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밧줄과 대본 (백업)
살아가면 돼
*쓴 날짜: 2021.12.04
*현대 AU, 의인화.
둘은 모르는 사이였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크루아상은 그가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이유를 통 알 수가 없었다. 배우란 이들이 으레 그렇듯 그도 넘쳐흐르는 자존감을 억누르지 못해 아무 곳에나 흘리고 다니는 게 아닐까, 하고 대충 짐작하는 것이 다였다. 배우들이 무대 뒷사정에 관심을 갖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 언제나처럼 궁금증 몇 가지가 해결되면 다시 화려한 조명 아래로 돌아갈 것이다.
"넌 왜 배우를 안 하는 거야?"
그러나 그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을 질문일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지. 크루아상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곧 죽을 사람은
크루아상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어릴 적 무대에 매료된 이후 쭉 꿔왔던 꿈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빠르게 이뤘으니까. 다만 평범하지는 않은 듯했다. 빛나는 무대의 타오르는 연기를 보고서 배우가 아닌 무대 장치에 매료되는 사람은. 그럼에도 크루아상은 이 길을 선택했고 썩 마음에 들었다. 쭉 그렇게 생각했다.
"너한텐 배우의 재능이 있다니까."
"말 좀 그만 거세요."
"왜 안 믿지?"
"누가 믿겠어요?"
그런데도 며칠 전부터 이 누군지도 모를 사람은 집요하게 이상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았으니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 준수한 외모로 보아 아무래도 배우겠지. 크루아상은 무대 뒤의 장비를 점검하고 조작하는 스태프일 뿐이므로 출연진의 얼굴 하나하나를 전부 알지는 못했다. 무대 연출 조율 중에도 마주친 적 없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유명한 사람이라 일정이 바빠 리허설에나 간신히 얼굴을 비추는 그런 대배우일 것이다. 그런 유명한 배우가 대체 무대 뒤엔 무슨 볼일인지. 지치지도 않고 얽힌 밧줄이나 쓰러진 페인트 통 같은 것을 타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넌더리가 났다.
"연기 해본 적은 있어?"
"있을 리가요."
"그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는 거네~. 한 번 해봐, 분명 재능 있다니까."
크루아상은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웃어른을 공경하고, 사람 간의 선을 확실히 지키고……. 아무튼 어릴 적부터 품행이 올바른 모범생이라는 말을 꾸준히 들어왔으니 객관적으로도 공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지금까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 없었던 덕분일 거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깨닫고 말았다.
"저기요. 말 좀 그만 거시라니까요. 대체 저에 대해 뭘 안다고 이렇게 따라다니세요? 제 이름은 아세요?"
"그럼. 크루아상이잖아."
"……."
순간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몰려들어 크루아상은 입을 닫아버렸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상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를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져 아무것도 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있었는데도 미소와 함께 질문이 돌아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안 물어봐?"
"안 궁금해요. 뭐 어디 공연 팸플릿 같은 데서 봤겠죠."
"오~. 어떻게 알았어?"
"하아……."
크루아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극장에 무대 기술 쪽 스태프라고는 크루아상 한 명 뿐이었으니 알고 싶다면 팸플릿에 적힌 '무대 기술 스태프' 옆을 보는 게 가장 쉽다. 그러나 그가 팸플릿에서 굳이 이름을 찾아볼 정도로 크루아상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늘 조명을 받는 배우니까, 무대 뒤가 궁금해서 호기심에 들여다봤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기에.
"근데,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
기분이 최악으로 치닫자 여태껏 대충 넘어갔던 문제도 시비를 걸고 싶어지고 말았다. 무대 스태프를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배우들은 가끔 있었으니 이 사람도 그런 부류겠거니 싶었는데, 굳이 이름을 알아내고 찾아올 정도로 관심 있는 상대에게 대뜸 반말을 해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밧줄 하나를 더 넘어 바짝 다가오며 웃기는 말을 했다.
"너는 왜 나한테 존댓말 해? 너도 반말해도 돼."
정말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 후에도 그는 매일같이 크루아상을 찾아왔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매일 찾아왔다. 하루는 이렇게 한가한 주제에 연출 조정엔 지금까지 왜 안 온 거냐고 따져 물었더니, 중요한 작품 하나가 끝나서 여유가 생겼댄다.
"요즘 배우들은 여유가 생기면 무대 스태프를 귀찮게 해?"
"반말 잘 하네."
"대답을 하라고."
"이건 뭐에 쓰는 장치야?"
"이보세요."
그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권양기 앞에 서 있었다. 애초에 저런 질문에 대답해 봤자 의미도 영양가도 없는 대화가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그가 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심지어 이름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이유를 통 알 수 없었기에 하나라도 더 대답을 얻어내고 싶었다.
"난 네가 배우를 하면 좋겠는데. 넌 모르는 모양이지만, 내 이름 앞에 꼭 붙는 수식어가 '연극계의 미래'거든. 그런 만큼 보는 눈도 훌륭한데. 진짜 내 말 안 믿을 거야?"
물론 크루아상이 그에게 무언갈 얻어내고자 열심히 생각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크루아상은 몸을 일으켜 저도 권양기 근처로 다가갔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내 직업에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무대를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무대 장치지 연기가 아니거든."
"연기도 무대 장치 중 하나야. 없으면 무대가 움직이지 않는 가장 중요한 장치지."
"연기 같은 건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기계가 좋다고, 나는.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도 한 번쯤 해보는 게 어때?"
"그러니까, 대체 왜?"
덜컹. 그가 뒤로 물러나며 바닥의 이음새를 밟아 난 소리였다. 혹은, 그의 말이 떨어지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 곧 죽을 거거든."
