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BLOW 上
BLOW
한노아의 집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매니저는 입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인사치레로라도 쓸데없는 말 몇 마디 나눌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처음 봤을 때 인사 꾸벅 한 게 다였다. 어쩌면 스케줄이 없는 날임에도 샵에 가야겠다며 갑작스레 매니저에게 통보한 그때부터 한노아는 기분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사정을 모르는 매니저는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바짝 선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행동을 죽였다. 그가 가자 하면 가고, 오자 하면 오고, 커피 마시자 하면 커피 사 와서 같이 마시고, 욕을 짓씹으면 입을 닫고 못 들은 체 했다. 이러한 점이 매니저가 한노아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샵에가서도 한노아의 기행은 계속됐다. 그가 무표정으로 샵 안에 들어서자 샵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 정장이 반사판 역할을 하는 건지 몰라도 한노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살짝 수척해진 외관과 오늘 특수하게 더해진 날 선 예민함까지 모든 것이 사람들을 기껍게 했다. 미모로 사람을 급 매기는 실장은 오늘의 한노아를 보고 눈이 뒤집어져서 시종처럼 시종일관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무성한 관심이 쏟아져도 정작 당사자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신경도 쓰지 않는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한노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를 바로 캐치한 매니저가 뒤에서 계속 실장에게 눈치를 줬다. 실장은 그런 매니저를 못 본 건지 무시한 건지, 보통 때보다 더 과한 리액션으로 한노아를 맞았다. 개인 룸에 들어갈 때까지도, 개인 룸에 들어가서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미모에 얕은 주름이 팼다. 매니저는 속으로 좆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한노아는 여타 배우나 아이돌처럼 심하게 짜증을 내거나 싹수없게 굴지는 않았다. 다만 한마디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는데 그가 한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원래도 과묵한 편이었던 매니저는 그 시간부로 묻지 않고도 한노아가 필요한 것들을 척척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실장님. 오늘 좀 화려하게 부탁해요. 색조 써도 좋을 거 같네요."
"아니, 우리 한 배우 백 정장 입고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더라니까! 오늘 무슨 날이야?"
"결혼식장 가요."
"누구 결혼식?"
"제 애인 결혼식이요."
그 대화 후로 아무도 한노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고요 속에서 붓이 피부에 쓱쓱 쓸리는 소리만 났다.
BLOW
아역배우로 시작해 안정된 연기력으로 탑급 정상에 오른 한노아에겐 부족한 게 없었다. 한노아를 넘치게 사랑해줄 많은 사람들, 어디서든 인정 받는 커리어, 그 뒤를 자연히 따라붙는 돈. 거기다 이제는 작품 보는 안목까지 탁월해져 마음에 드는 대본을 잡기만 했다 하면 대박이 터졌다.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말이다.
"노아야. 내 나비."
단, 남예준을 제외하면 말이다.
한노아가 남예준을 처음 만났을 때는 두 번째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꽤 묵직한 느낌의 스릴러 영화였기 때문에 어린 한노아는 정서적으로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배우 교체를 하기엔 한노아의 몰입도가 다른 아역배우들에 비해 남달리 특출났기에 감독과 투자자 모두 그 방안은 배제한 채였다. 그렇게 한노아가 나오는 장면을 전부 뒤로 미룬 채 성인 배우들만 촬영을 지속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투자자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촬영장을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는데 극강의 예민함을 드러내던 한노아가 새로운 친구를 보고 궁금한지 쭈뼛대며 다가가더니 도란도란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이 이거다! 속으로 외쳤다.
그 뒤로 남예준은 종종 촬영장에 놀러 왔다. 남예준은 친절했고, 한노아가 다가가면 언제든 미소 지어 맞이했다. 가끔 간식을 사 들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로 먼저 다가간 적은 없었다. 한노아가 올 때까지. 어쨌거나 한노아는 다정한 새 친구가 좋았다. 매일매일 남예준을 보며 눈에 빛을 낼만큼.
