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 썰
놔갱
(사망소재 ㅇ, 클리셰 ㅇㅇㅇㅇㅇㅇ)
한노아 무관이고 남예준 문관인데 둘은 정말 오랜 친우였음.
남예준이 한노아를 마지막으로 본 건 한노아가 전쟁에 나가기 전 봄날 목련잎이 떨어지던 때 남예준을 찾아왔을 때였음. 잘 다녀올 테니 승리 연이나 준비하라던 한노아는 자신만만하던 말과는 달리 도망친 장군을 대신해 군을 이끌다가 그만 명을 다했고, 시신조차 찾지 못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함.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 남예준은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항상 한노아가 없다는 게 이상하게만 느껴짐. 염을 하지 못했으니 그냥 친우가 멀리 떠나 보지 못하는 것만 같았음. 혼례를 할 때도, 대과를 합격했을 때도 남예준은 가장 먼저 저를 축하해줘야 할 한노아가 없다는 걸 느낄 때마다 한노아의 죽음을 실감함. 한노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예준이 크게 기뻐할 일이나 슬퍼할 일이 있으면 열 일 제쳐두고 남예준을 찾을 인간이었기에.
그러던 중 남예준이 기묘한 소문을 듣게 됨. 망자와 생자가 만날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딱 한 번 있다고. 그런 것에 절대 솔깃하지 않을 철벽 선비였지만 요즘 들어 한노아가 문득문득 생각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수소문 함. 한노아에게 꼭 해야 할 말을 못 한 미련도 있음.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에 가기 전날 괜히 아끼지 말고 다 말할 것을. 결국 생자와 망자의 만남에 대해 아는 어떤 어른을 찾아낸 남예준은 목숨을 건 도박을 함. 어르신은 남예준에게 이것저것 챙겨주고는 마지막으로 작은 모래시계 하나를 쥐여주고는 남예준에게 그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함. 다행히 모래가 엄청나게 천천히 떨어져서 남예준은 어르신께 큰절 올리고 길을 떠나게 됨.
걷다보니 어떤 대문이 보여서 어르신이 알려주신 대로 남예준이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리고 이렇게 말함
- 걷다 보니 길을 잃었사온데 어디로 가리이까.
그러자 문이 스르르 열림. 남예준 개 깜짝 놀라서 소리지를 뻔했지만 선비정신으로 참아냄. 비록 눈물은 못 참았지만.
눈물 닦고 감사합니다, 연신 외치며 들어가니 정갈한 몸가짐을 한 채 차를 마시는 한 사내가 있음. 남예준이 주춤대니 와서 앉으라고 함. 사내가 차로 목을 축이더니 말함.
- 산자가 제 발로 저승길에 올랐으나 하늘이 비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니 천운이로다.
앞사람이 입을 벙긋하는 게 분명한데 그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은 오싹함에 남예준의 팔에 소름이 돋음. 사내는 두꺼운 갓을 쓰고 있어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것으로 미루어보아 웃는 듯했음.
- 큰 운을 끌어다 썼으니 돌아간 이승에선 죽는 날까지 재수가 없으리라. 그래도 억울해 마라. 그대가 스스로 맞바꾼 운명이지 않느냐. 누굴 만나러 왔지?
갑자기 본론 꺼내는 이름 모를 사내 탓에 남예준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음. 어른이 설명해준 내용엔 직접적인 화두를 던지는 이는 없다고 했으니 의중을 잘 파악해서 대답해야 만날 수 있다고 했음. 근데 여기 이 사람은 그냥 떠 먹여주니 수상하잖음. 남예준이 답 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의 입가에 더 짙은 그림자가 짐.
- 이리 바보같이 기회를 날릴 셈이냐.
남예준 그 말 듣고 정신 번쩍 차림.
- 저는 제 벗을 만나러 왔습니다. 제 오랜 벗인데···, 저를 물론 잊었을 수도 있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기에···.
- 이름. 생년월일도.
- 한노아 입니다. xx년 2월 10일 생입니다.
사내는 허공에서 무언갈 뒤적거리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함. 남예준 바짝 쫄아서 굳어버림. 사내는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더니 이렇게 말함.
- 지금은 만날 수 없겠는데?
- 예?
남예준 개 패닉 상태 됨. 어떤 마음으로 가정도 내팽개치고 이곳에 왔는데 한노아를 볼 수 없다니. 남예준이 방울방울 눈물을 쏟아내자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손수건을 사내가 내 밈. 남예준은 고맙다며 눈물을 훔쳐냄. 남예준이 진정이 된 듯 하자 사내가 다시 입을 엶.
- 그래도 내가 지나가다 그에게 전해줄 수는 있으니 한번 속 시원히 털어 놓거라. 친우 대하듯 그렇게.
- ···,진짜 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아무렴. 내가 이 저승계의 마당발이니라. 친우 대하듯 말해주면 내 보존 두루마리로 네 모습을 담아두었다가 그에게 전해주도록 하지.
남예준이 모래시계를 힐끔 쳐다봄 모래가 다 떨어지고 1/3정도 밖에 남지 않았음. 아마 저승에서 좀 더 빨리 떨어지는 듯했음. 이제는 한노아를 못 만난다 하더라도 진짜 이 사내를 믿고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음. 그래서 눈 딱 감고 눈도 안 보이는 그 사내의 문을 마주하려하며 한노아에게 하듯 제 미련을 전함.
