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시간크루] 우리, 기차역에서 만나 (백업)

겨울이 오면 말이야

백업 by 삼
2
0
0

*글 쓴 날짜:2021.04.04

"갑자기?"

자꾸만 말썽을 일으키는 시간여행기를 붙들고 있던 크루아상은 저만치서 들려온 말에 한참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제 선선해지는 계절이라지만 기계가 내뿜는 열기에 크루아상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맺혔다.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있자 시간지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물병을 건네주었다.

"자~."

"아, 고마워. ……넌 덥지도 않아?"

"그럼~."

물병을 넘겨받으며 보는 쪽이 더 더워질 지경으로 꽁꽁 싸맨 시간지기를 곁눈질했기에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크루아상과 만난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언제나 저런, 얼굴 외의 피부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차림을 고수했다. 시간지기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보였는데, 이제는 무슨 말이 나올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너도 나처럼……."

"국장이 되면 안 더울 수 있다는 말 하려고 그러지? 당연히 사양이야."

"남의 말을 끊다니 너무하네~."

"그게 네가 할 말은 아닌데 말이지."

이제 놀리는 재미도 없어졌다고 푸념하는 시간지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크루아상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곧 겨울이 시작될 테니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지겠지. 오히려 일 년간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간이 손난로를 다시 꺼내와야 할 정도로 추워질 텐데, 그 어딘가가 어디더라……. 조금 이른 감이 있는 걱정을 하며 다시 시간여행기로 시선을 돌리려다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근데 아까 뭐라고 했더라? 그 말에 대답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유독 눈부신 시간지기의 웃음이 이유 모르게 아득하다. 말소리가 묘하게 흐려지며 초침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 오면, 기차역에서 만나자고~."

다시 물어봐도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겨울에 기차여행이라도 가자는 말인가? 크루아상은 되묻는 대신, 시간지기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면 늘 그래왔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을 뿐이다.

"그래, 그러지 뭐."

그러나 둘이 기차역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 다시 찾아왔고, 바쁜 와중에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했으니 굳이 기차역까지 가서 만날 필요도 없었다. 세 번의 가을을 더 지나는 동안 시간지기는 또 같은 말을 했다. 겨울이 오면 기차역에서 만나자고. 언젠가의 가을에는 크루아상이 먼저 기차역에 갈까?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겨울이 오면 그렇게 하자~."

다음 가을이 돌아올 때까지, 둘은 여전히 기차역에서 만나지 않았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크루아상은 창가에 앉아 가만히 빗소리를 듣다 기척을 느꼈다. 시간지기가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시간지기는 소리소문없이 다닐 수 있으면서 요즘 크루아상에게 찾아올 때는 부러 요란스럽게 티를 내곤 했다. 자신을 환영해주길 바라서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시간지기가 튀어나와 놀라는 빈도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기에 크루아상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글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데."

"네가 아무것도 안 한다니, 별일이네~."

확실히 별일이라고 말할 만 하다. 관리국에 있는 동안 크루아상은 늘 일뿐이었으니까. 일을 하거나, 아니면 일의 생각을 하거나. 식사를 하면서도 손에서 온갖 수식이 적힌 수첩을 놓지 않아 쉬엄쉬엄 하라는 말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관리국에서 일한 지도 몇 년 차인지 기억을 되짚어야 할 정도로 오래되었으니 일을 처리하는 요령은 점점 늘어갔고, 때문에 드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 절로 쉬는 시간이 늘고 있다. 여유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시간도 생기는 것이다.

"비가 언제까지 올까?"

"우산 없어~?"

"응. 아, 아니. 생각해보니 여분 우산을 연구실에 뒀었지. 있어, 우산."

"굳이 찾지 않아도 괜찮아~. 우산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는걸! 아니면 아예 데려다줄 수도 있고~."

"우산 있다니까."

시간지기가 '빌려주는' 우산이 과연 시간지기의 우산일지, 누군가에게 빌린 우산(물론 허락 없이)일지는 알 수 없다. 크루아상이 우산을 빌리면 불쌍한 시간관리국 직원 하나는 우산을 잃어버린 슬픔을 안고 눅눅해진 채로 집에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난데없는 화제가 떠올랐다.