"준아, 너도 배우 해 볼 생각 없어?"
"갑자기?"
"너 정도 마스크면 엔터에선 모셔가려고 할걸?"
열아홉의 여름이었다. 피크닉에 꽂힌 흰 빨대를 물고 남예준 책상에 걸터앉은 한노아가 말했다. 남예준은 또 사람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했다. 한노아는 남예준을 빤히 바라봤다. 아직도 저 맑은 눈 속엔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남예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노아와 눈을 마주했다. 아, 굳이 몰라도 될 것 같다. 그냥 한노아는 남예준이 좋았다. 남예준이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연예계에서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뒷배가 될지도 몰라서도 아니고, 다정해서도 아니고.
그냥.
그저 그냥.
오래봤고, 그만큼 또 오래 볼 사이니까.
단순히 친구였던 남예준이 미묘한 관계의 선을 넘어서기 시작한 건 그해 수능이 끝나고부터였다. 성인이 되기 직전의 남예준은 그때부터 오만 사교 파티에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하필 그 시기에 한노아는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보통 한노아가 작품에 들어가면 남예준과 메신저를 많이 나누곤 했다. 남예준이 계속 그를 따라다닐 순 없으니 찾은 해결책이었다. 한노아는 여전히 남예준이 곁에 있어야 현장에서 안정을 찾았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어릴 적에 형성됐지만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버릇. 한노아는 평소와 같이 부지런히 촬영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본이 어떤지, 감독이 괜찮은 사람인지 남예준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돌아오는 답은 한 통도 없었다.
한노아는 처음엔 당황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다음은 화를 냈다. 내 문자 보고 점 하나 찍는 게 그렇게 어렵나? 아차 싶으니 걱정이 들었다. 남예준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마지막 촬영 3일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처량하게도 그 동안 동그란 자음 단 하나도 오지 않았다. 결국 그 작품엔 한노아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윤 감독은 최고의 연기라며 찬사를 보냈다. 남의 속 타들어 가는 줄 모르고.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눈가에 거뭇한 그늘을 달고 남예준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제집인 양 하도 들락날락했더니 무턱대고 집안에 발을 들여도 아무도 한노아를 막는 이가 없었다. 한노아는 안방을 제외하고 집 내부에 있는 문을 하나하나 손수 열어가며 남예준을 찾았지만 묵직한 그의 잔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얼굴이 구겨졌고, 빠듯하게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남예준과 평생 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내가 남예준의 품에 벗어날 수 있는.
한노아의 촉은 함부로 무시 못 했다. 어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지 상황 파악 능력도 남들보다 빨랐고, 사람 보는 눈도 기가 막혔다. 한노아 자신도 남의 말은 안 믿을지언정 자기 촉은 믿었다.
그러면 뭐해. 맹목적으로 남예준이 보고 싶은 걸.
생각하면 할 수록 비단 연락 안 한 남예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만 확실해져 갔다. 애초에 친구가 연락 안된다고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그런데 나는 왜 화가 나지? 한노아는 그전까지 한 번도 사람을 붙잡아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눈도장 찍어야 할 감독의 앞에서도 꼿꼿했다. 그런 한노아가 고작 친구가 연락이 안된다고, 한낱 친구를 못 봐서 이렇게나 간절했다. 한노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아저씨, 예준이 어디 갔어요?"
천하의 한노아가 구질구질하게 물었다. 가끔 남예준의 집에서 잠을 자고 등교할 때 운전을 해주던 기사였다. 그는 한노아를 보고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오늘 예준님 사교 모임이 있으셔서 그곳에 가 계십니다."
"거기가 어딘데요?"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저한테도요?"
"네. 죄송합니다."
