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돌_단편모음

너와 함께 살고 싶어

깜돌_가이드버스

가끔 운이 나쁜 경우 센티넬의 능력이 더 큰 힘에 의해 먹히는 경우가 있다. 보통 센티넬이 폭주하기 직전까지 갔거나 폭주했는데 우연히 산 경우, 그러니까 죽다 살아난 경우에 그런 증상이 흔하게 발생한다. 즉, 이런 현상을 겪게 되는 센티넬은 내재하여있는 생명 에너지가 센티넬이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더 큰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능력 먹힘 현상을 일명 잠능(潛能) 현상이라고 부르는데 센티넬에게 나타난 잠능을 보고 세간에선 두 번 볼 수 없는 삶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라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능력을 잃은 센티넬도 과연 같은 생각을 할까? 잠능이 발생한 경우 센티넬에게 능력이 돌아올 확률을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야말로 미래를 목숨과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센티넬과 각인한 가이드가 있다면 그 가이드도 더 이상 센터에서 일 할 수 없다. 능력이 아예 사라져서 각인이 풀린다면 상관 없겠지만 잠능은 말 그대로 능력이 지하 깊숙이 잠긴 것이라 각인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능력적 빈털터리가 된 그들은 공허한 마음으로 센터에서 마지막으로 베푸는 교육활동에 참가한다. 다시 일반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교육인데 검정고시를 위한 강의를 해주거나, 창업 교육, 기술 교육 등이 주요한 과목이다. 사실 제대로 듣는 능력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들 좌절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성실하게 일하던 저기 저 사람.

"예준이 형."

그래, 천하의 남예준도 강사가 와서 강의를 하든 말든 맨 뒷자리에서 책상에 고개 처박고 자고 있는데 그 누가 듣겠냐고.

남예준은 약 석 달 전 폭주했다. 원래 그는 물 속성 센티넬로써 아스테룸에서는 손꼽히는 센티넬 중 하나였는데 S급이어서 유명한 것도 있었지만 빼어난 외모로도 주목을 많이 받았다. (S급이라고 해서 다 잘생긴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도록) 게다가 인성 또한 얼마나 고운지 그가 걷는 모든 길에 미담만 넘쳐났다. 원체 사람이 성실하기도 성실하기로서니 급이 높음에도 절대로 거만한 적이 없고, 늘 자신의 힘으로 남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니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제외하고는 누구나 남예준을 칭찬했고, 좋아했고, 또 존경했다.

센터에서도 남예준을 내세워 기관 이미지를 바꾸는데 성공했고, 그에게 어마어마한 투자를 들이부었다. 남예준은 광고도 찍고, 건강검진 홍보대사도 하고, 예능에도 출연하며 부도 잡게 되었다. 그마저도 기부하고 짬 내서 봉사활동 다니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나날이 치솟는 남예준 인기의 반작용으로 함께 생활하는 다른 센티넬들은 모두 남예준을 아닌 척하며 시기 질투했다. 아니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 뀌거나. 아무튼 둘 중 하나였다. 남예준은 선한 사람이지 바보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할 센티넬들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것이 남예준이 폭주하게 되는 씨앗이 되었다.

남예준은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는 자신의 마지막 현장이 된 그곳에서 제가 정신을 잃기 직전 키득대던 눈깔들을.

"강의 다 끝났어요.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배고프죠?"

"그래, 뭐 먹을래? 치킨 먹을까?"

남예준이 눈 떠보니 제 곁에 있던 사람은 친구도 아니고, 센터장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고, 다름 아닌 유하민이었다.

