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논컾)

혐오 (백업)

어디로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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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날짜: 2021.07.18

그 순간 처음 느낀 기분은 역함이었다. 기존의 답답한 나를 벗어던진 쾌감, 모든 의무로부터 풀려난 해방감 등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갖고 나니 그 끝에 놓인 이전의 내가 참을 수 없게 여겨졌다. 그동안 몸담고 있던 신체, 판단을 의지하던 사고, 손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던 도구들까지 전부. 텅 빈 시간관리국 한복판에 서서 아무리 속을 삭여도 위장 깊숙한 곳 진득하게 눌어붙은 역겨움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래서 시간지기는 가위를 고쳐 쥐었다.

황금 가위를 수십 번 휘둘렀지만 감정은 채 풀리지 않았다. 사방에 나뒹구는 시간여행기의 파편은 마치 토사물 같았으나, 시간지기의 감정은 단 일 그램도 토해지지 못했다. 어째서 과거의 나 따위는 이렇게나 끈질긴 감정으로 나를 붙들어 매지? 가장 아껴 쓰던 스패너도, 시간여행을 위해 개발한 고글도, 그리고 직접 고철을 개조해 만들었던 시간여행기도 전부 산산조각 냈는데. 다시 한참을 생각했다. 텅 빈 위장은 결론을 기다려주지 않고 끝없이 역겨움을 되새김질한다.

그렇게 첫 살해가 일어났다.

시간지기는 자신이 쉽게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혐오스럽더라도 자신을 살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러나 이제 시간지기는 어느 시간에나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정말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만 순간 시간지기는 틈을 찢었다. 충동이 이끈 곳은 자신이 시간관리국에 처음 입사한 날이었다. 과거의 크루아상이 관리국 입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시간지기도 도착했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위가 먼저 움직였다.

상식적으로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살해한다면 미래의 자신도 죽어버려야 맞다. 살아있는 미래가 없던 일이 되어 증발하는 게 이치이다. 하지만 시간지기는 살해를 저지른 후에도 여전히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과거에는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건 시간지기 본인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건, 이론에서 벗어난 나에게 주는 특혜로 생각해도 되는 거야?

생각하고 나자 다음부터는 쉬웠다. 혐오감을 견딜 수 없게 되면 곧장 아무 과거로나 가서 자신을 찔렀다. 아무리 반복해도 이 미래는 변함이 없으니 당연히 망설임도 없었다. 실은 과거로 이동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여기는 꿈이나 환상 속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다. 아무런 죄 없이 혐오를 떨칠 수 있는 거니까. 시간지기는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나? 그 질문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지만, 자신을 살해하는 죄에서조차 자유롭기에는 그의 사랑이 지나쳤다. 자기 자신이 역겹고, 그래서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완벽한 자신의 하잘것없는 과거.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다 하더라도 결국 그조차도 자신인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세상에서 시간지기가 사랑하는 이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이런 시간지기를 이해해줄 이도 자기 자신뿐이었다. 즉, 말하자면 과거의 자신은 시간지기의 유일한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변해버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뿐인 가족, 친구, 사랑하는 이까지. 전부 너야. 자신의 유일한 관계를 몇십 번이나 살해하며 시간지기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죽어 듣지도 못하는, 살해당한 자신에게가 아니다. 그를 살해하고 있는 자신에게다. 스스로 죄책감을 부여해 얻는 것은 자기혐오뿐이고, 이는 결국 다음 살해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이러한 통보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내 유일한 인연을 끊어내는 나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살해를 멈춘 것은 의미도 없는 중얼거림 따위가 아닌, 어느 날 발을 들인 과거에서 마주친 이미 죽어있는 '나'였다. 분명 처음 오는 과거였지만 그곳에서는 이미 죽은 자신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분명 작은 실수가 있었던 거겠지. 누구나 실수는 하니까. 전지전능한 그라고 해도 늘 완벽한 것만은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시간대로 향해도 마찬가지였다. 발을 들이는 곳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시간은 일 분 일 초, 아무리 시간을 넘나든대도 모든 시간대의 자신을 살해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기묘하게도 과거의 자신을 살해해도 그다음 시간대의 자신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이건 뭐지?

다섯 개의 시간을 더 거치고서 시간지기는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이 향한 곳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었음을. 시간지기가 살해한 크루아상들은 완전히 다른 시간선의 크루아상들이었다. 그랬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을 죽였음에도 시간지기는 사라지지 않았던 거다. 다음 시간대의 자신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거다. 이런 단순한 사실, 첫 살해의 순간쯤에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안 것은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자신이 아닌, 그저 같은 이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인 별개의 존재라는 걸 알아버리면 자기혐오로부터 비롯된 이 행동을 멈춰야 하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감정을 누구에게라도 토해내고 싶었으니까.

시간지기는 위장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 때보다도 강한 혐오가 들끓었다. 어서, 어서 이 기분을 뱉어야 돼. 아무한테나. 자신이 향하는 시간이 별개의 시간임을 알면서도 또다시 틈을 찢는다. 아직 내가 죽이지 않은 내가 한 명쯤 더 있을 거야. 그게 내가 아니라 해도 상관 없어. 어차피 나도 크루아상이었고, 그도 크루아상이니까!

찾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 하나, 마지막 남은 하나였다. 이제 그를 죽이면 또다시 도질 자기혐오는 어디에도 풀 수가 없다. 제 심장에 가위를 박아넣고, 그럼에도 죽지 않는 자신을 자조하는 방법뿐. 그래서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의 뒷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망설였다. 살해 전에 겪는 첫 망설임조차 죄책감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해서라니. 지독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죽고 싶어. 내가 죽고 싶으니까 나를 죽일 뿐이야…….

그제야 시간지기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안이 떠오른다. 시간지기가 크루아상을 죽이지 않고, 동시에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마지막 남은 크루아상을 시간지기로 만들어, 자신을 죽이게 하면 된다! 시간지기는 드디어 자신이 죽는 것으로, 시간지기가 된 크루아상은 자신과 꼭 닮은 존재를 죽이는 것으로 양쪽 모두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홀로 남은 크루아상, 이었던 시간지기가 다시 자기혐오에 빠진다면 이젠 죽일 상대조차 없겠지만, 그건 시간지기가 알 바는 아닌 듯했다. 크루아상은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저를 죽여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를 시간지기로 만드는 일쯤은 아주 간단하다. 그가 바라는 건, 누구보다 시간지기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약하고 볼품없는 과거의 크루아상. 당연히 가볍게 설득되겠지. 이미 그런 미래가 보인다.

그 순간 이미 그가 자신을 도로 살고 싶게 만드는 미래까지도 보았는지 모른다.

아니,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죽기 위해 그를 만나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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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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