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논컾)

결여 (백업)

마땅히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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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날짜:2021.04.18

*크루아상과 시간지기 설정 관련 심각한 날조 O

끼이익. 금속성의 물질이 대리석 바닥에 긁히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누구나 귀를 막고 달아날 정도의 소음이었으나, 정작 그 소리를 자아내고 있는 이의 귀에까지는 닿지 않았는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 잘 닦인 흰 바닥 위를 길게 가로지르는 선이 생겨난다. 이 바닥을 빛내기 위해 매일 분투하는 이들이 본다면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을 광경이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운가? 이 완벽하도록 아름다운 바닥에 흠집이 나서? 그러나 이 세상에 온전해서 완벽한 것 따위는 없다. 모든 존재는 결여됨으로써 완벽해진다. 그들은 아직 모르기에 이 바닥을 애도하는 거겠지. 정말 어리석게도.

이 바닥은 지금 완벽해지고 있다. 한 줄의 흠집, 그것이 이 바닥을 완성한다.

어느 날 크루아상은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무엇을 잃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짐작할 뿐이었다. 아주 작고 가벼운 뭔가가 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감각이 느껴졌으므로. 잃어버린 것은 아주 사소했다. 샌드위치 봉투 밑바닥에 남은 빵가루, 정비실 구석에 떨어진 녹슨 못,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 한 장 정도의 무게. 사라져도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존재. 하지만 봉투에 남은 가루가 없고, 정비실 바닥에 흩어진 못이 없고, 벚나무 아래에 꽃잎이 없으면 누구나 위화감을 느낀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봉지 안에 빵가루를 담을 필요가 있을까? 못을 구부려 다시 정비실 바닥에 던져놓을 필요가 있을까? 꽃잎을 모아 벚나무 아래에 뿌려줄 필요가 있을까? 크루아상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럴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자연스럽게 치워진 작은 것들은 전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 크루아상이 잃어버린 작은 것도 다시 돌아오리라. 수리공이자 시간여행자인 그에게 '결여'는 별로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빈틈이 생긴 이음새를 조이고, 구멍 뚫린 시간을 메우는 일을 매일같이 해왔으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크루아상은 작고 가볍다고 해서 전부 없어도 좋은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정비실 바닥을 구르던 녹슨 못은 사라져도 좋지만, 시간여행기에 단단히 박힌 못은 사라진다면 시간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둘의 시작은 같은 못이었는데, 그것을 누가 판가름한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드라이버를 돌려 시간여행기에 박혀 있던 못을 빼낸 건 크루아상이고, 의식하지 못하는 새 바닥에 떨어뜨린 것도 크루아상일 테다. 못의 쓸모는 크루아상이 결정했다. 크루아상이 필수 불가결했던 못을 먼지 더미 속에서 구르는 쓰레기로 만들었고, 새로운 못을 집어 필수 불가결한 못으로 만들었다.

그럼 크루아상이 가지고 있던 작고 가벼운 것의 쓸모를 판가름한 자는 누구일까? 누가 크루아상에게서 그것을 빼내어 바닥에 던져버렸을까? 그는 크루아상에게 빠진 것 대신 무엇을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걸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가 원하는 새 것을 끼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나에게 무엇을 담을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다. 그래야만 나의 인생이다. 그가 새 것을 끼우기 전에 이전에 있던 것을 기억해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는데 찾을 수가 있을까?

크루아상은 가장 단순한 방법부터 시작했다. "혹시, 요즘 내가 좀 달라졌다거나, 이상하다거나 하는 생각 한 적 있어?" 주위 쿠키들에게 모두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글쎄?"와 "모르겠어." 이상의 답은 듣지 못했다. 크루아상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작은 변화를 눈치채줄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적어도 시간관리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스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았을 뿐 방향이 잡히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이대로는 방향을 고민하는 새에 새로운 무언가가 텅 빈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일상을 이어나가다 보니 잃어버린 것을 허무할 정도로 쉽게 눈치채버렸기 때문이다. 크루아상은 이제 즐겁지 않았다. 동료들의 시간여행기를 봐주고, 엉망이 된 시간을 고치는 모든 일이 놀랄 만큼 감흥 없이 다가왔다. 그저 제 앞에 주어진 과제를 해치우는 것처럼 의무감에 사로잡혀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뭐지? 즐거움? 의욕? 열정? 남을 돕는 기쁨?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원인은 뭘까?