유하민은 남예준의 페어 가이드로 서로 상성은 높았지만 각인 하진 않은 상태였다. 남예준이 유하민을 처음 봤을 때 유하민은 고작 열여섯이었다. 각인은 성관계가 필수요소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 약 4년을 미뤘다. 유하민이 성인이 되자마자 센터에선 둘이 각인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남예준이 일제히 거절했다. 조금이지만 유하민이 본인보다 키가 컸음에도 남예준에게는 아직 열여섯의 유하민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유하민이 자기 이제 어른이라고 박박 우겨도 안 통했다. 그가 선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의 기원은 유교 자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각인하지 않아도 충분한 가이딩이 되었기 때문에 그 점은 특별히 문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폭주상태에서는 각인의 유무가 굉장히 중요했다. 잠능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산 센티넬들은 모두 각인 가이드가 있었고 그들이 대처를 잘해서 산 것이다. 솔직히 깨어나고는 이것저것 검사하느라 바빠 정신이 없었다. 검사했더니 잠능 현상이 발생했다지, 가족들은 울지, 센터장들은 한숨 쉬지, 그것들이 남예준의 정신을 다 갉아 먹어 치웠다. 혼자 남은 새벽이 되자 그제야 생각 정리 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암울함에 빠져 이것저것 생각하던 남예준이 어떤 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순간 등골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 어떻게 산 거지? 그다음 날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옆에 와 출석 도장 찍고 있는, 와서는 정 없어 보이게 인사 한번, 사과 깎아 먹어도 되냐는 질문 두 번, 딱 두마디 한 유하민을 보며 남예준이 식은땀 철철 흘리며 물었다.

'혹시···. 너 나랑 각인했어?'

돌아오는 답은,

"네에-."

딱 한 음절이었다. 정 없게.

와삭와삭 사과 과육이 씹히는 소리가 들렸고 남예준은 그날부터 유하민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처음은 미안해서, 나중은 원망스러워서.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은 해줬다. 대답까지 씹으면 정말 염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거 같아서. 웃기게도 유하민의 제안은 전부 거절하는 주제에 말이다.

어쨌든 둘은 그렇게 나란히 퇴소 교육을 매일 같이 받게 되었다. 남예준은 이곳에 유하민까지 끌어들였단 생각에 제정신으로 한 공간에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의 이능이 감쪽같이 숨어들어 갔다는 것 자체도 큰 충격이었지만. 1할의 희망에 기대 기뻐하다가도 9할의 현실을 보고는 절망했다. 이제 자신은 완전히 일반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물귀신처럼 S급 가이드의 발목까지 잡고 추락한 인간으로. 아마 천하의 쓸모없는 사람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 창이나 자신과 대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응원한다, 힘내라 등의 말을 했지만 가끔 그런 얘기를 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가이드 귀한데 아깝게 됐다. 남예준의 가족들은 남예준이 더 이상 센티넬로 활동 못하게 되자 굉장히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업 잘 되고 있었는데. 나 곧 연예인으로 데뷔하려고 했는데. 틱톡 같이 찍어서 조회수 뽑으려고 했는데. 남예준은 그 말을 듣고 완전히 무너졌다.

담아두었던 서러움을 털어 놓을 곳이 없어 남예준은 강의를 듣다 말고 충동적으로 센터 옥상정원으로 발을 옮겼다. 하늘의 색이 물빛이었다. 이능이 있었을 땐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자신이 만들어낸 물고래를 가르며 공중 다이빙을 하고 놀았다. 몸이 흠뻑 젖으면 자신을 적신 물을 다시 모아 잔디에 뿌리고 뽀송한 몸으로 다시 옥상에 올랐다. 이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이제는 떨어지는 즉시 즉사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물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먹먹하고 막막하고 눅눅했다. 그때 유하민이 저 아래에 보였다. 손톱만 한 머리가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지 아주 분주했다. 습관적으로 물방울을 만들어 미운 대갈통에 쏘아주려다 남예준은 또 낙담했다. 왜 공중에서 만들어내려던 물방울이 눈에서 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까만 머리가 휙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던 두 눈이 마주쳤다. 유하민의 눈이 커졌고, 남예준의 의도 없이 생성된 물방울도 커졌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남예준은 뒤로 두세발짝 물러났다.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유하민이 화를 내던 모습은 5년을 함께 하며 처음 봤다.

그렇지만 정작 유하민은 올라와서 화도 안 내고 아무 말 안 하고 또 묵묵히 남예준의 옆을 지켰다.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했다. 둘 사이에 마침표 하나 없는 공백이 일었다. 남예준은 답답함에 못 이겨 너한테 물 쏘려고 한 거 아니라고 해명하려다가 그냥 제 눈물이나 닦았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이제 일반인이었다. 예상외로 먼저 입을 뗀 건 유하민이었는데, 사고 발생 전과 같이 자신에게 덤덤하고 당당하게 시선을 맞춰오던 어린 놈이 차마 자신과 눈을 못 마주치겠다는 듯 이상하게 자꾸 시선을 굴렸다. 처음으로 폭주 후 남예준이 먼저 유하민을 바라봤다. 유하민은 겨우 눈을 맞추고 말했다.