한노아의 옆에는 늘 그를 데려가고 싶어 하고, 뽐내고 싶어 하고, 어떻게 하면 그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그와 긴밀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염려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선택한 건 오직 남예준이었다. 그러나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기사에게서 보이는 남예준의 다정한 거절에 한노아의 마음 한켠에서 오기가 생겼다. 한노아는 들어가려던 기사를 붙잡고 애처롭게 말했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저 집까지만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저 예준이 보고 가려고 한 거라 지금 매니저 형도 없어요. 택시 타고 가긴 불안하고."
한노아의 연기에 속은 건지 뭔지, 기사는 흔쾌히 그러겠다 말했다. 한노아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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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아의 계획은 단기간에 짰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완벽했다. 물론 그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노아의 연기력도 한몫했다. 한노아는 처음으로 제 본업이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싶었다.
한노아의 계획은 이러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머리가 아프다며 훌쩍이고 운다. 기사에게 편의점이나 약국에서 약을 사다 달라고 한 뒤, 그 사이에 기사의 내비게이션 최신 검색 기록을 뒤진다. 그리고 기사가 돌아오면 약을 받아서 들고 하나 삼킨 채 집으로 향한다.
한노아는 당시에 더 실감 나게 구라치기 위해 즉석에서 약 세 알을 입에 털어 넣었는데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은근하게 올라와 한노아를 괴롭히던 두통과 미열이 덕분에 싹 사라졌다. 기사의 차를 타고 오면서 문자로 미리 매니저를 불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를 보내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벤을 탔다. 매니저에게 주소를 넘겨준 뒤 한노아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남예준이 있는 곳이 생각보다 멀어 두 시간 정도는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매니저가 깨우는 소리에 한노아가 번쩍 눈을 떴을 땐, 온통 밤에 물든 자연물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거대한 저택이 먼저 보였다.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어느 창문에선 불빛이 번쩍번쩍 빛났고, 어느 창문은 아예 암전이었고, 어느 창문에선 은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노아는 마음과 달리 몹시 여유롭게 양치 도구와 물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스킨로션을 바르고, 은은한 발색력을 가진 틴트를 입술에 펴 바르고, 차 안에 있던 무선 고데기까지 사용하여 스스로 단장을 마쳤다. 날이 몹시 추웠지만 과감히 패딩을 벗고 매니저가 준비해 온 코트까지 빼입었다. 그리고 나서야 매니저에게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매니저는 거침없이 걸어가는 한노아의 뒷모습을 무척이나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맹렬한 추위에 몸을 떨며 차에 탔다.
"어? 한노아다!"
한노아가 저택의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서 담배를 태우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한노아의 또래처럼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연예인이 신기한지 우르르 몰려와 기웃대며 한노아와 말을 붙여보려 안간힘 썼다. 한노아는 적당히 그들을 상대하며 자신의 목표에 유리하게끔 상황을 만들어갔다. 이것이 자신이 속해 있는, 있어 왔던, 있을 자리였다. 한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예준? 아, V 투자사 걔? 이층에 있을 걸?"
유용한 정보를 습득하자 한노아는 바로 사람들을 떨쳐내고 남예준이 있을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노아가 예고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방 안에서는 비명이 난무했다. 대부분 남녀가 옷을 벗고 뒤엉켜있다 허겁지겁 이불 속으로 숨는 경우가 많았고, 불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문을 연 한노아에게 삿대질 하며 욕을 하거나, 역한 향이 나는 매캐한 연기 사이로 풀린 눈동자들이 한노아를 향해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한노아는 남예준을 찾으면서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묘한 불안함에 젖어갔다. 도대체 남예준이 이런 더러운 곳에 제 발로 왜? 그 기사가 설마 남예준을 납치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모든 답은 문 너머에 있었다. 한노아가 마지막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곳에서 남예준을 봤을 때.
"남예준···?"
"음···?"