"있지, 시간지기. 기차역 말이야."

"기차역~?"

"겨울이 되면 가기로 한 기차역 있잖아. 왜 안 가는 거야? 우리. 몇 년째 미루고만 있잖아."

"글쎄~. 네가 기차역에 안 와서 못 만나는 거 아닐까~?"

"……응?"

크루아상은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라도 세듯 뚫어지게 바라보던 창문 너머에서 시선을 뗐다. 어느새 옆에 앉은 시간지기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웃고 있으나 이유 모르게 아득했다. 이런 기분을 전에도 느꼈었다. 뒤이어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말소리가 흐려지며 초침 소리가 들린다.

"나는 늘 기다리고 있었어~. 겨울, 기차역에서."

그리고 다음 가을이 찾아왔을 때 크루아상은 알았다. 크루아상이 겨울에 기차역으로 가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냥 겨울이 오지 않은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가을이었고, 가을이었고, 다시 가을이었다. 하지만 시간지기는 겨울의 기차역에서 크루아상을 기다린다고 했다. 시간지기에게는 겨울이 온다. 크루아상에게는 오지 않는다. 이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몰랐지만 한 번 깨닫자 상황은 확실히 보였다. 크루아상은 계속해서 가을을 반복하는 중이다. 정확히는 입사 X년차의 10월을. 점점 일 처리가 빨라지는 게 당연했다. 계속해서 같은 일만 하고 있었으니까. 여유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매번 같은 연구만 했기에, 연구는 10월을 네 번쯤 반복했을 때 이미 끝나버렸으니까 더는 연구할 것이 없었다.

시간지기는 알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겨울이 오면 만나자고 말했을 것이다. 시간지기가 기다리고 있을 겨울의 기차역으로 가야 한다. 이 가을의 끝은 그 곳에 있다. 전 세계에 기차역은 몇 개나 되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많지만 어떤 기차역인지는 바로 느낌이 왔다. 시간지기와 크루아상에게 약속을 잡고 만날 만한 의미가 있는 기차역은 하나뿐이다. 처음 만났던 그때, 여러 사건을 겪고 용감한 쿠키와 친구들을 배웅했던 그 곳이다. 거기로 가면 겨울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지금은 아직 가을이지만."

혼잣말로 괜히 중얼거려보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데 시간여행자인 자신이 몰랐다는 것도 이상하고, 분명 시간지기의 힘일 게 분명한데도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기다릴 게 아니라 그냥 이 반복을 끝내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크루아상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길 바라는 걸까?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크루아상은 기차역으로 가보기로 결심하고 간단히 마실 것 정도를 챙겼다. 퇴근하는 대로 기차역에 가자. 그리고 10월을 벗어나자.

기차역의 풍경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한 해의 가을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바람에 감이 조금 흐려졌지만, 여기서 그들을 배웅한 게 몇 년은 더 된 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전 모습 그대로라니 기묘할 정도다. 다만 이제 더는 운행을 하지 않는 모양인지 기차역은 시간표도 역무원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조금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굉음과 함께 시야가 엄청나게 밝아졌다. 크루아상은 이 소리를 알고 있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다! 하지만 어떻게? 왜? 부신 눈을 간신히 뜨고 보니 새까만 기차 한 대가 크루아상의 눈앞에 정차해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차를 둘러보는 순간 기차의 옆면에 적힌 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종착역, 겨울.'

"이건……."

잠시 망설였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연구자라고 할 수 없다. 혹여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더라도 그 일이 10월을 벗어날 실마리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 여기서 겁먹고 돌아간다면 영원히 10월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크루아상은 가볍게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질서 있게 놓인 의자들만이 이곳이 기차 내부임을 증명해준다. 크루아상은 적당히 창가 자리 하나를 골라 앉았다. 생각해보니 기차를 타게 될 줄은 모르고 마실 것 정도만 챙겼는데, 탑승 시간이 길어지면 좀 곤란하겠어……. 이런 생각이나 하며 어디로 가는지 밖을 응시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두워진 창밖에는 나무로 보이는 것들의 그림자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정말 겨울로 가고 있는 걸까? 일어나 기차 안을 둘러보자고 생각은 했지만, 밖을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제야 자신이 기차 안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냄과 동시에, 오늘 관리국에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왜 기차를 탈 때 이건 생각 못 했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기에 자칫하다간 오늘 하루 통째로 무단결근을 할지도 모른다. 초조해져서 벌떡 일어났다가 떠오른 생각을 무심코 입 밖으로 흘렸다.

