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시간크루] 갈라테이아 (백업)

당신의 이름을 떠올린다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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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날짜: 2023.07.07

*근미래 아포칼립스, 의인화

*글에서 등장하는 모든 집단 등은 허구이며 실존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돔과 공상과 현실

크루아상은 숨을 들이켰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귓불을 빨갛게 물들이는 추위도, 코끝을 맴도는 서늘한 겨울 향기도 없었지만 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는 증거였다. 20XX년, 온 인류가 급격한 환경 변화를 피해 돔―이라고 불리지만 정확히는 반구형 전자 장벽으로 둘러싸인 대피 공간이었다―안으로 도망 온 순간부터 계절은 오로지 하늘의 색깔로만 구분지어졌다. 이런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늘 되풀이되던 친구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크루아상은 문을 열었으나 실내는 고요했다. 친구들은 제각기 다른 돔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지겹도록 꾸준히 넓어지고 생겨나는 돔, 서서히 늘어나는 인구 속 새로이 세워진 기관이 인류를 서서히 통제하려 든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들 지루한 수업을 견디다 못해 슬쩍 들춰보던 옛 소설에는 단골 소재로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물론 이를 회상하는 크루아상은 수업이 지루하다는 생각 따위 일생 해 본 적 없었지만.

아무튼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란 모두 타고난 재능이 하나쯤은 있으며, 그러니 그에 적합한 위치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런 명목으로 돔 안의 모든 생존한 인류는 신생 정부가 결정한 '적합한 위치'로 이동했다. 평범한 일을 하게 된 사람도, 돔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크루아상과 친구들은 전공 때문인지 전부 돔과 관련된 일을 하러 떠났다.

한 친구는 돔의 시설 전반을 담당하는 자동화 기계 개발 부서에 배정됐다. 다른 한 친구가 맛대가리 없기로 유명한 '영양식'의 제조 및 개선을 담당하는 부서로 보내질 때 늘어놓은 온갖 불만을 아직도 하나하나 기억한다. 애초 셋이 친해졌던 이유도 점심시간, 대학교 곳곳에 놓인 영양식 자판기 대신 하나뿐인 식당으로 향했기 때문이었으니 당연했다. 밀폐용기에 잘 포장된 검은 영양소는 음식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겉으로 드러나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런 세상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경찰 일을 떠맡게 된 크루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기계를 좋아했고, 놀러 나가는 것보다 나사 하나를 더 조이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재앙 앞에 장래희망 따위는 무력하다. 하루아침에 좋아하던 기계가 아닌 사람이 살아 숨 쉬는 거리의 안전을 정비하게 되었다. 다만 크루아상의 성격상 이렇게 떠맡게 된 일이라도 늘 온 힘을 다했고, 덕분에 주변으로부터는 적성에 맞는다는 평가를 무수히 들었다. 경찰이 소속된 '돔 관리국' 내에서도 유능한 경찰 크루아상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렇게 되짚어보니 신생 정부가 주장하는 적합한 위치란 정말 합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인정하는 것은 역시나 조금 꺼림칙하단 사실과는 별개로. 돔을 관리하는 기관의 가장 우수한 경찰이 하기도 우스운 말이지만 원래 이런 세계관 속 정부란 대개 온갖 악행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녀석들이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회상은 잠시 멈추는 편이 좋았다. 크루아상은 방금 문을 연 텅 빈 건물―몇 년 전, 친구가 떠나기 전까지 운영했던 샌드위치 가게였다―의 구석에서 상자를 찾았다. 당연하게도 돔의 모든 구역은 안전을 위해 CCTV로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었지만 이곳처럼 오래된 폐건물에는 아직 보는 눈이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크루아상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지배 체계에 대항하는 비밀 저항 운동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영양식 대신 간단한 음식을 몇 개 만들어 먹을 뿐이었다. 그것조차도 요즘은 카메라 앞에서는 꺼려졌다.

조금 전 극악무도한 녀석들 운운한 것은 사실상 농담에 가까웠다. 인류는 돔 덕분에 살아남았고, 완연한 죽음의 땅이 된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그런 인류를 위해 수많은 자산과 시간을 투자해 모든 오염을 막아내고 정화하는 장벽을 개발해낸 그들에겐, 이 안에서의 생활 방식을 제시할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제시할 자격 뿐이다. 강제하고, 감시하며, 모든 행동을 통제하려 드는 건…….

돔 생활이 시작된 후 6년이 지났고, 한 개였던 돔은 여덟 개로 늘어났다. 흔히 '중앙 돔'이라고 불리는 가장 큰 첫 번째 돔에는 거대한 건물이 세워졌다. 지금의 돔 관리국의 시초였다. 그 건물이 세워질 때가 크루아상이 처음 돔 생활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이었다. 실은 크루아상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다 죽어가는 행성의 유일한 안식처에 순식간에 나타난 새까만 빌딩의 풍경에선 두려움을 느꼈으리라. 그것은 파노티콥을 바라보는 감시탑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크루아상은 감시탑으로 소속을 옮겼다. 반 강제적인 처사였을지라도 결국 관리국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다. 죄수가 되느니 간수가 되고 싶었을까. 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두려움에 따른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몇 년도 전에 결정한 일을 굳이 이제 와서 확신하려 들 필요도 없다.

몇 년 새 꽤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두 입 정도 남았을 무렵, 감시탑에서 기다렸다는 듯 연락이 왔다. 출근 시간 전부터 일 관련 연락이 오는 건 거의 매일 있는 일이었으므로 크루아상은 대수롭지 않게 단말기 화면을 열었다. 그러나 곧 남은 샌드위치를 급하게 밀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오셨군요!"

크루아상을 맞이한 건 익숙한 경찰 동료가 아닌 다른 부서의 직원이었다. 걸친 흰 가운, 왼쪽 가슴에 자수된 초록색 문양으로 보아 생명연구부 소속이다. 직원의 옷은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몸도 성치 않아 보였으나 상황 설명이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다급히 말을 걸어왔다.

"아직 건물 안에 연구원들이 남아 있어요! 먼저 온 경찰부 몇 명이 들어가긴 했는데 건물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건지 다들 들어가자마자 연락이 끊겨서…… 안쪽 상황은 파악이……."

크루아상은 다시금 연락을 상기했다. 4층 생명연구부에서 미지의 사고 발생. 현재 돔 관리국 전체 봉쇄 중. 모든 경찰부는 즉시 돔 관리국으로……

지금껏 관리국에 문제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관리국 설립 당시 정부가 장담했고, 관리국장이 공언했으며, 직원들이 자랑하던 보안이다. 관리국은 돔에서, 즉 현재 지구에 남아있는 모든 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아닌가. 그곳이 외부에서 공격받은 것도 아니고 내부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직접 보기로 했다. 크루아상은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행동파인 기질이 있었다. 그런 기질이 그를 우수 경찰로 만들어준 거나 마찬가지니 장점인 셈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검은 건물로 발을 옮겼다.

돔은 당연하게도 그간 수많은 문제에 휩싸여왔다. 전례 없던 규모의 재해가 일어나 모든 인간이 돔으로 도망칠 때, 사람을 가려 받는 건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도,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형수도, 세 치 혀로 나라의 정세를 뒤흔들던 정치인도, 매일같이 역 안에서 잠을 청하던 노숙자도 모두 돔으로 왔다. 처음 돔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 한 달간은 차라리 밖에서 죽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했다. 법도 지도자도 없었다. 그리고 물자는 극히 적었다. 이 돔 안에 살아있는 사람 중 그때 무슨 짓까지 해보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달 후엔 아니었다. 돔 기술을 개발하고, 설치하고, 재해 시기를 예측해 작동시킨, 가히 인류의 구세주라 불려 마땅한 그들, 신생 정부가 체제를 설립한 후엔 말이다. 돔은 놀랄 만큼 빠르게 안정되었다. 다소 과격하게까지 느껴지는 '적합한 위치로의 이동'을 모두가 받아들인 것도 이래서일지 모른다. 목숨을 건 경쟁을 겪은 생존자들은 이제는 애쓰지 않고 치열하지 않게 누군가 정해주는 대로 살고 싶어 한다.

생각이 조금 딴 길로 샜다. 지금 중요한 건 신생 정부가 이 돔에서, 즉 지구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대항할 수 없다. 신생 정부의 상징인 돔 관리국 안에선 더더욱. 그러니 누군가 숨어들었을 거란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단순 실험 중 사고라기엔 대응이 너무 과하다. 긴 생각을 하는 사이 크루아상의 발은 어느새 4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딛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상함을 눈치챘다.

건물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사고 현장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비명이나 분주한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던 것으로 보아 건물의 어딘가가 심하게 파손됐을 텐데, 이상하게도 실내에는 연기조차 없었다. 바닥에 널린 수많은 유리 조각, 그리고 이미 늦은 사람들의 시신만이 여기가 사고 현장임을 증명한다. 크루아상은 생존자를 찾아 안쪽으로 들어가다 익숙한 제복의 시신과 마주했다. 크루아상과 같은 것이다.

"이건……."

분명 아까 먼저 들어간 경찰들은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그들이 죽어서 연락이 끊겼다면…… 적인지 뭔지 모를 것은 아직 이 안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끝까지 긴장이 올라왔다. 지독한 고요를 느낀 순간부터 이미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이젠 너무 뛰어서 멈출 것 같았다. 크루아상은 권총을 쥐고 여차하면 쏠 준비를 마친 채 점점 깊이 향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고 느꼈다. 그만큼 밝은 머리카락이었다. 피로 얼룩진 흰 옷을 걸친 채로 바닥에 주저앉은 금발의 연구원.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시체뿐이었지만 그 하나만은 분명 살아 있었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금색인 눈동자가 크루아상을 응시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연구원일 수 있겠으나 크루아상은 도저히 이 사람이 아군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긴장 속 대치 상태가 이어졌으나,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무 말 없는 상대를 계속 마주 보고 있는 건 크루아상의 적성에 맞지 않았으므로 결국 첫 마디를 떼고 말았다.