'혹시···. 죽으려고 했어요?'

떨리는 동공이 자신의 처지보다 가련해서 어쩐지 시선이 갔다. 남예준은 대답 않고 녹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자리를 피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유하민은 아무리 지겨운 강의가 있어도 절대 졸지 않았다.

"형, 다음 시간 기초경제라는데 치킨 시켜 먹지 말고 밖에 나가서 먹고 와요."

"그래, 그러자. 우리 진짜 최대한 천천히 먹고 오자."

보통 센티넬들이 잠능을 겪게 되면 모든 이능력자를 비롯한 센터 관계자들은 철저히 그 센티넬을 무시한다.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었을 때 말을 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는 무리에 끼워주지 않는다는 것이 맞겠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곧 안 볼 사람이고,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에게 굳이 공적인 얘기든 사적인 얘기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시만 하면 다행일까 각인 가이드의 경우는 센티넬 때문에 평생직장을 잃게 된 것이니 잠능을 겪는 센티넬에게 엄청난 폭언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아무리 센터에서 조치를 취해도 어떻게든 악담을 퍼붓고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남예준과 유하민이 둘이 꼭 붙어 잘 지내는 것은 센터 내 기기괴괴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상대에게 악담을 퍼부은 쪽은 남예준이었다. 유하민은 아무리 춥고 더워도, 밤이 길어도, 비나 눈이 와도, 늘 남예준이 강의를 들으러 기숙사 문밖을 나올 때까지 문 앞에서 남예준을 기다렸다가 함께 가고, 강의가 끝나면 남예준의 뒤를 따라가며 남예준이 기숙사 안으로 제대로 들어갔는지 보고 다시 등을 돌려 자신의 기숙사로 향했다. 가끔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만 기숙사 내 호수 정원 벤치에 앉아 대여섯시간을 뻐기다 제 기숙사로 들어갈 때도 많았다. 남예준은 그런 유하민이 거슬렸고, 짜증 났고, 거북했다. 자신이 보호받아야 될 대상이 됐다는 게 몹시 불쾌했다.

그래서 말했다.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유하민은 입을 꾹 닫은 채 들은 체도 안 했다. 남예준은 자신이 무시당한다 생각했다. 바로 다음 날 뜬눈으로 밤을 지샌 남예준이 처음으로 유하민에게 먼저 제안을 했다. 강의 다 끝나면 어디를 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유하민은 놀란 눈치였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그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배정 된 수업이 다 끝나고 늘 그렇듯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나서는 남예준을 유하민이 쫓았다. 남예준이 향한 곳은 유하민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센티넬이든 가이드든 이 곳에서 등급 판정을 받고 검사를 받으니까. 그러나 센터 연구소는 이제는 남예준도 유하민도 더 이상 갈 일이 없는 곳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수상쩍음을 느낀 유하민이 물었다.

'형, 여기는 왜 온 거에요?'

남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구소 내부에 들어가자 직원들이 놀란 듯 흘깃흘깃 그들을 쳐다봤다. 올 사람이 아닌데 왔으니 신기하기도 할 터였다. 남예준을 따라 유하민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예준은 3층을 눌렀다. 그곳은 연구소장이 있는 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남예준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소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유하민은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남예준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이 자기 일인 양. 노크를 했고, 들어오라는 허락의 음성이 들렸다. 들어가니 소장은 소파에 앉아 달큰한 향이 짙은 차를 마시며 여유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래, 각인을 끊는 연구에 동참하고 싶다고?'

바로 본론부터 내미는 소장의 말에 유하민이 눈을 크게 뜨며 남예준이 입고 있던 셔츠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잡고 흔들었다. 셔츠의 흩날림을 느끼면서도 남예준은 여전히 유하민에게 뒤통수만을 보여준 채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언제까지 하민이 발목 잡고 있을 순 없잖아요.'

