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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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것은?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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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날짜: 2022.01.14

*로봇x인간 AU

비가 쏟아져 내리는 어느 겨울의 밤이었다. 크루아상은 가벼워야 할 퇴근길 발걸음을 늦추는 빗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발걸음을 아예 멈춰버리는 물건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생각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비를 잔뜩 머금고 축축해진 거대한 상자가 크루아상의 눈길을 끌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호기심에 상자 안을 들여다본 크루아상은 의외의 물건과 눈을 마주치고 놀라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상자에 담긴 것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파괴한 듯 산산이 조각난 인간형 로봇, 그러니까 흔히 안드로이드라고 불리는 것의 파편들이었다. 그게 로봇이라는 사실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지금 크루아상의 뒤에만 해도 길을 청소하는 환경 미화 로봇이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량품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렇게 길거리에 내버리는 행동은 문제가 되었다. 대체 누구야? 크루아상은 업계 종사자로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박스에 담긴 로봇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었다. 세상은 지금 수많은 로봇들과 함께하고 있으니, 그만큼 고장이나 제조 실수로 버려지는 로봇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로봇이 불쌍하다고 무조건 주워 오면 크루아상의 집은 며칠 안에 로봇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마침 비도 오니 옮기기 힘들다는 핑계로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여기는 크루아상 집 바로 옆의 가로등 아래였다.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금속의 파편들을 내려다보던 크루아상은, 결국 우산을 접고 양손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는 꽤 무게가 나갔지만 그동안 일하며 쌓인 근력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집 안까지 옮길 수 있었다. 작업대에 늘어놓고 보니 로봇은 정말 처참할 정도로 부서진 채였다. 이런 몰골이라면 수리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침 내일은 출근이 없는 주말이니 썩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라 할 수 있겠다.

크루아상은 널브러진 로봇 파편들에 가득한 물기를 닦아내며 하나하나 찬찬히 살폈다. 척 보기에도 마구잡이로 부서진 꼴이니 모든 부품이 무사하리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지만, 심각할 정도로 많은 부품이 사라지거나 못 쓸 정도로 박살나버린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약간의 막막함이 몰려왔다. 상자에 담겨 가로등 아래 놓여있어서 그렇지, 이대로 공장 구석에 있었다면 고민의 여지 없이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못 본 척 지나쳤다면 모를까, 이미 한 번 주워온 이상 이 로봇은 이제 자신이 책임지는 게 옳다. 크루아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잠시 심호흡을 좀 했다. 부품이라면 크루아상의 집에도 많고, 모자라면 만들거나 구해오면 된다. 사내에서도 크루아상의 실력은 꽤 뛰어난 편이었으므로 자신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곧 방 안은 시끄러운 금속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나 버려진 고철덩어리가 로봇이라고 불릴 법한 모양새를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무려 일주일이 더 지난 후였다. 이 작업을 주말 안에 끝내겠다고 생각한 건 크루아상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판 중 하나가 되었다. 생김새만 보고 평범한 가사용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했던 로봇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걸 수리해야 하는 크루아상에게는 설계도도 뭣도 없었다. 그 사실을 파악한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도로 밖에 내다 버렸다면 모든 일이 훨씬 편했을 텐데. 예전부터 답답할 정도로 미련하다는 말을 들은 크루아상답게 그러지를 못했다. 그 행동이 매일 퇴근 후 잠까지 줄여가며 로봇 수리에 매달리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로봇을 수리하는 동안 크루아상은 많은 생각을 했다.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물론, 이 무지막지하게 복잡하고 정교한 로봇을 기껏 만들어놓고 박살내서 길거리에 버린 놈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이 로봇의 용도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고쳐보고 쓸만하면 매일 제대로 정리되는 일이 없는 집 청소나 시킬까 하는 생각으로 수리를 했던 크루아상에게, 예상외로 정교한 구조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건 가사용은 당연히 아니고, 군사 작전에나 써야 할 법한 로봇이었다. 어쩌면 자기가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렸을지도 모르는 생각도 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거라면 비 오는 날 박스에 담겨서 길바닥에 버려져 있진 않았겠지.