"여기의 연구원…… 이신가요?"

"도와주러 온 경찰?"

던진 질문에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듣고 나니 이 사람은 평범한 연구원이고 크루아상을 적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권총을 들고 있으니 누구나 긴장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연구원이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에 눈이 갔다. 정말 찰나였을 뿐이지만 크루아상은 똑똑히 보고 말았다. 분명 금발의 연구원인데, 사원증 속의 사진은 검은 머리를…….

그리고 크루아상은 땅에 처박혔다. 의문의 상대는 순식간에 한 손엔 크루아상의 목, 다른 한 손엔 권총을 쥔 손을 붙잡고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루아상이 사원증을 본 찰나 이 연구원인지 뭔지 모를 사람도 그 시선을 좇았겠지. 방심한 탓이다. 이런 식으로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죽으면 이 사고는 누가 수습하면 좋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데 정작 맨손으로 크루아상의 목숨줄을 틀어쥔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한참 크루아상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이랬다.

"날 알아?"

알 리가 있나. 터무니없는 질문엔 답이 나오질 않았다. 목이 붙들렸으니 당연하지만, 이유가 그뿐만은 아닌 듯했다. 이상하게도 이 정체불명의 인물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몸의 모든 기관이 잘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크루아상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는 혼자서 답을 얻은 듯 보였다. 크루아상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더니, 곧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아하……."

숨이 막혔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크루아상이 마지막으로 들은 건 이해되지 않는 감정으로 가득 찬 감탄사였다.

가짜 눈의 맛

크루아상은 가게 안에 들어앉아 잿빛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 허접한 인공 하늘 때문에 겨울을 최악의 계절로 기억하게 됐다고. 난 정말 겨울을 싫어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 대꾸하는 목소리도 익숙했다. 실내인데도 안개가 자욱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새파란 하늘도, 잿빛 하늘도 전부 인공인 건 같잖아?」

「겉모습은 중요해. 같은 맛의 샌드위치라도 다들 새까만 쪽보단 알록달록한 쪽을 먹고 싶어 할 걸.」

「글쎄…… 내 생각에 사람들은 새까만 영양식을 고를 것 같지만.」

둘이 터뜨린 웃음이 점점 잦아드는 소리가 먼 동굴 속 메아리처럼 흐릿해졌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크루아상에게 닿았다.

「크루아상, 듣고 있어?」

「크루아상.」

"크루아상?"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몸이 일으켜지지는 않았다. 기절할 정도로 강하게 잡혔으니 당연하겠지만 목이 얼얼했다. 애써 고개만이라도 들어 자신을 부른 게 누군지 확인하려 했다. 애초에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동료가 구해줬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모르는 목소리가…….

"일어났구나?"

황당하게도 눈앞에 나타난 얼굴은 크루아상을 기절시킨 장본인이었다. 산뜻한 웃음까지 짓고 있는 정체불명의 금발. 그는 크루아상이 몸을 가누지 못하자, 자기가 기절시킨 주제에 손수 벽에 기대어 앉혀주는 친절까지 베풀어 주었기에 크루아상은 자신이 있는 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둘러본 풍경은 돔에 백 개는 있을 법한 버려진 창고의 모습이라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황당함에 뭐라도 따지려 했지만 목에서는 말 대신 기침이 나왔다.

"미안, 사실 기절시킬 생각까진 없었는데. 아직 힘 조절이 잘 안돼서~."

태도가 지나치게 뻔뻔해서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나왔어도 말을 잃었을 듯했다. 크루아상이 그런 심정을 가득 담아 쳐다보자 눈빛으로 감정이 충분히 전달됐는지 그가 몇 걸음 물러났다.

"묻고 싶은 게 많지? 어떤 게 제일 궁금하려나? 네가 왜 살아있는지부터? 이건 당연해. 말했듯이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목소리가 나왔다면 연구원이고 경찰이고 다 죽였잖아, 하고 답했을 것이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 궁금하려나. 흠, 나는 '너한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던 거라.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너를 찾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치우고 있었던 거야."

궁금한 점을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골라 대답하던 그의 시선이 잠깐 크루아상을 스쳤다.

"나를 왜? 라는 표정이네.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는 걸로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구면이거든~."

"우리가? ……아."

조금 갈라졌지만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말 한 마디를 하면 기침이 열 번 정도 몰려오는 게 아직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름을 알고 있다고 구면이라니. 잠든 새에 신분증이라도 몰래 뒤진 거겠지. 혹시 신종 사기 수법인가? 아니지. 사기 좀 치겠다고 사람을 무더기로 죽이는 사기꾼이 있을 리가……. 기침을 잠재우며 하던 생각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크루아상이 진정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드디어 크루아상의 입이 조금 열렸다.

"네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 돼."

"그럴 거야. 이해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거든. 지금 이해하면 곤란해."

"나를 왜 찾았는데? 찾을 거면 그냥 찾아오면 되지 왜 굳이 건물에서 사람들을 죽인 거야? 애초에 거긴 어떻게 들어갔어? 아니, 참.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지. 제일 중요한 게…… 넌 대체 누구야?"

"질문이 너무 많은걸~."

"넌 누구인지부터 대답하면 되잖아."

"그게 제일 대답하기 힘든 건데. 난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도 없어. 네가 날 부르면 그게 내 이름이고, 네가 내 쓸모를 찾으면 그게 나야."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터무니없는 말은 하필이면 크루아상이 간신히 고물 더미를 짚고 일어나려던 찰나에 떨어졌다. 도로 넘어질 뻔한 크루아상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언성을 높이기 위해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너랑 각별한 사이라도 돼? 지금 내 눈에 넌 쓸모없는 테러리스트거든?"

"아하하. 그래. 당장은 그것도 나쁘지 않아."

겨우 일어난 크루아상의 눈에 테러리스트(그의 희망대로 불러주는 것이다)가 여전히 피 묻은 연구원의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머리색부터 틀려먹은 사원증까지 아직도 뻔뻔하게 걸고 있는 모습이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손이 떨린다. 지금 크루아상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돔의 심장부에 침투해서 눈에 띄는 사람을 모조리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크루아상은 그의 정체도, 목적도 모르지만 그는 크루아상을 알고 있다. 이름뿐만이 아니라, 표정만 보고도 무엇이 궁금한지 알 정도로 자세히 말이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의 말대로 정말 구면이기라도 한 건가?

"너는 경찰이지?"

"뭐? ……그래. 경찰인데."

"그 일은 적성에 맞아?"

갑자기 돔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만족도 조사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크루아상은 테러리스트의 정체가 궁금한 것과는 별개로 깊게 얽히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오래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맞든 안 맞든 너랑은 상관 없잖아."

"대답이 그렇게 매정하면 좀 곤란한데~. 죽일 생각이 없는 거랑 죽이지 못하는 건 별개인 거 알지?"

"지금 협박하는 거야?"

"아니, 그냥 농담이야."

테러리스트는 일련의 대화를 거치면서도 처음 지은 산뜻한 미소에서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내킨다면 몸 상태도 성치 않은 지금의 크루아상쯤이야 단숨에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적성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이 일은 나름대로 맞는 것 같고."

"그래……. 하지만 대학에선 기계를 전공했지?"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을, 테러리스트는 불쾌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지만 답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한참 동안 크루아상을 쳐다만 보다가 몸을 돌려 창고의 문고리를 쥐었다.

"그럼 오늘은 이쯤 할까. 오늘의 일은 잊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이런 경험, 잊고 싶어도 못 잊을 것 같거든."

"너를 기절시키고 난 바로 건물을 빠져나왔어. 나를 추적하다가 역으로 습격당했다고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여긴 중앙 돔의 구석이고. 나가면 바로 우리가 만난 건물이 보여."

"너는 나랑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계속 동문서답이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흘려넘길 줄 알았다. 하지만 테러리스트의 동작은 멈췄고, 분명한 대답이 들렸다.

"아, 질문 고마워. 하마터면 이 말을 잊을 뻔했네.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앞으로 네 주변의 누구도 믿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

"제일 수상하고 믿기 싫은 건 넌데 말이지?"

"그래. 하지만 이 말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올 거니까."

직후 창고의 문이 열렸고, 테러리스트는 빠르게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크루아상이 회복이 덜 되어 느린 동작으로 뒤쫓아갔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주위를 조금 살피다 고개를 들자 테러리스트의 말대로 돔 관리국이 보였다. 여기라면 어디인지 안다.

하지만…… 대체 방금의 만남은 뭐였던 걸까?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납득이 갔다. 그의 강한 힘도 내뱉는 말들도 전부 의문투성이다. 가장 큰 의문은 크루아상이 그가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의 이상한 감각과 크루아상을 자세히 알고 있던 그를 되짚어 보았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나? 크루아상의 기억상으로는 아니다.

