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시간크루] 영원의 자격을 논하며 (백업)

나는 너에게,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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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날짜: 2021.05.23

이별 통보는 첫 만남처럼 갑작스러웠다. 크루아상은 그 말이 처음 제 귓가를 스쳤을 때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인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나 어울릴 듯한 평이한 말투였으니까.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같은.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이고, 식사를 할 시기는 진작에 지났다. 그럼 그것 말고 잘못 들을 말이 뭐가 있지. 짚어가던 생각을 시간지기가 뚝 끊는다.

"들었어~?"

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수고롭게 입을 움직여 묻는다. 그러고는 적지도 넘치지도 않는, 딱 치사량만큼의 상냥함을 발휘해 되풀이해준다.

"나, 이제 여길 떠날까 하는데~."

크루아상은 이런 상황에서 대답하는 법을 잘 몰랐다. 언제 어디선가 보았던 어느 신파극의 주역처럼 울면서 매달려야 할지, 아니면 지금의 시간지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작별 인사를 건네주어야 하는지. 어느 쪽도 시간지기가 썩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지 않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힌 전기스탠드가 건전지가 다한 듯 한차례 깜빡였다. 지금 누군가가 타이밍의 신을 전도하러 온다면 믿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불이 꺼졌다. 칠흑 같은 방 안에서 달빛 한 줄기에만 의지해 서로의 얼굴을 간신히 보았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진부하고 시시한 문장이다.

"왜?"

"그냥, 좀 지루해졌을 뿐이야~. 원래부터 영원히 있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영원히. 그렇구나. 순간 크루아상은 한 가지를 이해했다. 자신은 시간지기를 막을 수 없다. 그를 영원히 즐겁게 해줄 수 없으니 당연한 처사이다. 소설 속 이들은 낭만을 속삭일 때 영원을 맹세한다.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함께하고, 영원히 행복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수식어에 불과하다. 영원을 살 수 없는 존재가 '죽을 때까지'의 대체재로 내뱉는 안일한 한 마디. 그들은 모두 죽으니까 맹세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만 지키면 되니 말할 수 있다.

그러니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에게, 영원을 말할 자격이 없다.

영원의 자격을 논하며

시간지기의 이별 통보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지기는 아직 떠나지 않았고, 크루아상은 아직 붙잡지 않았다. 아직이라는 표현은 전부 언젠가는 이뤄질 일임을 의미한다. 자신이 그럴 자격을 고민하더라도 크루아상은 결국 붙잡고 말 것이다. 시간지기에게 크루아상이, 또는 크루아상에게 시간지기가 더는 필요치 않더라도. 아니, 차라리 필요치 않았더라면 모든 일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크루아상은 이별 통보를 듣자마자 붙잡고, 시간지기는 쉽게 거절한다. 혹은 시간지기가 통보조차 없이 떠난다. 크루아상은 며칠간 시간지기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하다, 바쁜 일들에 밀려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상투적인 대화로만 이루어졌던 무채색의 관계가 되는 것이 크루아상에게는 조금 더 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편안한 삶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오늘이 증명한다. 올해의 봄, 그들은 정식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봤자 큰 변화는 없었다. 누군가가 사귀는 이가 있냐 물었을 때 어정쩡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해야만 하게 되었을 뿐이다. 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함을 알고 있었고, 그게 올해 봄 특별한 고백의 말도 없이 확인된 것이 전부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도 채 지나기 전, 봄과 여름이 뒤섞인 날씨에, 제멋대로 영원이라도 꿈꾸던 크루아상에게 시간지기가 통보한다. 나, 이제 여길 떠날까 하는데.

비가 오는 교차로, 기울인 우산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신발의 등을 적셨다. 크루아상은 시선을 신호등의 번뜩이는 붉은 빛에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기계는 녹슬고, 모든 생명은 변한다. 신호등처럼 깜빡이고, 빛의 색을 바꾸다가, 종내 꺼지고 마니까. 몇 년 후 영원히 흐르는 시간에 매료당하고, 그 시간에 실려 마찬가지로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를 만나기 전까지만의 이야기이다.

크루아상의 시선과 신호등 사이를 거대한 화환을 실은 트럭이 가로질렀다. 화사한 빛깔로 잔뜩 꾸민 화환은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 아래에 누워 있었다. 소중히 실린 화환이 향하는 곳은 아마도 누군가의 예식장일 것이다. 행복에 겨운 새 출발의 장소에서 크루아상은 흔히 그런 질문을 들었다. 서로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 분위기에 휩쓸려 너무나도 쉽게 영원을 맹세해버릴 이들. 단 한 명도 그 질문에 부정을 내놓지 않는다. 영원의 무게를 실감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고, 쉽게 거두어지는 수많은 영원, 영원, 영원……. 그 중 크루아상의 몫은 없다. 빗소리도, 자동차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한 가지 생각만이 든다. 내가 영원을 약속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하지만 나는 너에게, 영원을 말할 자격이 없다.

