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썰
깜돌
남예준. 나이 서른 셋. 가장 당황스러웠을 때는 무릎이 꺾여 더는 축구를 못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황당했을 때는 바로 지금.
"너희... 뭐하냐?"
체육시간이면 선생이 나오거나 말았거나 자기들끼리 축구를 즐기느라 인사도 나 몰라라, 체육복도 나 몰라라, 수업도 나 몰라라 하던 놈들이 5열 종대 칼각으로 서서 남예준을 기다리고 있었음. 남예준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로 눈을 가늘게 떠 학생들을 바라봤고, 그와 동시에 반장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옴.
"전체 차렷!! 선생님께 인사!!"
"안녕하십니까!!"
"이야, 이렇게 우렁찬 인사라니.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90도로 고개 숙인 남학생들이 고개를 들자 남예준은 가늘게 뜬 눈을 유지한 채 건성으로 대답함. 남예준은 재빠르게 오늘이 만우절인지 스승의 날인지 제 생일인지 모두 짚어봤지만 아니었음. 정말 아무 날도 아닌 날이었음. 어쨌든 남예준은 온 찬스를 놓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인지, 책인지 모르게 돌돌 말아 쥐고 있던 교과서를 쫙 펼쳐 이론 수업 들어감.
"너희들 이렇게 얌전할 때 시험진도 빨리 빼버려야겠다."
그렇게 말하고 남예준 진짜 수업함. 이론 수업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음. 그냥 교과서 쭉 읽어주는 것 뿐임. 어차피 들을 놈 하나도 없을 거 알아서 남예준도 대충 수업하고 나중에 유인물 나눠줌. 수업하다 보면 지루하다고 몸 뒤틀 놈들 분명 나올 거기 때문에 한 20분 하고 뛰어놀게 해야지 생각한 남예준. 졸지도 않고 생각보다 인내심 있게 자신의 수업을 참아내는 애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낌. 결국,
"... 놀래?"
어색함을 못 참고 옆에 같이 뒀던 공 튀기며 물어봄. 근데 학생들이 아니래 괜찮대. 이론 수업 하실 거면 하래.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녀석들이 사람이 된 모습을 보고 괜히 오기가 생긴 남예준...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고 50분 풀로 이론 수업 해버림. 근데 자세 조금 흐트러진 거 빼고는 다들 너무 열심히 들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 기이한 현상이 다음 수업에도, 그다음 수업에도 계속 이어짐. 원래도 남고생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미쳐버리니까 손도 못 대겠음. 그래서 옆자리 선생님께 애들이 이상한 거 같다고 말했는데,
"네? 그래요? 평소랑 같던데... 아, 좀 더 집중을 못하는 거 같기도...?"
아니다. 이쪽은 집중을 너무 잘해서 문제다. 남예준은 조금 더 고민하다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종례 시간이 옴. 종례 시간이 되니 살짝 어수선해짐.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안내 사항 전달하고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쌤!! 하고 부름.
"왜?"
"그... 뭐 물어봐도 돼요?"
"뭔데?"
갑자기 애들끼리 시선 교환이 바쁘게 오감. 그러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함.
"쌤... 저희 유하민 선수님 사인 받고 싶어요."
남예준의 고개가 정확히 45도로 기울어짐. 한껏 좁아진 미간은 덤임. 남예준은 일단 유하민이란 사람부터 누군지 몰랐음. 선수라고 하는 걸 보면 스포츠 쪽 사람인 듯한데 10년 전에 다리 다치고 난 후로는 스포츠 관련 기사 강박적으로 안보는 습관이 생겨서 알 턱이 없음. 다친 이후로 함께 경기 뛰었던 형, 친구, 동생들도 다 연 끊어버렸는데 남예준이 어떻게 그들과 연락을 하고 있겠음. 남예준이 할 답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음.
"어쩌라는 거야?"
"아아, 쌤!!"
"저희 사인 받으면 이번 중간 때 반 일등 할게요!!"
"유하민이 누군데 그래?"
남예준이 뱉은 말에 순식간에 반이 정적이 됨. 딱 3초 지나자마자 원성 아닌 원성이 터져 나옴. 어떻게 체육쌤이 유하민도 모르냐, 유하민을 모르면 그게 아스테룸사람이냐, 아니 그 남예준이 이 남예준이 아니냐, 아니다 봐라 여기 쌤이랑 똑같이 생기지 않았냐, 유하민이 남예준이 아니라 남애정이라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말한 거 아니냐, 유하민 선수가 분명히 남.예.준.이라고 끊어서 말했다, 아이고 얘들아 시끄럽다 그만해라!
남예준이 재빨리 폰으로 유하민 검색해봄. 유하민은 축구 국댄데 이번에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딸 수 있었던 주력이라고 평가가 내려지고, 아무튼 축구로 우리나라에 한 획을 그을 것이네 뭐네 어릴 때부터 유망주였고 어쩌고. 근데 어쩌라고. 남예준은 그렇게 생각함. 이 사람이 나랑 무슨 연이 있다고 애들이 나를 잡고 떼를 써?