그러나 그와 크루아상 사이에 어딘가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는 점만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크루아상이 돌아가서 확인한 바로는, 관리국의 사고는 테러리스트가 자진해서 4층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4층에 있던 인원은 크루아상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으니 사고로 날아간 자료와 인원을 보충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었다. 크루아상은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다 역으로 습격당해 기절했다고 증언했고, 별 의심 없이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하는 건 조금 찜찜했지만 이것 외에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테러리스트와 단둘이 얘기나 나누다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건강검진 결과 큰 이상은 없었지만, 크루아상 외에는 테러리스트를 목격한 생존자가 없었기에 관련해서 증언하느라 한참을 관리국에 붙잡혀 있었다. 그렇게 눈에 띄는 금발에 눈도 황금빛이니 금방 찾을 수 있겠다고 했다. 그 인원을 단숨에 해치운 사람을, 찾는다고 바로 잡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혹시 원래 관리국 직원 중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든가 있었나요? 그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을 때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아서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질문의 답은 부정이었다. 하긴, 관리국 직원이라 익숙한 거였다면 그렇게 눈에 띄는 남의 사원증을 걸고 있진 않았겠지. 다만 그 질문을 받은 관리국 보안직원의 표정이 조금 석연치 않았던 게 마음에 조금 걸렸다. 돔의 운영에 관련된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크루아상은 그런 생각을 하다 잠시 멈췄다. 생각해보면 어떤 전조도 없이 관리국에 난입해 사람을 있는 대로 죽이는 인간이 돔의 비밀과 관련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테러리스트도 모두를 의심하라고 했지. 솔직히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조직에 비밀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지금처럼 사는 것과 비밀을 까발려 6년 전의 무법지대 상태로 돌아가는 것 중 고르라고 하면 모두가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밀이 자신과 직결되어 있다면…… 적어도 크루아상에게는 그것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테러리스트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 확인 정도는 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조금 자료를 찾아보자. 크루아상은 증언을 마치고 건물을 나오는 대신 6층의 자료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테러리스트가 나타난 건 생명연구부였다. 크루아상은 무수히 많은 자료들의 틈에서 생각했다. 자료실에는 돔이 생기고부터 6년간 일어난 일이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전부라는 건 돔 관리국의 표현일 뿐 실제로 전부일 리는 만무하다. 크루아상은 반 정도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지만 진지하게 돔이 극악무도한 기관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도 꽤 많았으며, 돔은 그런 사람들의 의심을 누르기 위해 공정함이나 청렴함 같은 것을 강력히 표방하고 있었다. 이 자료실도 자신들이 하는 일에 숨길 만한 것은 없다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크루아상은 늘어지는 생각을 끌고 생명연구 파트로 발을 옮겼다. 이곳에 모인 자료의 정확성이 어느 정도든 일단 찾아는 봐야 한다. 여기가 아니면 별달리 실마리를 잡을 곳이 없기도 하고 말이다. 생명연구부는 멸망한 환경에서도 기를 수 있는 식량을 연구하기 위한 부서다. 비록 유통은 맛없다는 영양식의 형태로 이뤄지지만 그 재료에 무엇이 적합한지를 두고 몇 년째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진행된 연구가 크루아상의 친구가 있는 곳에 전달되는 것이다. 어떤 얼굴로 이 자료를 받았을지 생각하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물론 연구가 식량 분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구도 이뤄졌다. 이 연구 때문에 생명연구부가 인체실험을 한다는 괴담이 돌았던 만큼 이미지는 무시무시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영양제나 보조제 같은 의약품의 연구다. 여기서 만들어진 약품은 돔의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므로 시장에도 별 논란 없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다만 이 약이 정말 안전하냐, 제조 과정에서 인체실험은 없냐는 질문들이 미묘한 의문으로 남아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 걸 여기 써놓진 않았겠지만……."

크루아상은 '인체 강화' 분류의 자료를 몇 장 넘겼다. 어쩌면 그 테러리스트는 이곳의 연구를 통해 힘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 인체 강화는 호흡기처럼 지금의 가혹한 바깥 환경에 망가지기 쉬운 기관을 강화하는, 즉 생존에 보다 유리해지기 위한 연구였다. 그의 터무니없는 힘도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소문 속 인체실험의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크루아상은 정말 인체실험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크루아상의 위치는 돔 내에서도 꽤 높은 편이었고, 본인이 맡은 경찰 분야 외에도 박학다식했기에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의견을 구하는 일까지 꽤 많으니까. 크루아상은 눈치가 나름 빠른 편이었으므로 돔이 정말로 남들에게 밝혀져선 안 될 일을 하고 있었다면 어떤 경로로든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찰 업무에 열중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던 중 페이지를 넘기던 크루아상의 손이 잠시 멈췄다. '유전자 연구'라는 글귀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바깥에서 살아남는 데 최적화된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 개척활동 전담팀—돔 바깥의 탐색을 주 업무로 삼는 부서였다—의 혈액 등을 분석했다는 연구였다. 크루아상과는 별 관계 없고 딱히 문제 삼을 만한 연구도 아닌데도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그 직후 맑게 울린 알림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단말기에서 난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 일로 흐지부지되었지만 지금은 업무 시간이었다. 조사에 협조하며 당분간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테니 일주일 정도는 쉬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크루아상은 원체 쉰다는 말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어제의 일로 인력이 갑자기 줄어들어 순찰 인력이 부족합니다. 혹시 몸 상태가 괜찮다면 오늘만 3호 돔의 순찰에 참여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 건강이 제일이니 안 좋은 곳이 있다면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참여 여부와 관계 없이 답은 확인하는 대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호 돔을 담당하는 후배 경찰로부터의 연락이었다. 크루아상은 주로 중앙 돔, 그중에서도 돔 관리국 주변에 상주했으므로 만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만날 때마다 꽤 살갑게 말을 걸어오던 모습을 기억한다. 크루아상을 존경한다고 했던가.

「컨디션 괜찮아. 바로 3호 돔으로 갈게.」 크루아상은 고민 없이 금방 답장을 적고 자료실 밖으로 나섰다.

중앙 돔 밖으로 나가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다. 그래서 당연하지만 돔 사이를 오가는 열차에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크루아상의 일과는 늘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했던 일을 되돌아보거나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이전의 취미였던 기계를 좀 만져 보는 게 다였다. 굳이 다른 돔에 갈 필요가 없는 하루다. 친구들과 연락이 됐다면 얼굴을 보러라도 갔을 텐데, 몇 번 돔에 있는지조차 모르니 그럴 일도 없었다.

3호 돔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돔 관리국에서 통제하는, 그럴듯한 분위기만 내는 홀로그램이지만 조금이나마 실제 날씨와 같은 느낌이 나도록 각 돔의 날씨는 전부 무작위로 선정됐기에 돔마다 날씨가 전부 다른 날도 있었다. 중앙 돔은 꽤 오래 눈과 관련된 날씨가 걸리지 않아서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눈이 내려도 전혀 춥지 않다는 사실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선배, 이쪽이에요!"

멀리서 손을 흔드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크루아상이 가까워지자 후배는 도우러 와줘서 고맙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보시다시피 난 멀쩡하니까. 멀쩡하면 일하는 게 당연하지."

"선배의 그런 모습을 정말 존경하게 돼요."

"그래?"

순찰이라는 건 말은 거창하지만 크게 해야 할 일은 없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돔이 안정적으로 구축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입에 올리기도 괴로운 혼돈의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굳이 소란을 피우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돔의 규칙상 물의를 일으키면 범죄의 경중과 관계 없이 무조건 돔 밖으로 추방당하는데, 그건 사실상 사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며 바깥은 아예 사람이 살 수 없었던 멸망 직후의 시기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저,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선배는 왜 경찰 일을 하세요?"

그래서 순찰 중에 하는 것이라고는 대개 잡담뿐이었다. 가끔 망가진 시설물을 확인해 보고하고, 정말 가끔 사람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거나 했다. 어제 돔 관리국에서의 사건은 언론에 대폭 축소되어 보도됐기 때문에 거리의 분위기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야, 관리국에서 배정받았으니까?"

"하지만 선배는 다재다능하잖아요. 선배 정도 인재라면 다른 부서로 가고 싶다고 해도 흔쾌히 보내줄걸요."

이 후배는 크루아상을 만날 때면 크루아상의 목표나 롤모델 같은 것을 물어보고는 했다. 주어진 일을 해나갈 뿐인 크루아상의 어떤 면이 그렇게 존경할 만한 여지가 있는지 싶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관리국의 우수 경찰이라고 불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전부 최근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라 이런 질문들은 늘 신선한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래도 이미 경찰 일에 익숙해졌으니까. 익숙한 게 제일 좋은 거지."

"그렇군요…… 저한텐 다행이네요. 선배한텐 앞으로도 묻고 싶은 게 많거든요."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편할 때 얼마든지 물어봐."

별 무게 없는 대화와 함께 전혀 차갑지도 쌓이지도 않는 눈을 스치며 거리를 걸었다. 돔의 거리는 전부 비슷한 구조였기에 몇 번 와본 적 없는 3호 돔인데도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잿빛의 하늘을 싫어하던 친구들은 당연히 가짜 눈도 싫어했다. 아직도 돔의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지, 그들도 나름대로 돔에 적응하고 말았는지 갑작스레 궁금해졌다. 이런 세상이니까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겠지만…… 왠지 친구들은 변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미련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변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있어 준다면 자신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인가. 지금은 주위 사람이라기엔 너무 멀어지고 말았지만.

순찰은 큰 이변 없이 마무리되었다. 크루아상은 후배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중앙 돔으로 되돌아왔다. 돔 관리국 건물은 사고 흔적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완벽히 수복돼 있었다. 정말이지 늘 변함없는 도시다. 크루아상의 집 문도 몇 년간 그랬듯 평범하고 익숙한 모습이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위화감의 원인은 열쇠를 꽂고 손잡이를 돌렸을 때 바로 알아챘다. 집 안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도둑이라면 도주로를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에 크루아상은 일단 문을 닫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품 안에서 총을 찾아 쥐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도망가는 대신 그 소리에 자진해서 현관 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워진 모습을 보자 맥이 빠졌다.

"생각보다 늦었네~. 설마 오늘도 일한 거야? 관리국이라는 거 정말 블랙기업이다~."

그 테러리스트다. 아직까지 연구원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볼 수도 없었다. 황당함에 내 집엔 어떻게…… 라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질문이 늦어지는 새 테러리스트는 뻔뻔하게 열쇠를 꺼내 보였다.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는데, 집 열쇠를 복제할 시간이 없었겠어?"

"뭘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

그보다 이 테러리스트는 공표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수배 중인 범죄자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어제의 능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크루아상이 단말기를 꺼내도록 놔두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크루아상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채곤 했으니 아마 지금도 크루아상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을 터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다.

"진짜 뭐부터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네…… 대체 뭐야?"

