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갱_나비,BLOW

나비, BLOW 中

나비


아주 잠깐이었지만 한노아가 등장하자 소란스럽던 식장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한노아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도 그의 미모에 홀린 듯 시선을 그에게 고정했다. 누군가는 옆 사람과 수군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휴대폰을 꺼내 몰래 한노아를 촬영하기도 했다. 한노아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결코 급한 티를 내진 않았다. 한노아는 식장을 둘러보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남예준을 찾았다. 한노아의 눈 밑 글리터가 마치 눈물처럼 처연히 빛났다.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본 후 한노아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접수대로 향했다. 그가 밟는 거리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함께했다.

한노아는 제 수트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백지수표 한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접수대 위에 굴러다니는 펜을 잡아 수표 위에 작대기 하나 긋고 거침없이 원을 그려 나갔다. 접수대에서 아닌 척 곁눈질로 한노아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금액이었다. 한노아는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여상히 축의금이란 글자가 쓰여 있는 흰 봉투에 이름 석 자 적고 돈을 넣은 뒤 접수대에 있는 사람에게 건넬 뿐이었다.

"한노아 입니다."

"아, 잠시만요."

접수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두손으로 공손히 한노아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들고 명단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노아 세글자를 확인한 직원이 식권과 함께 남예준이 있는 대기실을 안내해주었다. 한노아는 식권을 쥐고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 달려가 남예준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물었다.

"그런데요."

"네?"

"예준이랑 무슨 관계에요? 예준이 친구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해서요."

"웨딩업체 직원···, 인데요?"

"아, 하하- 그러셨구나. 돈 관리 아무한테나 맡기는 거 아닌데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까 놀라서 물어봤어요.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한노아가 눈웃음을 살살치며 사과하자 직원이 아니라며,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들 많다며 거듭 말을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굉장히 친절하게 고객을 응대했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노아는 덕분에 없던 인내심도 끄집어내는 경험을 했다. 결국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오갈 거 같아 보이자 한노아는 선한 낯빛으로 칼같이 선을 그었다. 직원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지만 다시 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남예준을 보려면 한층 더 올라야 했다. 한노아는 마지막으로 1층 화장실에서 제 외관을 정리한 뒤에야 계단을 밟았다. 그냥 이건 남예준을 만나기 전 꼭 하는 습관이었다. 남예준은 아닌 척 하지만 예쁜 것을 좋아하니까. 계단을 오르며 도대체 남예준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남예준을 붙잡을 자격이 없어 아래에서 남예준을 바라만 봐야 했을 때가. 그렇다면 반대로 한노아의 진심은 어디까지인 걸까. 그것 또한 잘 몰랐다. 남예준도 자신과 지내면서 이렇게 비참해 본 적 있을까. 틈 나는 대로 남예준과 키스하고 섹스했어도 몰랐다. 서른 줄에 걸려도 여전히 한노아는 미성숙 했고, 한노아의 사랑은 미완성이었다.

나비

오래 본 친구와 성행위를 해도 세상이 두 쪽 나는 일은 없다. 한노아도 남예준도 같은 침대에서 깨어난 다음 답지 않게 잠시 쭈뼛댔을 뿐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남예준은 다시 한노아의 연락에 꼬박꼬박 답장하기 시작했고, 매일 밤 둘은 전화를 붙잡고 시시콜콜한 일과를 나누었다. 그러다 가끔 만나 함께 밥을 먹거나 한노아가 나온 영화나 드라마를 봤고, 아주 가끔은 호텔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이맘 때쯤, 한노아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스케줄이 밀리는 바람에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뛰어오는 한노아를 바라보며 남예준이 추위에 발개진 뺨을 봉긋하게 만들었다.

"나비야, 머리가 엉망이잖아."

한노아가 연신 미안해하며 제 주머니에서 데워두었던 핫팩 두 개를 꺼내 남예준의 뺨에 대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왜 제가 나비냐 물었다. 남예준이 한노아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음···, 예쁘니까 나비야."

말갛게 웃는 남예준이 너무 어여뻐 한노아는 그 별명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평생 그 애칭을 잊고 싶지 않아 배우 커리어에 지장이 생길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손목 안쪽에 작은 나비 모양 타투를 새길 정도로.