이상하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늘 어지간한 일은 잘 해내고, 그런 만큼 잘 질리는 그였으니까. 지금껏 주위에서 수많은 칭찬을 받은 일들도 금방 그만둬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김없이 흥미를 잃어버렸기에. 그런 나날을 반복하다 실패를 기뻐하고 성공을 괴로워하게 되었을 무렵 시간여행을 만났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설렘, 가져본 적 없는 목표. 여러 일을 거치며 그는 어느새 이 일에도 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만 것이다. 품은 감정은 큰 만큼 오래 갔지만 그저 오래 갔을 뿐이다. 언젠가는 꺼지고 만다. 그리고 오래 갔던 만큼, 지루함도 큰 모양이다.

남을 돕는 일은 의미 있고 보람차다. 단, 즐거울 경우에만 말이다. 한 번 흥미를 잃고 나니 이전엔 그토록 보람찼던 일들도 성가실 뿐이었다. 틈만 나면 시간여행기를 봐달라고 찾아오질 않나, 잔업을 떠넘기질 않나. 애당초 크루아상이 개발한 고글이 아니었으면 시간 어딘가에서 미아가 됐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일을 조금이라도 더 맡기지 못해 안달인 모습들이 끔찍했다. 그간 자신은 이런 요구에도 선뜻 응했었단 말인가? 겨우 이런 이들을 도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는 건가?

이제야 알았다. 사라진 게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와서 찾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잃어버린 게 아니다. 쓰레기 같은 존재들을 돕는 일에 행복을 느끼던 자신이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스스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래. 이런 이들을 돕기 위해 애썼으니 질리는 게 당연하지. 크루아상의 눈은 그때부터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리공 따위의 의미도 보람도 없는 일보다 더 높은 곳을. 더 높은 이상을. 갖고 싶다. 어떻게 하면?

크루아상은 더는 남을 위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 이제는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주변을 위해 하는 일은 늘 쉽게 질리고 만다. 나를 보아야 한다. 오직 나만이 나를 만족시킬 수 있고, 새로운 길로 이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더 강해질 방법만을 계속해서 모색했다. 타고난 힘은 보잘것없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전부 머리로 해온 것들이다. 이래서는 평생 더 높은 곳으로는 갈 수 없다. 유일하게 쓸모있는 머리로 생각해내자. 시간여행기도 고글도 만들어낸 자신이라면 강해지기 위한 도구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게 다짐한 이후 크루아상은 연구실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안에 틀어박혔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틈만 나면 문을 두드려댔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해방감에 취해 내달릴 뿐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의 빈자리를 채워줄 무언가. 그 무언가를 손에 잡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으나, 절대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크루아상은 갈망하고 있다. 지독한 지루함을 영원히 끊어내 줄 재탄생을.

타고난 힘을 뒤집을 수는 없다. 세상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 이들은 탄생부터가 크루아상과는 달랐기에. 그러나 특별한 재료와 거대한 의지로 빚어지는 것은 크루아상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강한 의지라면 크루아상에게도 있다. 세상이 공평하다면 크루아상에게도 기회가 돌아와야 한다. 그 어떤 특별한 힘도 없이 수많은 발명을 해낸 크루아상에게도 기회가 돌아와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불공평했고, 그렇기에 결론은 선로를 벗어났다. 세상이 마련한 길 안에서 달린다면 언제까지나 남에게 헌신하는 지루해 미칠 듯한 인생만이 계속된다.

크루아상은 그 누구도 힘을 주지 않는다면 빼앗기로 했다. 수개월을 투자한 연구가 내려준 결론이었다. 본래 그렇지 않았던 이가 갑자기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되는 방법은 단 두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도구에 의존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올려주는 강화제, 전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금지된 유물 같은 도구들이 그 예다. 하지만 이건 도구의 힘을 빌릴 뿐이다. 도구가 사라진다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는 힘 따위 있어봤자 소용 없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한 방법이 바로 빼앗는 것이다. 힘은 절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으니, 자신이 가진 힘을 늘리는 법은 결국 남의 힘을 자신이 갖는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치이다.