"뭐냐니?"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크루아상의 본심에 테러리스트는 즐거운 듯 웃었다. 별게 다 즐겁네, 인생 아주 행복하겠어.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그동안의 행동을 생각하면 이것도 눈치챘을까 싶었다. 최대한 그런 점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크루아상은 할 말을 정리해 보았다. 입을 열었을 땐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이것저것 말하고 말았지만.

"뭐 하러 온 거냐고! 아까 한동안 안 만날 것 같은 분위기로 사라져 놓고 왜 남의 집에…… 그보다 너 수배범인 건 알아? 경찰한테 찾아오다니, 자수라도 하겠단 거야?"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올 생각이 없었는데, 중요한 걸 하나 빠뜨렸더라고."

"중요한 거라니?"

테러리스트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단말기를 꺼낼 틈을 보고 있던 크루아상의 손을 덥석 붙들고 무언가를 건네줬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안에 전해졌다. 슬쩍 내려다보자 USB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이건?"

"내가 가면 열어 봐. 대신 단말기로는 안 돼. 집에 말이야, 옛날 기계들 많지? 인터넷 끊긴 거. 그런 걸로 확인해."

"그 말은…… 관리국에 들키면 안 된다는 뜻이야?"

테러리스트는 간결한 동작으로도 금세 크루아상으로부터 멀어지며 빙글 웃었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그럼, 또 봐."

그러더니 창문을 열고, 창턱을 밟고, 가볍게 몸을 날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든 동작에 5초도 소비하지 않았기에 크루아상은 질문을 던질 기회도, 다시는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날릴 기회도 잃었다. 황당함에 창밖을 내다봤지만 첫 만남과 마찬가지로 이미 테러리스트는 온데간데없어진 뒤였다. 남은 거라곤 수상하기 그지없는 USB뿐이었다.

그래서 이걸 어쩐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을 떼로 죽인, 말 그대로 '테러리스트'가 건네준 물건―심지어 돔 관리국에 들켜서는 안 되는―을 자신의 집에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동시에 친구들과 헤어진 후로부터 계속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걸 확인하고 나면 이 갑갑한 기분이 조금은 해소될까 싶었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명백히 지쳤다. 지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맞지 않는 경찰 일에 익숙해지고, 돔을 의심하길 그만뒀다. 이 USB의 내용물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돔에게 들켜선 안 되는 물건인 이상 지금 크루아상의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리는 없었다. 이대로 무시하고 지금처럼 사는 방법도 있다. 아예 이 USB를 관리국에 넘겨주고 그 테러리스트를 체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민을 다 마치기도 전에 크루아상은 창고에서 먼지 쌓인 태블릿PC를 끄집어냈다. 호기심. 모르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욕구.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크루아상을 이루는 요소란 그런 것들이었다. 그동안 쌓아온 감정의 실마리를 눈앞에서 지나칠 수는 없다. 설령 이 일을 평생토록 후회하더라도. 조금 충전하자 태블릿은 무리 없이 작동했다. 떨리는 손이 USB를 꽂았다.

안에 든 것은 수많은 정체불명의 기록이 담긴 폴더였다. 크루아상은 아주 약간의 망설임 뒤에 첫 번째 파일을 누르고, 읽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상론의 잿더미

■■■ 투약, 24호 사망, 나머지 개체들도 순차적으로 부작용 발견, 2호 유일하게 정상 반응, 다른 개체와의 차이점 검토……. 크루아상은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을 겨우 읽어나갔다.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건 명백한 인체 실험 기록이었다. 도시 전설 따위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돔 안에서, 크루아상이 매일같이 드나들던 그 건물에서, 사람이…… 급격히 속이 나빠졌지만 자료에서 눈을 떼기도 힘들었다. 여기에 담긴, 곳곳이 깨지고 누락된 자료는 분명히 진짜다. 다른 부서에 도움을 준 일이 많은 크루아상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어디에 쓰이는지 몰랐던 의문의 재료들과 타 부서 사람들에겐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던 생명연구부의 어느 방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동시에 차차 정리되어갔다. 만약 이 자료를 그대로 돔 관리국에 넘겼다면…… 터무니없는 짓을 할 뻔했다.

정독을 마친 크루아상은 안정을 위해 잠시 태블릿 화면을 닫았다. 하지만 그런 크루아상의 의사와 관계없이 머릿속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테러리스트―이젠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기도 좀 미안했다―는 그럼 정말로 인체실험의 피해자? 밖에서부터 침입한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한 건가? 그보다 이걸 왜 하필 나에게? 단순히 내가 이런 일을 못 지나칠 성격이라는 걸 꿰뚫어 봐서? 그렇다기엔 그 테러리스트는 처음부터 크루아상을 아는 듯 보였다.

군데군데 사라진 정보가 많아서겠지만, 자료 자체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 가장 큰 의문은 이 무수한 사람들을 다 어떻게 데려온 건지 전혀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인체실험의 피해자는 수백은 되어 보였다. 이 많은 인원이 사라지는데 경찰이 몰랐을 리가 없다. 혹시 돔 밖으로 추방한다는 사람들을 여기로? 그렇다 쳐도 인원수가 너무 많다. 기록상으로는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두고 실험한 듯한데 그럼 특정 연령층, 특정 성별의 사람만 수백씩 사라졌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방금까지는 다신 보지 않았으면 했지만, 지금은 당장 그 테러리스트를 붙들고 질문들을 쏟아내고 싶었다. 크루아상은 한참 동안이나 머릿속을 정리했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리국에 조금 쉬겠다는 연락을 보내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쉬라는 권고를 받았으니 문제 없이 일주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크루아상은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제일 최근에 생긴 8호 돔으로 향했다. 8호 돔은 거주지역 없이 연구소나 공장 등 돔 시설의 발전을 위한 시설만 모아둔 곳이었다. 때문에 시설에 관련된 사람들밖에 살지 않아 조용히 쉬고 싶은 관리국 직원들이 자주 향하는 장소기도 했다. 크루아상은 단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었지만.

어쩌면 여길 피한 것도 돔의 연구를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면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크루아상은 처음으로 8호 돔에 발을 디디며 생각했다. 경찰이라는 일을 맡아, 설령 그 직책을 원치 않았더라도 책임을 다하며 살고 싶었던 자신이 조금 미련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아간다고 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주어진 책임을 거부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해답이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위에서도 언급했듯 관리국 직원들이 꽤 오가는 장소니까 수상한 정보를 남겨뒀을 리가 없다. 조금 걷는 동안에도 크루아상은 익숙한 얼굴을 세 명이나 마주쳤다. '관리국을 습격한 범인을 홀로 추적하다 다쳤다'는 거창한 행적 탓에 만나는 사람마다 걱정 담긴 안부 인사를 건네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답했지만, 그런 자료를 읽은 직후여서인지 조금 불편했다. 과연 이 사람들도 인체실험의 비밀을 전부 모르고 있는 게 맞을까? 생명연구부 직원과 돔 관리국의 높은 사람들 말고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애초에 높은 사람이란 뭐지? 돔 관리국은 신생 정부가 세웠으니, 정부의 지도자일까? 돔을 세운 신생 정부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도 부족해서 민간인은 물론 꽤 신뢰받는 경찰인 크루아상조차 거의 알지 못했다. 관리국장이라는 사람과 동일인물일 것 같긴 했지만, 그 관리국장도 만나기는커녕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없다. 그저 그들이 세계가 끝나기 전엔 유명한 전자제품을 만들던 기업, T사였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아무도 T사라고 부르지 않지만.

크루아상은 자신이 아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그런 자신에게 앞뒤 설명은 하나도 없이 이런 충격적인 정보를 던져준 테러리스트의 정체도 더욱 궁금해졌다. 그 이상한 성격과 가공할 만한 신체 능력이 인체실험의 결과라면, 돔 관리국과 관련된 사람은 전부 증오해야 맞는 것 아닌가? 왜 크루아상만은…….

순간 크루아상의 발이 멈췄다. 혹시 인체실험에 관해 모르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라면? 그래서 생명연구부 직원들을 되는 대로 죽이고, 먼저 진압을 시도한 경찰도 '아는 사람'이라서 죽이고…… 크루아상은 제 생각에 제가 놀라 생각을 멈추려 마구 도리질을 쳤다. 그럴 리는 없다. 없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하고 나자 주변의 연구소 건물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 잘 떨쳐지질 않았다.

어서 하려던 일을 하자. 그러다 보면 이런 이상한 의심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 크루아상은 약품 생산시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인체실험의 가장 많은 기록이 약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살펴보고 나면 막연한 불안함의 대상이 조금은 확실해지며 마음이 가다듬어질 터다.

USB의 자료를 꼼꼼히 읽어가며 정리한 네 개의 시설을 모두 돌아보기까지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크루아상이 고른 곳을 포함한 대부분의 시설은 관리국 직원들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편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특히 크루아상은 다른 부서의 일까지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이라는 평이 관리국 내에서 꽤 퍼져 있었기 때문에 8호 돔은 처음 왔는데도 다들 환영해 주었다. 쉬는 김에 다른 부서의 일도 좀 더 배워볼 겸 들렸다는 핑계가 꽤 유용했다.