예쁜 별명을 지어준 남예준은 대학을 갔다. 그보다 아주 한참 후에 한노아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됐다. 작품이 개봉되자 남예준과의 보내던 꿈같던 시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노아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영화 홍보 차 여러 좆같은 예능에 나가야 했고, 인터뷰를 해야 했고, GV 스케줄에 참석해야 했고, 잡지 촬영도 해야 했다. 계속 그 일들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한노아의 처음은 언제나 남예준이었기에 혼자 먼저 영화 모니터링을 하진 않았다. 억지로 하루 짬을 내어 영화관을 대관해 남예준과 함께 제가 출연한 영화를 즐겼다. 그렇게 영화를 즐기다 입술도 섞고, 은밀한 곳을 주무르기도 했다. 한노아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어느 감정에서 기인하는지는 파악 못했지만 어쨌든 행복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고점을 찍으면 남은 것은 떨어지는 일 뿐이었다. 잠시 방심했던 한노아에게 그런 순간은 갑자기 찾아왔다.

예능은 특히나 한노아가 피곤해하는 스케줄이었다. 논란이 나지 않으려면 카메라 앞에서 8시간, 9시간 혹은 그 이상을 계속 방싯방싯 웃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았다. 요즘 들어 깜짝 카메라라면서 촬영 시작 전이나 쉬는 도중에 말도 없이 카메라를 불쑥 들이미는 무개념 제작진들이 많아져 잠시 촬영을 끊고 쉬어가는 그 시간마저 한노아에겐 노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소속사에 부탁해 예능 촬영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이 예능은 고정 출연진들 셋과 게스트 둘을 두고 진행하는데 게스트들은 각각 인터뷰어, 그리고 인터뷰이의 역할을 번갈아 하게 된다. 인터뷰를 당하는 주인공이 왼편 의자에 앉으면 고정 출연진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게스트가 오른편에 차례대로 앉아 인터뷰이에 대한 찌라시와 논란을 말하며 그에 대한 해명을 하라고 한다. 이때 인터뷰이의 마이크는 꺼져있고, 제작진이 준비한 갖가지 미션을 통과해야만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구는 곳에서 날 선 반응이라도 보이면 기사가 어떻게 날지, 방송에 어떻게 나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원래도 피로도가 많이 쌓여있는 상태이긴 했으나 한노아는 촬영 시작도 하기 전부터 지쳐버려 벌써부터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메이크업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대기실에 비치되어있는 소파에 몸을 눕혔다. 피로 축척으로 인한 예민함을 촬영 중 드러내지 않으려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하에.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다 잠에 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노아의 의식이 얕은 잠에 걸쳐져 있을 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싶지도, 몸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아 한노아는 계속 자는 체를 했다. 어차피 매니저 형 아니면 코디 누나일 것이라 생각해 신경 쓰지 않았다. -참고로 한노아는 이 방송에 나가기 전에 소속사를 통해 깜짝 카메라가 없는지 거듭 확인했다.-

"아···, 자나 보네."

예상을 뒤엎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퍽 아쉬운 척을 했다. 그게 한노아의 신경을 톡 치고 지나갔다. 한노아는 당장이라도 남의 대기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개념 밥 말아 먹은 인간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수상쩍은 인물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구두를 신었는지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한노아 주변을 배회하더니 이내 한노아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그리고 탁자에서 무언가를 만지는 듯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인영이 다시 제게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얼굴 앞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빛에 한노아는 눈을 감은 채로 얌전히 입만 벌려 말했다.

"스토커? 페이스 아이디 풀어서 뭐 하려고요? 세상에 간도 크시네."

"으앗!"

