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빠져버린 계절엔 (1)

너를 꼭 닮은 맑은 여름엔

유하민은 도어락을 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묘하게 끈적이는 바다 내음을 품은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촌구석으로 혼자 이사 온 사람의 최후인가. 얼른 문 좀 활짝 열어보라는 이삿짐 트럭 아저씨의 외침에 문을 끝까지 열어 고정한 후 집으로 들어갔다. 촌구석이라 집이 비싸지 않아 도심에서 지내던 집보다 여유 있게 고른 탓에 집이 꽤 넓게 느껴졌다. 역시 가구를 좀 더 챙겨올 걸 그랬나. 아니다, 언제 다시 올라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짐은 적은 게 낫지. 가져온 거라고는 침대와 책상, 책장, 옷장, 자전거, 컴퓨터와 TV 그리고 생필품 등이 다였다. 옷이 많은 탓에 짐이 많아 보였으나 막상 옮겨놓으니 그리 많지도 않았다. 짐을 후딱 옮긴 아저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떠나고 없었다. 그래, 정리는 내가 해야지. 땀을 흘려가며 가구 배치를 손보고 정리를 마치니 해가 모습을 감춘 시간이었다. 이사한 날은 짜장면인데…. 흔한 중국집 번호도 알 수가 없었기에 핸드폰을 들어 배달 앱을 열었다. 주소를 바꾸니 가득했던 음식점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한 페이지조차 채우지 못하는 것에 힘이 쭉 빠졌다. 중국집도 선택지가 거의 없네. 두 곳 중 그나마 평점이 0.1점이라도 높고 리뷰가 1개라도 많은 곳으로 선택해 짜장면과 탕수육 하나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친 하민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어내니 피로함이 잔뜩 몰려오는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은 후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고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딱 맞게 저녁이 도착했다. 음식을 보니 급격하게 허기가 느껴져 탕수육 하나를 입에 먼저 집어넣고 씹으며 상을 차렸다. 짜장면이 이렇게 맛있었나? 여기, 맛집이네. 앞으로 짜장면은 여기다. 배부르게 음식을 해치우자 귀찮음이 신체를 지배했다.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흔든 후 몸을 벌떡 일으켜 상을 치우고 그릇을 내놓았다. 그리고 잠깐만 침대에 누웠다가 동네를 둘러보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헉.”

 

눈을 번쩍 뜬 하민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3시가 가까웠다. 부모님께 부재중 통화도 여러 건 남아있었다. 카톡에 문자까지…. 전화는 좀 그렇고 카톡을 남긴 후 가벼운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잠도 다 깬 거 조용할 때 동네나 둘러보자. 그렇게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이 켜진 편의점이 보여 달려갔으나 불만 켜져 있을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알바가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잠시 기다렸으나 문에 붙은 영업시간 안내를 보고는 여기는 편의점도 24시간이 아님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껴진 짠 냄새가 점점 더 진해질 때쯤 하민의 눈에는 바다가 보였다. 밤 온도를 잔뜩 머금어 캄캄한 바다가 눈길을 꽉 잡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홀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보고픈 충동이 일어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나 주변을 살펴보던 때였다. 첨벙, 첨벙. 물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본능적으로 물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세상에. 그 캄캄한 바다에서 사람이 하나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수영이라도 한 걸까? 탄탄한 몸에 큰 키. 잘생긴 얼굴까지. 사람이 맞기는 해? 멍하게 그 남자를 쳐다보던 하민은 곧 당황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잘생긴 그 남자는 누군가와 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누군가는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고래가 이렇게 육지에 가까이 있어도 돼? 아니지, 아니지. 사람이 고래랑 대화를 어떻게 하는데? 이상한, 이상한 사람이다. 하늘도 너무하시지. 저렇게 잘생겼는데…. 하민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제야 그 남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로 돌았지만, 하민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음?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 응? 기분 탓 아니냐고? 그런가 봐. 너도 얼른 돌아가. 나도 오늘 푹 쉬고 내일 학교 가야지. 토요일에 또 올게! 조심히 가!”

