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ective.2
임시동맹
그의 이름은 한노아. 예준과 동년배로, 예준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욱하는 마음에 노아에게 내지른 반말을 더 이상 마음의 불편함 없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또래였던지라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예준은 어쨌든 노아를 내보낼 생각 뿐이었다. 사람을 믿고 싶은 것과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별개였으니까. 예준이 말 꺼낼 타이밍을 보는 동안 노아는 태연하게 원래 이 집 식구였던 것처럼 마당에서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노아는 뻔뻔하게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어쩌다보니 하루를 내리 쉬었다. 객식구 하나가 예준의 정신을 쏙 뽑아버려 예준은 노을이 질 무렵에야 자신이 아무 것도 안 하고 멍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사실 아무 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노아를 계속 뜬 눈으로 감시했으니까. 그래도 하루가 실속 없이 지나간 것 같아 예준은 갑자기 불안함이 몰려왔다. 이 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물이든 음식이든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이다. 예준은 두배 세배를 뛰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러고 있다니.
"사치다, 사치야."
"뭐가?"
끼익, 끼익. 그네가 움직일 때마다 기름칠 안 한 쇠줄이 비명을 질러댔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앉아있으니 더 발악했으리라. 예준은 노아와 단 둘이 있는 이 타이밍이 그를 내보낼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나 노아가 예준보다 반 박자 더 빠르게 말을 걸어와 예준의 입이 다시 닫혔다.
"근데 예준아, 나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 안 되냐?"
예준은 자신의 의견과는 정반대의 제안에 당황스러웠다. 노아는 예준이 답해줄 때까지 예준에게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부담스러움에 헛기침을 한 예준이 노아의 눈을 피하며 답했다.
"되겠어?"
"응."
"무슨... 안 돼."
"뭐? 왜 안 되는데?"
"당연한 거 아냐? 난 아직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여긴 나만 사는 곳이 아니야."
예준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돌려 돌려 말했지만 요약하자면 자신은 밖을 돌아다니며 생필품이든 음식물이든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하는 입장이고, 너를 아이들이 있는 보육원에 두고 자신이 돌아다니기엔 아직은 불안하다는 이야기였다. 예상외로 노아는 예준의 말을 경청했고, 또한 수긍도 했다. 노아가 꽤 진지한 태도로 임하자 예준은 조금 안심했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줄 알았다, 노아가. 그래서 노아의 입에서 제 발로 가겠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너. 지금 뭐가 제일 필요해?"
노아는 그네에서 내려와 예준의 앞에 서 가볍게 물었다. 예준은 노아를 올려다보며 그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것도 건진 것은 없었다.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노아의 말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현재로서 예준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물이었다. 단순히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을 넘어서 감자를 찔 때도 물은 있어야 했고, 질병 예방을 위한 개인위생에도 물은 필수였다. 또한 어느 정도 깨끗한 물은 그 자체로 화폐가치가 있었다. 바로 마실 수 있는 안전하고 깨끗한 2L 생수 한 병이면 보육원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하루를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과 맞바꿀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준은 가장 먼저 물을 떠올렸다.
그 다음 떠올린 건 희망이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 그저 득도한 듯 평안함을 느끼는 그런 비현실적인 것 말고, 단순히 내일을 살아갈 희망. 예준은 그게 필요했다. 그러나 그건 지극히 허황된 생각이었다. 어느 누가 무형의 것을 제게 줄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예준은 잠깐 든 생각을 까맣게 지워버렸다. 마치 그런 것 따윈 애초에 떠올리지도 않았다는 듯.
"아무래도 물...? 전기 끊긴 뒤로 물도 안 나와서 지금 다들 난리니까."
"그래? 내가 그거 넉넉히 구해다 줄게. 대신 당분간 나 재워줘."
"응?"