깜짝 놀란 건지 남자는 뒷걸음질 치며 그만 한노아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쩍- 하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강타했다. 한노아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팍 구겨졌다. 한노아는 남자가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바닥에 쭈그려 앉아 제 핸드폰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노아가 휴대폰을 들자마자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 유리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

한노아는 쌍욕이 올라오려던 것을 겨우 억눌렀다. 핸드폰 값이야 한노아에게 문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휴대폰 백번 부서져도 그깟 거 다시 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노아의 핸드폰은 불과 서너 달 전 남예준과 같은 기종으로 함께 맞춘 것이었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이전엔 부모님이 사주시는 것만 썼다.- 밤새 고심하며 함께 고른 핸드폰이라 그 의미가 더 컸다. 한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몸을 뉘었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마를 쓸어올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제야 기물파손을 해놓고 아무 사과도 없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그러게 누가 놀래키래?"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모양인지 한노아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본 순간 한노아는 화도 낼 수 없었다.

"어차피 뭐! 그거 뭐, 얼마 안 하잖아요. 내가 다시 사줘요? 물어내?"

정말 기연이라면 기연이었다. 남자는 이전에 남예준의 몸 곳곳을 물어 뜯었던 아귀 새끼였다. 한노아는 헛웃음을 치더니 얼굴을 제 양손에 묻었다. 더러운 입술로 남예준의 키스를 빼앗은 새끼는 돈도 많이 벌었을 거면서 쪼잔하다는 등,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존나 꼽준다는 등, 계속해서 한노아의 귀를 괴롭혀 한노아의 인내심을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트렸다. 한노아는 인상을 삭 굳히고 핏발 선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슬쩍 봤을 땐 몰랐는데 메이크업을 꽤 진하게 받은 것을 보아하니 아마 스태프는 아니고 자신과 같은 예능에 출연하는 듯싶었다. 생각해보니 아까 출연진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던 때에 스스로 제 후배라고 말한 것 같기도 했다. 한노아는 언제 분개했냐는 듯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죠?"

"이, 이름은 왜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방송계엔 얼씬도 못할 텐데···, 우리 후배 불쌍해서 나라도 기억해주려고요."

"뭐라고요?"

"싫으면 말고. 참, 휴대폰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실직하면 돈도 없을 텐데 자선 업체에 기부했다 생각할 테니까."

한노아는 너덜너덜해진 제 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가는 진짜 주먹이라도 나갈 것 같았다. 사실 그보다는 아귀 새끼 이름 따위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조금 더 크긴 했다. 냉소를 지으며 한노아가 그의 앞을 지나쳐가자 혼자 씩씩 열을 내던 남자가 한노아의 어깨를 콱 붙들어 돌려세우고는 빽- 소리쳤다.

"먼저 상도덕 없이 군 새끼가 누군데!"

"새끼?"

한노아의 미간이 꿈틀댔다. 남자는 한노아의 반응을 보고는 기세등등해져서 더 우악스럽게 굴었다.

"뻔뻔하게 남의 스폰 빼앗아 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

"스폰? 스폰이라는 게···, 설마 지금 남예준을 말하는 건가?"

한노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폭소했다.

"내가 네 스폰서를 빼앗았는데 그 스폰서가 남예준이라고? 하하-!"

한노아가 제 어깨를 꽉 틀어쥐고 있는 손을 세게 털어내며 역겨움을 무릅쓰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쫙 핀 손을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대며 선심 쓰듯 귓속말을 속삭였다.

"예준이 얼굴 엄청 보는 거 모르죠? 본인이 존나 못생긴 걸 왜 내 탓을 해. 가련하게."

남예준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넘봐. 감히.

한노아의 공격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것인지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한노아는 쐐기를 박듯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나한테 스폰서가 왜 필요해. 내가 남들 스폰을 해줘야 할 처진데. 얼굴도 별 볼 일 없고, 연기로 성공하겠다는 간절함도 없는 너 같은 놈이나 하는 거지. 그런 더러운 거. 아, 아니다. 그런 얼굴로는 스폰서 잡기도 힘 들려나?"

"이, 이 새끼가 근데!"

강한 파열음이 들렸다. 한노아는 갑자기 가해진 충격에 위태롭게 흔들리다 문고리를 잡고 나서야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한노아는 찢긴 입 안쪽 살을 혀로 몇 번 문지르다 다시 실실 웃기 시작했다. 아귀 새끼를 다시 볼 일 없다는 게 기뻤고, 남예준에게 걱정 받을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한노아가 거만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리고 예준이랑 내가 어떻게 스폰 주고받는 관계야. 차라리 애인이라고 하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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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야, 나 여자친구 생겼어."