"시간지기가…… 어떻게든 해주려나."

시간지기가 자신이 처리해줄 테니 하루만 관리국 일을 쉬자고 한 적은 많았지만, 크루아상은 그때마다 절대 싫다며 단호히 거절해왔다. 그런 그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시간지기는 무슨 표정을 할까. 표정이 자연히 상상되어 기분이 좀 미묘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지기를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시간지기를 믿다니…….

출근 걱정을 애써 내려두고, 크루아상은 어제 하려다 잠들어버린 기차 둘러보기를 시작했다. 크루아상이 있는 곳이 맨 끝 칸이었기 때문에 앞쪽으로 쭉 걷기만 하면 됐다. 혹시 다른 승객이 있을까 싶어 좌석들도 주의 깊게 들여다봤지만 승객은커녕 승객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세 번째로 다다른 칸에서 사진 한 장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건……."

크루아상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아이 시절 이불 속에 파묻혀 잠들어 있는 모습이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지만 비슷한 사진은 여럿 봤으므로 한눈에 알아봤다. 처음 탄 기차에서 처음 보는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다니,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사진을 뒤집어보니 뒷면에는 글씨가 적혀 있다. 'XX.10.01.' 이 날짜대로라면 이것은 언젠가의 10월에 찍은 사진이다. 크루아상은 과거의 사진조차 10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처음 사진을 발견한 후로 칸마다 크루아상의 사진이 한두 장씩 놓여 있었다. 사진 속 크루아상은 점차 성장하며 현재에 가까워졌다. 사진에 담긴 모든 순간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어 크루아상은 작게 웃었다. 사진을 주울 때마다 뒤집어보았기에 뒷면에 적힌 날짜도 점점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10월 1일부터, 2, 3, 4, ……하루 단위씩 지나간다. 10월 31일의 사진이 있는 칸이 이 기차의 마지막 칸이리라는 묘한 확신이 생겼다. 사진을 주우며 가다 보니 크루아상은 이 기차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나, 출근 문제 같은 여러 가지 복잡한 기분에서 벗어나 그저 보물찾기를 하는 것마냥 즐거워졌다. 가끔씩 반가움에 탄성을 참을 수 없게 하는 사진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인 태엽 비행기를 끌어안고 있던 10월 7일이라던가.

13일쯤 되자 선명히 기억나는 일들이 담긴 사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기장을 보는 기분으로 걷던 크루아상은, 시간관리국에 들어온 순간의 사진을 본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사진 속 자신이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 감정에 물드는 기분이었다. 나, 이렇게 기뻐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지금도 비슷한 표정일까?

15일에는 처음으로 크루아상 외의 얼굴들도 보였다. 오랜 친구들, 샌드위치와 히어로다. 시간관리국에 들어간 것을 축하한다고 열어준 깜짝 파티의 사진이었다. 처음 시간관리국에 스카우트된 후, 친구들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는데 전혀 믿지 않아 곤란했었지. 시간여행기와 시간여행에 대한 이론까지 전부 설명해 납득시킨 후에야 그들이 믿게 할 수 있었다. 최근 계속해서 반복하던 10월 중에는 셋이 모인 적이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모인 날이 아득하다. 사진 속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미소를 지으면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일, 이번에는 시간지기가 보였다. 처음 만난 그 날, 용감한 쿠키와 친구들을 배웅한 뒤 관리국으로 돌아와 한참을 이야기했을 때의 사진이다. 그때 크루아상은 시간지기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시간지기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많이 이해했나? 그 시절에 비해서는 확실히 그럴지 몰라도 아직 전부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