 


늦게 잔 탓인지 눈이 떠졌을 때는 해가 너무 높이 떠 있을 시간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도 들어있는 게 없어 대충 수돗물을 마시고는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에 올라타 트럭에 앉아 오며 보았던 마트로 향해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게 제법 시원하게 느껴져 드디어 새 출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 도착해서는 자전거를 나무에 묶어두고 구경을 시작했다. 계란은 꼭 사고, 양념장이랑 조미료도 사야지. 쌀도 사고…. 김치랑 고기도 좀 살까? 아, 기본 반찬들도 사둬야겠다. 김도 잊지 말고 사야지. 카트를 가득 채우고 나니 이걸 다 들고 갈 수 있나?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무거울 거 같은데. 짐들을 뒤적이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하민을 툭 건드렸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네요. 놀러 오셨어요?”

“네? 그게, 이사 왔…. 이사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살 게 많아 보이시는데 저기 보이시죠? 저기, 접수처. 3시까지 접수하면 저녁까지 배달해줘요. 이정도 양이면 배달비도 공짜. 무겁게 들고 가지 말고 배달로 받아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하민은 크게 당황했다. 어제 그 남자잖아? 근데 멀쩡해 보이네. 내가 꿈을 꿨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야, 신경 쓰지 말자. 3시까지라고 했나? 여유는 있네. 다행이다. 조금 더 장을 보고 계산까지 한 하민은 당장 집에 가져갈 물품을 몇 개 꺼내고는 전부 접수처에 맡겼다. 그리고 박스를 하나 받아 꺼내둔 물품을 담아 마트를 나왔다. 세워둔 자전거를 풀고 짐칸에 박스를 묶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엄마. 방금 장 봤어요. 학교는 내일부터 가구요. 그렇게 안 멀어요. 자전거 타고 왔어요. 네, 깔끔하고 넓어요. 네. 네. 무리하지 마시고 시간 될 때 한 번 오세요. 네, 끊을게요.”

 

전화를 끝낸 하민은 자전거에 올라타 집으로 페달을 밟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 다 먹은 후에는 다리미를 꺼내 전 학교 교복을 다렸다. 아직 교복이 없으니 이거라도 입고 가야겠지? 교복까지 다리고 나니 할 게 없었다. 배달은 저녁쯤에 올 거니까…. 게임이나 할까? 약 3시간쯤 게임을 즐기고 기지개를 켜며 몸을 쭉 늘리자 현관문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벌컥 연 하민은 흠칫, 놀랐다.

 

“어? 아까 그분이시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사실 제가 거기에서 일하거든요. 앞으로 종종 볼 거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아! 안으로 옮겨줄까요?”

“아, 아니요. 제가 옮길게요. 감사합니다….”

 

물건을 척 척 바닥에 내려놓은 남자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하민에게 남은 건 그저 배달온 물품뿐이었다. 그냥, 옮겨달라고 할걸. 얼른 옮기고 저녁은 제대로 된 밥을 해 먹자.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유하민. 밥이 되는 동안 사 온 김치로 찌개를 끓였다. 후라이와 말이 중 고민하다 첫날이니 이왕이면 더 맛있는 거로 하자는 생각으로 계란말이까지 휘휘 만들고 나니 타이밍 좋게 밥까지 다 됐다. 그릇에 밥을 담고 찌개를 조금 덜어 상에 올렸다. 계란말이와 케첩까지 올리고 개별포장된 김까지 하나 가져오니 완벽한 한 상이었다. 뿌듯해진 마음에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전송했다. 아들이 멀리 있지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을 좀 덜 하시라는 뜻도 조금 담겨있는 사진이었다. 저녁을 먹고 또다시 치우고 씻으니 아직도 피로가 덜 풀렸는지 눈이 감기었다. 감기는 눈을 붙잡고 알람을 맞추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띠띠띠띠, 울리는 알람에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알람을 끄니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조금 더 뒹굴거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몸을 일으켜 씻었다. 아침은 어제 사둔 빵 하나를 먹었고 우유를 한 잔 따라 마셨다. 설거지는 다녀와서 하자.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벌써 해가 뜨고 있는 게 역시 여름이었다. 아직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더움이 가까운 듯했다. 걸음을 옮겨 학교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교복이 다른 게 신기한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외면했다. 학교에 도착해 대충 돌아다니다 교무실을 찾아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늘 전학 오기로 한 유하민입니다.”

“네가 하민이구나? 잠시만 기다려줄래? 3학년 맞지? 1반으로 배정됐어. 안내해줄 친구 불러줄게. 아, 친구는 아니겠네. 사정이 있어서 1년 꿇은 학생이라 스물이야. 다들 형이라고 부르면서 잘 지내고 워낙 사람이 좋아서 잘 도와줄 거야. 교과서는 점심시간에 오면 줄게. 교복은 곧 1학기도 끝나는 마당에 새로 사기 아깝지? 예준이한테 얘기해봐. 어, 저기 온다. 예준아, 여기!”

