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만나지마.

내가 먼저 좋어했어.

남예준은 늘 체육 시간이면 구석에 앉아서 악보를 들고는 넋을 놓고 있었다. 수행평가에도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고를 치는 건 또 아니니 선생님들도 그저 내버려 두었다. 이따금 노아가 예준의 옆에 앉아 있기도 했지만, 노아는 체육을 좋아했다. 농구를 하다가 잠시 쉴 때면 언제나 예준의 옆자리로 향했다. 예준은 들고 있던 악보로 노아에게 부채질해주었고 노아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그런 예준을 눈에 담았다. 같이 농구를 뛰었던 친구가 마시라며 이온 음료를 던져주면 바로 뚜껑을 따 마시려다가도 예준에게 먼저 권했다. 예준은 고맙다며 먼저 입을 대고 마셨고, 노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온 음료를 섭취했다. 텅 비어버린 통을 들고 일어나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다시 경기를 뛰러 코트로 향했다. 한노아는 체육 시간이 좋았다. 가끔은 좋지 않은 컨디션을 핑계로 예준의 옆에 앉아 쉬었다. 그렇게 예준의 옆에 앉아 있으면 예준은 망설이다가 큰 결심을 했다는 표정으로 악보를 보여주고는 했다. 매번 악보를 보여주면서도 망설이는 손짓,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방비하게 반바지의 체육복을 입고는 앉아 있는 모양새는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떠올렸던 모습이었다.

 

“준아, 그래서 또 헤어졌다고?”

 

남예준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또, 헤어졌냐고 물어오는 한노아의 잔에 무자비하게 술을 따랐다. 노아는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실실 웃으면서 가득 찬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니, 내가 헤어진 게 그렇게 웃긴가? 연애를 시작해도 오래가는 법이 없었고, 오래가는 것 같다 싶으면 정작 내 쪽에서 이별을 택했다. 3주 만에 끝난 이번 연애는 어느새 내기로 번져갔는지 덕분에 돈 좀 땄다며 자기가 쏘겠다는 노아의 말에 오기를 부려 비싼 술을 시켜댔다. 이번에는, 좀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오기로 시킨 술을 무작정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시야가 훅, 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노아의 등에 업혀서 노아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있잖아, 노아야. 넌 여전히 목이 참 예뻐.

 

한노아는 농구를 좋아했다. 큰 키를 갖고 싶어서 시작한 농구는 생각보다 재밌었고 재능까지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으쓱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됐다. 체육 시간에는 농구를 택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노아는 아마, 여럿을 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준은 가끔 음료수를 들고 망설이는 애들을 보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묘한 승리감을 종종 느끼고는 했다. 저렇게 기다려도 노아는 내 옆으로 올 텐데. 악보는 그냥, 핑계였다. 곡은 늘 하교 후 혹은 일찍 눈이 떠진 새벽과 가까운 아침에 쓰는 게 좋았고 그저 이미 완성된 악보를 들고 다니며 노아를 구경하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노아가 쉴 때면 부채질을 해주면서 땀으로 젖은 목덜미를 훔쳐보는 게 작은 재미였다. 노아가 먼저 마시라며 권하는 이온 음료는 늘 입을 대고 마셨다. 노아는 입을 떼고 마시다가 음료를 흘려 옷을 적시는 게 싫다며 입을 대고 마시는 사실을 알면서 그랬다. 입을 대고 마셔도 노아는 신경 쓰지 않았기에 오직 나만 모른 척하면 되는 일이었다. 노아는 점수를 따내면 언제나 나를 보며 웃었고, 그 웃음을 아무도 모르는 밤에 떠올리면서 어떤 날은 열이 오르기도 했다.

 

“깼어?”

“...응.”

“적당히 좀 마시지.”

“미안….”

 

노아는 예준이가 깼다는 것을 알면서도 업고 걸어갔고, 예준 역시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이미 너무 익숙했다. 집에 도착해서야 현관에 예준을 앉힌 노아는 예준의 신발을 벗겨주었다. 예준은 손을 뻗어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준은 점심시간이면 잠을 자 줘야 한다며 자는 노아를 매번 구경했다. 같이 잠들기는 했지만, 늘 먼저 일어났고 노아는 종이 치기 전까지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아는 늘 늦게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했다. 예준은 잠든 노아의 손을 잡았고, 남은 손으로는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좋았고,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의 냄새도 좋았다. 노아는 꿈이라도 꾸는지 슬쩍 잡았던 손은 어느새 꽉 쥐어있었다. 예준은 종이 칠 시간에 맞춰 다시 책상에 엎드리고는 자는 척을 했다. 종이 치면서 노아가 일어나고 손을 놓으면 그제야 일어난 듯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책이 사물함에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아직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둥, 자리를 뜨고는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혔다.