아, 그러세요. 하마터면 습관적으로 그렇게 답할 뻔했다. 그만큼이나 평온한 말투였다. 방금의 말을 지우고 늘 하던, 너에겐 배우의 재능이 있다느니 따위의 말을 집어넣어도 위화감이 없을 어투와 표정. 그 안온한 얼굴을 보며 크루아상은 생각했다. 이런 것이 배우인가. 그렇다면 크루아상에게 배우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분명하다. 크루아상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말을 하며 이런 표정을 지을 능력 따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왜냐고 안 물어봐?"
물어봐서 뭐 어떡하라고. 무슨 대답을 듣겠다고 물어봐. 크루아상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별 친하지도 않은 상대가 갑자기 자기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걸 어떻게 자세히 파고들겠는가. 물론 눈앞의 이 상대는 돌연 크루아상이 내일 죽는다고 고백하면 대답할 때까지 이유를 캐물을 위인이겠지만. 크루아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질문해주는 대신 권양기에 매인 밧줄을 들여다보았다.
"놀랐어? 넌 상냥하구나."
분명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크루아상은 이런 무거운 소리를 웃어넘길 만한 성미가 아니었다. 크루아상이 침묵하는 동안 그는 무대 뒤 깊은 곳까지 가볍게 걸어 들어갔다. 그가 선 곳은 어둠 그 자체였는데도 황금색 눈동자가 똑똑히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머리 위에 메인 조명이 자리 잡은 듯 시선을 붙들렸다. 그제야 그가 배우임을 실감했다.
"그냥 질려서 그래. 배우 일에도, 인생에도. 그래서 다 벗어던지고 아주 아주 먼,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려고. 그러니까 네가 떠나버린 나 대신 무대에 서 줘. 우리 닮았잖아. 나처럼 꾸미면 아무도 눈치 못 챌 걸."
크루아상이 살면서 들은 말 중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단어를 고르기도 전에 대답이 먼저 튀어 나갔다.
"싫어. 내가 왜. 그게 말이 돼? 애초에 너랑 내가 닮았다니, 너 빼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리고 뭐, 질렸다고 죽어? 진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너도 언젠간 질릴걸? 스태프 일에. 그리고 나랑 같은 생각을 할 거야. 왜냐면, 우리 닮았잖아?"
"그러니까 안 닮았대도."
그가 점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탓에 이윽고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또렷했다. 가장 뒤쪽의 객석까지 닿도록. 배우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 관객을 위해 있는 힘껏 감정을 실어서.
"좋아, 그럼 기다려 줄게. 네가 질릴 때까지. 그늘에 질려 조명을 받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해. 이 자리, 기꺼이 내어줄 테니까."
원한 적도 없는 자리를 선심 쓰듯 내어준다 말하는 게 고까웠다. 조명을 받는 일보다 조명을 조절하는 일이 더 재미있다고, 앞으로 사천 번을 더 이야기해도 모르는 척하고 제 말만 할 인물이다. 크루아상은 진심을 담아 불평했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너는 듣고 있어?"
"어. 듣고 있다고. 그러니까 말하는 거잖아."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지?"
답을 고민하는 순간 긍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애를 썼지만 목에 걸린 거짓말은 쉬이 튀어나갈 줄을 몰랐다.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그가 저를 지나쳐가자, 그제야 말이 흘렀다.
"너도 관심 없다는 내 말,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는 주제에."
저쪽에서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크루아상은 이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그가 크루아상의 마음이 바뀌는 것을 멋대로 기다려준다는 말은, 아마 배우를 하겠다는 말이 떨어질 때까지 매일 얼굴을 마주 보러 오겠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크루아상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죽으러 갈까?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에서는 쓴맛이 났다. 진심으로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얽매인 인생에 춤을 청하고
그 후로도 그의 얼굴을 보는 나날은 계속되었다. 당연히 먼저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전부 그가 일방적으로 찾아온 만남이었다. 크루아상은 원한다면 언제든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능력도 경력도 충분하니 다른 극장으로 얼마든지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왠지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지들은 아주 잠시 고민한 뒤 곧 포기해버렸다. 무엇보다 그라면 크루아상이 어디로 옮겨도 악착같이 따라올 것 같기도 했고. 유명한 배우라는 사람이 무슨 무대 뒤로 매일 출석을 하는지. 이런 사람이 연극계의 미래라니, 앞으로의 연극계 전망이 아주 암담하다.
"너는 왜 매일 여기 있어?"
"너는 왜 매일 여기 있는데?"
크루아상은 대충 받아치며 이런 사람에게 단단히 잘못 걸린 제 미래도 암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 네가 있으니까."
"저기요. 전 여기 있는 게 당연한 무대 스태프고요, 그쪽은 여기엔 아무 볼 일 없는 배우고요."
"배우도 날마다 무대 위에서 보내진 않아. 그런데 넌 날마다 무대 뒤에서 보내네. 뭘 그렇게 하는 거야?"
그가 말을 끝맺는 동시에 타이밍 좋게 앞쪽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퇴근하기 전 대충 쌓아뒀던 상자 더미가 무너져버린 모양이다. 쏟아진 상자 안에는 깨질 만한 물건이 없었기에 도로 올려두기만 하면 된다. 크루아상이 수습하러 달려가는 모습을 그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며칠간 지켜봤으면 그가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일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았을 텐데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귀하게 자랐나 보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서도 남을 지겹도록 귀찮게 하는 주제에 저는 귀찮은 일을 외면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크루아상은 불만 속에서 상자를 쌓다 말고 방금 질문을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뭘 하냐고 했지. 일단 기자재 점검을 하고, 지금처럼 정리도 좀 한 다음에, 비는 시간엔 새로운 연출 같은 걸 생각하고 시도해 봐. 뭐, 연출을 생각해도 쓸지 안 쓸지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더 멋진 무대로 만들 방안이 늘어나면 좋잖아."
