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백업)
과거를 마주하는
*글 쓴 날짜: 2021.06.21
크루아상이 그 틈새에 떨어진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시간여행 중 이상한 시간선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여행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었고, 이번에는 그저 그 대상이 된 장소가 특정 시간선이 아닌 시간의 틈새 어딘가였을 뿐이다. 틈새는 크루아상을 구속하지도, 어딘지 모를 시간선으로 날려 보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크루아상이 할 일은 충격으로 기능에 작은 이상이 생긴 시간여행기를 보수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어려운 일일 리 없었다. 크루아상은 휴대용 공구 상자 속 내용물을 늘어놓고, 시간여행기를 천천히 살폈다. 이 정도면 고치는 데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쉬운 일이겠다 싶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크루아상은 나사 하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창 수리에 집중하고 있던 무렵이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사가 굴러간 곳을 향해 손만 뻗었다. 하지만 손에 닿은 감촉은 작은 나사못과는 명백히 달랐다. 작지만 나사못보다는 크고, 딱딱한 쇠가 아닌 따스한 맥박과 접촉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손에 닿은 맥박의 주인은 아기였다. 소중한 천에 싸인 갓난아기.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틈새에 이렇게나 어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지금이 꿈속인가 했다. 하지만 꿈속이라고 해도 혼자 덩그러니 놓인 아기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몹시 서투른 동작으로 아이를 안아 들고 내려다보았다.
"너는 어디서 왔니?"
아직 대답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아이는 작게 칭얼댈 뿐이다. 크루아상은 결국 시간여행기의 보수를 잠시 미루고 아이를 안고 있는 쪽을 택했다. 상당히 기묘한 일이지만 아이의 모습이 이유 모르게 익숙해 보여 자연스럽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아이는 또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나타난 것도 갑작스러웠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역시, 이건 꿈인가? 아이가 있던 곳으로부터 시선을 옮기니 아까 찾던 나사가 보였다. 다시 그리로 손을 뻗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크루아상은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또다시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다만 이번엔 '서 있었다'. 갓난아이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아직은 보호자가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되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렸다.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짙은 깨달음이 끼쳤다. 아이는 어린 크루아상과 꼭 닮았다. 아까 보았던 갓난아기도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유 모를 익숙함은 그것이었나. 이 틈새는 과거의 파편을 보여주는 곳일까?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균열이 생겨나니 이런 곳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언니는 누구예요?"
하지만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기만 하는 곳은 아닌 모양이다. 이번에는 아이 쪽에서 먼저 물어왔다. 크루아상은 낯선 곳에 떨어졌을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고, 동시에 아이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말을 고르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나는 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와 버렸어."
시간관리국의 직원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시간관리국 매뉴얼에서 흔히 등장하는 단골 멘트였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상황을 대충 얼버무릴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들이 특히 애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이 대사는 과거의 시간선에 떨어져 과거 사람과 마주쳤을 때를 위한 말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수상한 시간의 틈새에서 마찬가지로 누가 봐도 수상한 시간여행기를 붙들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는 별로 적절하지는 않다. 상대가 아직 어리기에 사용한 방법이다.
"그렇구나! 언니 뒤에 그건 뭐예요?"
어린아이를 만나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예전에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책에서 아이들은 질문을 아주 많이 한다는 내용을 읽은 것도 같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쳤는데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어딘가 허접한 대답을 빠르게 납득해버리고는 시간여행기를 가리키는 아이를 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질문을 받았으니 둘러대야 한다.
"이건…… 비행기야."
"비행기!"
"응, 비행기."
"언니는 그럼 비행사예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아이의 눈이 유달리 빛났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제일 좋아했던 장난감이 아마도…….
"저도 비행기 좋아해요!"
비행기였지. 비행기에서부터 시간여행기까지, 새삼 많이도 왔다 싶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시간 사이를 날아다니며 이룰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어릴 적의 크루아상조차도 말이다. 아직은 이 꿈이 명확하지 않을 나이이다. 크루아상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막연한 동경이다. 너는 꼭 좋아하는 걸 이룰 거라고 답하려는 찰나 눈앞의 모든 것이 한 차례 점멸했다. 반사적으로 찡그린 눈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을 무렵 눈앞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까와 비슷했다.