다만 결과는 그다지 긍정적이진 않았다. 생산시설은 관리국 건물의 자료실과 마찬가지로 비밀은 한 톨도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세 번째로 방문한 시설에선 마침 쉬고 있던 연구원에게 제조 과정의 세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USB를 확인하지 않고 단순히 견학 차 방문한 것이었다면 아무 의심 없이 믿었을 정도로 깔끔한 이야기였다. 결국 인체실험과의 연계나 은폐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일이 마음속의 의심을 확신으로 거듭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설명과 완벽한 방문객 맞이. 이것은 오늘 방문한 생산시설의 관계자들이 전부 인체실험을 알고 있으며 감추는 데에 협조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돔 관리국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웃는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정말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는 사람'은 누구고 '모르는 사람'은 누구지? 기대와는 달리 전혀 해소되지 못한 의심이 발목을 붙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크루아상은 USB와 태블릿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숨길 방법을 고민하다 태블릿은 도로 창고 속에, USB는 잡동사니가 뒤섞인 서랍 안에 넣어두고 나왔었다. 다행히 둘 다 그대로였는데, 크루아상은 확인차 집어 든 USB가 일반적인 제품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검은 표면에 정사각형 모양의 자국이 있었고, 손톱으로 자국을 건드리자 뚜껑처럼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자료의 충격이 너무 커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떨어져 나간 안쪽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가장 안정되는 장소에

그 테러리스트가 남긴 메시지인가? 크루아상은 집중해서 글자를 들여다보았지만 암호 같지는 않았다. 적힌 그대로의 의미라면 무슨 뜻이지? 단순하게 크루아상이 가장 안정되는 장소라면 친구들과 자주 모였던 그 샌드위치 가게다. 거기에서 자주 식사를 했으니. 하지만 이젠 완전히 폐건물이고, 그 주변에 폐건물은 몇 채나 돼서 그 테러리스트가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반대로 메시지를 남긴 테러리스트가 가장 안정되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만날 때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사람이 어디에서 안정을 느낄지, 짐작이 갈 리가 없다. 아마 테러리스트도 크루아상이 모른다는 사실을 짐작할 것이다. 그는 늘 크루아상을 꿰뚫어 보듯 행동했으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이번에도 꿰뚫어 봤다는 건가? 크루아상이 옛 샌드위치 가게에 가진 애착과, 아직도 친구들의 추억을 마음에 담아두고 산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해도 그 장소까지 알아내는 건 무리가 있지 않나? 크루아상은 거기에 자주 드나들었으니 오래 지켜봤다면 가능하겠지만, 아까 생각한 가설대로라면 테러리스트는 크루아상을 만나기 전까지는 생명연구부의 실험실에 갇혀 있었을 터다. 크루아상의 행적을 지켜볼 기회 따윈 없었다.

크루아상은 생각을 잠시 멈췄다.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을 생각해서 어지러웠다.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샌드위치 가게는 당연하게도 이제 전기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간에 탐색은 무리다. 우선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움직여 보기로 했다. 심란한 마음에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잠을 설쳤다. 크루아상은 옅은 두통과 눈을 찌르는 햇살로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테러리스트와 대면한 아침에 버금가는 최악의 아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크루아상에겐 불쾌한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서 채비를 하고 어제 미룬 가게 조사를 하러 일어났지만, 바깥으로 향하는 발은 여전히 묵직한 추를 매단 듯 더뎠다. 어제오늘 처음 돔이 세워졌을 무렵처럼 심란하기 그지없는 기분뿐이었다. 

샌드위치 가게는 크루아상의 집 근처였기에 가볍게 뛰어 금방 도착했다. 여기에 있는 거라고는 크루아상이 자주 쓰는, 샌드위치 재료가 담긴 냉장 기능이 있는 상자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자의 배터리를 충전할 때가 됐던 것도 같다. 상황이 조금 정리되면 하기로 했다. 말고 또 특별한 건…… 주위를 둘러보던 크루아상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가게의 안쪽에 웬 비닐봉지가 떨어져 있었다. 전엔 없던 물건이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쓰레기를 버릴 사람은 없을 텐데. 의문을 품고 집어 든 봉지 안에는 작은 검은색 정육면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집어 들자 물체는 연두색 빛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찾았어?」

직후 크루아상이 의문의 물체를 놀라서 떨어뜨릴 뻔했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제 오후부터 계속 이것저것 묻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였다. 이건 통신장치? 하지만 처음 보는 형태였다. 크루아상의 영혼에 새겨진 본능 같은 것이 이 장치의 구조를 궁금해하고 있었지만 억누르고 장치 너머의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그 테러리스트?"

「아직도 그 호칭이라니~. 이렇게 빨리 찾은 걸 보면 꽤 궁금한 게 많았던 것 같은데.」

"아, 그렇지. 안 그래도 정정하려고 했는데. 마땅한 호칭이 아직은…… 아니, 이런 시답잖은 말을 할 때가 아니라."

「잠깐만~.」

크루아상은 바로 USB의 자료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말을 끊었다. 테러리스트의 말은 늘 그렇듯 여유 있는 어조였지만 주변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좀 바쁜데. 네가 이렇게 금방 연락할 줄은 몰랐어서, 일을 좀 하러 왔거든~.」

"그런 자료를 보면 누구라도 금방 연락하지 않을까."

「5분만 기다려~.」

"그래……."

기다리는 동안 질문할 거리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서없이 온갖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을 정도로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크루아상이 머리를 애써 굴려보는 동안 상대는 시간 감각이 어떻게 된 건지 무려 20분이 넘게 지나서야 연락을 줬다. 크루아상으로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많았으니 어찌저찌 도움은 됐지만, 네 배를 기다리게 해놓고 사과 한마디 없는 태도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 있지?」

"응. 근데 엄청 늦었잖아."

「내가 좀 바빠~. 날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설마 방금까지 싸웠어?"

「질문할 건 그런 게 아니지 않아?」

원래 얼굴을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상대였지만 그럼에도 표정을 보지 않고 대화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크루아상은, 테러리스트를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응, 네 말이 맞아. 솔직히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제일 물어보고 싶은 건 왜 하필 나한테 이 자료를 넘겨준 건지야. 내 짐작이 맞다면 넌 이 실험의 피해자일 텐데…… 그럼 관리국 사람을 전부 증오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음~.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딱히 그 관계자들을 증오하진 않아~.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너를 만났을 때 죽어 있던 사람들은 그냥 '치운' 거라고. 오히려 고마운 마음은 있을지도 모르지~.」

"고맙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와 당황한 크루아상과는 다르게 테러리스트의 목소리는 남의 사연을 읽어주기라도 하듯 태평했다.

「그래~. '지금의 나'는 그 사람들이 태어나게 한 거니까.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그 사람들 덕에 태어났단 건 아니고~.」

"네 신체 능력 같은 걸 실험으로 얻어서 그렇단 얘기야? 아무리 그래도 발상이 너무 기상천외한데."

「뭐, 그런 셈 쳐. 그리고 말이야, 솔직히 그 사람들은 증오할 만한 위인도 못 돼. 너무 약하잖아~. 그냥 불쌍할 따름이지.」

"그래서…… 나는 뭐가 달라서 정보를 준 거야?"

「네 생각보다 간단한 답이야~. 그 정보가 너한테 필요했으니까.」

크루아상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다음 말이 이어졌다.

「계속 고민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널 살려두고 중요한 정보까지 넘겨준 건 정보를 터뜨리고 싶은데 마침 딱 좋은 사람이 눈에 띄어서가 아니야. 너여서, '크루아상'이어서 준 거지~. 난 너를 만나려고 실험실을 나왔어.」

"나를 어떻게 알고?"

고민 중 하나의 해답을 얻었는데도 전혀 명쾌하지 않았다. 크루아상은 인체실험의 비밀을 몰랐던 만큼 피해자들과도 전혀 연이 없었다. 혹시 크루아상과 오가며 친분을 쌓은 사람이 피해자가 되었고, 실험의 영향으로 크루아상은 알아보지 못할 모습으로 변해버린 거라면 이전의 신분을 대면 그만이다. 둘은 분명 초면인데도 테러리스트는 이전부터 크루아상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그건 혼자 알아내기까진 시간이 좀 걸리려나~. 응?」

"왜 그래?"

「잠깐만 끊을게. 이번엔 정말 5분 안에 돌아올 테니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크루아상은 그동안 비슷한 사람을 어디서 본 적 있나 기억을 되짚어봤고 역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좀 더 비상식적인 영역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 가령 그가 크루아상의 숨겨진 가족이라든가. 세계가 멸망하기 전 유행했던 막장 드라마에서는 단골 소재였다. 이번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돌아왔다.

「금방 왔지?」

"진짜 금방 왔네. 그런데 지금 어디서 나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건 비밀인데~.」

"그러셔……. 하던 얘기 계속해도 될까? 네가 날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일단 묻겠는데, 그냥 알려주면 안 되는 거야?"

「응, 아직 준비가 덜 돼서~. 준비가 끝나면 알려주겠지만, 네가 직접 알아내는 것도 재밌지 않겠어? 휴가 냈지? 그 시간을 귀중히 활용해 보면 어때?」

"잠깐만. 날 원래 알고 있었다니까 이상하게 나에 대해 잘 아는 점은 넘어가도…… 내가 휴가 냈단 것까지 아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당장 어제 오후에 말했고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동료들도 모를 텐데."

「내가 너한테 관심이 아주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지~.」

"전혀 해명이 안 되거든."

대화가 슬슬 마무리 분위기가 되어가자 크루아상은 조금 초조해졌다. 결국 알게 된 건 이 테러리스트는 본래부터 크루아상을 알았고, 정보도 크루아상을 콕 짚어 전해줄 생각이었다는 사실뿐이다. 그가 어떻게 알았고 앞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테러리스트가 또 멋대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크루아상은 서둘러 말했다.

"질문…… 더 해도 돼? 저기, 그래서 넌 나랑 이 정보를 가지고 뭘 하고 싶은 거야?"

「난 네 삶을 바꾸고 싶어~.」

"응?"

「지긋지긋한 돔에서, 지긋지긋한 책임감에 매달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따분하고 가치 없는 일생을 보내는 걸 멈춰주고 싶다고.」

무슨 말이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방금의 말은 지금까지의 농담조 섞인 말들과는 확연히 무게가 달랐다. 표정을 보고도 몰랐던 테러리스트의 속내지만, 방금의 것만은 분명한 진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크루아상은 자신의 삶이 그렇게 비관적이고 우울한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편안하게 살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정말로 '원하던' 삶인지 묻는다면 동의하진 못하리라.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듯 상대가 말했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크루아상을 크루아상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크루아상이 생각하는 걸 기다렸는지 잠깐의 공백이 이어지던 끝에 테러리스트가 먼저 말했다.

「충분한 답변이 됐는진 모르겠지만, 그럼 여기까지로 할까~.」

"아, 잠깐! 또 이 기기로 연락할 수 있어?"