긴 문장엔 정이 그득그득 붙어있었다. 그건 유하민이 바란 적 없는 것이었다. 유하민은 끝내 돌아보지 않는 남예준의 팔목을 잡아 끌어 남예준이 자신을 보게 했다.

'무슨,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 왜 그걸 형 혼자 결정하는데요.'

'너는 나 살릴 때 나랑 상의하고 살렸니?'

유하민은 그 말을 듣고 가슴에 칼이 꽂히는 듯한 싸한 통증을 느꼈다. 남예준은 그 말을 하고 가슴을 가위로 난도질 당하는 감각에 휩싸였다. 서로 간에 아무 말도 왕래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연구소장은 하필 또 괜찮은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늘어트린 긴 머리칼을 틀어 올려 묶고는 소장실 내부에 있던 캐모마일 차를 두잔 타가지고 와 소파 앞에 있던 안내용 탁자에 마주 보게 두었다. 그리고는 경직되어있는 두 사람의 몸을 일일이 밀어가며 움직여 그들을 소파에 앉혔다.

'합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 거라면 나는 연구에 동참시켜줄 수 없어요. 장소를 빌려줄 테니 잘 이야기 나눠보세요.'

소장은 그대로 제 방을 나갔다. 방 안은 고요했다. 일이 제 생각과 다르게 틀어지자 남예준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에 휘말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왜 날 살렸어?'

유하민은 남예준의 말에 푹 숙였던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들어 올려 남예준을 쏘아붙이듯 쳐다봤다. 남예준은 기가 차 소리를 빽 질렀다.

'누가 살려달라고 했냐고!!! 너 지켜주겠다고 끝까지 각인 안 한 거 너도 다 알면서 왜 그랬어!!! 도대체 왜!!!'

남예준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에서 메아리쳐 들렸다. 남예준은 반사되어 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귀를 틀어막고 눈을 꼭 감았다. 못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혼자 있으면 습관처럼 내뱉던 말을 되뇌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그냥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죽어, 죽어, 죽어! 손으로 머리를 마구 내려쳤다. 어디라도 때리면 고장 나겠지. 그러면 더 빨리 죽겠지. 다시 한번 죽기 직전까지 간다면 그땐 내 능력이 돌아올 수도 있잖아.

남예준에게 정신이라는 것이 깃들었을 때는 우직한 온기도 함께 있었다. 거대한 따스함이 자신을 끌어안은 채 훌쩍이고 있었다. 유하민이 남예준을 악착같이 안고 또 고쳐 안았다. 늘 자신의 곁에 있어 온 것처럼 고집스럽게 존재했다. 남예준은 자기도 모르게 유하민의 옆구리로 팔을 쑥 집어넣어 꾸물꾸물 유하민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유하민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유하민의 몸이 움찔댔다. 남예준은 축축해지는 어깨의 감촉을 느끼며 물었다.

'왜···, 왜 그렇게 울어?'

유하민이 답했다.

'형이 날 외롭게 해서요.' 

남예준이 유하민을 달래며 말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어.'

남예준의 대답이 유하민을 더 울게 했다. 유하민이 소리치듯 말했다.

'형한테 그런 말 백번, 천번 들어도 나는 상처 안 받아요! 내 말은···! 그러니까 내 말은···, 왜 내가 지금 옆에 있는데도 외로워 하는 거예요, 자꾸···. 흑,···.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럼···.'

남예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쓰게 웃었다. 남예준이 잠시 잊고 있었던 각인의 능력은 아무리 세상의 끝에 있어도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유하민은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한 감정에 계속 노출 됐을 것이다. 그렇게 남예준과 함께 좌절하고, 함께 절망하고, 함께 잠식되고, 함께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유하민은 그 흔한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었다. 사람들을 향해 습관처럼 내뱉던 괜찮다는 그 말을 유하민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남예준이 굳이 괜찮다는 답을 했던 이유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기적이라고 무마하는 자들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남예준은 그렇게 고독 속에 스스로 먹혀들어 갔다.

'그리고 형이···, 형이 왜 내 발목을 잡아요···. 저는 형 아니면 가이드고 센티넬이고 하나도 관심 없는데···. 흡,···. 왜 말을 그렇게 해요···.'