"나도 애초에 공짜로 지낼 생각 없었어. 나 그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
어깨를 으쓱하는 노아를 보고 예준은 곰곰이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노아는 가방에서 속옷 하나를 꺼내 갈아입고는-예준은 눈을 감은 채 돌아서 있었다.- 예준에게 재워준 보답이라며 따지 않은 500mL 생수를 한 병 건넸다. 예준은 이 귀중한 걸 왜 덥석 주지, 물에 무슨 약이 섞였나 불신의 눈빛으로 한동안 물을 살펴봤고, 노아는 그런 예준을 보고 또 빙긋 웃으며 예준이 건넨 감자 하나를 맛있게 먹었다. 예준이 물이 새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게 되어 소중하게 물 한 병을 품에 넣었을 때 노아는 예준에게 보육원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준은 다시 눈이 가늘게 뜨고 노아를 바라보았고, 노아는 단순히 궁금한 것 뿐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예준은 가이드 겸 감시의 역할을 하기 위해 노아를 따라다니며 노아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말해줬다. 아이들이 가꾸는 밭에 매년 무엇을 심고 지금은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벽에 걸린 유치한 단체 사진에는 예준이 왜 없는지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노아가 꽤 꼼꼼하게 살피는 탓에 예준이 난감할 때도 있었다. 가령 예준이 스무해 넘게 이곳에서 자랐어도 알지 못했던 마른 우물을 발견한다든지, 보육원 담 끝에 작게 나 있던 개구멍의 존재를 찾아낸다든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노아는 탐색이 끝나자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술래잡기하는 판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저녁 먹기 전까지 뛰어놀았다.
예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아를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 오늘 아무 것도 안 했잖아."
"육아도 노동인 거 몰라?"
뻔뻔한 대답이 돌아오자 예준은 말문이 막혔다. 노아가 명랑히 웃으며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예준의 입을 더 틀어막았다. 노아는 그대로 예준에게서 등을 보이며 몇걸음 멀어진 뒤 다시 예준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노아의 머리칼을 붉게 물들였다. 예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노아의 뒤를 쫓았다.
"다른 좋은 곳 많은데 왜 꼭 여기에서 지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좋은 곳? 어디?"
"근처에 빈 집도 많고, 정부에서 제공했던 쉼터 같은 것도 있어."
"아-, 그런 곳? 유감스럽게도 난 인프라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럼? 너한텐 뭐가 중요한데?"
"정."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예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또한 간만에 들어본 단어이기도 했다. 그 정이 연장과 관련된 정은 아닐 것 아냐. 정이 밥 먹여 주나? 이런 시대에 무슨 정을 찾아. 예준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노아의 발언으로 해소됐다.
"난 외로움이 싫거든. 그래서 잠도 혼자 못 자잖아, 등신같이."
예준은 아무 말 안 했다. 그저 씻고 싶다는 노아에게 샤워용 물을 받아둔 화장실을 안내해주고는 물 아껴 쓰란 당부만 하고 뒤돌았다. 때론 빙산의 일각만 드러날 뿐인데도 지금과 같이 보이지 않는 깊은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래,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노아도 그동안 많은 사정이 있었겠지. 어림짐작으로는 뭔들 못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예준은 노아를 헤아려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화장실 앞을 서성이던 예준이 노아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선고했다.
"내일 너 하는 거 보고 결정할게. 너 여기서 지내는 거."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노아의 행동이 멎었다. 예준은 노아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든 말든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제가 한 선택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래를 슬쩍 들춰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다 감당할 수 있는 미래면 좋으련만. 예준은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 길을 낡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걷는 것만 같았다. 나아가기를 선택했음에도 무엇이 나올지 몰라 두려웠다.
"그런데 나 어디서 자?"
노크도 없이 노아가 불쑥 예준의 방문을 열고서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색에 잠겨있던 예준은 깜짝 놀라 몸을 움칫대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봤다. 밝은 머리칼,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맑은 피부에 점 하나. 시작은 언제나 불안함과 동반하고, 선택은 항상 또 다른 책임을 불러온다. 예준은 푸른 눈동자를 정확히 마주하며 말했다.
"여기서 나랑 같이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책임지면 된다. 예준은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첫 번째 책임이 시작됐다. 예준은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_
아, 또다.
누군가 내 몸을 더듬는 느낌.
어둠 속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도망가고 싶지만 몸이 뻣뻣하다.
소리지르고 싶지만 물속에 갇힌 마냥 숨 조차 쉬기가 힘들다.