23일의 사진은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크루아상이 시간지기의 생일을 축하해줬던 날이다. 사실 그 날은 크루아상의 생일이기도 했지만. 당시 크루아상으로서는 드물게 쇼핑을 갈 일이 생겼었는데, 시간지기에게 어울릴 것 같은 팔찌를 발견해 고민 끝에 생일 축하와 함께 건넸었다. 시간지기는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일이나 팔찌 자체에는 큰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크루아상이 자신을 위해 뭔가 준비해줬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굉장히 즐거워했었다. 그런 표정이 사진에 그대로 담겨 마치 그날로 돌아간 듯 크루아상도 사진 속 시간지기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27일엔 저번 가을비를 보던 날의 크루아상이 있었다. 창밖에서 찍은 사진인지, 크루아상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시간지기의 모습이 그 날임을 확실히 한다. 어? 크루아상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올해의 사진이다. 아직 조금 남았는데, 전부 올해인 걸까?

그 의문은 28일의 사진을 보자 해소되었다. 28일은 분명 계속 반복하던 10월의 다다음 해였지만, 크루아상은 그 사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 사진을 보자 기억났다. 지금 크루아상이 반복하던 10월은 현재가 아니었다. 과거 있었던 어느 10월이다. 왜 지금까지 기억나지 않았을까? 사진 속 행복한 크루아상을 빤히 들여다봐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진의 크루아상은 지금 누구나 탈 수 있는  시간여행기를 만들어낸 기쁨에 흠뻑 젖어 다른 건 생각나지 않을 테니까.

29일의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와 함께였다. 둘은 바다를 보러 온 참이었다. 모두가 탈 수 있는 시간여행기를 만든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시간관리국이 몇 배나 바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와 관련한 여러 사건사고도 끊이질 않았다. 가끔 정말 힘이 드는 날에는 시간여행기를 만든 일을 후회할 때도 있었다. 시간지기는 그런 크루아상을 비난하지도, 그렇다고 위로해주지도 않았지만, 어느 해의 10월 29일에 갑자기 시간을 멈추더니 바다를 보자며 크루아상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날 바다에서 들었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지금도 그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기억난다. "난 미래를 볼 수 있지만 네 미래는 잘 보지 않아~. 어떤 걸 해낼지 기대돼서, 직접 보고 싶거든~."

30일, 이즈음의 크루아상은 직접 나서서 수리하는 일보다는 연구 쪽을 주로 담당하기 시작했다. 주위 쿠키들도, 그리고 크루아상 자신도 정말 아쉬워했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체력적 한계가 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동료들은 시간여행기가 고장 나면 종종 크루아상을 찾았고, 크루아상은 선뜻 고쳐주었다. 사진 속 크루아상은 책장을 빼곡히 메운 책들 중 원하는 논문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고, 시간지기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둘의 차이가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크루아상은 세월이 흐르며 많이 변했지만 시간지기는 처음 만난 그 모습 그대로다. 외관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유해지고, 동시에 깊어지던 크루아상과 달리 시간지기의 말은 늘 어린아이마냥 가벼웠으니. 시간지기는…… 변하는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 칸에 발을 내딛는 순간 크루아상은 알았다. 이 칸이 마지막 칸이다. 다음 칸으로 가는 문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차에는 조종칸도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공구만 있었으면 내리자마자 뜯어봤을 텐데. 무서워하는 대신 이런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본능 같은 거니까.

그런데 문만 없는 게 아니었다. 사진도 없었다. 대신 카메라가 하나 있었는데, 크루아상이 살펴보려 가까이 가자 찰칵! 소리를 내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리곤 사진 한 장을 뱉어냈다. 사진은 뒷면을 위로 한 채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날짜를 먼저 볼 수 있었다. 'XX.10.31.' 역시 이것이 마지막 사진인 모양이다. 그런데 사진을 뒤집었을 때, 크루아상은 갑자기 사진을 찍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자신 대신 다른 것과 마주했다. 흰 창턱의 창가에 노란 꽃 한 송이가 든 꽃병이 놓여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보는 창가의 처음 보는 꽃병이다. 이건 혹시 미래의 사진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메라도 뜯어보고 싶어졌지만 기차와 마찬가지로 공구가 없었고, 주인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므로 참아야 했다. 그때 안내 방송이 울렸다.

