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혼잣말 (백업)
둘이서 있는 거야
*쓴 날짜: 2021.11.17
시간지기는 알았다. 무엇을 알았냐 묻는다면 밑도 끝도 없다. 시간지기는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많기에. 굳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자신이 잠에서 깰 즈음엔 늘 크루아상이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곧 발소리가 들리리라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생각을 갈무리하려는 찰나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
크루아상은 목소리에 답하기 전 현관에 잠시 멈춰 서서 코트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코트에서 날아오른 눈은 바닥에 검은 물 자국을 남기는 일도 없이 금세 사라졌다. 그의 맞은편에 선 이가 코트를 대신 받아줄 정도의 배려심을 가졌을 리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팔에 걸친 채 그제야 인사를 받았다.
"응. 다녀왔어."
"오늘은 꽤 늦었네~."
"어쩌다 보니 얘기가 좀 길어져서……."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다. 돌아왔을 때 상대의 인사가 들리지 않는 편이 어색할 정도로.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던 동거는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간지기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이나 틈새에서 보내고, 크루아상은 바깥에서 보냈으니까. 집 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인데도 둘은 이 생활을 썩 마음에 들어 했다.
"저녁은 먹었어?"
"방금 일어났는데~."
"그럴 줄 알았다. 좀 챙겨 먹어. 내가 이것저것 사다 놨잖아."
"난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는 거 알면서~."
"그러면 내 샌드위치는 왜 그렇게 집어먹었던 건데?"
볼멘소리에 시간지기는 그냥 웃었다. 그런 웃음을 지을 때면 자신을 마주 바라봐주는, 곤란하지만 사랑스럽다는 크루아상의 표정을 좋아했다. 수백 번 보고 수백 번 생각해서 흉내 낼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 짓는 표정에서는 아무리 해도 그만큼의 사랑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크루아상의 얼굴로 보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뭐 좀 먹을래?"
"아니, 됐어~. 그보단 네 얘기가 듣고 싶은데."
"내 얘기?"
"오늘은 뭐 했는지, 같은 거~."
"틈새에서 다 봐 놓고선."
"다 아는 얘기여도 직접 듣는 편이 좋으니까~."
이야기하는 동안 방 안의 옷걸이에 코트를 건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의 손짓을 따라 거실로 나왔다. 거실 한가운데의 소파는 크고 푹신했지만 혼자 쓰기에는 다소 사치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이 곁에 없을 땐 소파를 잘 사용하질 않았다. 종일 집에 있으니 원한다면 언제든 써도 될 텐데. 아무튼 드디어 쓸모를 되찾은 소파가 등을 편안하게 받쳐주었다.
"……해서 내일 더 얘기해보기로 했어. 역시 복잡한 이론은 앉은 자리에선 해결이 안 되더라."
"흐음~."
적당한 반응처럼 흘리는 목소리가 나른한 것을 크루아상은 금방 눈치챘다. 푹신한 소파에 따뜻한 이불까지 있으니 조는 건 당연하기도 했다. 금방 화제가 돌려졌다.
"듣고 있는 거 맞지? 졸려 보이는데. 그냥 자도 돼."
"그건 싫어~."
"왜?"
"요즘 계속 내가 자고 있을 때 나가니까~."
"나간다고 깨우기는 미안해서 그러지."
"인사를 못하면 아쉽잖아~."
시간지기가 진심으로 싫다는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님을 둘 다 알고 있다. 다만 시간지기의 수면 시간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나 그 탓에 아침 인사를 나누지 못한지 상당히 오래되었고, 그 점에 아쉬움을 느끼는 게 사실이긴 했다. 시간지기가 잠들면 크루아상은 집에서 사라지고, 깨어나면 다시 돌아오곤 했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아예 나갔다 온 것도 모를 정도로 자겠어, 그 정도의 생각을 했는지 크루아상이 말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야? 점점 자는 시간이 늘어나잖아."
"그건 아닐걸. 널 만나기 전까진 잠이란 걸 잊고 살았으니 몰아서 자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크루아상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핀잔을 주려다 말고 문득 기침을 몇 번 했다. 집에 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떠들었으니 목이 아플 법도 하다. 잠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시간지기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이 합리적임을 설명하듯 몇 마디 말했지만, 크루아상의 입이 물컵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만큼은 입을 다물어주었다. 이상한 말을 던졌다가 사레에 들려서 고생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그게 왜 이상한 말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중에 병원이라도 가보는 게 어때?"
돌아서며 하는 말이란 건 또 걱정이다. 시간지기의 몸이 의료기기로 검진할 수 없다는 거나, 접수처에 내놓을 제대로 된 신분도 이름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시간지기가 느끼기엔 상당히 사소한 일에도 병원을 가자고 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해 줬지만 자꾸 이런 제안을 했었다. 그걸 상기시켜 주기도 전에, 크루아상이 자각했는지 스스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얘기는 전에 했었나?"
"응. 이십 번쯤 했을걸~."
"……그렇게 많이 했을 리가 없는데."
"못 믿겠으면 직접 세어 볼래? 틈새 열어줄게~."
"돼, 됐어. 그걸 어느 세월에 다 세."
그냥 그런 걸로 치자, 못 이기겠다는 듯 웃어넘기는 크루아상의 목소리도 시간지기는 상당히 좋아했다. 그가 집을 비운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되새겨본 목소리 또한 그것이었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시간지기가 잠시 끊겼던 대화를 잇듯 말했다.
"내가 잠을 안 잤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꿈은 안 꿨으면 좋겠어."
일순 정적이 흘렀다. 시간지기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묻는 목소리도, 제 생각을 이어 말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속삭이듯 대화가 오갔다. 왜 그런 말을 해? 넌 이런 말을 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지기는 조용히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크루아상도 그냥 쉬게 내버려 둘 생각인지 말을 걸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끊어지게 된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간지기가 잠을 자면 잘 수록 대화가 끊어지는 빈도수가 잦아졌으니, 아마 그가 시간지기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런 말뿐인 걱정 따위 필요 없는데. 진심으로 걱정된다면 그냥 손이나 좀 잡아주면 될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시는 그 손에 온기가 돌아올 수 없단 걸 알고 있다.
시간지기는 알았다. 무엇을 알았냐 묻는다면 밑도 끝도 없다. 시간지기는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많기에. 굳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자신의 옆자리가 따스하지 않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생각을 갈무리하려는 찰나 목이 조금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물을 마셨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을 많이 하긴 한 모양이지. 그러나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잠이 쏟아졌기 때문에, 시간지기는 그냥 눈꺼풀을 내리덮이도록 두기로 했다.
혼자뿐인 꿈을 지나 눈을 뜨면 다시 옆에 그가 있을 것이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