「미안하지만 아니. 대충 만든 거라, 한 번 작동시키면 배터리가 엄청 빠르게 닳거든. 아마 10분 내로 방전될 거야~. 그리고 충전도 못 해. 일회용이지~.」

"이거 네가 만들었어?"

「그냥 취미로. 기계는 오랜만이라 좀 헤매기도 했어~. 뜯어보면 꽤 조잡할걸.」

그 말을 듣자 크루아상은 뜯어봐도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분위기상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기에 참았다. 대신 더 중요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다음엔 어떻게 연락해?"

「그렇게 싫어하더니, 벌써 연락하고 싶어 하는 사이가 되다니~.」

"그런 사이가 된 김에 말하지만, 쓸데없는 소린 안 했으면 좋겠어."

테러리스트는 크루아상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테러리스트라는 호칭, 그만두고 싶은데.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지만 역시 대체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때가 됐다 싶으면 내가 먼저 찾아갈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하겠다고?"

「걱정 마~. 네가 원하는 타이밍에 나타나 줄 테니까.」

"……그래."

테러리스트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적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크루아상은 긴 고민 없이 일방적으로 찾아오겠단 약속에 동의했다. 단 이틀 만에 관계가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럼 이만~.」

"응. 다음에 봐."

곧 가게는 폐건물다운 정적에 휩싸였다. 크루아상은 이제 쓸모없게 된 정육면체를, 여유가 되면 분해해 보고 싶단 생각으로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고 건물을 나섰다.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인 크루아상과 테러리스트의 관계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실험자의 자료가 더 필요하다.

우선 USB의 자료를 한 번 더 살펴보자고 생각했다. 크루아상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본질의 모형

한참 자료와 사투를 벌인 끝에 정리한 실험 피해자들의 특징은 이랬다. 모두 비슷한 연령대와 비슷한 신체조건을 가졌으며, 실험으로 누군가가 희생되면 그 빈자리는 빠른 시일 안에 같은 조건의 피해자로 채워졌다. 재앙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사망했고, 지금 돔에 남은 인구는 아무리 늘어났어도 이전 인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처럼 인구가 적은 상황에서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람이 죽어 나갔다간 순식간에 사회가 무너질 것이다. 자료만 보면 이 인체실험의 피해자 수는 제일 작은 돔 하나쯤은 없어졌을 규모였다. 그러니 이 피해자들은 돔 안에서 동원됐을 리가 절대 없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바깥이 어느 정도 복원되었고, 돔에 들어오지 않은 생존자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공동체를 꾸렸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가능성이 낮았다. 돔 초기, 그 아수라장 속에서 차라리 바깥이 낫겠다며 나가려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돔에서 나가 몇 걸음 못 가 쓰러지고 말았다. 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에 비하면 환경이 많이 회복되었을 지금도 돔 바깥은 최신 장비로 중무장한 개척활동 전담팀 외에는 아무도 나갈 수 없는 공간이다. 그들조차도 30분 이상의 탐색은 절대로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크루아상은 고뇌하며 혹시 놓친 내용이 있나 자료를 계속해서 넘겨봤다. 사실 놓친 내용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보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그 바람이 이뤄낸 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루아상은 한 문서의 구석에 실린 사진에서 어느 글자를 발견했다. 내용물까지는 보이지 않는 시험관 밑에 적힌 글씨. 거기에는 분명히 '배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처음 자료실에서 인체실험의 기록을 찾을 때 보았던, 개척활동 전담팀의 혈액 등을 분석했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은 뒤 실소했다. 설마. 돔의 기술력이 그 정도일 리가. 하지만 이 끔찍한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정도의 사람들이니까…….

실험체들의 정체는 사실 우수한 직원들의 복제품일지도 모른다.

명확한 문장으로 떠올려 보고, 이렇게 가정하면 모든 조건이 비슷한 사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계속해서 데려오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럼 그 테러리스트가 크루아상을 잘 아는 건…….

"그럴 리가."

크루아상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하며 태블릿 화면을 껐다. 현실성 없는 얘기다. 애초에 크루아상과 그 테러리스트는 머리와 눈의 색부터가 다르다. 하지만 그동안의 의문점 대부분이 이해되고 있어 이 생각을 중단하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돔을 위해 일하는 동안 돔은 자신을 수백 명쯤 만들어서 온갖 실험으로 죽여보고 있었다고? 배신감이나 공포 따위의 감정은 들지도 않았다. 그것을 넘어선 정체 모를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게 사실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크루아상은 번뜩 한 문장이 떠올라 문서를 뒤졌다.

실험체들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문은 홍채 인식으로 통제한다. 분명히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인체실험의 피해자들은 실험 구역 내를 꽤 자유롭게 돌아다닌 모양이고,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홍채 하나로 수많은 사람의 통행을 허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 '테러리스트'가 크루아상을 본뜬 실험체라면 크루아상의 홍채로도 열릴 것이다. 기계가 둘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이 증거다.

그 전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만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복제인간이 오직 실험만을 위해 수백 명 존재한다는 걸 안다면 함께 이 끔찍한 실험의 진상을 밝힐 동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루아상 말고도 몇 명이나 이런 실험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지만,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조금이나마 든든할 것 같았다. 지금 있는 동료(?)는 아무래도 제멋대로고, 공개수배범에, 심지어 연락도 일방적으로 하고 있으니.

그렇지만 누가 인체실험의 피해자이고 조력자인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동료를 찾는단 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실험은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니 크루아상처럼 직접 전해 듣는 게 아니면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오는 실험체는 당연히 저번에 테러리스트가 한 것처럼 거하게 일을 터뜨려야 하니, 지금으로선 크루아상 말고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어라?

이젠 웬만한 의문은 풀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 새로운 수수께끼가 급부상했다. 왜 테러리스트는 실험실에서 혼자 탈출했을까? USB에 담긴 실험 기록은 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크루아상 말고 다른 사람들의 복제인간도 있었다고 가정하면, 안엔 못해도 백 명은 되는 사람이 있었을 터다. 관리국을 뒤흔들 만큼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이 그뿐이라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똑같은 얼굴의 사람 백 명이 뛰쳐나오는 쪽이 사회에는 훨씬 혼란을 줄 것이다. 관리국을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라면 이쪽을 택해야 한다.

테러리스트는 크루아상에게 '네 삶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돔 관리국에 큰 증오를 느끼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의 목적은 그럼, 정말로 크루아상에게 이 상황을 깨닫게 하고, 바뀌게 하는 것 외에는 없나? 어째서 그런 동기를 가지게 되었지?

그는 강하고 자유로운, 지금의 크루아상과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둘의 뿌리는 같다. 자신이 변화했으니 본래의 크루아상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하지만 그 테러리스트처럼, 지금의 모습을 전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한다면 그것도 크루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순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이름 대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크루아상이라는 이름을 말하면 크루아상이 바로 정체를 의심할 테니 둘러댄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을 생각하면 그는 자신을 크루아상과 같지만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크루아상이지만 크루아상이 아니다. 둘은 뿌리만 같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크루아상은 어떤 의미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크루아상은 주머니에서 짧은 수명을 다한 통신기기를 꺼냈다. 그리고 경찰 일을 하면서도 집에 늘 놔뒀던 공구로 천천히 뜯어내기 시작했다. 줄곧 제멋대로 연락해댔으니, 이쪽도 한 번쯤은 제멋대로 연락할 자격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통신기기는 크루아상의 것과 그의 것 두 개만이 연결되어 있었고, 내장된 부품 중 하나는 상대 통신기기의 위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 기계의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된 그의 위치는 놀랍게도 관리국 건물, 그것도 8층이었다. 8층부터는 관리국의 보안 구역으로 크루아상도 몇 번 가본 일이 없었다. 통신할 때 누군가랑 싸우는 것 같더라니, 설마 또 관리국에서 사고를? 하지만 크루아상에겐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튼 관리국의 8층부터는, 용건도 없는데 무턱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단 관리국 건물로 오긴 했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크루아상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고민하다 일단 비교적 개방적인 옥상의 버튼을 눌렀다. 보통 흡연을 하는 직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세계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담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옥상의 문은 가볍게 열렸다. 온종일 온갖 생각에 몰두한 탓인지 시간은 벌써 밤이었다. 가짜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바라보고 있자니 하늘의 별은 멸망하기 전 세계의 천문 데이터를 참고해 구현하고 있다는, 지금 상황과 전혀 관련 없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크루아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거기에 서 있었다. 그 테러리스트가 정말 크루아상이라면, 크루아상이 직접 찾아오리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다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옥상의 문이 밀리며 무거운 소리가 났다.

"내가 알아서 연락한다고 할 땐 알겠다고 했으면서, 여기까지 왔네~."

그 황금빛 눈동자는 밤하늘 별의 일부처럼 멀리서도 보였다. 크루아상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형태가 익숙했다. 최근 들어 자주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눈동자 너머로 마주친 영혼의 형태가 눈에 익은 것이다.

"응.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그럴 것 같았지만~. 너라면 분명 지금쯤은 아주 많은 걸 알았겠지."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는 건 아닌데…… 질문을 하다 보면 확실해질 것 같아. 지금 시간 괜찮아?"

"물론~."

그가 크루아상의 말에 웃으며 다가오자 복장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피 묻은 연구복을 처분했는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정황상 이 옷도 누군가의 옷을 빼앗은 걸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싶었다. 크루아상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먼저 입에 담았다.

"이렇게 찾아와놓고도 '진짜 맞냐'고 물어보면 좀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너는 정말로…… 나인, 아니, 나였던 거지?"

"응. 맞아."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답이 나와 맥이 탁 풀렸다. 정말로, 크루아상이 맞지 않는 일에 적응해가며 노력할 동안 관리국은 몇백 명의 크루아상을 만들어내고 실험체로 소모하고 있었단 말인가. 상념에 젖으면 정신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빠르게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럼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연구실에선 너 혼자 나온 거야? 여러 가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조력자가 있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아서."