곧 열차가 종착역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승객분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 주세요.

평범한 안내 같지만 말이 조금 이상했다. 마음의 준비? 기차에서 내리는 데 마음의 준비씩이나 필요한가? 이런 수상한 기차라면 탈 때 훨씬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오히려 내릴 때는 홀가분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텅 비었을 기차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다.

"안녕~."

태연하게 웃으며 인사까지 건네는 걸 보니 크루아상이 아는 그 쿠키가 확실하다. 분명 기차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시간지기는 원래 신출귀몰했으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 기차 안에서 마주치니 시간지기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마냥 위화감이 심하게 들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응~? 나도 너랑 같은 이유로 탄 거야~. 겨울의 기차역으로 가려고~."

말을 마치며 아무 자리에나 앉고는, 크루아상도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린다. 곧 종착역이라고 했는데 자리에 앉는다니, 웃기는 일이었지만 크루아상은 군말 없이 앉았다. 시간지기가 처음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말을 했을 때 기차여행이라도 가자는 건가 생각했는데, 진짜 기차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게 여행은 아니지만.

"아, 맞아. 너도 혹시 사진들 봤어?"

"사진~? 나는 못 봤어, 네가 다 주워갔으니까~."

"응? 아…… 이 기차엔 내 사진 뿐이었구나? 나는 네 사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게 네 사진이기도 한가."

곧 도착한다던 기차는 아직도 세차게 달리는 중이다. 도착할 때까지 잠시 시간을 채울 거리는 필요할 듯해 크루아상은 가방 안쪽에서 사진들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너도 볼래? 사진."

사진을 보자는 제안에 시간지기는 당연히 응했고, 둘은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해가며 넘기기 시작했다. 이건 언제의 사진이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크루아상과 시간지기는 같은 존재지만 다른 시간선을 살았기에 모든 과거가 완전히 겹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지기는 어떤 부분의 기억이 결여되어 있는 듯했기에 모든 사진을 함께 공감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크루아상의 과거쯤이야, 이미 다 자기 눈으로 봤을 텐데. 사진을 한참 봤는데도 여전히 기차는 멈출 기미가 없었기에 둘은 마지막 사진까지 도착했다. 의문의 꽃병 사진. 크루아상이 이 사진엔 무슨 말을 해야 고민하는 찰나, 시간지기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얼마 전의 사진이네~."

"응? 너는 이 사진 알아?"

"당연하지~."

역시 미래의 일이어서 시간지기만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기엔 시간지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그럼 너는 몰라?'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조금 인상을 찌푸리는데, 알 수 없는 말이 들렸다.

"그럼 아직 못 내리겠네……."

시간지기의 목소리지만 시간지기답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는데 옆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놀라 눈을 몇 번이고 비벼봐도 텅 빈 자리다. 갑자기 어디로 간 거지? 크루아상은 다시 일어나 칸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전 칸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다.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찾아볼까 싶어, 크루아상은 지나온 칸들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칸을 지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사진 같은 건 이제 없었다. 시간지기도 없었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한 칸을 거칠 때마다 자신의 몸에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잠을 잘못 잤을 때처럼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였는데, 여섯 번째 칸을 지나자 팔에 작은 멍이 생겨 있었다. 어디 부딪힌 기억은 없는데.

스물두 번째 칸에서 크루아상은 잠시 숨을 돌릴 겸 멈춰서 좌석에 앉았다. 체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방 안에 있던 물도 거의 다 마셔간다. 배가 고프진 않아 다행이지만, 배가 안 고픈 이유는 잘 모르겠다. 문득 바라본 창밖은 여전히 밝으면서도 이상했다. 햇빛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세상 자체가 빛을 내는 느낌이다. 대체 풍경은 왜 이러는지, 시간지기는 어디로 간 건지, 곧 도착한다던 종착역은 언제 도착하는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몸을 일으킨 크루아상의 발밑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주워보니 작은 꽃잎이었다. 꽃잎은 크루아상이 사진을 주우며 지나올 때 미처 문을 닫는 것을 깜빡한, 스물세 번째 칸에서 날아온 모양이다. 크루아상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음 칸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다음 칸은 기차라기엔 이상했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보인 건 다음 칸으로 가는 문 대신 창문이었고, 커튼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칸의 양옆에는 의자 대신 침대들이 있다. 크루아상은 이것이 어디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인지 안다. 여기는 다름 아닌 병실이었다.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니 텅 빈 병이 있었다. 꽃은 꽂혀있지 않지만 꽃병임을 바로 알았다. 사진 속에서 한 번 보았으니까. 크루아상은 가방에서 31일째의 사진을 꺼내 비교해보고, 똑같음을 확인한 뒤 깨닫는다. 이 사진은 미래의 일 따위가 아니다. 이것 또한 지나온 과거의 일, 그리고…….