나를 대신해서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때로는 그 자체로 용기가 되기도 했다. 적어도 남예준은 그렇게 느꼈다. 이해 당한다는 것이 이다지도 위로가 됐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고야 말게 했다.

'나···. 사실은 안 괜찮아.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어.'

남예준이 죽어가니 유하민은 또 남예준을 살릴 것이다. 남예준이 익사하니 유하민은 돌고래가 되어서라도 남예준을 건질 것이다. 남예준이 폭주했던 그날 밤처럼. 유하민에 의해 누군가의 첫 숨이 텄다. 새로운 세상을 있는 힘껏 들이마셨던 남예준의 첫 숨은 이상하리만치 짠맛이 났다.

그 뒤로는 평범했다. 아침에 문을 열면 유하민이 있었고, 유하민과 강의를 듣고, 중간에 유하민과 밥을 먹으러 가고, 또 유하민과 강의를 듣고, 유하민과 함께 기숙사에 들어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겨운 수업에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던 남예준이 남 눈치 안 보고 책상에 대자로 뻗어서 잠을 잘 때가 있다는 것과, 유하민이 뭘 하자고 하면 대체로 긍정적인 답변을 한다는 것 정도였다.

요즘들어 유하민은 간혹 남예준의 기숙사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남예준이 요청을 할 때도 있었고, 유하민이 먼저 그러고 싶다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유독 유하민은 화장실을 자주 갔다. 남예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 유하민은 왜 그런 눈으로 보냐며 얼굴을 붉히곤 했다. 함께하는 동안 남예준은 유하민의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슬프면 유하민의 등짝에 도장을 찍었고, 우울하면 유하민과 산책을 가고, 외로우면 유하민에게 엉겨 붙어 잠들었다.

남예준은 가끔 혼자 잠에 들 때면 유하민이 울면서 했던 말을 곱씹었다. 뜯어보면 아주 별것 아닌 말인데, 그마저도 유하민이 벌벌 떨면서 말해서 뜨문뜨문 끊어졌는데, 그냥 그 말을 생각하면 가슴이 찌르르하고 울렸다. 유하민의 그 말이 손난로의 똑딱이 단추라도 되는 양 따뜻하게 남예준을 감싸 안아 늘 좋은 꿈을 꾸게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정작 유하민은 가이드로써의 생활에 별 미련이 없어 보이일 때가 많았다. 가이드로써 남예준의 옆에 섰을 때보다 오히려 남예준이 폭주한 후 이런 저런 실습과 기술을 배우는 것을 더 즐거워 하는 듯했다. 특히 호신술이나 운동을 배우는 등 몸 쓰는 수업 시간에 눈이 빛났다. 정작 진짜 현장에서 몸 쓰던 남예준이란 사람은 동작 하나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예준은 능력을 섬세하게 다루는 것에 특화되어있어 팀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잘했으나, 오롯이 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할 때는 조금 버벅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민은 그런 예준에게 단계를 지어 설명해줬다. 그러면 또 예준은 하기 싫어하는 티를 내도 곧잘 따라 했다.

"아니다, 하민아. 우리 그냥 밖에서 놀자. 수업 째고."

"형이 웬일이에요?"

"싫어?"

"당연히 전 좋죠!"

센터의 생활도 막바지를 향해갔다. 끝내 능력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꿨던 그날은 사람들에게서 잊힌 지 오래였다. 더 이상 센티넬 남예준과 가이드 유하민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괜찮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아마 서로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민아."

"네에-."

제 부름에 재깍 답해오는 목소리에 남예준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예준이 쌀쌀한 초겨울 바람에 붉게 얼어붙은 유하민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러자 유하민의 큰 어깨에 정전기가 떨어졌다. 남예준은 모른 척 손을 펴 자신의 손가락 골 사이사이를 유하민의 체온으로 채웠다. 그리고는 유하민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하민은 그 말을 듣고 추위에 몸까지 얼어붙은 모양인지 자꾸만 삐그덕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예준은 잡은 손을 꽉 쥔 채 거리를 신나게 걸었다. 곧 먹을 치킨이 기대됐고 늘 그렇듯 자신의 앞에 있을 유하민이 기대됐다.

너와 함께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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