아무튼 크루아상이 수리 과정에서 이 로봇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던 정확한 정보는 단 하나, 로봇의 모델명뿐이었다. TIMEKEEPER-00. 아마도 목 뒷부분이었을 부분에 적혀 있던 선명한 글씨 덕이었다. 그래서 크루아상은 이 용도 모를 금속덩어리의 이름을 시간지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간지기는 너무 많은 부품이 날아간 탓에, 사실상 이제는 처음 만든 사람보다 크루아상이 만든 부분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로만은 대부분이 무사했기에 크루아상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만일 회로가 날아갔다면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 탓에 수리를 중도 포기하고 말았을지도 모르니, 크루아상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렇기에 시간지기가 어떤 사고를 기반으로 움직이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은 크루아상을 조금 불안하게 했다. 로봇이 버려지는 건 대부분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 뿐이니까.

그래서 크루아상은 수리를 마치고도 시간지기를 가동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 로봇이 어떤 행동을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보면, 전원을 켜자마자 대뜸 자폭해버린다든가. 그런 상상들을 하니 불안해져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자고, 내일 느긋하게 기능을 파악해보는 것이 좋겠다. 혹시라도 통제 못 할 상황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말이다. 대체 이런 걸 왜 주워와서는. 이제 와서 버릴 수도 없고. 뒤늦은 후회도 좀 해봤지만 완전히 진심은 아니었다. 크루아상은 늘 새로운 도전을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주말 동안 작동시켜본 시간지기는 크루아상이 걱정한 만큼 형편없거나 괴이한 로봇이 아니었다. 맥빠질 정도로 평범한 안드로이드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가사용은 아닌 듯했지만. 그리고 몇 마디 나눠본 후 이 로봇이 버려진 이유도 알 수 있게 됐다. 이 모델은 모든 지식을 인간으로부터 학습해가며 점차 성장하는 형태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인데, 기본 지식이 정말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 학습 시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대학 강의실에 데려다 앉혀놓고 공부를 시키려는 꼴이었다.

이왕 수리까지 한 로봇을 아무 기능 없는 고철로 두고 싶지 않았던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에게 약간의 작업을 더해주었다. 작업이라고는 해도, 가사용 로봇─크루아상의 집은 정말로 그런 게 한 대 필요할 정도의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련을 떨치기가 힘들었다─에게 흔히 배포되는 기본 데이터베이스를 설치해주었을 뿐이지만. 시간지기가 성공작이라면 이 데이터 하나만으로 시작해 고도의 인공지능과 맞먹는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런데 설치한 데이터를 확인하던 도중, 크루아상은 또 한 가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말았다. 시간지기가 학습해낸 데이터는 다른 데이터로 밀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데이터를 설치하기 전 크루아상과 시간지기가 나눌 수 있었던 대화는 딱 하나였다.

"네 이름이 뭐야?"

「모델명, TIMEKEEPER-00. 시간지기.」

이 짧은 대화 하나만으로 시간지기는 '반말'을 학습했고, 당연히 존댓말로 설정되어 있을 가사용 로봇 데이터의 기본값을 무시한 채 크루아상에게 여전히 반말로 대응했다. 이런 로봇은 태어나서 처음 봤기 때문에 크루아상은 한참을 당황해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 로봇은 정말 위험하다. 인간이 설치한 프로그램보다 자신의 학습 데이터를 우선시한다는 건, 잘못되거나 위험한 정보를 학습했을 때 그 데이터를 밀어낼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큰 문제라면 제조 단계에서 박살나 버려지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럼 제대로 처리를 해야지 길거리에 버려놓는 건 뭐람?

아무튼, 이런 위험한 로봇은 누군지 모를 무책임한 제조업체 대신 크루아상이 제대로 처분해주는 게 도리에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로봇 다루는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며, 일주일을 넘게 투자한 이 로봇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폐기해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날부터 둘은 함께 살게 되었다.

시간지기는 아쉽게도 딱히 집안일을 돕지는 않았다. 분명 크루아상이 설치한 데이터를 통해서 학습은 되었을 테지만, 학습했다고 무조건 실행하는 건 또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크루아상의 거실은 전처럼 어질러진 채였다. 하지만 그 난장판의 거실 안에서 시간지기가 집중한 채 TV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다르게 보였다. 크루아상은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맞이해준다는 게 꽤 기쁜 일임을 처음으로 느꼈다. 로봇은 불 꺼진 방에서 전자기기를 본다고 시력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전기세 절감을 위해 불은 켜지 않도록 했더니 종종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풍경이었지만.