"자자, 조용히 하고. 선생님은 그런 사람 모르니까 이만 하교해라."
"아, 쌤 이거 쌤 맞잖아요! 남예준 선수!!"
갑자기 들이미는 자신의 과거 사진에 눈을 찌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음. 과사 공격 당한 남예준이 눈을 질끈 감음.
"얘들이 왜 이럴까. 이건 나 맞긴 한데 나는 모르는 일이야."
"와 치사해!! 왜 쌤만 유하민 선수 얼굴 보는데요!!"
"아니, 얘들아 난 모른다니,"
"유하민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쌤이라는데 왜 모르는 척 해요!!!"
"맞아!!! 왜 모르는 척 해요!!!"
고릴라가 괴성 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남예준은 지긋이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자신은 무고하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소란스러움이 멎지 않자 단전에서부터 소리 끌어올려서 외침.
"조용!!!"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다들 벙찜. 남예준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리는 거 같았음. 애들이 좀 진정한 거 같아 보이자 남예준이 차근차근 설명함. 자기가 스포츠 관련 뉴스는 잘 안 봐서 몰랐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내일 말해 줄 테니 지금은 입 다물고 집에 가라고. 그제야 고분고분 가방을 챙겨 들고 꾸물꾸물 하교하기 시작하는 학생들. 남예준은 그런 애들 보다가 자기도 교무실로 올라감.
본인 서류 처리할 거 마저 한 다음 초록 창에 자기 이름 석 자 검색해보는 남예준. 예전에는 하루에 한 번씩 검색해보곤 했는데 그것도 다 옛날 일이지 막상 하려니까 너무 민망함. 그래도 애들이 지랄발광을 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뉴스란에서 검색해봤는데 진짜 난리도 아님. 기사 제목이 [유하민이 선택한 남자, 남예준은 누구?] 뭐 이딴 거로 도배되어있음. 제일 처음에 뜨는 기사 클릭해서 읽어봤는데 갑자기 자기 과거 사진이 번쩍 하고 떠서 눈갱당하기..
어쨌든 정리하자면 축구로는 국내 원탑인 유하민이 이번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기자회견 할 때 존경하는 인물로 남예준을 뽑았고, 그걸 본 학생들이 처음엔 남예준이 그 남예준은 아니겠지 하며 키득대다 진짜 맞아서 하루종일 선생님 존경모드 on 된 거였다. 마지막엔 시장바닥이 되긴 했지만.
남예준은 그 흔한 sns도 안함. 그러니 그의 근황이 궁금해도 알턱이 없다. 기자들이며 유튜버며 다 꼭꼭 숨은 남예준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음. 그랬거나 말았거나 남예준은 오늘도 등교 중임. 당연함. 남예준이 선생임. 어쨌든 그날의 소동 이후 애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됨. 물론 유하민의 존경 공세도 계속되고 있었음. 남예준만 모를 뿐... 애들도 남예준이 별 생각 없어 보이니까 그냥 이 선생님한테는 뭘 뜯어낼 수 없겠구나(뭘?) 싶어서 포기한 거임.
문제는 늘 한 김 꺼졌을 때 발생함. 별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고 있었음. 유하민과 남예준 관련해서 교내에서 떠드는 소리가 죽었고 남예준도 당연히 잊고 있었음. 근데 퇴근하려고 교문 밖을 나서는데 누가 남예준을 붙잡는 거임. 남예준은 누구냐고 물음. 그랬더니 자기는 뫄뫄 스포츠 기자래. 인터뷰 좀 해주셨으면 좋겠대. 남예준 속으로 개빡쳤지만 사회화 가면 쓰고 생각 없다고 말하고 지나침. 그 다음 날은 자신을 유튜버 근황전국체전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와서는 남예준에게 시간 좀 내달라고 함. 남예준 시간 없다고 함.
아무튼 이런 일이 거의 일주일째 되니까 남예준은 참을 수가 없어짐. 교감, 교장 선생님도 안 좋게 보고 애들까지 구설수에 휘말리게 될까 봐 좀 걱정됐음. 결국 학생들 도움 받아 인스타 아이디 하나 개설함. 거기다가 자신은 축구 은퇴한 지 10년이고 유하민 선수가 누군지도 모른다. 유하민 선수와 관련한 거든 근황에 관련 된 거든 어떤 인터뷰도 해줄 생각 없으니 자꾸 학교로 찾아오지 말라고 함.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협조 바란다고 글 마무리 짓고 올려버림.
그 다음 날 눈 떴는디 다 인스타 알림임. 뫄뫄 기자입니다. 뫄뫄 유튜버입니다. 뫄뫄 잡지입니다 등등 뭐가 많이 옴. 남예준 뭐야... 이러고 집어치우고 준비하고 출근함. 근데 반에 들어갔더니 애들이 난리가 난 거임.
"쌤!! 인스타 디엠 확인 해보셨어요??"
"빨리 확인해봐요!!"