"뭐?"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한노아는 최근 면허를 땄다. 그래서 시간만 났다 하면 남예준을 보러 남예준이 재학 중인 대학교에 종종 찾아갔다. 보통은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쯤 맞춰 가서 남예준에게 문자를 남기고 기다렸다. 그러면 남예준이 종종걸음으로 해맑게 제 차로 오는데, 그 모습이 어지간히도 귀여웠다. 그럼 둘은 저녁이 될 때까지 잠시 차 안에서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인근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음습한 곳에 차를 대두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노아가 예약해둔 식당으로 가서 맛있게 밥을 먹고 함께 남예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가끔 한노아가 대놓고 후줄근한 옷차림에 캡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오는 날이 있는데, 그날은 꼭 학식을 먹었다. 남예준이 다니는 대학의 커뮤니티엔 대학도 안 간 한노아가 우리 학교에 다니는 거 같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한노아는 남예준의 공간에 그렇게 자신을 드밀었다. 영역표시 하듯 자신의 체취를 묻히고 남예준을 탐했다.

그러나 한노아가 이 모든 걸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론적으로 보자면 남예준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노아가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남예준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모두 따랐다.-물론 그건 한노아도 마찬가지였다.- 맹세컨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모양새도 아니었다. 그러니 한노아는 둘 사이에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어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가끔 의문은 들었다. 친구끼리 섹스가 가능해? 하지만 지금 남예준과 너무나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기에, 일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기에, 그런 고민 할 시간에 남예준에게 연락이나 하고 싶었기에, 피어나는 의구심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 안일함의 여파가 이렇게 한노아의 뺨따귀를 내리쳤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응. ···뭐야, 그 눈빛은? 난 너만큼 안 예뻐서 여친도 못 사귈 거 같았어?"

믿을 수 없어 장난치는 거 아닐까 하고 되물은 질문에 남예준은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 그것도 방실방실 웃으면서. 한노아는 아까 남예준과 함께 맛있게 먹은 연어 초밥이 도로 튀어나올 거 같은 기분이었다. 목으로 모래가 넘어가는 듯 까슬까슬한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한노아는 방황했다. 만나자마자 걱정을 한 아름 받았던 다친 입술 가를 손으로 쓸었다. 일부러 더 걱정받고 싶어서 기사가 뜨고도 이틀이나 지나고 만났는데 순식간에 소용없는 일이 됐다. 소독 열심히 해줬는데 하나도 안 나았다. 아팠다. 너무 쓰라리고 따가워서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스케줄을 취소하지 말 걸. 한노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 제 얼굴에 그림자가 지게 했다.

"난 너한테 안 예쁘다고···, 그런 말 한 적 없어."

"어?"

"축하해. 예쁘게 잘 사귀었음 좋겠네. 난 먼저 좀 일어날게."

"뭐? 벌써?"

"스케줄 있어. 너 보려고 잠깐 시간 뺀 거야."

한노아는 밥도 벌어 먹고살 수 정도로 제가 제일 잘하는 짓을 했다.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 했다. 화를 내자니 그럼 우리가 무슨 관계이기라도 했냐는 남예준의 투명한 질문이 돌아올까 봐 겁이 났고, 진심으로 축하하자니 그건 또 안돼서, 그냥 척 했다. 연기할 때 다른 감정을 품으면 안 되는데, 그럼 사람들에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금방 들켜버릴 텐데. 그러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엔 이제 한노아는 남예준에게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남예준의 주인공은 알고 보니 따로 건재했으니까. 착각한 것이 부끄럽고 서러워 한노아는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치아에 찍힌 볼 안쪽을 남예준이 곧은 손으로 조심히 매만져주길 바랐는데, 다친 입술을 보며 지금보다 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봐주길 바랐는데, 그럼에도 조심히 키스 해오는 남예준의 입술을 흉이 지거나 말았거나 미련하게 탐하고 싶었는데.