- 혼자 가니 좋더냐. 이 나쁜 놈. 승리 연 다 준비했더니···. 그래도 괜찮아. 널 이미 용서한 지 오래다. 그곳은 외롭지 않으냐? 춥지 않으냐? 어디든 잘 지낼 거라 믿는다. 사실 네가 전장에서 돌아오거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남예준이 잠시 망설이다 이내 결심한 듯 물을 가득 머금은 눈과는 달리 굳건한 표정으로 말을 이음.
- 나 너를 연모한다, 노아야. 참으로 연모했어. 너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남예준은 더는 말하지 못했음. 쥐고 있던 모래시계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감.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엶.
- 운이 좋군, 선비양반.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나 보아. 한노아 그자가 내가 송신함과 동시에 곧장 연통이 왔어. 그도 시간이 없으니 내게 전해달라 하더군.
남예준이 곧장 고개를 들고 앞의 사내를 바라봄. 사내는 목을 가다듬더니 말하기 시작함. 근데 그 목소리가 남예준이 너무 보고 싶어 했던 자의 것이라 남예준의 눈이 땡그래짐.
-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바보야. 나도 나의 마지막 때까지 널 생각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은애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 예준아.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니.
남예준은 그 말을 오열함. 오만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뒤섞여 정신 잃기 직전이었음.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남예준이 들어온 문을 활짝 열어젖힘. 남예준의 모래시계가 거의 다 떨어지기 직전이었음. 남예준은 오라 하는 사내의 말에 비틀거리며 대문으로 걸어감. 남예준이 대문을 넘어가기 직전 사내가 제 얼굴을 가리던 갓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남예준에게 말함.
- 이제는 이별이야, 예준아.
남예준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한노아가 남예준이 기억하던 소년의 모습으로 천진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음. 이미 남예준은 대문에서 발을 뗀지라 그 얼굴을 오래 보진 못했음. 허망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남예준은 문득 제 손에 쥐어진 손수건이 시야에 들어옴. 그곳엔 어떤 단어가 서툰 자수로 박혀있었음.
'戀'
마지막 한자는 그리울 연 입니다! 연인 할 때 그 '연' 맞습니다.
혹시 추가 설정이 궁금하신 분들은 하단을 참고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설정을 좀 더 풀어보자면 노아가 18에 전장으로 향했구요, 20에 명을 다했는데(전쟁은 예준이가 25살이 되던 해 끝남) 노아는 원래 그 때 죽을 팔자가 아니었습니다. 전장에서 남을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값이 아주 높은 공덕으로 취급받아 남들 벌 받을때 노아는 놀아요. 그러다 심심해서 차사 일을 좀 맡게 되었고 보직은 산 자를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세에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고 예준이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망자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노아와 같은 차사가 중간에서 가로 막으니까요. 그러나 예준이처럼 저승 언저리에 닿으면 가끔씩 차사가 망자에게 말을 전해주는 경우는 있습니다. 아니면 산 자가 그리워하는 목소리를 흉내내어 위로하거나 그런 식입니다. 절대 못 만납니다.
그리고 원래 산자가 저승에 오면 차사는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요. 왜냐면 얼굴을 본 순간 혼이 불리되어 죽은 자가 됩니다. 노아가 얼굴을 보여준 건 순전히 꼼수 쓴 겁니다. 예준이를 완전한 이승에 두고 사실 네 앞에 있던 게 나였다. 라고 말한 거죠. 부르고 싶은 이름도 불러보면서요. 그래서 남들은 저승사자가 제 얼굴 보여주며 이름 3번 부르고 데려갈때 예준이는 이름 2번 불립니다. 이미 한번은 노아가 불렀기 때문에.
노아가 하는 차사 일도 보직이 보직이다보니 실은 심심할 때가 더 많습니다. 노아는 심심함에 못이겨 여인들이 하던 자수에 눈독을 들이고는 맹연습 합니다. 한가지를 잡으면 끝을 보려는 성격이기에 얼추 자수가 그래도 볼만해졌다 싶어졌을때(저승의 시간이 이승의 시간보다 빠름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손수건에 예준이가 그리울 때마다 저 한자를 새겼어요. 나중에 올 예준이에게 주려고. 자신의 그리움의 증표였죠. 하지만 결국 예준이가 그리움을 쥐고 가네요. 예준이는 평생 노아를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둘은 서로 좋아했는데 티는 못냈습니다. 아무래도 둘 다 꽤 큰 양반가 출신이기도 하고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그저 친구로 오래 지내는 것만이라도 좋다 그런 생각으로 감정을 눌렀죠. 어렴풋이 노아는 혹시 예준이도? 정도의 느낌은 받았습니다. 예준이는 완전한 짝사랑이었구요ㅎㅎ 노아도 예준이도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면 은근히 마음을 전할 의향이 있었습니다. 비록 끝이 좋지 않았지만요.
마지막으로 둘 다 몰랐던 사실 한가지가 있는데 우연이라도 같은 감정을 품은 생자와 망자가 만나게 된다면 그 둘의 인연이 엄청나게 질겨져 그 다음생에도 또 같은 감정을 지닌 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감정이 분노였다면 서로에게 화를 일으킬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감정이 사랑이라면 서로 사랑에 죽고 못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와 예준이의 감정은 사실 서로를 오래도록 못만났기 때문에 사랑보다는 그리움이 큽니다. 아마 그들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늘 그리운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불타오르는 사랑보단 애틋함이 더 커서 더욱 오래 함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사족이 길었습니다...ㅎㅎ
trick or 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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