비어 있던 꽃병에 갑작스레 사진과 같은 노란 꽃이 자리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사라졌던 시간지기가 있다. 아까처럼 난데없는 등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지기는 자신이 없어져서 보고 싶었냐며 장난스레 웃지도 않았고,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자신이 방금 꽃병에 담은 노란 꽃이 크루아상이라도 되는 양 그쪽만 빤히 응시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기억났어?"

시간지기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 듣는 게 얼마 만이더라. 반복해온 10월 중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꽤 최근이다. 이전 기차가 아닌 병실에서도, 꽃병에 꽃을 꽂으며 시간지기는 이런 목소리로 말했었다. 크루아상은 대답을 말로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시간지기의 질문대로 모든 게 기억난 탓이었다. 이 곳은 크루아상의 병실이었다. 어디가 특별히 아파서 입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 나이대면 흔히 그렇듯 쇠약해져 자연스레 병실 한 쪽에 자리를 얻었을 뿐이다. 그래. 크루아상은…….

"시간은 내가 반복한 게 아니야~."

"뭐? 그럼……."

"일생을 시간여행에 바친 너여서, 시간조차도 너의 죽음을 슬퍼했던 걸까?"

제대로 된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조차도 슬퍼했다는 말이 크루아상의 귀에는 묘하게 들렸다. 크루아상에게 있어 시간지기는 늘 시간 그 자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공백이 지나간 후에 크루아상은 설명을 들었다.

"네가 눈을 감자마자, 시간이 아주 오래 전의 10월로 되돌아갔어~. 처음엔 내 무의식이 시간을 되돌린 건가 했지. 하지만 틀렸어. 시간이 돌아간 원인은 내가 아니라 네 쪽이었던 거야. 너의 무의식, 혹은 아까 말한 대로 시간 자체의 짓이었을지도~."

창문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크루아상은 자신의 머리카락은 흔들렸지만, 시간지기는 옷자락조차 흔들리지 않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 기차는 크루아상의 기차이다. 시간지기가 이곳에 올라탄 것은 시간을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기차에는 크루아상의 사진뿐이었다. 이 기차에 타야 하는 것도,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것도, 그리고 결국 내려야 하는 것도 크루아상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크루아상 하나뿐이니까. ……죽은 것은.

"아무튼 10월은 영원히 끝나지 않았고, 솔직히 계속 똑같은 행동만 하는 널 지켜보는 건 슬픔을 잊게 할 정도로 아~주 재미없었어~. 나는 언제든 그 10월을 끝낼 수 있었지만, 말이지……."

시간지기가 드디어 크루아상을 바라보았다.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이미 반복하던 10월과는 많이 달라진, 나이 든 모습임을 눈치챘다.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신과 변해버린 '자신'이 마주 본다.

"이게 정말 네 미련이라면, 네가 스스로 끝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그것뿐이야."