있지도 않은 스케줄을 핑계 삼아 처음으로 한노아가 남예준을 내쳤다. 아니, 한노아는 내쳐졌다. 남예준에게. 홀로 돌아가는 길, 한노아는 왠지 남예준과 처음 몸을 섞던 그날이 생각났다. 남예준은 제게 나비라고 했지만, 정작 자유롭게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는 건 남예준이었다. 늘 남예준을 기다리는 것은 한노아였다. 그때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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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아가 파업을 선언했다. 회사는 뒤늦게 온 한노아의 사춘기를 컨디션 난조로 포장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노아는 실제로 병이 났다. 다름 아닌 술병이. 한노아와 적당히 선을 긋고 지내던-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매니저는 모순적이게도 한노아와 가장 붙어있는 날이 많았기에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한노아가 저렇게 정신 못 차리는 원인이 한노아가 틈만 나면 만나러 가는 어떤 사람에 있다는 것을. 웃기게도 적당히 선 긋고 지냈기에 정확히 누군지는 또 몰랐다.

매니저는 제 밥줄 끊기는 게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는 한노아가 왜 저러고 있는지 이유를 알아 오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수미일관 침묵을 지켰다. 한노아는 타인에게 무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셈은 확실히 했다. 여기서 한노아의 환심을 산다면 당분간은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 토끼 같은 마누라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는 기껏해야 시말서 몇장 써 내면 그만일 테다.

한노아는 매일같이 매니저에게 양주를 사 와라 시켰다. 매니저는 심부름 하러 한노아의 집을 드나들 때마다 싱크대를 살폈지만 도무지 뭘 먹은 흔적이 없었다. 대신 양주병만 매일 한 병씩 현관문 앞에 늘어갔다. 매니저는 딱 이틀은 모른 척 했다. 대신 검색사이트에 X일 술 마심, 술 연속 X일, 급성알코올중독 등의 키워드를 계속 쌓아나갔다. 4일째 되던 날 매니저는 회사와 상의하여 병원 전문의를 데리고 한노아의 집으로 쳐들어가 취해서 침대에 널브러진 한노아에게 수액과 영양제를 놓게 했다. 그리고 한노아를 계속 지켜봤다. 한노아는 약이 거의 다 들어갔을 즈음에 눈을 떴다. 왼손이 불편해 꼼지락 대니 매니저가 달래듯 말했다.

"아직 약 더 들어가야 해요."

"아···."

한노아는 제 발밑에 있는 인영이 잠시 남예준이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수액 때문인지 정신이 말짱했다. 한노아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돌아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매니저가 자신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노아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혹시 누구 왔다 갔다거나 그런 거 없죠?"

"제가 와 있을 땐 없었어요."

이제는 감출 생각도 없이 대놓고 실망한 티를 내는 한노아를 보던 매니저는 말을 이었다.

"누가 왔다 간 흔적은 있었어요. 죽이랑 약이랑 두고 갔더라고요."

한노아가 침대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매니저가 다친다며 만류했지만 한노아는 들은 체 하지 않고 카테터를 뽑아버렸다. 손에 피가 흐르거나 말았거나, 거실로 저벅저벅 걸어 나간 한노아는 매니저가 식탁에 들여놓은 죽과 약봉지를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약 갑 하나에 붙은 푸른 메모지를 발견했다.

나비야. 걱정되게 왜 전화도 안 받아. 실종신고 하려다 회사랑 연락돼서 참았어. 죽이랑 약 놓고 갈게. 죽은 18일 오전 9시에 사서 가져온 거니까 반나절 지나면 먹지 말고 버려야 해!


-예쭈닝-

참 지독하고 치밀한 다정함이었다. 3일 동안 다시는 남예준의 정에 속지 않기로 몸을 헤쳐가며 다짐했는데 그 결심이 쪽지 하나에 무너졌다. 한노아는 고작 그 쓰레기 같은 희망 하나에 굳어지려던 마음을 다시 베어내기로 했다. 남예준을 보고 싶었다. 남예준이 다시 자신을 걱정해주었으면 좋겠고, 그런 남예준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남예준을 밤새 끌어안고 그의 목에 코를 박고 살 내음을 맡으며 위로받고 싶었다. 한노아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만 알았지 죽이는 법 따위 몰랐다.