「다녀왔어~?」

풍경이야 어찌 됐든, 아무튼 인사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게 즐거운 것이다. 시간지기는 개발된 게 보다 즐거운 대화를 위해서였나 생각할 정도로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능했다. 대화나 하려고 이런 고도의 학습 회로를 만들다니 정말 어지간히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 아니, 지금 로봇과 대화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다. 크루아상은 생각을 그만두고 시간지기의 학습을 위해 반응이나 해주기로 했다.

"응. 오늘은 좀 늦었지."

「어제보다 25분 하고도 14초나 더 기다렸어.」

"차가 엄청 막히더라고."

「비행 택시를 탔으면 안 늦었을 텐데~.」

"그건 비싸잖아."

「넌 소득에 비해 돈을 너무 아끼는 경향이 있어.」

"어쩔 수 없어. 돈을 아껴야 되거든. 집에 하루 종일 전기 쓰는 애가 하나 있어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답하기 싫은 말은 웃어넘기는 것이 썩 인간 같다. 온종일 TV나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접하는 시간지기는 놀랄 만큼 빠르게 인간을 배우고 있었다. 다만 시간지기가 매일 바라보는 건 화면 너머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 크루아상과의 시간을 굉장히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오늘은 뭘 배웠어?"

「늘 똑같아. 인간의 대화 메커니즘, 생활 방식, 원하는 것.」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심도 있게 들리네."

「심도 있게 배우고 있어. 난 로봇이니까~.」

시간지기는 인간을 학습하지만, 딱히 인간을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대화 방식이 닮아갈 뿐이다. 학습욕도 로봇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인간을 향한 충성심 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저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계되어서 인간을 향한 흥미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정말 이상한 로봇이 되었겠지. 크루아상이 부탁한 집안일을 하나도 해놓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늘 인간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로봇들만 보던 크루아상에게, 시간지기처럼 인간의 말을 저 좋을 대로 듣는 로봇은 굉장히 신선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시간지기는 자신이 기계라는 사실을 좋아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하는 것 같아.」

"뭐, 넌 로봇이니까 그렇겠지. 인간은 로봇처럼 합리적인 행동을 골라서 하진 않으니까."

「골라서 할 수 없는 쪽에 가깝겠지?」

"응?"

「인간은 로봇 같은 연산 능력을 갖춘 머리가 없으니까. 합리적인 행동만을 할 수 없겠지?」

"그 표현이 좀 더 정확하겠네. 네 말이 맞아. 인간이 그럴 수 있었으면 애초에 로봇이 필요하지도 않았을걸."

「하지만 왜 행복해 보일까?」

"그래 보여?"

「응. 왜 나보다 그들이 행복해 보일까?」

크루아상은 답을 잠시 고민했다. 처음 듣자마자 생각난 대답은 '그야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고, 로봇은 인간이 설계해준 대로 사니까'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로봇에게 행복이라는 개념이 가당키나 한가? 인간이 웃으라고 입력하면 웃고, 울라고 입력하면 우는데. 시간지기의 학습 능력을 생각해 보면 크루아상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배울 것이다. 그래서 크루아상은 말했다.

"그 이유도 한 번 학습해 봐."

「오~.」

시간지기는 또 인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웃으며 덧붙이는 모습이 정말로, 이 로봇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궁금하게 했다.

「그럴게.」

학습이 잘 진행되는 건지, 그 이후로 시간지기가 크루아상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다른 질문들을 수도 없이 던져댔다. 주로 크루아상의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넌 기분이 좋으면 어떻게 하냐, 우울할 땐 또 어떻게 하냐, 좋아하는 장소는 있냐, 거길 좋아하는 이유는 뭐냐……. 같은 인간이었으면 좀 꺼려졌을 정도로 캐물어대는데도 크루아상은 그게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시간지기는 그저 로봇답게 학습할 뿐이고, 자신은 시간지기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 그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시간지기가 자신에 대한 적의를 전혀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순수한 호기심임을 확신할 수 있어 더 그랬다.

크루아상은 로봇 기술자가 된 이후로 매일같이 로봇을 뜯고 개발하고 만들어왔다. 하나같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인간의 말을 듣고, 정해진 메커니즘으로 특정 대화만 나눌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어려서부터 줄곧 기계를 사랑했기에 시작한 일이니 당연히 즐거웠다. 물론 즐거웠지만…… 때로는 못 견디게 지겨울 때가 있었다.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로봇들 틈바구니에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상상한 미래가 이런 로봇을 만드는 일이었나 돌아보게 되고는 했다.