"조력자는 필요 없었어. '성공작'은 나뿐이었으니까. 나머진 다 그대로거나 오히려 나빠졌지. 애초에 말이야…… 아침에도 비슷한 얘길 했잖아? 내가 바꾸고 싶은 건 사회가 아니라, '너' 하나뿐이야. 그러니 다른 성공작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 명이면 충분해."

"사회가 아니라 나 하나뿐……."

크루아상은 중얼거리며 돔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빛을 내는 주택들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친구들과 헤어진 이후부터 크루아상은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일했지만, 돌이켜 보면 철저히 혼자였던 것만 같다.

"그 말은 너 말고는 자신의 원형을 바꾸고 싶어했던 복제가 없었다는 뜻으로도 들리는데. 그럼 모든 사람을 통틀어 성공작이 너뿐이었던 거야? 아니면."

다음 말을 꺼내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그러나 마음속에선 이미 확신이었다.

"복제인간 자체가 내 것밖에 없었던…… 거야?"

관리국에서 유명한 인재인 크루아상은 많은 부서의 일을 도와주고, 연구도 많이 도와줬다. 크루아상만한 상대가 또 없었을 것이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크루아상을 마주 보는 그의 눈빛이 이미 답이었다. 그 눈빛에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그래. 하지만 뭐, 그렇게 우울해할 것도 없잖아? 내가 있는걸."

"미안, 사실 네가 날 바꾼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솔직히 모르겠어. 어차피 우린 돔 밖으로는 못 나가니 지금처럼 살 수밖에 없잖아. 너처럼 되려고 목숨을 걸고 약물을 투약받기라도 하란 뜻도 아닐 거 아냐."

"크루아상. 나도 너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네가 어떤 기분인지, 나는 때때로 너보다 더 잘 알 수 있어~."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리고 강하고, 자유롭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크루아상도 그처럼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동경한다니, 누구라도 비웃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크루아상은 그처럼 사람을 죽이길 원치 않고, 평온한 삶을 벗어나 모든 사회에 반항하기도 원치 않는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제멋대로 굴 수 있는 그를 지금처럼 바라볼 뿐이다.

"그래. 넌 꼭 내 이상형 같아. 하지만 이상형이라는 건, 나는 될 수 없으니까 이상형인 거잖아."

문득 신화 속의 조각가가 떠올랐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을 조각하고, 신의 힘으로 사람이 된 그 조각상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피그말리온. 그는 과연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상형과 끝까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완벽하고 비윤리적인 그는 정말로 크루아상의 갈라테이아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어. 우리의 뿌리는 같은걸~. 아까 지금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했지? 잠깐 따라와 봐."

"어? 잠깐만!"

그가 다짜고짜 옥상의 계단을 내려가 12층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크루아상은 생각도 그만두고 놀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열어젖힌 철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관리국 꼭대기의 12층은 본래 크루아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국장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말 그대로 텅 빈 방뿐이었다.

"왜 아무것도…… 관리국장은?"

"지금은 나야~."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아서 늘 하듯 뭐? 하고 되묻지도 못했다. 설마 아침에 싸우던 사람이…… 통신기가 8층을 알렸을 때 관리국의 위쪽에서 사고를 쳤을 거란 사실은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위쪽일 줄은 몰랐다. 크루아상이 질문을 하지 못하자 그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놀라지 마. 이 '관리국장'이라는 건 아무도 없는, 이름뿐인 자리였으니까~. 난 빈집을 차지했을 뿐이야."

"빈집이라고……?"

"그래. 처음 관리국을 세운 사람은 세계 멸망의 후유증이 가져온 병으로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후계자를 뽑을 여유도 없었어~. 다들 인류를 영원히 돔 안에 안주시키는 데 필사적이었으니까. 돔 운영 위원회, 그러니까 신생 정부의 형태로 윗사람들은 있었지만, 국장 자리엔 아무도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기로 했지~. 그럼 널 내보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말하며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온 방이 밝아지자 텅 빈 줄 알았던 방의 구석에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문 같은 것이 보였다. 그가 그 공간으로 들어가려는 눈치였으므로 크루아상은 빠르게 뒤따라가며 물었다.

"내보내다니, 관리국 밖으로? 경찰 일을 그만두게 한다는 얘기야?"

"음~. 그것도 맞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히 설명하라고 따지려 하는데, 안쪽의 공간이 눈에 들어와 크루아상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곳은 비밀 통제시설 같은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정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는 돔의 곳곳을 비췄고, 아래쪽의 계기판에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수많은 버튼이 푸른 빛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국장실의 비밀방답게 돔의 설비를 관리하는 곳인 모양이다. 그는 국장답게 자연스레 그 앞에 섰다.

"내가 국장이 된 일은, 당연하지만 다른 운영회 위원들의 동의를 얻진 못했어. 그래서 네가 예상했듯 안타까운 사건이 좀 있었고~."

"너 말이야…… 다른 점은 부럽다고 해도, 그 정신 나간 윤리의식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지금 이 얘기의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잖아? 중요한 점은 돔의 운영을 결정할 사람이 이젠 나뿐이란 거지~."

"뭐? 너, 대체 몇 명을……."

"크루아상. 지금 난 네가 원했지만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한 그는 계기판을 조금 건드렸다. 화면에 비치는 돔의 풍경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전부 꺼졌다.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계기판의 푸른 빛만이 둘의 표정을 비췄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따라올래?"

"새삼스럽게 뭘 물어."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하다가도,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잔뜩 죽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긴장이 되고 마는 모양이다. 크루아상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다. 그도 그 점을 느꼈는지 미소가 온 얼굴에 과장될 정도로 쾌활하게 번졌다.

"그럼 이리로 와~."

방 한가운데에 전송 장치 같은 것이 나타났다. 국장실의 기능 중 하나일 테니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건 아닐 테지만, 정확한 목적지를 알 수 없으니 굉장히 꺼림칙했다. 크루아상이 조금 망설이자 그가 크루아상의 팔을 잡아끌더니 바싹 붙었다. 둘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첫 만남 이후로 처음이었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크루아상이 말했다.

"왜 이러는 거야?"

"딱 붙어 있는 편이 좋아~. 이거, 1인용이거든."

"뭐?! 야, 그럼 한 명씩……!"

당연하게도 그런 항의에 멈추는 일은 없었다. 전송 장치는 지나친 용량의 인원을 싣고 일을 시작했다. 곧 둘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네가 나의

눈을 떴을 때 크루아상은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 수가 없었다. 아까 보던 것과 닮은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에 옥상으로 되돌아온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그가 말했다.

"1인용이어도 괜찮지? 우린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기계의 정원은 인원수의 문제잖아."

"음~. 우리가 쓴 기계는 좀 다를걸. 저건 '국장 전용'이거든. 국장한테만 반응하는 거지. 두 명이 함께 타도 국장만 쓸 수 있어. 그러니까 1인용."

"뭐……."

"이렇게 겉모습이 달라져도 기계에는 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모양이야. 재밌지?"

재밌기는커녕 심란하기만 했다. 정말로 둘은 같은 사람, 정말로 그는 크루아상의 복제라고 기계가 증명해주었다. 그런 둘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 크루아상은 두려웠다. 사회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원하는 일보다는 모두가 원하는 일을 택해온 크루아상. 그리고 그런 크루아상의 반항을 대신하듯 제멋대로 굴며 사람과 사회를 부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 조금만 잘못되면 크루아상도 그처럼 되어버릴 것 같았다. 온전히 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말 것 같았다.

그런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찰나 둘 사이를 가르듯 바람이 불어왔다. 둘의 머리카락을 한 차례 흩뜨리고 사라지는 바람에 크루아상은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바람의 감각, 바람이 실어 온 공기의 냄새,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나 익숙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운 느낌이었다. 크루아상은 생각보다도 먼저 말했다.

"여긴 설마…… 바깥?"

그러고는 제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발밑을 바라보자 둘이 딛고 선 곳은 다름 아닌 돔의 꼭대기였다. 가짜 별을 비추는 발아래와 경쟁이라도 하듯 진짜 별들이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상황이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바깥 공기도 꽤 괜찮지?"

"아니, 어떻게…… 바깥은……."

"거짓말었던 거야~."

그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았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답을 가져오고 있었으니. 돔의 공기보다는 조금 탁한 듯도 싶었지만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보호장비를 갖추고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오염이 전혀 아니었다. 바깥은 돔 안에서 들어왔던 이야기보다 훨씬 더 회복되어 있었다.

"너를 내보낸다는 말이 뭔지 이제 좀 알겠니?"

"나갈…… 수 있다고? 돔에서?"

크루아상은 생각했다. 돔은 분명 처음에는 피난처였고 유일한 살 구멍이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돔을 떠나지 못했다. 돔이 삶을 정해주고 미래를 압박해 와도 그저 거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나갈 수 없으니까. 그곳에서 앞으로 살아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이제 나갈 수 있다면…… 아니, 그렇다고 해도.

"하지만 그건 도망치는 거잖아."

"그래~. 그게 뭐가 나빠? 자기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실험하는 도시에선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거야."

"이제 돔엔 정부도 없고. 유일한 권한을 가진 네가 나랑 돔을 나와버리면……."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써? 그냥 내버려 둬."

그의 눈빛은 크루아상과 달리 흔들림이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확신에 찬 눈을 할 수 있을까. 크루아상은 저 너머에 담긴 영혼이 제 것과 같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어쩌면 실험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 신이 그에게 크루아상과는 다른 새로운 영혼을 부여한 걸지도 모른다. 그 조각상처럼. 크루아상은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그럴 순 없어. 너도 나라면 기억하잖아. 제대로 된 정부가 없었을 때 돔이 어땠는지.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가게 두고 싶진 않아. 친구들도 어딘가에 있을 거고."