교차로를 건너 도달한 길의 한편 늦은 시간인데도 문을 연 꽃집이 있다. 가지각색의 기념일이 가득한 5월의 끝자락, 수많은 기념일에도 미처 팔리지 못한 채 남은 꽃들이 진열대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다 시들어가는 누런 잎의 꽃다발은 이미 팔릴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영원하지 못한, 누구도 찾지 않는, 이제는 이런 수식어의 뒤만이 그들의 자리이다. 그리고 그곳은 머지않은 미래 크루아상이 차지할 자리이기도 하다. 말라비틀어져 버석버석한 꽃잎을 발치에 뿌리고, 썩어 문드러진 나무 관에 누울 크루아상에게 다른 자리는 과분하다. 크루아상이 약속할 수 있는 영원은 오직 단 하나, 죽음뿐이니까.

이런 식의 끝을 예상하지 못했나? 되짚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함께 하는 시간은 불안했고, 행복은 쓰라렸다. 시간지기는 언제라도 금방 떠날 이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채 안일하게 살았다.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현재를 살고 싶었다. 미래는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여행자라는 칭호를 내건 주제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건가. 나의 안일함이 심판받고 있는 건가.

크루아상은 꽃집의 문을 열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경쾌하게 울리자 안쪽에 앉아있던 이가 손님이 올 줄 몰랐던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저런 시든 꽃을 진열해놨는데 누군가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크루아상은 개의치 않고 말한다. 밖에, 있는 꽃다발 하나만 주세요. 다 시든 꽃을 살 거냐고 재차 확인해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의 의미 없는 대화 끝에, 결국 돈을 받기도 미안하다며 꽃다발은 값을 치르지도 않은 채 크루아상의 손안에 놓였다.

꽃집을 나와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든 채로 길을 걸었다. 왜 꽃다발을 샀는지는 크루아상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꽃다발을 가엾게 여겼거나, 혹은 자신과 겹쳐 보고 동족을 애도하는 의미였거나. 어느 쪽이든 관계 없다. 이미 꽃다발은 시들었고, 크루아상의 손에 들려 있다. 크루아상은 꽃의 향기를 맡아 보았다. 본래 샛노랬을 꽃잎은 다 죽어버린 채로도 여전히 짙은 향기를 풍겼다. 이 향기만은 영원할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향기는 잔향일 뿐, 결국 이마저도 언젠가는 공기 중으로 휘발된다. 코 끝에 남은 감각이 미미해질 즈음에는 향기마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고 만다. 그렇게 된다면 이 꽃의 삶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영원하지 않은 것이란, 정말 부질없구나.

네가 보는 나도 이와 비슷하겠지. 이런 나는 너에게, 영원을 말할 자격이 없다.

불 꺼진 현관에 크루아상이 발을 들이자 형광등이 빛을 밝혔다. 아무도 없는 집은 접힌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가끔 집까지 따라오곤 하던 시간지기는 이별을 통보한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시간지기가 완전히 떠나고 나면 아마도 함께하던 시절의 떠들썩한 집을 영원히, 아니, 죽을 때까지 다시는 볼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프다. 크루아상을 떠난 시간지기도 이제 다시는 떠들썩한 크루아상의 집에 올 수 없다. 그쪽은 정말로 영원히 말이다. 그런 게, 정말로 괜찮을까. 시간지기는 서글프지 않을까. 남은 것은 지루함뿐일까.