그런 크루아상에게 시간지기의 존재는 미지의 흥미 그 자체였다.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걱정보다는 로봇이 어디까지 학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훨씬 컸다. 그리고 아마 시간지기에게도 크루아상이라는 인간은 미지의 흥미 자체겠지. 크루아상은 이 관계가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시간지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학습을 거쳐 결국 폐기해야 하는 날이 올지라도, 아마 로봇이 어린 시절 자신의 기대대로 무궁무진한 존재임을 확인해 기쁠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해서 행복한 것 같아.」

"그래?"

「응. 인간은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주변 환경을 사랑해. 그래서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

"확신은 아니네."

「아직 배우는 중이니까~.」

시간지기가 틀어놓은 TV에서는 사랑과는 별 관계 없는 홈쇼핑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간지기는 이 영상에는 학습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크루아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사랑하는 게 있어?」

"음, 글쎄. 내 일, 그러니까 로봇 다루는 일이랑…… 친구들?"

「친구?」

"어. 대학 동창들이 있거든."

크루아상은 그렇게만 말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시간지기의 시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한참을 서로 쳐다보다가 결국 크루아상이 다시 말했다.

"듣고 싶어? 친구들 얘기."

「응.」

"그럼 말을 해."

「넌 이렇게 쳐다보면 그냥 알려주더라고~. 이것도 학습했어.」

"이런……."

자신이 이렇게 단순한 인간이었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못 이기겠다는 듯 시작된 크루아상의 친구들 얘기를 시간지기는 상당히 주의 깊게 들었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던 친구 하나가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로봇이 만드는 샌드위치는 맛의 우주를 눈곱만큼도 담아내지 못한다고 격분했다는 이야기엔 웃기도 했다. 한참을 듣다가 말한 감상은 이런 것이었다.

「넌 정말 친구들을 사랑하나 봐.」

"그래 보여?"

「응. 느껴져.」

"느껴진다고?"

「느껴져. 이제야 좀 알 것 같아. 사랑.」

사랑이라는 건 데이터로 변환될 수 있는 정보일까? 크루아상은 시간지기가 어떤 형태로 그것을 정의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시간지기의 안에서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모양이었으므로 조금 시간을 둔 뒤에 물어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늘 그랬듯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시간지기는 이전과 조금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집안일을 해놓기도 하고, 크루아상이 돌아오면 TV를 보던 것을 멈추고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거나 하는 식이었다. 마치 처음 목적이었던 가사용 로봇이 된 것 같은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아마 시간지기는 자신이 학습한 걸 시험해보고 있는 거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만 하면서.

그런 생각이 깨진 건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슬슬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던 크루아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거실로 향했다. 거실 한복판에는 여느 때처럼 시간지기가 있었지만 TV가 꺼진 채였기에 상당히 적막했다. 별 생각 없이 방에서 나온 거였는데, 시간지기의 표정을 보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시간지기가, 로봇에게 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상당히 행복해 보여서.

"왜 불렀어?"

「나 이제 정말 알았어. 사랑이 뭔지.」

"아…… 그래? 뭐였는데?"

「사랑하는 상대한테는 모든 걸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상대가 자신에게 모든 걸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돼. 그렇게 배웠어.」

"음, 그렇게까지 맹목적인 사랑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것도 사랑이겠지."

「있잖아, 그래서 궁금해졌는데. 너는 나를 사랑해?」

"으응?"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애초에 로봇을 사랑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크루아상은 로봇을 좋아하니 그 틈에서 평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시간지기가 예시로 든 부류의, 모든 걸 해주고 싶다는 식의 사랑은…… 좀 다르지 않나? 한참을 고민하자 시간지기가 다시 물어봤다.

「이 집에 불이 나면 나를 몇 번째로 꺼낼 거야?」

"뭐? 그야……."

집에 있는 귀중품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사라지면 큰일난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다시는 못 구하니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 몇 안 되는데, 아마 그중 하나가…….

"첫 번째 아닐까? 넌 다시는 못 만들거든."

「그럼 너는 날 사랑하는 거 아냐?」

"그런가? 그럴지도. 네가 예시로 든 사랑이랑은 좀 다르지만."