"디엠? 왜?"
"유하민이 쌤한테 디엠 보냈대요!!!"
"쌤이 제발 디엠 봐줬으면 좋겠대요!!!"
알고보니 남예준이 글 올리고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유하민이 디엠 보냈는데 남예준이 못 본 거임. 유하민이 남예준이 디엠 안보니까 봐줬으면 좋겠다고 스토리 올리면서 남예준 태그함. 그걸 애들이 본 거고... 남예준 디엠 어떻게 보는지도 몰라서 헤매야 함. 사실 남예준은 유하민이 디엠 왔다 해도 별로 볼 생각도 없었는데 애들이 간청을 하니 그래그래, 하면서 봐주는 거임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해서 둘이 여차저차 만나게 되고 첨엔 남예준이 개 날카롭게 나는 너 기억도 안 난다. 나 자꾸 언급하지 말아달라. 나는 이제 선수도 뭣도 아닌 일반인이고 자꾸 이러면 우리 아이들한테도 피해가 간다. 이런 식으로 선 팍 그어서 유하민 ㅈㄴ 상처받지만 집념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축구선수 답게 어떻게든 남예준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안착하는 걸 보고 싶었어요... 더 길게 풀라면 풀 수도 있지만 제가 힘드네요...
아 그것도 보고 싶음... 학생들 한정으로 무한 다정남(말은 거칠게 해야함 남고라 거칠게 다루지 않으면 먹힘) 남예준... 그렇게 수많은 인터뷰 거절했는데 방송부 학생들 인터뷰는 받아줘야 함. 학생들 개쫄아서 인터뷰 해주시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는데 남예준이 흔쾌히 ㅇㅋ 해서 놀라야 함. 왜 우리 인터뷰는 하겠다고 했냐 어떤 학생이 물으면 내 이야기 가지고 기자나 유튜버는 고작 돈을 벌지만 너희는 꿈을 꾸지 않냐고. 뭐가 더 값어치 있을 거 같냐고 되물어야 함... 그렇다 남예준은 ㄹㅇ 참 스승이었던 것이다. 학생들 개갓이 감동 받아야 함 그리고 그 인터뷰를 축제 때 공개했는데 알고 보니 유하민도 남예준네 방송부 학생들의 요청에 인터뷰 응한 거지. 그게 남예준이 유하민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되고...
남예준이 축구 관둔 이유는 부상 때문인데 제때 치료 못 받은 탓도 있고 남예준 본인은 사실 그 치료를 계속 받으면서 축구 하고 싶었는데 가정형편이 치료비 감당 하면서 남예준을 기다려 줄 만큼 좋지 않았기에... 걍 남예준이 먼저 관두겠다고 함. 사실 남예준은 어찌 보면 유하민보다도 더 재능있는 선수였음. 그래도 좀 오랜 기간 동안 어떻게 어떻게 치료를 좀 어느 정도 해두고 나서 다시 체교과 원서 넣어서 대학 갔고 모 남고 체육 선생님으로 산지 3년 차임.
유하민이랑 남예준은 딱 한 번 같은 팀으로 뛴 적이 있는데 그때 남예준이 부상을 당함. 그리고 그 부상으로 영영 은퇴했고. 남예준은 그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음. 누구랑 경기를 같이 뛰었고 자기가 어쩌다 다쳤는지도... 남예준에게는 그날이 너무 고통스럽던 기억이라 뇌가 기억을 거의 다 지워버린 거지... 그래서 유하민도 기억 못하는 거고.
유하민은 남예준의 리더십에 첨에 반했으면 좋겠다. 자기는 막내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 일쑤였는데 남예준이 주장 되고 나서 그런 일 일절 없어졌음. 남예준이 가끔 자기 뭐 가르쳐주기도 하고 먼저 인사도 밝게 해주고 사람들이 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마음 맞춰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 보고 멋지다 생각해서 계속 훔쳐봤는데, 남예준도 주장으로써 힘들어하고 스스로 멘탈케어주문 외우고 하는 거 보고 인간적인 면을 보게 되자마자 사랑이 됐을 듯. 자기도 도움이 되고 싶긴 한데 아직 남예준이랑 막 친하고 그러진 않아서 걍 이 악물고 더 열심히 훈련에 임할 듯..
연하 유망주로 축덕판에선 유명했는데 기자가 매번 존경하는 인물 물어봤을 때 일부러 대답 안 함. 자기가 연상만큼 멋있어진 다음에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금메달 따서 그 때서야 연상 언급한 건데 정작 연상은 그런 연하 맘도 모르고 이제는 구설수에 오르기 싫으니까 개싸늘한 반응 보였던 거임. 그래서 연하 마음 박박 찢겼음. 그치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연상 놓치고 싶겠음? 자존심 다 내려 놓고 연락처 교환하고 싶다고 말하는 연하. 또 쾌남 연상은 그거 보고 마음 약해져서 그러자고 쿨하게 전번 교환함. 그렇게 덩치 큰 고양이 키우는 사람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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