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갱_나비,BLOW

나비, BLOW 完

나비, BLOW


나비, BLOW

남예준은 결혼에 이르기까지 몇번의 새로운 연인을 만들었고, 한노아는 딱 그만큼의 절망을 얻었다. 남예준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속이 쓰라려 알코올로 소독을 하고, 그 소독약이 독해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한노아가 죽기 직전에야 남예준은 한노아의 앞에 나타나 제 살을 내어주고 한노아를 숨 쉬게 했다. 한노아는 이러다가 조만간 제가 미치광이가 되거나 아니면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싹 말라 그대로 미라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인내의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한가지 확신을 얻었으니까. 남예준은 한노아를 버리지 않는다. 사랑하는지는 모르더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한노아가 바라던 대로 그는 남예준에게 불변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한 번도 한 적 없던 도박을 감행하는 것이다. 전장에 홀로 나가는 장수처럼 그 어느 것도 믿지 않은 채 오롯이 쌓인 경험들과 깨달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대기실이 있는 복도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노아는 거침없이 신랑대기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누가 봐도 새신랑 같이 환히 웃고 있는 남예준이 몇몇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예준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던 한노아는 매너 따위 잊어버린 사람처럼 남예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익숙하지 않은 발소리에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 한노아의 존재를 파악하고는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한노아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가 안된다면 제가 예준이와 인사를 해도 될까요?"

"아! 저희 다 끝났습니다. 편히 인사 나누세요. 축하한다, 예준아!"

그 뒤로 축하한단 인사말이 한차례 쏟아지고 나서야 대기실은 온전한 침묵에 다다랐다. 아예 양해를 구하고 사진기사까지 내보낸 한노아는 그제야 멀었던 남예준과의 거리를 좁히며 차갑게 말했다.

"준아. 내가 네 결혼까지 축하하게 될 줄 몰랐는데."

"고마워, 축하해줘서."

"축하한단 말로 들려, 이게?"

"그럼. 아니야?"

연신 생글생글 웃는 모양이 아니꼬웠다. 분명 남예준을 사랑하는데 왜 웃고 있는 그는 이다지도 미운지 제 자신도 남예준만큼 이해할 수 없었다. 한노아는 남예준의 밝은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싶어졌다. 하고 싶다면 그대로 하리라. 한노아는 더는 망설이지도, 득실을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더라도 남예준은 한노아를 내치지 않을 테니까.

"아니, 너무 축하하지."

한노아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남예준을 껴안았다. 결혼식 때문인지 평소 남예준이 쓰던 것과는 다른 짙고 묵직한 향수의 향이 한노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향을 맡자 속이 들끓어 한껏 인상이 찡그려졌다. 한노아는 얌전히 그 향들을 벗겨내고 남예준의 체취를 맡는 데에 집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바라던 향이 한노아의 코 끝에 수줍게 닿자, 그제야 한노아는 겨우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노아가 나른함을 잔뜩 머금고 남예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준아···, 어쩌지?"

한노아가 손을 움직여 가만가만 남예준의 등을 쓸어내렸다. 손이 내려가 허리에 닿을 때마다 남예준의 몸이 움찔거렸다.

"나는 너랑 영원히 친구로 있을 생각 없는데."

한노아는 할 말을 끝맺자마자 급하게 남예준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충족감에 몸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남예준의 입술을 물어 뜯고 혀로 핥다, 끝내 열리는 입술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남예준의 몸이 밀리다 못해 벽에 부딪혔다. 더욱 질척이고 적나라한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남예준이 버거워하든, 파고드는 살덩이에 괴로워하든,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한노아는 아랑곳 않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키스했다. 도저히 한노아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 없었던 남예준이 한노아를 세게 밀쳐 강제로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한노아는 행동을 멈췄다.

남예준이 손등으로 번들번들한 입가를 훔쳐내고는 한동안 숨을 골랐다. 한노아는 그런 남예준에게서 여전히 갈증을 느끼며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남예준의 숨이 정상 범주 안에 들어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한노아가 다시 남예준과 몸을 겹쳐왔다. 마음 같아서 당장 여기서 남예준과 개처럼 흘레붙어 먹고 싶었다.

남예준은 자신을 다시 안아오는 한노아를 말리지 않았다. 평소 그랬던 것처럼 다가온 어깨에 기대서 마저 숨을 골랐을 뿐. 그래, 남예준의 이런 점이 한노아를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흙바닥에 선을 그어놓고는 남들이 딴짓할 때 모르는 척 다시 발로 흐트러뜨려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점이. 그리고 그런 모습을 한노아에게만 내보인다는 점이.

문득 한노아의 시선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남예준의 목덜미에 오래전부터 앉아있던 나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이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있는 나비, 한노아. 똑같은 것이 제 손목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을 것이고, 끝내 목도할 것을 알면서도 화장이나 테이핑으로 가릴 생각도 안 한 듯했다. 지난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와 한노아를 덮쳤다. 분명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마치 날 보라는 듯 우아하게 날갯짓하려는 그것을 보자마자 한노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입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였는지 남예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한노아는 때를 놓치지 않는 포식자처럼 남예준의 목뒤에 완전히 자리 잡은 제 분신에 이를 콱 박아 넣고 짓씹었다. 남예준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예준아, 너 진짜 또라이구나?"

남예준의 살갗에서 입을 떼지 않았기에 소리가 반쯤 먹혀들어 갔지만 한노아는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남예준이 한노아의 말을 다 알아 듣고 세차게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아주 명쾌하고 만족스러움으로 가득 찬 웃음이었다. 자신이 봐왔던 남예준의 웃음 중 이만큼이나 진실된 것은 없었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한노아는 그 모습을 보며 남예준의 본연에 집중했다. 남예준이 제게 보였던 다정함, 사랑스러움, 친절함, 배려심 그런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남예준이 바라던 단 하나. 한노아는 그 하나를 정확히 알게 된 순간 남예준의 사랑이, 남예준이 받고자 했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남예준이 포효하듯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하-! 그래 이거잖아, 나비야! 가지고 싶으면 달려들어야지. 쟁취해 내야지! 그래야 네 것이 되지."

"하···."

한노아는 이제서야 남예준이 왜 저를 보고 나비라 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남예준의 바람. 절망적인 순간이 도래해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날아와 끝의 끝까지 열렬한 마음을 토해내는 것. 그것이 끝내 비극과 파괴를 불러오더라도 망설이지 않는 것.

한노아는 실소가 터졌다. 남예준이 자신을 괴롭게 하면서까지 반복해온 행패의 전말에 대한 모든 게 이해되자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남예준의 이것 하나를 몰라서 그동안 계속 남들에게 그를 내어 줘야 했다니,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울분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미친 듯한 감정의 고조가 일어났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는 쾌감과 비로소 남예준을 온전히 가졌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남예준이 또라이인 줄 알았는데 제가 더한 놈이었다. 한노아가 흥분감에 잠식당한 듯 눈을 크게 뜨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남예준을 보며 같이 박장대소 했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며 웃던 그들은 한순간에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서로를 탐했다. 한노아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대며 말했다.

"준아, 너처럼 성격 꼬인 애 받아 줄 미친놈은 나밖에 없어."

"알아.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잖아."

남예준의 답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의 이가 부딪혔다. 발정 난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 뜯고, 상대의 숨을 삼키고, 제 표식을 마구잡이로 남겨댔다. 대기실 문밖이 어수선해지고, 노크하는 소리가 여러 번씩이나 허공에 울려 퍼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예준에게 새겨진 형체만 남아있던 나비가 붉어지다 못해 점점 옅은 제비꽃의 색으로 변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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