"넌 정말 답답할 정도로 남을 생각하는구나~. 이 일에 네 책임은 아무것도 없어. 정부를 세우고 바깥 정보를 제멋대로 조작한 건 관리국이잖아? 왜 그 일의 여파를 네가 책임지려고 하는 거야?"

"내가 책임지려고 한다기보단, 할 수 있는 일을 팽개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 였던 네가 돔을 무너뜨린 거니 내 책임도 없다고는……."

"아니, 돔을 무너뜨린 건 그냥 나야. 너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도 나지~. 그러니 죄책감은 나한테 떠넘기고 넌 하고 싶었던 걸 하면 돼. 돔은 남은 관리국 직원들이 어떻게든 하겠지."

크루아상은 생사를 걸고 싸웠던 처음 만난 순간보다 지금의 대화가 훨씬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늘 그가 일방적으로 말을 던지고 크루아상이 끌려다니는 관계였으니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 사실상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번엔 내 의견을 따르게 설득할 수 있을까, 하고 크루아상이 잠시 고민하자 그는 그런 크루아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꽤 많은 관리국 직원들이 네 복제의 존재를 들었었단 거 알아?"

"응?"

"너한테 유독 질문 많이 하던 사람들 있지? 미래의 비전, 적성, 하고 싶은 일. 그런 걸 물어본 직원들은 다 복제의 방향성 연구에 협력 중이었다고 생각하면 돼. 이 연구는 보다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연구였으니. 본체인 네가 바라는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알 필요가 있었겠지~. 그래도 돔을 지켜주고 싶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함께 3호 순찰을 한 후배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그 외에도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정말 대단했다. 어떤 상황에서 무슨 진실을 꺼내면 크루아상이 주장하던 의견을 굽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 지금 상태로 밖으로 뛰쳐나가면 친구들이 걱정되어서라도 마음 편히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돔을 위해 함께 행동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의 피해를 모르는 척하고 나가봤자 행복해질 수는 없을 거야. 내가, 우리가 기계를 좋아했던 이유는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잖아."

크루아상에게 그와 같은 힘이 있었다면 답답함을 참을 수 없게 된 어느 날 돔을 박살 냈을지도 모른다. 돔 어딘가에 살아있을 친구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돔이 어떻게 되든 함께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크루아상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고, 그런 주제에 소중한 사람은 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너라면 혼자 돔을 떠나도 잘 살겠지만, 그건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면 돔에 있어 줘. 물론 영원히 여기서 살자는 건 아니고, 나름의 체제가 잡히면 그때는 나가도 좋을 것 같아. 나도 바깥이 많이 궁금하거든."

"돔의 체제를 잡는 일은 전혀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만, 기대도 되지 않아? 지금은 몰라도 처음 지구의 상태는 정말로 끔찍했잖아. 그런데 돔은 거기에서도 버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그런 기술을 눈앞에서 살펴보고 뜯어고칠 기회, 솔직히 난 좀 재밌을 것도 같은데……."

"자길 가지고 실험한 사람들의 기술을 재밌어하다니, 독특하네~."

공감인지 뭔지 모를 말이었다. 실험한 사람들은 크루아상과 관련 없는 그의 '개인적인' 복수―크루아상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로 죽었다. 남은 것은 그들이 남긴 어마어마한 기술력의 유산뿐이다. 이런 발상은 분명 일반인은 하지 않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크루아상은 그의 뒤틀린 윤리의식의 씨앗이 제 심장에도 잠든 게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눈앞에 이런 상대가 있는 이상, 그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평생 발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단 사실을 다들 알게 되면 말이야. 이젠 더 이상 한정된 공간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까. 뭐, 돔의 시설은 완벽하니 여길 나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이제야 조금 생각해 보는 표정이었으므로 크루아상은 빠르게 말을 보완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생각도 없어. 애초에 난 뭘 이끄는 건 적성에 안 맞고……. 그냥 돔의 시스템을 좀 뜯어보고, 네 관리국장 권한으로 이제 바깥에 나가도 된다고 공표하고, 몇 가지 규칙 정도만 만들고 싶어. 넌 권한만 빌려주면 돼."

"빌릴 필요 없어~. 잊었어? 국장 권한은 너한테도 작동하는 거~."

"아, 그렇지. 나 참, 관리국의 실험체였다는 사실도 조금 전에 알았는데 갑자기 국장까지 되다니……."

그는 한탄하는 크루아상을 보며 웃다가, 곧 생각을 결론지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좋아. 잠깐이라면 남아줄게~. 일은 재미없겠지만 고생하는 널 구경하는 건 재밌을 것 같고. 그리고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네~."

"정말?"

"그래~. 대신 너무 오래 걸리면 그냥 데리고 나올 거니까 그건 알아둬~."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같은 인간은 때론 아득할 정도로 다른 존재가 되고 만다. 크루아상은 변해버린 자신의 영혼을 보았다. 그러나 본질이 같기 때문인지, 때로는 통하기도 한다.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서로를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상황이 얄궂었다. 혼자서 돔을 떠나 살아갈 능력이 충분히 되는데도, 굳이 제 손을 더럽히며 사회를 박살 내려 했던 그는 분명히 크루아상을 위하고 있다. 만들어진 이상형은 분명히 자신을 태어나게 한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

어떠한 부정의 여지도 없이 그는 크루아상의…….

갈라테이아

그로부터 며칠간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돔 전체의 관리 시스템을 살펴보고, 분석하고, 중앙 통제였던 구조를 각 사람이 통제하도록 엄청난 개조를 거치느라 해야 할 일의 양이 산더미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그리고 재미없을 것 같다는 말을 했던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크루아상과 같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덕분에 크루아상은 격무와 함께 그의 핀잔에도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꽤 유용한 조언을 섞어 던져주기 시작한 그의 핀잔에 힘입어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크루아상은 기존의 시스템을 완전히 해체한 뒤 모든 돔 거주민에게 통제권을 넘겨주었다. 「돔 안의 사회와 바깥이 충분히 안정되었으니, 돔 정부와 관리국은 역할을 다하고 해산한다」는 발표와 함께였다. 각 돔의 사람들은 관리국의 권고대로 일정한 인원수로 구성된 공동체를 꾸려 대표를 뽑고, 그 안에서 다시 돔의 대표를 뽑는 식으로 새로운 체제를 위해 움직였다. 거기까지가 크루아상이 도울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게 잘 될지는 모르겠네. 난 관리니 정치니 하는 건 잘 모르니까."

둘은 관리국 옥상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한낮이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잘 보였다. 천장을 뒤덮었던 가짜 하늘은 크루아상의 노력으로 이제 실제 하늘을 투영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의 답답함이 약간 가시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돔을 아예 걷어낼까 생각했지만, 바깥의 공기가 돔의 내부만큼 깨끗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환자나 노약자 등의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안 어울린다."

처음 이제 바깥에 나가도 괜찮고, 돔 정부는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발표되었을 때는 당연히 온 돔이 흔들렸다. 일반 거주민들도 그렇지만, 크루아상처럼 관리국의 직원이었던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그 무법지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을 언제나 무의식 밑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곧 새로운 사회의 기틀을 잡는 데 협조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보다 돔이 썩어빠진 기관이었다는 건 결국 우리밖에 모르게 됐네~. 괜찮겠어? 난 마음에 안 드는데."

"여기서 돔의 비리를 폭로해봤자 혼란만 커질 뿐이잖아. 다들 관리국의 권고도 안 들으려고 할 거고. 난 됐어. 처음 돔…… T사가 없었다면 다 죽었을 테니 그 값을 치른 셈 치려고. 돔의 비리에 관련된 자료는 관리국 내부에 남아 있으니, 사회가 안정되면 자연스레 드러나겠지."

"미련하네~."

내용과는 다르게 크루아상을 비난하는 듯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이쪽을 돌아보는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잘 정리된 것 같았다. 돔의 상황, 그리고 둘의 관계가. 크루아상은 잠시 그를 마주보다 말했다.

"그럼 이제 갈까?"

가방은 가벼웠다. 그는 짐이 없는 게 당연했고, 크루아상도 가진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바깥은 크루아상처럼 방금 돔을 나선 사람들 외엔 아무도 살지 않을 테니 일단은 돔을 아예 떠나는 게 아닌 여행의 형태로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속박하던 존재를 영영 벗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다. 어떻게 여기에 몇 년이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했을 뿐, 크루아상도 마음속에선 그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은 안 만나도 괜찮아~?"

"응. 애초에 지금은 만나려고 해도 못 만날 거야. 걔네라면 아마 누구보다도 먼저 돔을 뛰쳐나갔을 테니까. 한참 전부터 나보다도 여길 지겨워했는걸. 그러니 여행하다 보면 분명 만날 수 있겠지."

그는 크루아상의 친구들을 굉장히 남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아닌, 자신과 친한 크루아상의 친구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그의 인격이 뒤바뀌는 동안 인간관계의 인식에도 변화가 일어난 걸까? 크루아상이 돔을 뛰쳐나가지 않은 원인 중 하나가 친구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그럴싸한 생각이다.

"두고 온 건 없지?"

생각 도중에 그의 말이 들려, 크루아상은 멈췄다. 그는 크루아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돔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동료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와서 어떤 점이 어떻게 변했는지 하는 생각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는 크루아상의 이상적인 존재, 크루아상이 되고 싶은 모습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상형은 불완전하다.

조각가와 조각상은 행복했을까? 크루아상은 이전의 의문을 되새긴다. 그들은 분명 상대가 너무 완벽해서,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어서 갈등을 빚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내…… 깨달았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두렵지만 귀중한 관계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하며 크루아상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날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걸 그만둔 지 꽤 됐네~."

"아무래도. 실험의 피해자…… 거기에 나 자신인 사람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럼 생각해봤어? 날 어떻게 부를지."

"……응."

진짜 태양이 하늘의 중앙에서 둘을 비췄다. 그는 그 태양,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섰는데도 크루아상은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줄곧 속으로만 생각하던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 단어가 둘의 관계를 새로이 명명하고, 더 좋은 곳으로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갈라테이아.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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