 

하민은 그 예준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었다. 이상한 그 남자. 이름이 예준이었구나. 잘생겼는데 이름도 예쁘다. 비록 이상하기는 하지만. 근데 들키지는 않았나 봐. 잘 지낸다는 거 보니까. ...눈이 정말 예쁘다. 바다 같아. 그만 쳐다봐야 하는데. 이상하게 보일 텐데.

 

“음, 우리 구면이죠? 이름이, 하민이었구나. 유하민. 나는 남예준.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가 많이 도와줄게.”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강당, 급식실, 미술실, 음악실, 보건실까지 안내해주었다. 체육관은 어차피 1교시가 체육이라며 미뤄두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사람이 좋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학생 대부분이 예준을 보면 오빠, 형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옆에 있던 하민을 보며 누구인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예준은 그럴 때마다 하민을 살피었다. 얘기하기 싫은 티가 났는지 장난스럽게 비밀이라는 말을 남기고 하민을 잡아끌었다. 하민은 다시금 교무실에 납겨졌고, 예준은 이따 교실에서 보자며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닌가 봐. 피곤해서 헛것이라도 본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넋을 놓고 있으니 선생님이 불렀다.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올라갔다. 반에 들어가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나니 하민의 자리는 예준의 옆이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거니 예준이 얼굴을 가까이해 귀에 속삭였다.

 

“내가 이따가 보자고 했지?”

 

듣기 좋은 음색. 이 형은 안 예쁜 구석이 어디야. 잘생기고 키도 커. 머리 색도 파란 게 예쁘고, 눈동자도…. 성격이 좋아서 주변에 사람도 많아. 하민은 도통 조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속삭임이 닿았던 귀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해가 귀에 떠오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체육관이었다. 전학을 온 날이라는 핑계로 체육관 구석에 앉아 숨을 돌리었다. 아직 누군가와 제대로 대화조차 해보지 않아 같은 반 친구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호기심 뒤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러다 예준과 눈이 마주치자 예준은 활짝 웃어주었다. 체육 선생님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후다닥 하민에게로 달려가 하민의 옆에 앉았다. 아, 벌써 더운 것 같아. 에어컨 언제 틀어주려나? 옷의 가슴팍을 쥐고 옷을 펄럭이니 짭조름한 바다의 내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예준의 펄럭이는 옷에 시선을 두고 있으니 예준은 화들짝 놀라며 팔을 교차해 몸을 가렸다.

 

“너, 어디를 보는 거야?!”

 

하민은 당황해 어버버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빵 터진 예준은 장난이라며 웃었다. 너무 크게 웃은 나머지 체육 선생님께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지만, 예준은 즐거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민을 보며 뒤로 걸어가던 예준은 손으로 밥을 떠먹는 시늉을 하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따가 밥 같이 먹자. 하민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 내내 예준의 교과서를 같이 보면서 수업을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몇몇 애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또 어떤 친구는 매점에서 산 마이쮸를 나눠주어 입에서 포도 맛이 돌기도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자 예준은 배가 고프다며 벌떡 일어났다. 하민은 그런 예준을 따라 일어나 급식실로 향했다.

 

“그런데요, 형. 둘이서 먹어요?”

“응! 아직 다들 안 친하잖아. 밥 먹는데 불편하지 않겠어? 불편하게 먹으면 체해. 아프면 안 되니까. 오늘 학교 처음 왔잖아.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있지. 천사?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천사면 고래랑 대화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들 속에서 점심을 다 먹은 후에는 교무실에 들러 교과서를 받았다. 남은 시간에는 매점까지 구경했고, 하민은 예준의 번호를 받았다. 그렇게 정신없던 새로운 학교의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6교시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유독 뜨겁고 밝던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하더니 갑작스럽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끈적였다.

 

“비 오겠는데. 하민아, 우산 있어?”

“...아니요. 없어요. 형은 있으세요?”

“나도 없는데. 내 집 들렀다가 갈래? 가깝거든, 학교랑. 우산 빌려줄게.”

 

결국 하민은 예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수업이 끝나자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를 쏟아내었다. 우산을 써도 젖을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냥 간다고 할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진짜! 집에 가면 젖었으니 닦으라고 수건도 빌려주실 거 같고,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 가라며 차도 한 잔 내줄 거 같은데…. 이게 무슨 민폐야…! 하민의 고민이 끝없이 이어질 때쯤 가방을 다 챙긴 예준은 사물함에 가방을 넣었다.