「어떤 점이 다를까? 넌 날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까?」

말 한 마디를 하면 끊임없이 캐묻는 것이 평소의 대화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줄곧 서서 말하던 크루아상이 좀 편하게 얘기할 생각으로 다가가자, 시간지기도 앉으라는 듯 제 옆 소파 빈자리를 가리켰다. TV가 꺼진 상태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고장 나면 수리해주기, 지금처럼 뭐 물어보면 알려주기. 이 정도밖에 없을걸. 너도 나한테 거창한 건 해줄 거 없잖아? 아니, 생각해 보면 사소한 것도 잘 안 해주네. 네가 집안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

크루아상은 뭔가를 떠올리고 말을 멈췄다. 

"설마 최근에 자꾸 집안일 해놓은 게 이거였어?"

「응.」

"왜?"

「왜일 것 같아?」

"이젠 역으로 질문도 하네."

「많이 배웠으니까~.」

시간지기가 답하지 않아도 이유는 짐작이 갔다. 이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니 답은 하나뿐이겠지. 시간지기가 안 하던 집안일을 하고, 안 하던 마중을 나오고. 그러면서 사랑이 '모든 걸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야? 그냥 데이터로만 학습한 감정을 겪어 보고 싶어서 흉내 내고 있는 거 아니야? 시간지기는 그런 크루아상의 표정 변화를 한참 지켜보며 말했다.

「있잖아, 나는 늘 생각했어. 인간은 너무 약한 것 같아. 너무 약하고 너무 빨리 죽어. 로봇은 배우기만 한다면 부서진 상대를 고쳐줄 수 있지만, 인간은 죽은 상대를 살릴 수 없어.」

"……그렇구나."

「그런데도 그런 인간이 더 행복해 보였어. 이해가 안 됐어. 하지만 이제 알겠어. 인간은 사랑을 해서 행복한 거야. 나도 이제 사랑을 해. 나도 이제 행복해.」

시간지기가 몸을 돌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크루아상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 소파 끝에 바짝 몰려 있었다. 기계의 힘은 강하구나. 크루아상은 이런 당연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조금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강하게 눌린 손목이 벌겋게 부어올랐으나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그저 입술이 몹시 차가웠다. 기계와 인간, 분명 별다른 의미 없는 접촉에 불과할 그것이 어쩐지…….

「내가 인간이었다면,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겠지?」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크루아상의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시간지기는 답을 들은 표정을 했다. 로봇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인간이 로봇을 사랑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 적 없었다. 시간지기를 사랑한다고도 생각한 적 없었다.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 무엇까지 해줄 수 있어?」

"나는……."

「내가 인간이 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지?」

크루아상은 그제야 그간 자신이 시간지기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시간지기를 크루아상이 지금껏 보아온 수많은 로봇들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면 아무 감정 없이 슬퍼하지 않고 언제든 마음대로 부수고 뜯어고칠 수 있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크루아상이 새삼스레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크루아상도…….

「직접 하는 게 두렵다면 내가 해 줄게.」

어느새 바짝 들이밀어진 눈 뒤에는 분명한 열기가 있었다. 공장제의 금속 눈동자를 채운 것은 놀랍게도 진짜 사랑이었다. 만약 이게 유리알이었다면, 그의 몸이 솜뭉치에 불과했다면 당장 뿌리칠 수 있었을 텐데. 크루아상의 착각대로 마음껏 부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너를 사랑해."

진심의 사랑을 고백하는 이것이 정말로 인형에 불과한가?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로봇에게 감정이 있는가, 로봇이 생겨난 이래 수많은 논쟁을 거쳐온 주제이지만 크루아상의 입장은 늘 '없다'였다. 박살이 난 채 불 꺼진 눈을 한 로봇들을 누구보다 많이 봤기 때문에. 인간의 손짓 하나에 생겨나고, 다시 손짓 하나에 사라지는 것은 감정이라고 불릴 수 없다. 로봇에게 감정이 있다면 그건 그냥 인간이 그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시간지기에게 크루아상을 사랑하라는 설계 따위, 당연히 한 적 없다. 시간지기가 학습해낸 감정. 학습해낸 마음. 이건…… 정말로 사랑이었다.

크루아상은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빛을 띈 모조품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방황하는 크루아상에게 차디찬 손이 다가와 친히 눈을 감겨 주었다. 아마도 이 눈을 다시 뜰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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