"그걸 매일 해?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그야 재미있으니까."
"스태프잖아. 감독도 아니고, 그냥 무대 스태프.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 그런 게 재미있어?"
뒤를 돌아보자 늘 짓는 표정의 그가 있었다. 크루아상을 비난하려는 의도 없이 정말 순전한 궁금증으로만 던진 질문인 것이다. 이런 자각 없는 악의로 가득 찬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협동해 만들어나가는 무대에 서고 있는 건지. 이 정도의 흠은 덮을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설마 나한테만 이러는 건가? 후자라면 그가 더 싫어지고 말 것 같았으므로 크루아상은 쓸데없는 생각을 끊어내며 답했다.
"어. 재밌어. 근데 그건 배우도 마찬가지 아냐?"
"응?"
"배우도 대본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잖아. 뭐가 다른데?"
그는 방금 한 말의 어떤 점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구나. 우린 묶여 살고 있구나. 넌 무대를 움직이는 밧줄에, 난 극을 움직이는 대본에."
크루아상으로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려운 말이라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이전부터 지겹도록 강조해대던 '닮았다'의 일환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그가 끼워 맞추려 들 뿐이다.
하루는 그가 무대 뒤로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 만난 후 얼굴을 보지 못한 날은 없었기 때문에 크루아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걱정을 하고 말았다. 그는 절대 단념 같은 것을 할 성미가 아니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매일 찾아올 게 분명하니까. 귀찮은 상대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가 늘 죽음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점이 몹시 신경 쓰이게 했다. 퇴근 시간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고민하는 찰나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든 함께 가자. 나는 이제…… 위해서라면…… 상관없어."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평소의 가볍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어서 알아듣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무대 뒤쪽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크루아상은 그가 연기 중임을 알아챘다. 그는 무대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대에 선 모습은 처음 보았다. 연기에 집중하지 않았던 건지, 허공을 보던 그의 시선은 금세 크루아상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대사 비슷한 것을 읊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크루아상은 자신이 대답할 때까지 그가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읊은 대사의 다음이 뭔지 모르는 데다가, 자기 생각을 말하려니 별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인지라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난 잘 모르겠어."
"극이랑 비슷한 말을 하네."
"그래?"
그가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기 때문에 크루아상은 무대 위로 가서 섰다. 리허설 때 몇 번 나와본 적이야 있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적막한 무대에 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매일같이 무대 뒤로 출근하면서도 한 번도 설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위치다. 그러니 배우의 재능이 있다는 그의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겠는가.
"방금 읊은 대사, 이번에 하는 작품 거 아니지?"
"응. 애초에 이 극장에서 한 적도 없을걸? 그냥 생각나서 말해본 건데. 이번에 하는 건 좀 더 시끄럽고 화려하지."
"넌 그런 게 재미없어?"
그는 대답 대신 한참을 웃었다. 자기를 눈앞에 두고 혼자 웃는 상대를 지켜보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어서, 크루아상은 그가 웃음을 그치고 설명할 때까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무대 뒤에선 내가 매일 물어봤는데, 앞에선 네가 질문하는 게 웃겨."
"별 게 다 웃기네. 이런 사소한 것도 웃긴데 연기엔 어떻게 질린 거야?"
"연기에 질린 게 아냐. 배우에, 사는 것에 질린 거지. 삶에 자극도 없고 충격도 없어. 예전엔 대본 백 개로 백 가지 인생을 살 수 있는 배우라면 절대로 질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 난 적힌 글을 외워 읊을 뿐이니까. 무대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인생을 살더라도 막이 내려가면 본래의 인생으로 돌아와야 하잖아."
분명 슬픈 말이겠지만 그의 표정이 평온했으므로 마음에 잘 와닿지 않았다. 하긴,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말을 할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배우라 하니 한껏 부풀린 감정으로 호소한다면 크루아상도 공감하고 말 텐데.
"그런 표정으로 말하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너도 연기를 해보면 한 번에 이해할 거야. 왜냐면 우린……."
"안 닮았어."
"아직 말 안 했는데~."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구두를 신은 덕에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연기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양팔을 쭉 뻗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배우란 무엇일까. 연기란 무엇일까. 요즘의 크루아상은 그의 말 탓인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을 자꾸 하게 되었다. 이게 그가 매일같이 같은 말을 해댄 목적이었다면 성공한 셈이다. 그 사실이 조금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배우에 질렸어."
크루아상이 무언가 말할 새도 없이 말이 이어졌다. 그의 눈에 언뜻 멀고 먼 밤하늘 같은 것이 비친 것도 같았다. 그는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은하를 꿈꾸고 있는 건가.
"하지만 죽을 땐 이 무대 위에서라면 좋겠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럼 난 실직한다고."
말과는 다르게 실직보다 그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말았다는 사실도 기분이 나빴다.
그들의 관계와는 별개로 연극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트가 완성되고 의상을 점검했으며 배우들은 매일같이 모였다. 늘 리허설에야 간신히 얼굴을 비추던 그도 이번에는 그 안에 있었다. 그냥 크루아상의 얼굴을 보러 온 거였겠지만, 실상을 모르는 주변의 사람들은 바쁘면 무리해서 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를 걱정해주었다. 사람들 틈의 그는 크루아상에게 예의 바르게 웃으며 존댓말을 건넸다. 정말이지 배우 그 자체였다.
"3막의 독백 장면 말인데요."
그의 존대는 익숙하지 않아 크루아상은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얼핏 마주 본 표정은 장난기 있는 미소 그대로인데, 여기에 공손히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도 익숙하지 않았다.