둘은 병실이 아닌 일반적인 칸으로 돌아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서로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창가에 앉은 크루아상은 바로 옆의 창밖을, 복도 쪽에 앉은 시간지기는 반대편의 창밖을 응시한 채 조용히 열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하면 끝이다. 크루아상에게 더 이상 겨울은 없다. 내리는 순간이 마지막이다.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이 열차에서 내리길 바랄까?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말만 들으면 바라는 것 같지만, 그게 정말 시간지기의 본심일지는 모른다. 시간지기는 정말 괜찮을까? 영원한 시간 속, 자신과 가장 닮은 유일한 자신이 떠나도 괜찮을까? 괜찮지 않으니까…… 크루아상이 10월을 반복하는 내내 곁에서 지켜본 것 아닐까? 지금도 크루아상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게 아닐까? 속이 쓰려서 더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왜 하필 이 10월이었을까? 크루아상은 애써 고민의 화제를 돌렸다. 10월이 크루아상에게 특별한 의미인 건 맞다. 태어난 날도, 시간관리국에 들어온 날도, 시간지기를 만난 날도, 그리고 마지막을 맞은 날도 전부 10월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하필 이 해의 10월인지만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짐작할 뿐이었다. 이때는 크루아상이 모두가 탈 수 있는 시간여행기를 만들기 직전으로, 죄책감이나 부담감은 거의 느끼지 않고 순수하게 수리공 일을 즐기던 거의 마지막 10월이다. 크루아상의 마지막 미련이 10월을 반복시킬 때, 가장 평온했다고, 한 번 더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 10월이 여기였던 게 아닐까. 시간지기에게 이 가설을 말하자 "그럴지도~."라는 애매한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긴, 크루아상도 모르는 크루아상의 무의식을 시간지기가 알 턱이 없다.

이번 역은 겨울, 겨울입니다.

아. 크루아상은 고개를 든다. 옆의 시간지기도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 시간지기가 먼저 물었다.

"너는 이제 미련이 없어?"

"미련?"

"네가 원한다면 내 힘으로 계속 반복해줄 수 있으니까~. 계속 반복한 10월 말고도, 다른 때 언제든지. 그러니까……."

기차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문밖을 바라볼 수 없었다. 시간지기의 눈동자에 홀린 듯 시선을 붙들린 채였다.

"내릴 거니? 여기서."

이 말에 감히 누가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크루아상이 한참이나 대답하지 못하자 시간지기는 먼저 기차에서 내렸다. 시간지기가 기차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 크루아상도 그제야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밖은 온통 하얗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밖은 완전한 겨울이었다. 정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크루아상은 더는 미련이 없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보편적인 시간여행기도 만들어냈고, 이미 연구라면 하고 싶은 만큼 했다. 병실에서 눈을 감을 때도 정말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 드는 생각이 있다면 친구들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보게 될 일이다. 크루아상이 무의식중에 시간을 돌릴 정도로 걱정했던 것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시간지기…….

"내가…… 내렸으면 좋겠어?"

대답은 없다. 눈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시간지기의 얼굴도 흐려 보일 지경이지만, 정작 시간지기의 위에는 조금도 쌓이지 않는다. 시간지기가 분명 밟았을 눈 위에도 발자국 따위는 없다. 이 기차도 바깥의 겨울도 크루아상의 것이다. 시간지기는 지금 미련이라는 명목으로 난입해있을 뿐이다.

"크루아상, 난 너를 보내주고 싶어~. 그래서 일부러 겨울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도 한 거야. 네가 눈치챌 수 있도록~.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시간지기는 안다. 크루아상이 쉬이 자신을 두고 떠나겠다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터다. 하지만 보내주고 싶다는 말 또한 거짓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몇십 년간 쌓아온 관계는 이미 신뢰의 단계를 넘어섰다. 쉴 때가 온 소중한 상대를 쉬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간지기도 절실히 느끼리라. 그래서 지금 기차에서 먼저 내린 것이다.

"그러니까 나한테 묻지 말고, 너 자신에게 물어봐~."

"나 자신……."

나 자신은 누구지? 시간지기는 내가 아닐까? 나는 어떨까? 나는 영원히 살아야 하고 유일하게 마음을 준 상대는 이제 떠나야 한다. 붙잡을 것인가? ……붙잡지 않는다. 속으로는 내심 남아주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떠난다고 결정하면 군말 없이 존중한다.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을지도 모르지. 영원히 살 테니까 이런 인연쯤은 몇백 년이 지나고 나면 희미해질 것이다. 그런 쿠키가 있었나? 할 정도로.

