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Precursor 10
보낸 사람: 사소한
좋은 밤이에요, 커서님. 여기는 국제 표준시로는 오전 11시 40분,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8시 40분이에요. 이전에 적었던 편지와 비슷한 시각에 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이 편지가 커서님에게 어떠한 형태로 출력되고 전달될 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전송을 보낸 건 메일이 아니라 정말 수필로 쓴 편지거든요. 만일 출력이 되는 데 있어 오류가 난다면 아마 제가 필시.. 악필이여서 그런걸꺼에요. 이해해주세요.
편지에 보낸 사람에 처음 저를 소개했을 때의 닉네임이 아니라 이름 석 자를 한 번 적어봤어요. 커서님이 저를 그리워해주시고, 첫 친구이자 마지막 친구(사실 마지막 친구가 되지 않길 원하지만요! 정말 기쁘지만.. 이전의 편지에 썼듯이, 저는 당신이 잊혀지거나 고독한 건 역시 싫어서요.)로 삼아준다면.. 역시 이럴 때에는 그냥 전부 솔직한 제가 되고 싶었어요. 그냥 닉네임 뒤에 숨지 않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편지는 저 자신 그대로 적고 싶어서요.
먼저 솔직히 추신에 담긴 이야기부터 가볍게 꺼내자면.. 해.. 는 안 될껄요, 아마? 제가 커서님이 적은 편지의 내용에 정말 많은 가량 걱정을 담은 편지를 역으로 다시 돌려받는 이 기분을 어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음, (펜으로 몇 번 북북 긋다 쓰고 긋다 쓴 흔적이 남아 있다.) 피를 좀 지불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건강에는 이상이 없대요!! 건강한 성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 피를 주기도 하니까 그거랑 비슷하게 생각해주세요!! 너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사람 마음이 쉽지 않네요.. 어쩔 수 없나봐요. 아픈 것도 아니고, 조금 어지러운 것 뿐이니 괜찮아요, 정말로! 이게 상황이 바뀌니까 기분이 정말 정말 이상하네요..
그리고 정말로, 세삼스레 주신 편지를 받고 어쩐지 슬퍼지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저와 나눈 그 모든 이야기들이 메모리에 담겨 있고, 언제까지고 기억해줄 건 커서님일텐데 저는 나이를 먹다보면 점차 이 순간들에 느꼈던 감정들이 옅어지고, 흐려지는 때가 오고야 말겠죠.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걸 생각치 못 한 제 탓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무드등을 보고 몇 번이고 커서님의 생각을 해야겠단 생각이 조금, 들었어요. 물론 그 이전에 다양한 것들로 이 기억들을 남기려고 노력하겠지만요. (펜으로 꾹꾹 누른듯한 흔적이 있다.)
그래서 이 기억과 감정이 옅어지기 전에 말따라.. 가능할 때에 모든 것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걸 조금 전하고자 해요. 언제나 그 모든 기분을 전해주려고 한 것도, 그 다정함과 상냥함도, 정성스럽게 쓰여진 글자 하나하나에 지금의 제 기분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의 삶의 일부, 어쩌면 전체를 바꿔줘서 고마워요. 짧은 시간동안 제 안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 짧은 한 달 여간의 시간동안 편지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사진을 찍고, 메일에 한 줄 어떤 이야기를 적을 지 고민하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좋았어요. 핸드폰의 갤러리를 살펴보니 제가 즐거웠던 순간들과, 사소하지만 기뻤던 순간들이 전부 남아 있더라고요. 새벽 시간의 하늘 사진이나, 버스 너머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사진, 크리스마스 트리의 사진 같은 것들이요. 그 순간들이 저에게 있어선 전부 반짝거림이었어요.