숨막혀.
살려줘.
아니, 차라리 죽여.
_
감겨있던 예준의 두 눈이 갑작스레 뜨였다. 예준은 쿵쾅대는 심장과 박자를 맞추어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 옆에서 같이 자기만 하면 한번을 그냥 넘어감 없이 꾸는 악몽 탓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가슴팍에 닿아있는 따끈한 무언가를 느끼고서 예준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한번 어그러진 불안의 탑은 쉽게 멎지 않았다. 예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예준은 눕거나 잠 들 때 누군가의 살결에 닿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했고. 지나친 암흑에 삼켜진 시각이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을 만져댄 그 불쾌한 감각만이 선명해지고 비대해져 갔다. 예준은 치열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떠올리려 애썼다.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지금을 도피하기 위한 한 가지만 있으면 되었다.
예준은 주위를 두리번대다 연한 빛이 살랑이는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다 생각났다. 찬란했던 노란빛을 가득 머금은 소년이.
한노아.
그 석 자가.
"하... 내가 어쩌자고..."
같이 자자고 한 걸까. 못 잘 거 뻔히 알면서.
예준은 뒷말을 삼켰다. 노아가 자는 걸 지켜보다 자신은 슬그머니 나와 방문 앞 복도에서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이미 하룻밤을 새운 상태여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마 노아는 옆에서 함께 자다 자신을 끌어안은 듯했고. 어쨌든 수상쩍은 온기의 주인이 누군지 명확해지니 예준은 갑작스레 안도감이 밀려와 몸에 힘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노아와 일정 이상의 거리를 유지한 채 바닥에 녹아내리듯 누워버린 그는 몸과는 반대로 맑아진 정신에 눈을 끔벅이며 다른 생각들을 이어 나갔다. 특별할 건 없었다. 늘 하던 생각이었다. 내일 어떤 것을 어떻게 구해올까. 상처가 덧나지 말아야 할 텐데. 한노아가 정말 물을 구해올 수 있을까. 그런 것들.
예준은 피곤함에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무래도 복도에 나가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할 듯했다. 예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와 이불을 들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못 잔다는 노아가 마음에 걸려 마지막까지 노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거듭 확인한 뒤였다.
"예준아."
"......."
"예준아."
"......."
"남예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예준은 겨우 눈꺼풀을 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노아...?"
"왜 여기서 자."
복도에 난 창을 보니 하늘이 푸르딩딩했다. 곧 동이 트려나.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쌓인 피로감이 예준을 짓눌렀다. 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앞으로도 쭉 이럴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 노아가 깊게 잠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나온 건데 몇시간도 채 가지 않아-체감상으로는 고작 몇십분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찾아 나오다니. 그렇다고 예준이 노아보고 다른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할 수도 없는 터였다. 알게 된 지 이제 만 하루가 지난 노아를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포용해줄지 판단하는 것은 예준의 입장으로써는 이른 처사였다.
"자다 깼는데 너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
"들어와서 자. 나 너 없으면 못 자."
나는 너 있으면 더 못 자.
예준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취한 사람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예준을 노아가 붙들었다. 예준은 몸을 살짝 흔들어 손길을 거절했고 노아는 고분고분하게 예준이 원하는 대로 놓아주었다. 둘은 또 같이 누웠다. 예준에게 타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예준의 신경이 곤두섰다.
"예준아."
불안감에 잠 못 들던 예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노아를 바라봤다.
"나 너 안고 자도 돼?"
장난기 묻어있는 노아의 말에 알 수 없는 처량함이 감돌았다. 예준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예준은 반사적으로 싫다는 의사를 표하려 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만큼 잠을 재워주면 노아가 빨리 나가지 않을까 하는. 자신의 잠이야 틈틈이 채워주면 될 것이다.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지만 깨끗하든 말든 일단 물을 구해다 준다는 노아를 피곤한 상태로 보내는 것도 아니다 싶었다.
"그래, 맘대로 해."