"네. 뭔가요?"
"제가 조명 아래에 서도 괜찮을까요? 한가운데 말이에요."
그가 말하는 3막의 장면은 본래 주인공이 무대 한쪽 구석에서 독백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거기서 한참 떨어진 메인 조명 아래다. 주인공 혼자서 빛을 받으며 대사를 읊는 장면이라 어디에 서든 그만이 눈에 띌 거라 별 상관은 없지만…….
"저기 바로 아래 서면 눈이 엄청 부실 텐데요."
"그런 건 상관 없어요. 난 가장 눈에 띌 수 있는 위치가 좋으니까."
배우는 질렸다면서 가장 눈에 띄는 무대의 중앙에는 욕심이 나는 건가? 크루아상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그 편이 더 연극에 좋다고 판단한 거라면, 그는 최소한 자기가 맡은 무대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봤을 땐 전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무대를 떠난 후 연기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크루아상을 제 대역으로 세우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지 않았는가.
"그럼 그러세요. 당신 의견이라면 다들 불만 없겠죠. 감독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래도 크루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아상이 생각하기에도 중앙 쪽이 연출적으로는 더 나은데, 배우가 눈이 부신 게 상관없다며 자처하고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까의 생각대로, 그는 전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 손을 잡는다면
크루아상에게는 전혀 순조롭지 않은 매일이었지만, 결국 무대는 순조롭게 막을 올린다. 그는 돌연 떠나거나 죽어버리는 일 없이 리허설에 참여했다. 지금도 완벽한 주인공의 모습을 한 채 크루아상의 곁에 서 있었다. 방금 연출 하나가 갑작스레 변경되어 조명의 위치를 조정하는 작업 중이던 크루아상이 사다리 위에서 말했다.
"무대 준비하러 안 가?"
"조금만 더 있다가~. 나도 올라가 봐도 돼?"
"위험하게 어딜 올라와. 오늘부터 며칠간 공연해야 되는데, 주인공이 첫날부터 다치면 큰일 난다고."
그렇게 말해도 그가 결국 사다리를 오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을 때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크루아상은 옆의 사다리를 밟고 올라와, 이미 조정을 마친 옆쪽 조명을 기웃거리는 그를 말리며 어린애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거 건들지 마."
"안 건드려~."
"그리고 빨리 내려가. 주인공 같은 중요한 역을 맡았으면 분장실에서 쉬면서 컨디션 관리나 하라고."
"잔소리는."
주인공이라고는 해도 수수한 옷차림이다. 평범한 소녀 역인 주인공답게, 그냥 흰 셔츠에 짙은 갈색의 멜빵바지가 다였다. 그러나 그의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와 머리칼만은 숨길 수 없었기에 누구나 그가 주인공임을 알아채고 말 것이다. 그는 모두의 시선을 뺏는 능력을 타고났다. 본인이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잘 사용하기에 더더욱 누구도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크루아상은 문득 생각나 물었다.
"평범한 소녀가 이런 머리색을 해도 돼?"
"아하하. 응."
그는 웃음을 흘리더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순박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배우한테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외모가 아니야.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지."
"……널 보면 볼수록 나한테 배우의 재능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는데."
"해본 적도 없잖아?"
다시 답하는 표정은 도로 원래의 그였다. 이걸 안 해보면 모르겠냐?
"미안한데, 난 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될 능력 같은 건 없어서. 진짜로 오십 번쯤 말한 것 같아."
분주한 발소리와 함께 개막 십 분 전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주연 배우가 농땡이를 피울 만한 시간은 아니다. 그는 사다리를 순식간에 내려오더니 크루아상을 지나치기 직전 장난스레 말했다.
"오늘, 나한테서 눈을 떼지 마. 멋진 걸 보여줄게."
눈을 떼고 자시고, 여기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그가 말을 마친 뒤 바로 달려 나갔기 때문에 대꾸할 시간은 없었다.
크루아상이 몸담은 극장은 유명하긴 했지만 그리 크지 않았다. 다른 극장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아주 작은 편이었다. 기술 스태프가 겨우 크루아상 한 명뿐이라는 것에서 짐작이 갔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극장이 작아도 한 명이 감당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지원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크루아상이 혼자 맡고 있었다. 덕분에 공연 당일날이면 다른 분야의 스태프들까지 달려와 돕는 일이 허다했다. 아무튼 극장이 유명한 이유는 오래되고 유서 깊은 극장인 덕이었다. 최첨단의 기술보다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기술들을 활용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다지 많지도 않은 객석을, 관객들은 꽉꽉 채웠다. 이 극장에서 몇 년 일했지만 이렇게까지 객석이 가득 찬 것은 처음 보았기에 크루아상은 신기한 마음에 조금 내다보았다. 그가 주역을 맡은 덕분일까. 우습게도 크루아상은 아직도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데. 알아내려면 당연히 알 기회가 백 번은 있었겠지만, 그냥 그가 자기 입으로 소개하기 전까진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루아상이 도로 무대 뒤로 돌아가고, 조명이 모두 꺼졌다. 막이 오름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울렸다.
무대는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훌륭했을 것이다. 바쁘게 기기를 조작하러 돌아다니는 크루아상의 귀에는 극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으니, 막이 끝날 때마다 울리는 관객들의 박수를 토대로 이런 애매한 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기를 보는 눈이 거의 없는 크루아상도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로 훌륭한 배우였으니 성공은 당연한 일이겠지.