아, 그런가. 지금 시간지기가 두려워하는 건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다. 그제야 깨달았다. 시간지기는 희미해지는 기억을 두려워한다. 크루아상과의 인연이, 나눈 감정이 흐려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이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게 느껴지는 날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크루아상도 두렵다. 시간지기가 자신을 잊는 미래는 상상만 해도 괴롭다. 우리의 인연이 아무리 두터웠더라도, 시간지기는 결국 잊고 말 것인가? 그때 크루아상의 시선에 무언가 스쳤다. 그 순간 말했다.

"넌 나를 잊지 않아 줄 거야."

시간지기의 눈이 흔들린다. 그리고 크루아상이 제 손목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도 내려다보았다. 금색의 팔찌가 그 자리에 있다. 생일 선물이었던 팔찌다. 딱히 팔찌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받은 날 이후로 손목에서 떨어져본 적이 없는 그 팔찌. 팔찌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쯤, 시간지기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팔찌를 한참 바라보던 시간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루아상에게 손을 내민다. 잡고 내려오라는 것처럼. 크루아상은 그 손을 잡기 전에 자신의 가방을 시간지기에게 건넸다. 이 안에는 크루아상의 사진들이 가득 담겨있으니, 시간지기에게 주고 싶었다. 가방을 넘겨받은 시간지기가 다시 손을 내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다시 내밀어진 손은, 크루아상이 망설임을 그치고 잡았을 때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구의 떨림인지는 모른다. 아마 둘 다 손을 떨고 있지 않을까. 탑승구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와 마지막 계단에 섰다. 여기는 시간지기의 시간이 아니기에 시간지기는 이 눈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지만, 아마 크루아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기차 밖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닌, 삶의 바깥일 뿐이니까. 크루아상이 멈춰있는 동안 시간지기가 물었다. 아마 마지막이다.

"크루아상, 너는 나를 만나서 행복했어?"

순간 마음이 동요했지만 크루아상은 침착하게 답했다.

"응. 당연하지."

"하지만 너는 나를 만나지 않아도 행복했겠지? 그렇다면…… 너에게 나와의 만남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래, 크루아상이라면 시간지기와 만나지 않았어도 보람찬 삶을 살았을 것이다. 질문을 던진 시간지기도 잘 알고 있다. 잘 알기에 저리 확신하며 물었으리라. 그러나 크루아상은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시간지기. 너는 나를 만나서 행복했어?"

시간지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걸 왜 묻냐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답했다.

"응."

"나를 만나지 않았어도 행복했을까?"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지기는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는데,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 와서야 처음 알았다. 크루아상의 심장도 덩달아 아팠다. 응어리진 것을 뱉듯, 시간지기의 입에서 대답이 토해졌다.

"……아니."

"그래."

크루아상이 웃었고, 이어진 대답을 들은 시간지기도 결국 웃었다.

"난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응."

시간지기의 답을 듣고 크루아상은 발을 내렸다. 눈을 밟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찰나였다. 눈보라가 몰아쳐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고, 눈앞이 다시 밝아지자 크루아상은 다시 기차 안에 있었다. 창가를 바라보자 크루아상과는 다르게 여전히 역에 서 있는 시간지기가 보인다. 둘의 눈이 마주하자 시간지기가 입 모양만으로 말한다. 고, 마, 워.

아……. 기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크루아상이 용감한 쿠키 일행을 배웅했던 그 기차역, 그 자리에서, 이번엔 시간지기가 크루아상을 배웅하고 있다. 그때의 크루아상은 미래를 향한 걱정과 함께, 그 몇 배는 되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가득 안고 있었다. 시간지기도 조금쯤은 미래를 기대하고 있을까? 자신 없이 살아갈 미래를…… 상상해보고 있을까? 이기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사는 내내 모두에게 좋은 미래를 주고 싶었고, 그 대상에는 당연히 시간지기도 포함이었으니까. 시간지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소리쳤다.

"나야말로 고마워!"

시간지기에게 들렸을까? 들렸을 것이다.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이 아는 가장 대단한 쿠키니까. 앞으로 시간지기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역시 이 대답도 긍정이다. 시간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게 세상에는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대니까.

이윽고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글에 관한 사담: https://fusetter.com/tw/8YfOzHLV#all

정말 안 읽으셔도 좋을 쓸데없는 이야기 투성이라 후세터에 따로 썼습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