 한 귀족들의 사병들도 무찌르지 못한 마수를 고작 저런 빼빼 마른 소년이 무찌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소년이 죽었다는 소식만을 지루하게 기다리던 왕에게 소년은 보란 듯이 나타났다. 온 몸이 피 칠갑이 된 채로 우두머리 마수의 머리를 들고. 왕은 소년의 능력을 불신해 새로운 마수가 내려오길 보름을 기다렸지만 마수는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소년의 완벽한 승리였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런 뭣 모르는 소년이 대공이 된다면 제가 휘두르기 좋으리라. 왕은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척했다. 소년을 위한 개선식도 열었다. 소년은 대공이 되었고, 그런 소년에게 왕은 살기 척박한 북부의 땅을 하사했다. 소년은 불만 없이 받아들였고, 소년을 따르는 많은 가신과 백성들이 북부의 땅으로 이전했다.

시간이 지나고 영지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판단했을 때 소년은 제가 왕에게 제시한 두 가지를 받기 위해 청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권력의 맛을 본 왕은 제 정부의 태에서 난, 심지어 달거리도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식을 북부로 보내 그 아이의 편에 그러할 수 없다는 답서만 덜렁 들려 보냈다.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왕의 태도에 크게 노한 소년이 말했다.

- 왕이 나와의 약조를 깨었으니, 나 또한 더는 왕국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

소년은 더 이상 마수들을 관리하지 않았고, 오직 제 영지민들을 보호하는데 주력을 쏟았다.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은 심히 기뻐하며 연회를 벌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석 달을 지나지 않았다. 북부에서 시작된 몬스터 웨이브를 아무도 막지 않자 그 영향이 고스란히 수도에 미쳤다. 수도에는 마수들이 날뛰며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손하며 감당할 수 없는 인적, 금전적 피해를 입혔다. 왕은 모든 병력을 다해 마수를 막았으나 쏟아지는 마수들을 이길 길이 없었고, 제 아들의 목숨이 끊어지고 나서야 땅을 치며 후회했다. 왕은 피난길에 오르며 제 시종을 불러 소년이 있는 북부로 전갈을 보냈다. 무엇이든 주겠으니 이 고통을 끊어달라고.

소식을 듣자마자 소년은 왕을 실컷 비웃으며 그의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를 버린 아비를 위해 숨죽여 우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쓰여 끝을 보진 못했다.

소년이 사태 수습에 들어간 지 두어 달 만에 마수들은 왕국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왕은 소년의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벌벌 떨며 칙서를 써 내려갔다. 소년의 바람대로 소년을 대공국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과 대대로 정실에게서 난 자식을 대공에게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왕의 굴욕스러운 패배였다. 그리고 그 약조가 지금까지 이어져 대공국은 마수를 토벌하며 제국을 보호하고, 제국은 그런 대공국과 협력하고자 꾸준히 황후의 태에서 난 자식을 대공국으로 보내 둘을 혼인시켜 이 평화가 깨지지 않게 유지해왔다.

그리고 그 조약의 피해자가 바로 예준이었다. 예준은 자신이 사내이고, 하나뿐인 황후의 자식이니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황실 내 사서를 모두 뒤져봤지만 이제껏 그 조약에 예외란 없었다. 심지어 황후에게서 난 자식이 모두 사내여서 선대 황제가 정부의 여식을 보내자 대공이 길길이 화를 내며 여식을 돌려보내고 끝내 황자를 데려갔다는 일화도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야 예준은 마음을 비우고 북부로 향하는 길에 동행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자신 하나 희생하여 만백성을 마수에서 지켜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백성에게 빛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황자 전하, 이쯤에서 하루 더 묵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에릭 경께서 말씀하기를 이번이 야외에서 주무시게 되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합니다."

"그래, 다들 곤할 테니 어서 잠자리를 준비하라 이르거라."

"예. 전하겠습니다."

살갗에 닿는 찬기가 깊은 회상에 잠겨있던 예준을 끌어올렸다. 댄이 어느새 멈춰선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가,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이었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온 탓에 뻐근해진 몸을 풀러 예준도 마차 밖으로 나갔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활기에 예준은 고개를 마구 흔들며 안 좋은 생각을 떨어내려 했다. 곧 포근한 이부자리를 한품에 안은 댐이 마차 앞에 도착했고 예준은 버거워 보이는 그를 대신해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댄은 짧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마차 내부를 정리하며 제가 들고 온 것들을 가지런하게 폈다.

북부에 오긴 한 건지 잠깐 나가 있었음에도 온 몸이 어는 듯했다. 한창 불 앞에서 스튜를 끓이는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어 몰래 부엌칼에 손을 대려던 예준은 문득 걱정이 됐다. 황자인 예준과 그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댄은 마차 내부에서 묵고, 다른 기사들은 모두 야외에서 잠을 청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추운 곳에서 잠이나 잘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취사병들에게 들켜 쫓겨나는 김에 마차 앞을 지키던 기사단장 에릭에게 다가가 물었다.

"경, 이리 추운데 밖에서 눈을 붙일 수는 있는 것이냐? 제국의 겨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추위야."

"아, 전하. 지금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천막을 치고 있고, 전하께서 하사하신 두툼한 양털 옷이 있으니 그것을 덮고 자면 충분합니다."

"흠···. 그래도 내가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 구나."

"저희는 전하께서 선택하신 정예 기사단들이 아닙니까. 북부에서 혹한기 훈련을 한 경험도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래도 고뿔이라도 걸릴까 염려 되어. 한기가 올라오면 버티기 힘들 것인데···. 차라리 내 침금을 내어주면 어떠하냐? 나는 어차피 마차 안에 있으니 외투만 덮고 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에릭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울상이 된 예준을 바라보았다. 제 전하는 어릴 때부터 이다지도 다정했다. 한 때는 불경스럽게도 마음 약한 예준이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준은 마음이야 무를지 몰라도 시야가 정확해 단호해져야 할 때엔 단호할 줄 아는 이였다. 그것을 알게 된 후로 에릭은 예준이 꼭 차기 황제가 되기를 남몰래 기도했었다. 비록 끝내 그 바람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에릭이 정중한 어투로 예준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 소인 감히 직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한다."

"전하께서 이 정도도 누리시지 않으시면 저희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편히 가신다면 그것으로 저희는 족할 것입니다. 부디 걱정을 거두시옵소서."

예준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때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나, 훗날 제 사람에게 무엇이든 하사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는데, 정작 본인이 지금 내어줄 수 있는 것이란 냉기를 잔뜩 머금은 침구가 전부라니. 예준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입술 끝에 달랑거리는 비참함을 삼켜냈다. 황자로서의 마지막이니 제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건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건만, 그는 존중할 줄 아는 주군이었기에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기꺼이."

잠자리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잠에 들고 일어나면 내일은 대공저에 도착할 것이다. 자신은 황자가 아닌 몸만 사내인 대공비가 될 것이고, 모든 슬하의 가신들과 기사들이 바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을 통해 대공에게 감시를 받을지도 모르고, 업무도 제가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할 것이다. 대공의 마음에 제가 차지 않는다면 그대로 유폐되어 평생을 갇혀 지낼지도 몰랐다. 그 모든 생각은 제가 대공비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그날 밤부터 끊임없이 생각해 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직 일어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공저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대공을 마주한 적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예준이 마음을 다잡으려 생각의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북부에 살면 간혹 오로라를 볼 수 있다던데, 경은 훈련을 하며 본 적이 있나?"

그렇게 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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