은은한 조명 사이 눈에 띄게 밝은 것이 있었다. 완전히 풀린 눈으로 게슴츠레 자신을 바라보는 남예준이 그러했다. 웃통을 발가벗어 드러난 뽀얀 살결에는 알 수 없는 붉은 꽃들이 피어나 있고, 번들거리는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 남예준이 침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예준의 맞은 편에는 제 시간을 방해받아 기분 나쁘다는 듯 한노아를 째려보는 자신만큼 아름답지도, 몸이 좋지도, 키가 크지도 않은 남자가 있었다. 한노아는 그 광경을 보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가,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 머리가 아팠다가, 웃으며 제 앞에 앉아있는 상대를 달래는 남예준을 보았다가, 이내 흐려지는 시야에 아무것도 볼 수 없어졌다. 곁에서 남예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아야, 여기 어떻게 왔어?"
그 목소리에는 짜증도 묻어있었지만 걱정도 잔뜩 껴있었다. 한노아는 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애를 다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만큼 보고 있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한노아를 어지럽게 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에 한노아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노아야."
한노아는 옷을 껴입고 급히 쫓아와 자신을 잡는 남예준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남예준 조차 없는 고요한 곳에 가고 싶기도 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노아는 한쪽 팔을 남예준에게 내어준 채 길이 보이는 대로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남예준이 앞질러 자신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눈을 가린 손은 축축했다. 물기에 찬바람이 닿자 손이 시렸다. 마음은 그보다 더 시렸다. 남예준을 좋아했나?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남예준과 함께라는 게 좋고, 남예준이 자신을 특별히 대우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우월감에 젖을 뿐이었다. 남예준은 그저, 그냥, 당연히 제 곁에 있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러하듯 남예준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나 봐봐, 노아야."
한노아가 남예준의 부름에 응답했다. 얼굴을 가린 손바닥을 천천히 내리며 남예준을 응시했다. 남예준은 다정하게 한노아의 눈물을 쓸어내렸다. 한노아는 남예준의 손길이 고파 떨어지려는 손에 볼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남예준이 한노아의 볼을 아예 제 양손으로 붙잡아 가뒀다. 그리고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촬영할 때 많이 힘들었어?"
그 목소리가 너무 태평해 한노아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아니라고 답한다면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한노아는 여전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서글퍼도 되는 걸까. 생각해보니 촬영할 때도 힘들긴 했던 거 같다. 남예준의 목소리를 못 들어서. 남예준과 연락이 안돼서. 끝나고 나서도 남예준을 볼 수 없어서. 그리고 제가 몰랐던 남예준의 이면을 나보다 못난 새끼가 알게 되었다는 게 참을 수 없어서.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섞여서 한노아는 문득 키스하고 싶어졌다. 제 앞에 있는, 십년지기 죽마고우이자, 평생을 파트너로서 함께 하기로 다짐한 남예준과.
"너···, 그딴 심해에 사는 아귀처럼 생긴 놈이랑 섹스하고 싶냐?"
영화촬영의 여파로 거친 억양이 뒤섞인 한노아의 목소리가 남예준의 귀를 강타했다. 남예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한노아의 볼에서 손을 떨어트리자 그 손을 한노아가 덥석 붙잡았다. 한노아는 잠시 망설이다 남예준의 손바닥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시선은 여전히 윽박지르듯 날카롭게 남예준을 향해 있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한노아의 가슴이 마구 동했다. 제 입술 자국을 새기려는 모양인지 한참을 떼지 않던 한노아가 이내 이를 드러내어 도톰하게 올라와 있는 남예준의 손바닥 안쪽 살을 살짝 깨물었다. 남예준이 몸을 흠칫 떨며 손을 물리려 하자 이번에는 한노아가 그를 순순히 놓아줬다.
"차라리 할 거면 나랑 해. 섹스."
나른한 목소리로 정확하게 발음하는 된소리. 피식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 눈물을 흘려 빨갛게 부어오른 두 눈이 마치 불길 같았다. 타오르는 눈빛으로 남예준을 바라봤다. 남예준은 당황한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결국 한노아에게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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