3막, 주인공의 독백 부분. 크루아상은 무대 뒤쪽에 있었지만 흘러나오는 노래 덕에 그가 무대 한가운데에 섰음을 알았다. 그의 제안으로 연출을 조금 바꾸었던 그 장면이었다. 한동안은 별도의 조작 없이 독백만이 이어졌으므로 벽에 등을 기대려는 찰나였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해 올려다본 천장에서 무언가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가장 가운데의 조명이 이음새가 헐거워진 채 삐그덕대며 낙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조명의 아래에는 분명, 그가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난 후였다. 왜 이런 일이. 무대 기재 점검이라면 수십 번도 넘게 했다. 당장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에도 감독과 함께 꼼꼼하게 확인했다. 크루아상 외에는 누구도 조명 쪽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대체…….
크루아상은 생각을 멈추었다. 그가 들어오지 않았는가. 자신이 설 무대에 이런 위험천만한 짓을 벌이는 건 상식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그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상식 안에서 행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이유 같은 건 알 바가 아니다. 우선 사고를 막는 게 먼저다. 크루아상이 사다리를 밟고 조명에 달린 전선을 붙들어보려는 찰나 그대로 조명이 낙하했다. 직후 전선을 잡았고, 다행히 조명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명만은 분명히 들렸다. 가슴이 섬찟했다.
크루아상의 행동은 큰 사고를 막았다. 하지만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무대의 한가운데에 섰던 배우는 추락하는 조명에 스쳐 한쪽 눈을 다쳤다. 심한 상처였다. 다시는 그 눈으로는 앞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무대 스태프인 크루아상에게 별다른 징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크루아상이 평소 기재 관리를 성실히 하기로 유명했고, 무대의 막이 오르기 직전까지 장비가 멀쩡했던 걸 감독과 함께 확인했고, 무엇보다 목숨이 위험할 뻔했던 사고가 상처로 그친 것도 크루아상의 행동 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 자체가 완벽한 수리를 끝낼 때까지 휴식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과는 별개로 당분간은 일자리를 잃은 셈이었다.
크루아상은 병문안을 가지 않으려고 했다. 크루아상이 조명의 흔들림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크루아상은 직장을 잃고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을 한순간에 날려 버릴 위험천만한 짓을 멋대로 저지른 사람의 얼굴 따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을 땐 이 무대 위에서라면 좋겠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그 말대로였다. 제가 조명 아래에 서도 괜찮을까요? 그는 입버릇처럼 논하던 죽음을, 크루아상이 관리하는 무대를 통해 실현하려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책임한 일이다. 오늘, 나한테서 눈을 떼지 마. 멋진 걸 보여줄게. 이게 뭐가 멋진데. 그에게 힘껏 화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궁금해졌다. 그가 얼굴에 상처를 입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짙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주연 배우가 사고를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치고도 과했다. 연극계의 가장 큰 인재가……. 그런 말들이 주위에서 웅성거렸다.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크루아상은 한 마디도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우습게도 그제야 처음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의 이름을 찾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인터넷 사이트 메인에 오늘의 사고를 다룬 뉴스 기사가 걸렸기 때문이다.
시간지기.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연기 영상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유명 동영상 플랫폼에 자리한 그의 이름으로 된 채널이 수십 개의 영상을 올려준 덕분에. 크루아상은 그 중 가장 조회수가 높은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그와 마주 보았다. 무대의 한가운데에서 누구보다 밝은 조명을 받으며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 황금빛의 눈동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얼굴. 한순간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타까워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지금 장면의 1초 뒤 갑작스레 떨어진 조명이 그의 한쪽 눈을 앗아간다면. 크루아상조차도 탄식했으리라. 이것이 연기에 매료된다는 감각이구나. 그제야 알았다. 만일 크루아상이 어릴 적 본 무대가 이것이었다면 크루아상은 배우를 지망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크루아상은 그의 연기에 탄복했고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도 그처럼 조명을 받고 싶어서 따위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 조명을 비춰 주고 싶어서. 보다 완벽한 무대에 그를 세워주고 싶어서. 그를 위해 최고의 연출, 최고의 음향, 최고의 무대를…….
그 모든 것을 그에게 선사해 그와 함께 최고의 연극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방금까지 증오하던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들게 한다는 점에서, 크루아상은 그의 천재성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남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크루아상은 병원을 찾아갔다. 평소 그와 크루아상이 종종 붙어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많았기에, 관계자들은 안타까워하며 병실로 크루아상을 안내해주었다. 아마 친하게 지내던 배우를 자기가 관리하던 무대에서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 따위를 느낀다고 생각하겠지. 병상에 누운 그가 한 짓임은 꿈에도 모르고. 병실에는 그와 크루아상 둘뿐이었다.
"날 보러 와줬구나?"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한쪽 눈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는 점만 빼면. 자신이 벌인 일이라지만 그런 사고에도 멀쩡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모습이, 아까 전 본 조명 아래의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네 연기를 봤거든."
"저번 무대에서?"
"아니. 무대 뒤에서 보일 리가 없잖아. 사고 난 다음에. 인터넷에서."
그는 답하는 대신 꽤 오래 생각하더니 맥락에서 다소 벗어난 질문을 했다.
"그럼 내 이름도 알았겠네?"
"어. 네가 지금까지 말을 안 해줘서 이번에 처음 알았잖아."
"애정이 부족하네!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네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애정이 있을 리가 있겠냐."
크루아상은 그의 붕대가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 배우로서는 정말 치명적인 상처다. 물론 배우에게 얼굴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비중이 적다고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의 두 황금빛 눈동자는 모두가 사랑했기에 더욱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엔 관심 없는 듯, 그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를 떠나는 게 예상보다 빨라지겠네."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목소리에 크루아상은 말을 삼켰다. 병원에 온 이유는 분명 그가 이대로 무대에서 물러나는 걸 원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자신이 자칫하면 크루아상의 인생까지 휘말릴 뻔한 사고를 쳐놓고도 언급 하나 없는 게 화가 났다. 무대를 떠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크루아상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그가 재차 말했다.