 

“준아, 내가 개야? 너 얼굴 완전 토마토야. 세수라도 좀 해. 그리고 신발은 좀 직접 벗어라. 매번 귀찮게.”

“왜- 네가 다 해주니까 좋은데? 난 편하기만 하고만.”

“아직 술이 덜 깼지? 됐다, 주정뱅이랑 무슨 얘기를 한다고.”

 

예준은 밴드를 제외하면 취미가 별로 없었다. 학교를 무슨 재미로 다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뭐, 학교를 재미로 다는 건 또 문제였겠지만, 예준은 동아리 시간이 아니면 늘 조용한 편이었다. 모든 애들에게 친절한 모범생. 눈에 띄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눈에 확 띈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점심시간이라고 달라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하는 것도 없는 시간이라면 내가 가져도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낮잠이나 자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예준은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의 점심시간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잠도 잘 오지 않는 주제에 억지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으면 금세 잠들었다가, 또 금세 일어난 예준이 손을 잡아 왔다. 잠든 예준을 눈을 슬쩍 뜨고 구경하다가 깰 것 같으면 눈을 감았다. 예준이 손을 잡으면 꼭, 손에서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노아는 여름을 싫어했다. 그냥, 몸이 닿기라도 하면 더웠다. 여름이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하게 더운데 여름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붉어지는 귀를 감추느라 자는 척 뒤척이는 짓거리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그냥, 손을 움찔거리며 빼버리면 그만인 것을 알면서도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내가 예준이랑 손을 또 언제 잡아보겠어. 일주일 중 5일, 딱 20분이었다. 종이 울리면 눈을 슬그머니 뜨고는 다시 엎드린 예준을 보다가 손을 슬쩍 뺐다. 예준은 방금 일어난 척하며 눈을 비비고는 자리를 떴다. 그런 예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일 점심시간이 빨리 오기를 소망했다.

 

“아이스크림 줘?”

“응, 먹을래.”

 

노아는 정말 세수라도 했는지 조금이나마 붉은 기를 가라앉힌 예준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까는 것도 지 손으로 하기 싫은지 봉지째로 내민 아이스크림은 받지도 않는 예준의 머리를 검지로 톡 건드리고는 아이스크림을 까서 바쳤다. 예준은 노아가 머리를 톡 건드려도 헤실헤실 웃으며 내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이가 시리다며 안 먹겠다면서 발라당 누웠다. 결국 남은 아이스크림은 노아의 차지였다. 입이 짧은 건지, 변덕이 심한 건지. 예준은 매점에서 이것저것을 잔뜩 사고도 먹다가 말았다, 열어놓은 과자가 눅눅해질 때면 눅눅해졌다고 툴툴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한 움큼씩 집어먹기를 반복하니 예준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기 시작했다. 노아는 예준이 자기가 잘 먹는 과자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몰려왔다.

 

“노아야, 난 남자를 갈아치우면서 길게 만나지는 못한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데?”

“누구겠어. 오늘 헤어진 걔가 그랬지. 노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예준은 길게 만나지는 못한다는 얘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늘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다 노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면 꼭 노아를 불러냈고 이제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잔뜩 취했다. 고등학교는 진작에 졸업했는데. 왜 이 마음은 여전한지. 괜찮은 사람이라도 만나면 쉽게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애하면서도 노아를 신경 썼고, 매번 이 문제로 다투고는 했다. 예준은 늘 노아를 바라보았다. 예준의 시선 끝에는 노아가 머물고는 했다. 그랬기에 노아는 예준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아니, 확신했었다. 예준이가 애인이라면서 모르는 남자를 소개해주기 전까지는. 애써 마음을 접어가는데도 예준의 연애는 늘 오래가지 않았고, 기대하기 시작하면 기대가 무너졌다. 그렇게 남자를 갈아치우면서, 나는 왜? 노아는 내심 예준이 자기도 건드리기를 바랐다. 나라면 절대 놔주지 않을 텐데. 노아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버리고는 예준의 옆에 누웠다. 예준의 옆에 누워 모른 척, 손을 잡았다. 여름도 다 끝나가는데 늦더위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나랑 만나보던가. 알잖아. 우리, 잘 맞는 거. 연애도 길게 잘할지 누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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