그럴 리가 없다. 크루아상이 거짓을 말하면 시간지기는 분명 속아준다. 영원히 너를 즐겁게 해줄 테니까 떠나지 마. 진실이라기에는 너무 달콤한 말, 그러니 당연하게도 거짓이다.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알 법한 사실을 둘만이 눈감아줄 수 있다. 모르는 척, 끝 따위 오지 않는 척, 영원한 척 연기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끝이 찾아오더라도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 크루아상만은. 그래, 크루아상만. 영원 소꿉놀이의 상대역을 모래밭에 혼자 버려두고. 상대역이 자신이 남긴 부스러기를 찾아 모래밭을 끝없이 파헤칠 줄 알면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크루아상은 시간지기를 시간만 주어진다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자신을 미워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시간지기처럼 되어 영원을 누리며 시간지기를 영원히 사랑한다면, 그것은 지금만큼의 의미가 있나? 크루아상이 시간지기를 사랑하는 것과 시간지기가 시간지기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시작은 전부 크루아상이었더라도. 지금의 크루아상은 영원을 논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지기와 만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의미는 퇴색된다. 영원한 너는 영원히 변한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감정은 잦아든다. 너를 향한 감정을 안은 그대로 사라질 나,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한 감정을 차차 잊어가며 영원히 살아갈 너. 크루아상은 이런 관계는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눈치 없는 척 외면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여행기를 타고 되돌아가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을 결심까지는 서지 않는다. 딱 그 정도의 어중간한 생각이다. 벗어놓은 신발은 푹 젖어 엉망이었다. 내일 출근에 지장이 없으려면 지금 바로 새 신발을 준비해두는 편이 좋다. 이런 상태로는 밖에 신고 나갈 수가 없으니까. 이렇듯 당연한 일이다. 너도, 그리고 그 누구도 감정에 푹 젖은 채 영원히 살아갈 수는 없다. 살아가려면, 반드시 말라야만 한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영원히 젖어있길 바라는 건 이기심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나는 너에게, 영원을 말할 자격을 원한다. 

밤새 널어놓은 신발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벽에 아무렇게나 걸어둔 꽃다발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난다. 집을 나서며 본 교차로의 신호등은 밝은 초록색이다. 그리고 시간지기는 보이지 않는다. 벌써 떠나버린 건 아니지. 내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기다려줄 거지. 크루아상은 그렇게 믿으며 무슨 대답을 하면 좋을지 일하는 내내 계속해서 생각했다. 오늘 말해야만 한다. 오늘이 지나면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의 답을 기다리는 일조차 질려버릴 것 같다. 그는 크루아상 한정으로 인내심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깊다고 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제자리였다. 크루아상은 시간지기를 아직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일지라도 앞뒤 생각 하지 않고 붙잡고 싶었다. 그냥 나를 계속 지켜봐 주면 안 되냐고, 나와 함께 계속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그만 책상에 놓여 있던 스패너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스패너를 제자리에 도로 올려놓았다. 제자리에. 제자리란 무슨 의미일까. 본래 있던 자리.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결론의 제자리, 스패너의 제자리, 제자리. 둘은 다를까. 나의 생각이 지금 맴도는 곳은 어디지? 출발점? 도달해야 할 장소? 그것을 확답할 수 있었다면 고민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크루아상은 결국 쪽지를 적어 국장실 문틈으로 떨어뜨렸다. 오늘 대답을 들려주고 싶어. 밤에 내 연구실에서 만나자. 해묵은 감정을 이제는 털어놓고 싶었다. 너에게 영원을 말하고 싶다고, 그렇게. 막상 너를 만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부질없고 상투적인 작별 인사를 건네게 된다고 하더라도. 툭. 쪽지가 문 너머 국장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끊어진 것은 고민인가, 관계인가.

결국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영원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끝이 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도 있다. 별은 언젠가 죽기에 찬란하다. 동화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귀결되기에 사랑받는다. 모든 삶은 끝나기에 이루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이 영원하면 수리공은 필요가 없고, 기록은 의미를 잃는다. 영원을 갖지 못한 모든 찰나들은 딱 영원을 가지지 못한 만큼 더 아름답다. 삶도, 우주도, 그리고 아마 우리의 관계도. 어제 산 꽃다발이 다시금 떠올랐다. 영원 대신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진한 향기를 가진 노란 꽃. 갑자기 그 꽃이 걸려있을 곳은 하루 중 대부분 아무도 없는 집 안이 아니라, 크루아상이 쉼 없이 들락거리는 이 곳 연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집을 다녀오기에는 충분하다.

요즈음 자꾸만 쓸모없는 일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도 느낄 만큼 사소한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행동에 온 신경을 쏟았다. 영원함의 시각으로 세계를 둘러보다 보니 세상에는 놀랄 만큼 크루아상과 비슷한 처지의 것들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관심을 주고 말았다. 잰걸음으로 집까지 가는 길에 크루아상은 교차로에서 한 번도 멈춰서지 않았다. 신호등이 밝힌 빛은 하나같이 초록빛이었다.

언제나처럼 형광등에 불이 켜지고, 집에 온 김에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불이 켜지거나 물이 틀어진 곳은 없다. 창가에 놓인 몇 개의 화분들도 잘 자라고 있다. 신발은 아직도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벽에 걸린 꽃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난다. 크루아상은 꽃다발을 빼 들고, 다시 집을 나섰다. 분명히 이 세상은 전부 찰나인데, 어째서 이렇게 변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물었다. 대답은 자기 자신이 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게 물었으니까.

그것에 답하기 위해서 별다른 자격이 필요한가. 나는 너에게, 영원을 말할 자격이…….