"안타까워? 그럼 나를 대신해서 무대에 서 줘."
"안타까울 리가 있어? 네가 낸 사고잖아."
"그럼 정말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
"역시 들지?"
크루아상이 단어를 고르는 틈을 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분명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상대는 태도가 어떻든 간에 환자다. 조금 생각했지만 역시 하고 싶은 말을 담아만 두는 건 크루아상의 성미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껏 그와 진지하게 부딪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지금도 부딪히지 않는다면 영원히 미묘하고 지긋지긋하고 끝나지 않는 관계만이 남을 것이다. 온 목적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말하고 보자. 크루아상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본래 목적과는 크게 어긋나는 말을 뱉었다.
"어. 네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넌 죽을 뻔했고 난 잘릴 뻔했어."
"내가 죽고, 네가 스태프를 그만두면 넌 내 빈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만들고 싶었는데."
"뭐라고?"
"찾아봤다며, 연기 영상. 내가 정말 죽어버리고 봤다면 안타깝지 않았겠어? 그 자리를 채우고 싶어지지 않겠어?"
"그러니까, 난 연기 안 한다고.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크루아상은 자신이 그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죽었다 해도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대체 왜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쳐."
"장난친 거 아니야. 죽을 때와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지."
이 미친놈아. 크루아상은 그 말을 애써 꾹 눌러 참았지만 그에게 전해졌을 터다. 눈빛마저 숨기지는 못했을 게 분명하므로. 그는 눈빛에 항의하는 대신 웃었다.
"네가 막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그럴 줄은 몰랐어."
"이게 목숨으로 장난친 거 아니면 뭐야?"
"화났어?"
"화 안 나게 생겼냐?"
그의 한쪽뿐인 눈에 크루아상의 얼굴이 선명히 비쳤다. 타오르는 황금 속의 크루아상은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고집했다. 크루아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집착이다. 그의 연기는 그만이 할 수 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단 말이다. 그가 그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건지, 크루아상을 과대평가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만두어줬으면 했다. 크루아상은 말에 답답함을 눌러 담았다.
"몸 좀 사려."
"왜 날 걱정해?"
"네 연기를 봤다고 했잖아."
"응. 그게 왜?"
"난…… 못 해. 그건 정말 너만 할 수 있어. 나한테 떠넘기지 마. 네가 해야 돼."
한동안 병실에서는 기계 소리만이 울렸다. 그는 정말 의아한 표정으로 크루아상을 올려다보았지만 그게 연기인지 아닌지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난 질렸다고 말했잖아."
"그래, 그래서 찾아온 거야. 네가 이대로 질리게 두기 아까워서."
크루아상은 이제야 처음 병원에 올 때 준비한 화제로 돌아왔다. 제 목숨을 종잇장마냥 취급하는 상대에게 화가 나는 건 순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한참이었다. 그가 어떻게든 목숨을 이어가게 만들고 싶었다. 연기를 계속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주저 없이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네가 질리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 무대를 만들 거니까. 계속 내가 만든 무대에서 연기해 줬으면 해. 이 말을 하려고 왔어."
말을 끝마치고도 별달리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배우라 해도 일상마저 격하고 감동적인 일에 물들어 살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들었고 크루아상도 평온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왔다. 일단 오늘은 그에게 말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를 무대에 계속 세우려 드는 게 이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이 정도는,
"지금까지 내가 당한 게 얼만데."
소소한 복수 정도로 생각해두기로 했다. 그가 일방적으로 크루아상을 끌어당기고 제 자리에 세우려 한 것처럼, 크루아상도 그를 무대 위에 계속 세워둘 것이다. 재능을 포기하고 달아나게 두지 않겠다. 무대에 묶인 인연을 놓지 않겠다. 자신이 그의 연기에 매료된 만큼, 그도 자신의 무대에 매료되어 떠나지 않게 되었으면 했다.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 있을까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극장은 다시 문을 열었다. 크루아상은 드디어 사랑하는 무대 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감상에 젖어 극장을 둘러보니, 수리를 하며 겸사겸사 낡은 설비들도 교체한 모양인지 꽤 많은 곳이 달라져 있었다. 스태프도 추가로 뽑는다 하니 이 극장도 점차 변하겠구나 싶었다. 그와 크루아상의 관계처럼 말이다.
처음 병문안을 간 날 이후 크루아상은 병원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적도 없으니,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극장이 다시 문을 연 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가 먼저 찾아왔다. 새 스태프들이 뽑힐 때까지 당분간 공연 예정도 없는 극장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크루아상보다도 먼저 무대 뒤에 와 있었기 때문에, 크루아상은 그를 처음 마주쳤을 때 자신이 환상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오랜만이지?"
하지만 크루아상이 그의 환상을 볼 정도로 그를 생각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한 달만인데도 어제 본 것처럼 인사를 건네는 뻔뻔함은 질릴 정도로 현실감이 넘쳤다. 크루아상은 그의 한쪽 눈 대신 자리 잡은 안대를 못 본 척하며 태연하게 인사를 받으려 노력했다.
"오랜만이네."
"별로 안 반가운 표정인데."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돼?"
"그런 반응 좋지~."
그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흘리며 무대 뒤를 둘러보았다. 새로운 설비들이 잔뜩 생겼다는 사실을 그도 눈치챈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설비를 건드리는 일에 좋지 않은 기억이 생기고 만 크루아상은 도저히 그런 행동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미안한데 여기서 나가주면 안 돼? 너 앞으로 여기 들어오지 마."
"뭐? 이런 냉대를 받다니 서운하네, 우리 사이 정이 있는데!"