"형, 저 어디 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매니저가 조치를 잘해줘 머리가 아프진 않았지만 어지러웠다. 음주 측정기에 바람을 불면 백퍼센트 면허 정지 당할 꼴이기도 했고, 지금 운전했다간 꼭 사고를 낼 거 같아 한노아는 매니저를 불렀다. 아직 오후 2시였으니 지금 출발하면 남예준의 마지막 강의가 끝나는 시간과 얼추 맞았다. 매니저는 알겠다 했고 한노아는 부랴부랴 씻고 옷을 대충 껴입었다. 모자와 마스크까지 챙겨 나가는 시간까지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남예준이 다니는 성휘대의 경상관은 언덕배기에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가려면 3-4층 정도 높이의 계단을 올라야 했고, 후문으로 들어가려면 가파른 길을 올라 돌아가야 했다. 당연히 한노아는 정문 아래에서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남예준은 후문으로 돌아가면 멀다며 항상 이곳만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남예준의 걸음 따라 한노아는 계단을 밟고 싶었지만 이미 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그러진 못했다.

동전만한 머리통들 사이에서 한노아는 빛을 받아 영롱한 짙은 밤의 색을 찾았다. 남예준은 사람들이 거의 빠지고 마지막 즈음에 등장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예준은 이럴 때 좋았다. 보고 싶을 때 바로 찾을 수 있다는 게. 한노아의 가슴에 무언가 뜨겁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남예준에게 달려가 뜨거운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남예준은 한노아에게 동력과도 같았다. 한노아를 움직이게 하고, 또 한노아를 멈추게도 했다.

남예준은 금방이라도 내려올 것처럼 굴었으나 잠시 발을 멈추고 어딘가를 쳐다봤다. 남예준의 시선 따라 한노아의 시선이 옮겨졌다. 남예준의 시선 끝에는 행복하게 웃는 단정한 흑색의 단발머리를 가진 한 여자가 남예준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한노아의 심장이 급제동했다. 덜컥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한 번에 알아버렸다. 그녀가 이 치정극의 주연이라는 것을. 한노아는 자신이 그들 사이의 불청객이 된 것만 같았다. 자신과 선을 그어버린 남예준을 붙들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자격 따위 없었다.

애초에 한노아는 그렇게 용기 있는 인간이 아니기도 했다. 아귀 새끼와 키스하던 남예준을 마주한 때에도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한노아는 오늘도 한노아로 존재했다. 그래서 한노아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손을 맞잡은 채 온기를 나누는 두 남녀를 허망하게 올려다보았다. 지우개로 선을 지우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 벽이 있었다. 말랑한 지우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우개만 갈려 나갈 뿐이었다.

한노아는 문득 제 행색을 살폈다. 마음이 급해 아무거나 껴입었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보풀 다 일어난 후리스에 물 다 빠진 검은 조거 팬츠, 짝짝이로 신어버린 양말, 너무 초라해서 미칠 거 같은 마음. 그 볼품없는 모든 것들이 한노아를 숨게 했다. 무슨 권리로 남예준이 보고 싶었을까, 나는.

"하···."

한노아는 돌아섰다. 좀 멀리 떨어져 있던 매니저의 낡은 아반떼에 올라탈 때까지 자신을 붙잡아주지 않는 남예준에 섧다가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노아는 오늘로써 모든 것을 끝내기로 다짐했다. 남예준과의 애매한 관계도, 애꿎은 기대도 다 버리기로 했다.

"형, 저한테 시나리오 들어온 거 있어요?"

"노아씨 대본이야 언제나 쌓여있죠. 벌써 차기작 준비하시려고요?"

"네. 예능 나가기 싫어서요."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회사 가보는 걸로 할까요?"

"네. 그리고 내일 저 데리러 와주세요."

한노아의 사춘기가 끝났다. 낙엽의 바스러지는 향이 코 끝을 찔러왔다. 모든 나비가 추위에 못 이겨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한노아의 팔목에 남아있는 작은 나비를 제외하고는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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