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논컾)

재생 (백업)

정말 축복할 만한 일이야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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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날짜:2021.11.13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가 시시껄렁한 작명 따위에 별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젠 부를 이도, 불릴 일도 없을 테고. 이름을 잃은 직후 작명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습게도 케이크를 하나 마련하는 것이었다. 텅 빈 건물 꼭대기에 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려놓은 케이크엔 초 한 개를 꽂았다. 앞으로는 나이를 매길 수 없게 될 테니 초를 장식하는 것은 이번만이다. 그의 손 끝에서 성냥이 타올랐다.

불붙은 초를 꽂은 케이크는 한 조각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케이크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그는 그저 기념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초가 완전히 녹아 촛농에 뒤덮인 케이크가 완성되고, 그 속에 잠긴 불꽃이 제풀에 꺼질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었다. 누구도 먹을 수 없게 된 케이크의 한가운데에 검게 탄 채 쓰러진 심지가 안쓰러웠다. 물론 안쓰럽다는 표현은 일반적인 감상을 빌린 것으로, 그의 생각은 아니었다. '안쓰럽다'는 심지가 아닌 지금껏 살아온 그의 삶 따위에나 붙일 수 있는 수식어다.

그는 케이크를 그대로 둔 채 건물을 내려왔다. 건물 꼭대기엔 이따금씩 거센 바람이 불어오니 굳이 치우지 않아도 알아서 바람에 날려 갈 것이다. 그 전에 지나가던 가엾은 새가 입에 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겠지만, 그에게 그런 사실은 딱히 알 바가 아니었다. 굳이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아래로 향하는 발걸음은 소름 끼치도록 경쾌했다. 한 입도 대지 않은 케이크의 맛이 달콤했기 때문이겠지. 그런 그의 발에 무엇인가가 턱 걸렸다. 끈적한 액체가 신발에 얽혀들었다.

그러고 보니 청소를 해야 했구나. 계단 중턱에 잘못 가져다 놓은 물건처럼 엎어져 있던 무언가를 발로 툭 차자 금세 저 끝까지 굴러떨어졌다. 굴러간 곳 근처에도 비슷한 모양새로 널브러진 무언가들을, 그는 손에 든 가위를 가지고 대충 통행에 방해되지 않을 곳까지 죽 밀어놓았다. 단내가 풍기는 밀가루 뭉텅이, 이것도 케이크와 마찬가지다. 다만 하나뿐인 초는 아까 심지만을 남기고 녹아버렸으므로 여기엔 꽂을 것이 없어 그 점은 조금 아쉽게 되었다. 

건물에 버려둔 두 개의 케이크가 자연적으로 사라지길 기대하며, 그는 느긋하게 방문을 열었다. 이 방에서는 건물 아래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부유하는 건물의 특성상 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구름과 까마득한 절벽뿐이었지만 그가 고작 풍경 따위에 겁먹을 성격은 아니었다. 오늘 자신이 새로이 차지한 곳 중 여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겨우 이걸 위해 아침부터 사방을 시끄럽게 만든 것은 아니지마는, 얻은 게 이것 하나뿐이었어도 나쁘지 않았겠다 싶었다. 지금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으므로 어디에나 관대하고 후한 평가를 내려줄 수 있었다.

아까의 청소 때문에 더러워진 신발 때문인지 방 안에서까지 단내가 났다. 기껏 새로 맞춘 신발인데. 그는 한 손에는 신발을 벗어 쥐고, 다른 손으로는 창문을 열었다. 단내를 환기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곧 신발 한 켤레가 아래가 보이지 않는 허공으로 내던져졌다. 맨발이 되어 몸이 조금 가벼워진 김에 텅 빈 방 안을 이곳저곳 뛰어다녀 보았다. 실은 신발의 무게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늘 무거운 공구들을 달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핑계 삼아 한참을 춤춰 보았다.

창 너머에서는 해가 기울었다. 그는 오늘의 날짜를 몰랐기 때문에 다시는 이 날을 기념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념을 위해 번거롭게 날짜를 찾아볼 의지 따위가 생길 리도 만무했다. 거기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도 존재한다. 첫째, 태어난다는 것은 기념할 가치 없는 지루하고 끔찍한 일이다. 둘째, 그에겐 이제 날짜 같은 개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오늘의 기념은, 날짜가 아닌 사실을 기념했을 뿐이다. 그가 재생했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퍼포먼스 같은 것이다.

참 별 볼 일 없는 생일이네,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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