"어, 그 정 네가 조명이랑 같이 끊었으니까 나가라고."
"아~. 내가 또 뭐 부술까 봐 그래? 이젠 안 그럴게."
그는 그제야 크루아상이 나가라고 말한 이유를 알아차린 듯, 나가기는커녕 상자 하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정말 무신경한 사람이다. 크루아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쳐다봤다.
"못 믿겠어."
"안 한다니까!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걸 이번 일을 계기로 알았잖아. 다시 할 리가 없지."
말을 마치며 웃는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한쪽 눈이 사라진다는 건 정말 사람의 인상을 많이 달라지게 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새삼 깨달았다.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얼굴로 연기할 수 없겠지. 그 점이 그에게 그리 큰 제약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크루아상이 남의 중대한 사고를 자업자득이라며 쉽게 넘어갈 만한 성격이 아닌 탓도 컸다.
"저기, 좀 뜬금없는 거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넌 앞으로도 계속 연기할 거야?"
둘은 키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앉아 있는 탓에 크루아상을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그가 조명을 건드리던 날도, 그리고 그 후 병원에 찾아갔을 때도 이런 시선이었다.
"그건 병원에서 한 말의 연장선이야?"
"그런 셈…… 이지."
"솔직히 말하면 연기는 이제 안 하고 싶어."
역시 그런 답이었다. 그동안 보여준 온갖 기행들을 생각하면 연기에 질려서 죽고 싶다는 그의 정신 나간 마음은 분명 진심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의 말이 이어질 것 같았으므로 크루아상은 무언가 말하는 대신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네가 만들겠다는 무대에는 좀 흥미가 생겨. 넌 정말 자신이 있어? 그 말, 책임질 수 있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로 높이가 같아진 시선이 기묘한 빛으로 맞부딪혔다. 타고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 같은 저 눈빛, 크루아상은 그 누구도 저것만큼은 흉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크루아상이 정말로 그를 대신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랬더라도 그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고 무대를 만드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단순히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 안타깝기 때문만은 아니다.
"네가 전에 나한테 한 말 기억해? 연기도 무대 장치라고 했던 거 말이야."
"물론이지."
"그 말대로 연기도, 그리고 배우도 무대 장치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난 그런 무대 장치가 좋아서 무대 뒤의 삶을 꿈꿨고. 그리고 지금은 너라는 무대 장치에 매료된 거야. 이 장치를 나는 꼭 써야겠어. 이런 훌륭한 무대 장치를 가지고도 최고의 무대를 못 만들면, 무대 뒤에서 살 자격이 없지."
그가 답하는 대신 바닥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크루아상도 그의 시선을 좇았다. 바닥엔 눈으로는 구조를 식별하기 힘든 전선들이 얽혀 있었다.
"난 엄청 까다로워. 멋대로 꼬이는 전선이, 혼자서 추락하는 조명이 될 거야. 갑자기 크기를 조절하는 음향이 될 거라고. 잘 다룰 수 있겠어?"
"양심이 있으면 추락하는 조명 얘기는 하지 말지."
"아하하. 그러고 보니 넌 혼자서 추락하는 조명도 잡아내는 사람이었지."
"이 얘기에 웃을 수 있는 사람, 전 세계에 너밖에 없을걸."
"그러니까 더 실컷 웃어야지. 나만 누릴 수 있는 권리인데."
크루아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모르는 새 그의 제멋대로에 물들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예의 없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크루아상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바닥의 전선 개수나 세어 보던 그가 갑작스레 다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왜 내 이름 안 불러?"
"뭐?"
"내 이름 알았다며. 그런데 왜 한 번도 이름으로 안 불러 줘?"
"너도 나 이름으로 부른 적 거의 없잖아."
"한 번은 불렀어."
역시 아직 그의 제멋대로에 물들기는 멀었다. 크루아상은 그가 자기 이름을 언제 불렀나 생각하느라 한참이나 기억을 되짚었다.
"이름 부르는 게 중요한가?"
"내 주변엔 다들 내 이름을 엄청 거창하게 부르는 사람들 뿐이니까. 배우님이라든가, 뭐 그런 걸 붙여서 말이야. 하지만 넌 그냥 불러줄 거잖아."
"시간지기. 이러면 돼?"
시간지기의 시선이 크루아상에게로 돌아왔다. 그때의 시간지기는 정말로 기쁜 표정이었는데, 크루아상은 그제야 시간지기가 지금껏 지은 즐거운 표정은 전부 과장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사람은 정말로 배우였다.
"그걸로 충분해. 앞으로도 종종 불러줘."
"뭐, 생각 나면."
확실한 동의의 말은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크루아상은 둘이 암묵적인 약속을 맺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도 변함없이 크루아상은 스태프를, 시간지기는 배우를 계속했다. 시간지기의 사라진 한쪽 눈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의의 사고를 딛고 일어선 배우에게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시간지기가 크루아상에게 재능이 있다느니 따위의 말을 꺼내는 빈도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시간지기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아예 안 하게 된 건 아니었다.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시간지기는 매일같이 크루아상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새로운 연출 등 일에 관한 것일 때도 있었고, 정말 시답잖은 주제일 때도 있었다. 좋아하는 게 뭐냐, 내일 시간 있냐 하는 대화 말이다.
"그냥 생각 좀 했어. 저번에 네가 주역 맡았던 연극 있잖아. 네가 첫날에 사고를 쳐서 결국 하루도 제대로 공연 못 했지?"
"그랬지~."
둘은 간만에 무대에 나와 앉아 있었다. 시간지기와 어울리다 보니 크루아상은 어느덧 무대 위가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그 위에서 무언갈 하는 게 익숙해졌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이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관객석을 바라보는 시야에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배우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는 것, 좋은 연출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그거, 끝까지 보고 싶었는데."