시간지기가 크루아상을 찾아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새 크루아상은 꽃다발을 가져와 연구실 벽에 걸어두고, 일을 마무리한 뒤,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보고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평범하게 문을 여는 대신 크루아상 바로 옆의 틈새를 찢고 나타난 시간지기의 모습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던 것은 생각에 너무 몰두했기 때문이리라. 눈이 마주치고 이어진 잠시간의 정적 끝에 크루아상이 운을 뗐다.

"아직 안 떠났었네. 다행이다……."

"네 제대로 된 인사를 못 들었으니까~."

이별을 통보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쾌활한 목소리다. 제대로 건전지를 갈아 끼운 전기스탠드는 이제 깜빡이는 일 따위 없다. 크루아상은 차라리 지금 스탠드가 꺼지면 좋을 텐데, 생각했다. 시간지기의 표정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이게 마지막 인사가 된다면 얼굴을 똑똑히 봐야만 하겠지. 역시 스탠드는 꺼져서는 안 되겠다. 아랫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그래서, 대답이라는 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마르지 않은 신발과 꽃의 잔향, 밝게 빛나던 신호등을 떠올리며 그 의미를 되새긴다. 너의 영원에 나의 찰나를 새기고 싶다고 바란다. 너에게 가장 큰 의미가 되기를 꿈꾼다. 그런 심정을 아주 짧은, 그러나 요 며칠간 끊임없이 반복한 단어에 실어 뱉는다.

"너를 영원히 사랑해."

사랑하고 싶어, 가 아니다. 이것은 확신이다. 언젠가 분명 죽어 없어지고 말 존재가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믿음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분명 스탠드는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는데도 시간지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풍경이 아득해지고 마는 걸까. 있잖아,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더라도, 너에게 이 말만은 건네게 해주지 않을래. 이 모든 게 언젠가 끝나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게 지금이라면, 나는 너에게 전해두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돌아와."

언제든이라니, 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되물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백 년 후, 천 년 후에 돌아오면 어쩔래? 그렇게 묻는다면 대답할 방도는 없다. 하지만 네가 돌아온 순간이 만일 내 삶이 아직 끝나기 전이라면 나는. 나는 그때도 반드시 너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내 찰나의 삶 속, 너를 만난 이후의 모든 시간을, 너를 사랑한다고.

"꼭 프로포즈 같네~."

그리고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의 말을 따지고 드는 대신 이상한 말을 꺼낸다. 늘 이랬다. 머릿속으로 시간지기가 할 만한 예상 답변 수십 개를 준비해도 들어맞는 일이 없었다. 프로포즈, 라기엔 주변 환경이 지나치게 조촐하다. 약속을 상징할 반지는커녕 그럴듯한 선물도, 분위기 있는 초나 풍선들도, 심지어는 제대로 된 꽃 한 송이조차 없다. 잠깐, 꽃 한 송이? 순간 크루아상의 시선이 잠시 벽에 걸어둔 꽃다발에 닿았다. 시간지기도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주저 없이 벽 쪽으로 걸어가 꽃다발을 빼 들었다. 둘은 아마 언제나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므로, 크루아상은 물었다.

"그걸로 괜찮아?"

다 시들어버린 볼품없는 꽃이다. 잔향만은 아직 느껴지지만 결국 그마저도 가까운 시일 내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프로포즈와 함께 건넨다면 아무리 사랑하던 사이어도 그 순간 틀어지고 말 게 분명한 몰골이다. 하지만 시간지기는 꽃다발을 들여다보다가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는 이런 꽃다발, 좋아해."

……그렇구나.

시들고 말라 잊히는 일만 남은 꽃다발을, 시간지기는 사랑한다. 영원에 스쳐 갈 뿐인 그 찰나의 생명. 그것을 사랑한다며 증표로서 받아든다. 크루아상은 알았다. 그것은 대답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나를. 이미 한 차례 증명했던 사실인데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다. 둘은 지금 맹세했다. 찰나를 흘려보낸 뒤에도 계속 살아갈 영원을, 영원이 흐르는 동안 잊힐 찰나를, 슬퍼하지 않겠다고. 크루아상은 시간지기를 따라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럼 또 봐."

삶과 죽음, 영원과 찰나, 흘러가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 그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변하는 것은 없다. 삶은 끝나고 찰나는 순식간이며 흐르지 않는 것은 썩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들여봐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래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놓치고 말 시간이 있다. 이것은 직면하지 않고서는 얻어내지 못할 축복이다. 모든 시간을 영원히 방랑할 너의 유일한 좌표. 하나뿐인 시점. 나의 찰나 속 영원히 사랑할 네가, 그게 나라고 말해주는,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영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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