힘을 빼앗는 법을 연구하며, 누구에게나 힘의 그릇이 있어 수용량을 넘으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보고서를 아주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런 점은 연구의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크루아상은 자신이 누구보다 큰 그릇을 가졌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크루아상은 이뤄냈다. 상대의 시간도, 생명도, 그리고 힘까지도 앗아가는 저주받은 황금 가위를 손에 쥐었다! 이것을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가. 크루아상이 제자리에 멈춰 남들이 미쳤다 손가락질하는 일에 몰두할 때, 수많은 이들은 이미 크루아상을 지나쳐 저만치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조급하지 않다. 그들은 이제 곧 멈출 테니까. 크루아상이 주저앉힐 테니까. 이 연구를 위해 허비한 시간도 걱정할 필요 없다. 더는 시간의 흐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크루아상은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황금빛 가위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크루아상의 손과 가위를 뒤덮은 진득한 액체가 바닥에까지 얼룩을 남겼다. 고요한 시간관리국의 깔끔한 바닥이었기에 소리도 얼룩도 누구에게나 거슬리겠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이미 지적할 이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아니지. 아직 하나 남았지. 크루아상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위를 도로 주워든다. 어디론가 향하는 걸음걸이는 터무니없이 느리다.

일어난 일은 전부 보이는 대로다. 크루아상은 시간관리국 직원을 모두 가위의 제물로 삼았다. 쓰레기 같은 조직의 쓰레기 같은 존재들. 아무 생각 없이 삶을 흘려보내다가, 누구보다 힘을 보람차게 사용할 크루아상의 양분이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행운이고 축복이다. 걱정하지 마. 당신들의 몫은 내가 최고로 아름답게 활용해줄 테니까.

이제 시간관리국에는 크루아상 외의 단 한 명, 국장만이 숨 쉬고 있다. 이 정도로 관리국을 뒤집어엎었는데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두려움에 떨고 있나? 혹은 당신도 선택받은 존재여서, 이런 추잡한 방식을 쓰는 나 따위는 가볍게 이겨버릴 수 있나? 궁금했다. 그의 힘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미치도록 탐이 났다. 자신은 이런 하잘것없는 직원들을 최고의 엘리트라고 모아놓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줘. 내가 갖게 해달라고.

그리고 너무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국장은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크루아상을 단숨에 제압하지도 않았다. 둘은 격렬하게 싸웠고 크루아상이 승리했다. 그뿐이었다. 국장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목을 베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던 엄청난 양의 힘에 순간 숨이 턱 막혔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미 가위에 목이 잘려 나간 지 오래니까.

그가 크루아상을 대충 상대했다고는 해도 전투는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싸우는 도중 다친 한쪽 눈에서는 지독한 단내가 풍겼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크루아상에게는 희열뿐이었다. 잃어버린 눈의 안광까지 남은 눈이 빼앗은 것마냥, 치켜뜬 눈 속 기묘한 황금빛이 감돌았다. 드디어 이 힘이 제 것이 되었다. 크루아상은 웃었다. 텅 빈 국장실에 울려 퍼지는 웃음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 기뻐서. 너무 기뻐서. 

그렇게 그는 국장이 되었다.

국장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단연 관리국의 재정비였다. 자신이 전부 쓸어버려 텅 빈 관리국을 도로 채워넣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대로 완벽하고 이상적인 조직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미없으니까. 조금 허접한 직원이 들어와 관리국의 물을 흐려도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상황이 심각해지면 그냥 전부 뒤엎고 다시 시작할 힘이 있었기에.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들만 둘 수는 없지. 그는 누구를 데려올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가장 재미있는 결론을 냈다. 모든 시간선을 둘러본 뒤, 시간여행기를 개발해낸 수많은 자신들을 찾아내어 그들 모두에게 스카웃 제안을 한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으리라. 자신을 지켜보는 자신이라니!

쓰레기들로만 가득 찬 조직, 그 사태를 손 놓고 방관만 하는 국장. 그 사이에 놓인 크루아상. 자신과 같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할까? 과연 이 안에서 다른 선택이 탄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야기는 다시 한밤중의 복도에 울려 퍼지는 소음으로 돌아온다. 소음을 만드는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지만, 문 저편에 앉은 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이제 슬슬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당연히 그를 이길 생각은 없다. 드디어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찼을 그를 막아설 이유 따위는 없지 않은가? 영원한 시간을 누비며 국장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다음 크루아상을 불러들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져주는 것도 재미없겠지. 상처 하나쯤은 남겨도 될 터다. 상처는 어디로 해주는 게 가장 좋을까?

그래, 눈 하나 정도면 좋겠네. 네가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오늘의 기쁨을 기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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