관객석을 쳐다보던 시간지기의 시선이 크루아상에게로 향했다. 시간지기는 텅 빈 손에 대본이라도 놓인 양 허공을 움켜쥐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해줄까?"
"혼자서?"
"못할 것도 없지. 나는 갓 퇴원한 환자지만 말이야."
대놓고 눈치를 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크루아상은 그러면 그냥 쉬라고 말해주는 대신 못 알아들은 척 웃었다. 지지 않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스태프보다는 잘하겠지."
"넌 분명 재능이 있다니까."
"아직도 그 소리야?"
"있던 재능이 사라지는 일은 없잖아~."
지지 않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둘 다 그 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럽게 주고받고는 했다.
"앞으로 나도 너한테 스태프의 재능이 있다고 주장해볼까."
"그럴 수도 있지. 난 뭐든 대체로 잘하거든."
"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자기애였다. 우스갯소리를 나누고 있자니 크루아상은 문득 맨 처음 질리도록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근데 우리 둘이 닮았다는 건 무슨 말이었어? 난 진짜 아직도 모르겠는데."
"눈빛이 닮았잖아? 뭐든 척척 해결할 수 있고, 그러는 바람에 뭐든 쉽게 질려버리는 눈빛이 닮았어."
"그게 보여?"
"그럼. 배우는 사람의 시선을 관찰하는 직업이잖아. 넌 분명 내 지루함을 이해해줄 거고, 연기도 충분히 재능이 있어 보였어. 넌 모르는 거 같지만 얼굴도 꽤 닮았는데. 그래서 말한 거였지."
"설명을 들어도 전혀 모르겠어."
크루아상의 말에 시간지기는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이 즐거워 보여서 크루아상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계속 함께 보내다 보면 언젠가 크루아상도 시간지기의 시선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우리는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걸까?"
잠깐의 정적을 깨듯 시간지기가 대사를 읊었다. 저번에 준비하던 그 연극의 대사였다. 분명 아까 크루아상이 끝까지 보고 싶었다는 말을 했으니, 크루아상을 위해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흐름을 끊고 싶진 않았지만 또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힘들었다.
"왜 하필 여기부터야?"
"저번에 여기서 끊겼잖아."
시간지기의 방금 대사가 끝나는 직후 조명이 추락하며 비명이 울렸었다.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해 겨우 눌렀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 것만 같았다. 크루아상이 신경 쓰이는 표정으로 조명을 올려다보고 있자 시간지기는 웃으며 메인 조명 아래에서 슬쩍 비켰다.
"이젠 조명 안 부순다니까."
"애초부터 안 부쉈어야지."
"어쩌면 찾아가야 하는 걸지도 몰라. 내가 숨쉬기 위한 장소를. 나의 바다를."
당연히 시간지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사를 이었다. 아직까지는 이 극장의 하나뿐인 스태프인 크루아상이 밖에 앉아 있으니 어떤 장비도 조작될 턱이 없는데도, 시간지기가 목소리를 바꿀 때마다 조명의 밝기도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뛰어난 무대 장치가 지금 무대 위에 있기 때문인가.
"그렇구나. 지금은 그냥…… 숨을 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삶의 바다>. 그들이 준비했고, 시간지기가 망쳐놓았고, 그리고 방금 다시 시간지기 혼자 완성한 극의 제목이었다.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서 자란 소녀가 바다를 동경하며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소녀는 여행하며 들꽃이나 참새 같은 짧은 삶을 사는 존재들을 만나 인생의 모든 순간을 가치 있게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마침내 도착한 바다는 그런 걱정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다는 아름답고 소녀의 삶은 아직 길다. 소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무엇을 어떻게 하며 인생을 보낼지는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결심하며 막을 내리는 극이다.
연출 등은 화려하지만 극의 내용 자체는 아주 잔잔해 자칫하면 지루해지기 십상이라, 거의 모든 비중을 차지하는 주연 배우가 얼마만큼의 역량을 가졌는지가 흥망을 결정짓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시간지기가 주연이었다. 맥없다는 평까지 듣는 이 마무리를 시간지기는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었다.
"소녀의 눈에는 바다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던 걸까?"
"글쎄. 아마 우리가 무대를 보는 만큼 아니었을까."
"흐음~."
시간지기는 자신이 방금 연기한 주제에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질렸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지. 그래도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의 입버릇대로 둘이 닮았다면, 시간지기도 조금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무대는 너무 아름다워서, 여기에서 일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런가. 그런 곳이었지."
"왜 회상하는 말투야? 나한테는 현재인데."
크루아상은 아직도 연기하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시간지기의 곁으로 다가갔다. 발밑의 무대 바닥이 모래사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한테도 현재로 느껴지도록 만들어 줄게."
"정말?"
"응. 여기에 설 수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되든 좋다는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 말 진심이지?"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어?"
시간지기가 걸음을 옮기자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객석을 등지고 서자 눈 앞에 펼쳐진 무대는 바다였다. 누군가의 손짓 한 번에 수천 가지의 빛깔을 띄고 수천 가지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어떤 장소보다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내가 꼭 만들어 줄 거야. 너도 장치 중 하나니까 절대 빠지면 안 돼. 알겠지?"
여기에 서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바다가 모습을 바꾸며 환영해줄 것이다. 끊임없이 파도치는 바다는 생겨난 이래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일 수 없으니. 가만히 있어도 질리지 않을 수 있는 경험이란 시간지기에게 지나칠 정도로 새롭고 낯설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다. 크루아상이 있다면, 시간지기도 이제는. 그토록 질렸다고 생각했던 무대에서도. 시간지기는 말했다.
"지금은 그냥 숨을 쉬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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