무언가를 알아가고, 찾아가는 기쁨이, 어떤 걸 시도해보고 실패해도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이 29년이라는 세월 사이에서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어요. 사실 처음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무방하겠죠. 저는 그 망망대해와 넓디도 넓은 우주와 같은 회색빛 일상 속에서 아주 조금은 제 색깔을 찾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건 전부 이 메일에 답장을 적어준 당신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아마 이 편지 이후에도 똑같은 삶을 살지도 몰라요. 회사에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그리고 퇴근을 하고, 집에서 잠을 자는 그런 일상이요. 그럼에도 그게 마냥 이전처럼 지루하고 공허하게 느껴지진 않을거에요. 저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이야기들이 남았고, 저는.. 반짝임을 찾는 방법을 조금은 알아낸 것 같아요. 저는 아마 이 앞으로의 저의 삶을 조금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언젠가.. 커서님에게 이 모든 것들을 돌려주고 싶어요. 말했었던 언젠가의 우리의 시선과 렌즈가 맞물리는 기적과 희망을 꿈꾸고요. 아마 그건.. 말따라 언젠가 제 세계에서 새로이 태어날 커서님을 통해서나, 제가 전해주신 이 메모리칩을 어찌 사용할 지 등에 달려있겠죠.
저는 조금 더 별에 대해 알아볼까 싶어요. 겨울의 대삼각형과 베텔기우스를 보러 가볼까 싶어요. 그 사이에서 메모리칩에 남아 있는 별들과 성운들을 조금 찾아보고 싶어요. 찾기 정말 많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요. 만일 찾을 수 없다면.. 이 메모리칩에 남아 있는 항성과 별들, 은하, 행성, 성운들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적어보고자 해요. 하늘의 별자리를 그려보며 무언가 회고하고 추억했듯 저도 무언가의 형태로 이 모든 걸 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와 커서님의 이야기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이 반짝임이 두근거리고 예뻤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그 글의 데이터를 언젠가.. 커서님에게 소포로 보내보는 걸 제 버킷리스트의 가장 길고도 가장 힘들지만, 가장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로 남겨놓으려고요.
물론 인간이라는 건 참으로 변하기 쉬운 동물이기도 하고.. 세월에 따라 저 또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커서님을 만들고, 희망과 애정을 가지며 기적을 만들어 낸 존재니까요. 사실 제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발자국 바깥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이 달라진다는 걸 이젠 조금은 배웠으니까요. 어찌든, 무언가라도 남으리라 생각해요.
짧았지만 이 길었던 메일과 편지로 커서님의 큰 프로젝트는 성공으로 남았나요? 첫 편지에서 적어 줬던 그 작은 부탁도, 제가 잘 들어드렸을까요? 물론.. 이 편지가 또 이어질 지, 혹은 여기서 끝일지 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이 편지가 하나의 마침표라면 전에 말해줬던 어릴 적 이야기 중 유달리 오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처음 약속했었던 걸 보여드리고자 해요.
어렸을 적에 제가 애들이랑 논다고 산도 올라가고, 탐험도 했다는 이야기를 적었었죠. 언젠가 한 번은 그것들을 일기로 쓰고 방학 숙제로 제출한 적이 있어요. 그걸 읽은 담임 선생님이 한 번은 학교에서 하는 글쓰기 대회에 나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 생각없이 거기에 나갔고, 저는 거기서 장려상을 받은 기억이 있어요. 장려상이면 그리 큰 상도 아니고, 학교도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장려상이면 거의 참가한 누구든 받을 수 있던 상이였거든요. 근데 그 때가 유독 기억에 남아요. 그 때 부모님의 칭찬을 받아서일지도 모르고, 혹은 상을 받아서, 상품을 받아서일지도 모르죠. 근데 지금 막상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는 아니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 글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 글을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었고, 누가 읽어준 게 기뻤던 것 같아요. 그 글은 저희 가족에 대한 거였거든요. 저희 집, 저희 고향, 고향 친구들 그런 것들이요.