예준은 노아에게서 등을 돌리며 답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준의 등 쪽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예상치 못하게 꽉 끌어안는 노아의 손길에 예준은 살짝 당황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모순되게도 오히려 어딘가 속박되어있는 그 느낌이 예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곧이어 목뒤에서 노아의 숨결이 닿았다 멀어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했다. 축축한 그 느낌이 서서히 체내에 감겨들어 갔다. 예준 또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_
예준이 갑자기 정신을 차렸을 땐 아주 한낮이었다. 눈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끔뻑끔뻑 하던 예준은 이내 옆에 노아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사람이 일어나는 소리조차 못 듣고 자다니, 자신의 실책이었다. 예준은 자신을 향한 짜증을 가득 담은 큰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보육원 바로 뒤에 위치한 뒷산에 올라간 모양인지 보육원 안이 고요했다. 얼마나 단잠을 잔 것인지 예준의 머리칼이 잔뜩 눌려있었다. 예준은 방문 하나하나를 열어젖히며 노아가 있는지 확인했다. 허기가 져 속이 쓰렸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노아의 짐가방 마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나갔나? 아니면 아예......."
노아가 이대로 떠났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예준의 마음이 급해졌다. 어차피 노아가 진짜로 떠났다면 자신이 그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소량의 물로 눈곱만 뗀 예준이 늘 함께 지니고 다니는 배트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 바로 아래에 떨어진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잠값 하러 간다.
이따 보자 예준아.
예준은 안도감에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노아가 본인이 말한 잠값을 얼마나 해줄지 기대가 됐다. 예준은 쪽지를 바지 뒷주머니에 곱게 접어 넣어두고 보육원을 나섰다. 물은 노아가 어떻게든 구해온다 가정하고, 자신은 다른 것들을 구해오겠다 다짐했다. 상비약을 구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더 급한 건 당장의 먹을 것이었기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동네 구멍가게를 한 번 더 탐색해 볼 생각이었다.
그 외의 세부적인 계획을 어느 정도 세운 예준이 대문을 나서려던 그때, 멀리서 거친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예준이 상황 파악을 위해 대문을 나서자 멀리서 흰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예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예준이 반사적으로 보육원 안으로 다시 들어가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쇠로 된 두꺼운 체인을 이용해 문을 단단히 고정했다.
수상쩍은 흰 차가 정확히 예준이 있는 보육원의 대문 앞에서 질주를 멈췄다. 예준은 바짝 긴장해 대문 옆의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시동 꺼지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달칵이며 차량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숨을 죽였다.
"거기 숨은 거 다 보이거든?"
"으악!"
숭숭 뚫린 대문의 틈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예준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문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아였다.
"문 좀 활짝 열어봐. 차 안으로 들여놓게."
"노아야. 너 도대체...?"
"내일 드라이브 갈래? 근처에 경치 좋은데 있던데."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나니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예준은 멍하게 대문 고리에 감았던 체인을 풀고 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양쪽 문을 활짝 열었다. 노아는 바로 운전석에 탑승해 시동을 걸어 차 머리를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만만하게 차를 들여놓겠다던 말과는 다르게 노아는 운전실력이 형편없었다. 오른쪽 앞머리 한번, 왼쪽 옆구리 한번, 왼쪽 사이드미러 한번 총 세 번을 철문 모서리에 박아대고 나서야 차량은 보육원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차를 보며 예준은 어이가 없어졌다. 드라이브는 무슨 조만간 이 차를 폐차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아도 머쓱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차량에서 내렸다.
"이런, 입구가 너무 좁네. 하하!"
아니다. 입구는 차량이 들어올 때 예준 2명이 양옆에 서 있어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널찍했다. 예준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노아를 바라보자 노아는 슬쩍 눈을 피하며 움푹 팬 차량의 옆문을 만지작댔다.
"차는 도대체 어디서 가져온 거야?"
"그냥 길바닥에 버려진 거 주웠어. 원터치라 바로 시동 걸 수 있겠더라고. 이거 타고 좀 멀리 나가면 뭐든 구하기 쉬워질 거야."
"아니, 물 구해오겠다더니..."
"물도 구해왔지. 깜짝 놀랄 걸? 트렁크 봐봐."