 

“하민아, 가방에 중요한 거 있어? 없으면 사물함에 두고 가. 가방 젖잖아.”

 

예준의 말대로 가방까지 사물함에 넣어버린 하민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주말에 집에 초대해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지. 라는 다짐을 할 뿐이었다. 1층에 도착해 심호흡으로 호흡을 가다듬고는 잔뜩 긴장한 하민의 손을 덥석 잡고 예준은 달렸다. 지금 이게 드라마 혹은 영화였다면 명장면이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예고편에 쓰였을지도. 잡힌 손을 큰 눈으로 바라보다 눈에 비가 들어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았어도 앞에 돌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둥 예준의 말이 들려 달리는 행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점점 차 헐떡이는 소리가 조금씩 커질 때였다.

 

“헉, 헉. 하, 숨 찬다. 여기가, 후, 내 집이야.”

 

숨을 몰아쉬느라 고개만 끄덕인 하민을 보며 예준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에 들어가 바로 수건 여러 장을 가져와 한 장은 신발장 앞에 깔아주고 두 장은 하민에게 건넸다. 젖은 신발을 벗고 수건 위에 올라서니 수건이 물을 빨아들여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에 들린 수건 하나를 목에 걸고 남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나서야 목에 걸었던 수건으로 젖은 팔과 옷을 닦아냈다.

 

“나는 옷 먼저 갈아입으면 되니까 하민이, 너 먼저 씻어. 감기 걸…. 미안한데 나 먼저 씻어도 될까? 옷은 아무거나 꺼내입어도 돼.”

“네? 수건으로도 충분해요. 우산만 빌려주시면 바로 갈게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빨리 씻고 나올게. 옷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어.”

 

다급하게 욕실로 들어간 예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곧이어 물소리가 들렸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하민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옷, 갈아입어야겠지? 옷장으로 추정되는 가구의 문을 여니 가지런한 옷가지가 보였다. 검은색의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갈아입으려니 축축한 속옷이 마음에 걸렸다. 이걸 어쩌지. 말을 할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니 갑자기 예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민아! 하민아! 내 말 들리지? 옷장 열면 오른쪽 아래에 3층 서랍이 있는데! 제일 밑에 서랍 열면 속옷 있거든? 거기에 있는 건 다 새 거니까 꺼내입어! 미리 얘기해주는 거 깜빡했어. 미안해! 하민은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안을 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눈을 꼭 감고 제일 위에 있는 속옷을 하나 꺼내고 바로 서랍을 닫았다. 남색의 속옷을 손에 쥐고는 갈아입지도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 문이 열렸고 바다 내음이 훅 끼쳤다.

 

“어? 왜 아직도 그대로야? 내 말 안 들렸구나. 내가 꺼내줄게. 응? 꺼냈는데 왜 안 갈아입었어. 아! 씻고 입으려고 기다렸구나? 좀 더 빨리 나왔어야 했는데. 얼른 들어가서 씻어, 얼른.”

 

하민은 예준에 의해 몸을 일으키고 욕실에 넣어졌다. 조금씩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기에 결국 따뜻한 물로 씻고야 말았다. 예준이 빌려준 것들을 착용하고 나서야 욕실을 나오니 예준은 기다렸다는 듯 드라이기를 들고 다가왔다. 오늘처럼 젖은 날은 머리도 바로 말려줘야 한다나, 뭐라나. 기어코 예준의 손에 머리까지 맡기었다. 따끈한 바람이 머리칼 사이로 속속 들어오니 나른함이 몸이 퍼졌다.

 

“형. 형한테서 바다 냄새나요. 바다 향 나는 바디워시가 욕실에 있었나….”

“어, 어? 있어, 있어. 하민이가 못 찾았나 봐. 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런 소리 가끔 들어.”

“그래도요. 새벽까지 수영하면 위험해요. 고래랑 가까이 있는 것도 위험하고…. 근데 고래가 육지에 올라와도….”

“하민아.”

 

하민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수영이랑, 고래 얘기를 했던가…? 예준이 드라이기를 끄자 위잉 울리던 소리가 사라져 집에는 침묵이 돌았다. 하민의 침 삼키는 소리만이 집을 채웠다.

 

아, 나 지금 망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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