저의 고향과 제가 난 곳을 다시 돌아봤던 이 편지의 여정에서 커서님의 처음을 알고 같은 세계를 볼 수 있었어서 참 좋았어요. 아마 얼마 전에 연락이 닿은 연구원들 또한 커서님이 그리울꺼고, 그 데이터를 봤을 때 기뻤을꺼라고 생각해요. 그게 닿지 못 했더라고 해도 만일 닿았더라면 분명히 기뻐했으리라 생각하고 싶어요. 마치 제가 그 고향집에 갔을 때에 가족들이 반겨주고 저에게 관심을 가져줬던 것처럼요. 그렇기에 커서님이 지구의 안녕을 생각한만큼, 커서님의 지구가 안녕하기를 기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버킷리스트가 달성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요. (정말 제가 무교인데도 온갖 신들에게 온갖 걸 부탁하는 기분이네요.) 그리고 처음에 전해주지 못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전해줄 수 있길 바라요. 그 아쉬움도 그 때에는 전부 풀 수 있도록요. 물론 유성우나 부품 조각의 형태 말고요! 온전한 데이터와 '자아'를 가진 상태로이길 빕니다! (꼭 새로운 갑판을 교체하기를 바라고요! 정말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제가 수리공에 소질이 있었더라면 정말로 고쳐드리고 싶었어요!)(급하게 쓴 필체로 '그치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저만 알고 싶다는 생각이 왜 드는걸까요.. 여전히 저는 절 잘 모르겠네요.'라고 적혀있다.)
저는 어린 날 그 날 쓴 글 다음으로 꽤 제가 좋아하게 된 것이,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게 오래간만에 생긴 것 같아요. 그걸 골라내는 건 역시 참 어렵더라고요. 제가 크리스마스 때 쓴 말이 이대로 돌아오게 될 줄은 또 상상치도 못 했네요. 미안해요, 이게 우유부단해서 그런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최대한 가장 감동 받았던 풍경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초등학생 이후로 제가 제 사진을 찍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고요.
이 사진이 감동으로 와 닿을지도, 이 편지와 사진 자체가 어찌 도착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부디 이것들이 와닿을 수 있기를 바라요. 이전의 편지에도 적었지만, 오늘의 편지에도 그걸 적어볼까 해요. 수필로 적으려고 하니.. 조금 어색하고 창피하기도 하지만요. 당신의 여행의 끝이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저는 당신이란 책을 꽤 오랫동안 다시 펼쳐볼꺼에요. 당신이라는 이야기의 필자는 당신이고,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정말 참 좋아해요.
이전에 적어준 편지의 말처럼 '사라지는 것보단 걸어온 길을 돌아볼 수 있으니, 별에서 태어나 별로 돌아갈 때 그만큼의 노력을 보답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제가 돌려주고 싶어요. 분명 그 끝이 별의 폭팔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이어도, 혹은 오래오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것이라도, 제가 이 보내드리는 사진을 계속 좋아하고, 반짝인다고 생각하는 한은 그 빛은 스러지지 않으리라고요.
당신이 저에게 전해준 따스함만큼 당신께서도 오래토록, 그 외로웠던 우주가 마냥 차갑지만은 않기를 바라요. 오랫토록 안녕하길, 친구. 마냥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사이에서도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내서 이겨낼 수 있기를.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여정이 정말로 멋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부디 좋은 여행을 해요, 친구. 그 끝이 무엇이든 간에 기다릴게요.
/ 당신의 독자이자 친구인 사소한이.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추신. 편지 봉투 안에 사진과 함께 좌표가 적힌 종이 또한 첨부했어요. 결과가 어떤지..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추추신. 편지 봉투 앞 쪽에 우표를 5개 붙혔어요. 편지지를 사러 갔는데 이게 보이더라고요. 어쩐지, 붙혀서 보내고 싶어서 그리 보냈어요.
마지막 추신. 이건 적어야겠어요. 제가 메모리칩 일부를 받고 울상이 되었단 사실을요.. 생각치도 못 한 선물을 이렇게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거 잃어버리면 제가 가보를 잃어버리는 걸로 오늘부터 생각할래요..
* 편지 내에 삽입된 두 그림(커미션)의 출처는 @N2NULL님, @commippu님입니다. 위 쪽의 우표 커미션의 경우에는 단일 이미지를 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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