노아가 운전석 쪽에 위치한 트렁크 버튼을 눌렀다. 예준의 표정이 트렁크가 입을 벌리는 속도에 맞춰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가득 채워진 생수 네 통이 트렁크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 안 되겠다. 예준은 그 모습을 보고 차마 하지 못했던, 하지만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그 말을 꺼냈다.
"어... 일단 정말 고생했어, 노아야. 고, 고마워 근데..."
"근데?"
"너 설마... 사람을 죽... 아니, 헤치거나 그런 거... 아니지...?"
예준의 생각은 나름 타당함이 있었다. 애초에 이 정도의 물을 한 번에 구하기 위해선 살인도 서슴지 않아야 가능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예준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노아가 쉽게 사람을 헤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현 상황이 여의찮더라도 자신의 선에서 과감히 쳐내야만 했다. 자신을 헤칠 수 있는다는 가정은 둘째치고, 급한 상황이 오면 분명히 그가 아이들을 위협에 빠트릴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무슨 힘으로 건장한 성인 남성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응할 수 있겠는가. 예준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한편, 예준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아는 왠지 예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아 웃음이 자꾸 나왔다. 예준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노아도 한 번에 이정도 양의 파밍을 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다. 노아는 눈을 곱게 접어 한번 웃고는 성큼성큼 발을 움직여 예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예준은 어쩐지 잔뜩 겁먹은 고양이처럼 노아의 시선에 삼백안을 드러내고 정면으로 맞서며 뒤로 찔끔찔끔 도망갔다. 어느 정도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노아가 자신의 얼굴을 불쑥 예준에게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왜? 내가 사람 죽였을까 봐?"
"아니, 나는 그냥. 어... 그러니까...."
예준의 목젖이 크게 한번 움직였다. 노아는 잔뜩 겁먹어 횡설수설하는 예준의 머리칼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북북 머리칼을 헤집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노아의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예준은 당황스러움에 몸이 살짝 굳었다. 할 말도 전부 잊어버려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예준의 몸을 가득 채우던 긴장이 조금 가셨을 즈음 노아가 입을 열었다.
"나 사람 죽일 정도로 간 큰 놈 아니야. 경우에 따라서 폭력은 좀 쓸 수도 있지만?"
노아의 답변에 예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아를 바라봤다. 노아는 펄쩍 뛰며 답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미친 인간이 날 죽이려고 달려들면 나도 맞서야지, 그럼 죽어?"
예준이 노아의 추가적인 설명에 납득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예준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노아를 바라봤다.
"의심해서 미안."
"오해 풀었으면 됐어."
가볍게 받아친 노아가 물통을 나르기 시작했다. 예준 또한 옆에서 함께 도왔다. 물통을 보육원 내로 들여놓은 후 예준이 다시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노아가 예준에게 물었다.
"너 어디 가게?"
예준이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나도 나가서 뭐라도 구해와야지."
"내가 구해왔잖아."
"사는데 물만 필요해? 여유 있어도 미리미리 구해둬야지. 어제도 못 나갔는 걸."
예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노아는 못마땅하다는 듯 예준을 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예준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언갈 잘못 말했나 싶어 했던 말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그른 말을 하진 않은 것 같아 노아의 답이 오길 기다렸다. 노아는 별 다른 말은 안 하고 그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예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같이 가자."
"아냐, 너 피곤할 텐데 그냥 쉬어도,"
"내가 집에서 뭘 할 줄 알고 혼자 둬? 너 아직 나 못 믿잖아."
체내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예준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입이 바짝 말랐다. 사실 노아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으나 노아가 아침부터 고생해가며 식수를 네 통이나 가져온 걸 생각하면 예준의 입장에선 빈말이라도 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준이 잠시 아무 말이 없자 노아는 입술을 곱게 휘며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가.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나 실컷 감시해. 감시하는 김에 오붓하게 드라이브도 하고."
노아가 예준보다 앞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밖으로 가볍게 뛰어가는 노아를 보며 예준 또한 걸음을 옮겼다. 예준이 대문을 열었고 노아는 시동을 걸었다. 둘을 태운 흰 승용차가 굳게 닫힌 보육원의 대문을 등지고 점점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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