갓난아기가 걷고 말하는 아이가 돼서 왔으니 아마 이번에 올 크루아상, 그러니까 아이 쪽도 좀 더 자라 있을 것이다. 슬슬 자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볼 나이가 되어 올지도 모르지. 크루아상은 그동안 그들이 자기 자신의 과거인지, 혹은 다른 시간선의 크루아상인지 고민했다. 다섯 살 즈음의 일은 크루아상도 기억나지 않아서 아까 만난 아이가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같은지 판단할 만한 기준이 부족하다. 만일 다른 시간선의 크루아상이라면, 갓난아이와 걸을 수 있던 아이는 같은 시간선에서 왔는가? 이 또한 미지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묘하고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드는 틈새다.
"저기…… 누구세요?"
그리고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의 아이는 역시나 아까보다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학생? 어느 쪽이든 아이는 상대의 얼굴이 자신과 조금 닮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는 듯했고,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누구라도 갑작스레 도착한 낯선 곳에서 자신과 닮은 얼굴을 보면 놀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놀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닌 듯하다.
"혹시, 그 예전의, 비행사 언니?"
아, 같은 시간선에서 오고 있었구나. 당황한 아이를 눈앞에 두고 할 법한 생각이 아님은 알았지만 의식하기도 전에 저절로 들고 마는 생각이다. 크루아상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주려 노력했다.
"응, 맞아. 나를 기억하는구나?"
"네! 아, 아니…… 그보다 여긴 어디죠? 언니는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예요?"
"음……."
이전에 본 '비행사 언니'를 다시 봤다는 놀라움에 둘의 얼굴이 닮았다는 사실은 금방 잊힌 모양이다. 하지만 여긴 어디냐고 묻는다면 이젠 적당히 거짓말로 넘어가기 힘들어진다. 대체 이, 톱니바퀴나 정체 모를 기묘한 황금빛으로 가득 찬 공간을 뭐라고 둘러대겠는가? 여긴 네 꿈속이야. 이건 너무 거짓말 같다. 사실 여기는 시간의 틈새인데…… 이런 말 했다가는 뒷감당이 어렵다. 과거의 크루아상이 시간여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이 말이 된다면 너무 많은 것이 바뀌고 말지도 모른다. 결국 조금 엉성하게 느껴질 법한 답변으로 수습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여기 계속 있는 것도 그래서야."
"정말요? 큰일이잖아요."
"너는 여기 어떻게 왔니?"
"저요? 저는 그냥 잠들고 나니까 여기로 왔어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번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잠에서 깨고 나면 꿈 꾼 것처럼 다 잊어버리는데…… 여기 들어오니까 다시 생각이 나요. 언니랑 했던 얘기가, 진짜 어렴풋하게……. 아, 그러고 보니 몇 년이 지났는데 언니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네요."
"그런가?"
이번에도 대충 무마해야 한다. 다행히 적당히 뱉을 만한 말이 빨리 생각났다.
"오랜만에 봤으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지."
중학교에 올라갈 때쯤이면 시간을 다룬 학문에 슬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때였나? 정확한 나이를 모르니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만 시간여행까지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기에, '크루아상'의 미래에 개입하지 않으려면 관련된 모든 질문을 얼버무려야 한다. 다음에 올 때는 시간관리국에 입사한 이후의 나이가 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한창 관련 주제에 몰두해있던, 시간여행기 개발 직전의 크루아상이 와서 '당신은 미래의 시간여행자? 뒤의 그건 설마 시간여행기?'같은 질문이라도 던지면 상당히 곤란하다. 그 당시의 크루아상은 지금의 자신도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여행기를 분해해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분해하려 들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다.
"혹시 비행기는 아직도 좋아하니?"
크루아상은 슬쩍 말을 돌렸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다 보면 본래 화제는 금방 까먹기 마련이다. 그런 의도로 던진 말에 아이는 잘 걸려주었다.
"네! 좋아해요. 요즘은 단순히 비행기를 넘어서서 좀 더 멋진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어떤 거냐면, 음……. 아직은 정말 망상에 불과해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
"그럼 다음에 네가 여기 왔을 때, 내가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말해줄래?"
"아, 그럴게요! 근데 그때까지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언니도 집에 가야죠."
"만약에 있으면 그래달라는 거지. 나도 네가 오기 전까지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볼 거야."
실은 그냥 수리만 끝내면 되는 거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십 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시간의 틈새에서 머무른 크루아상에게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틈새에서 나갈 때 좌표를 출발 직후로 찍을 테니, 사실 실제로는 몇 초 정도가 흐른 거나 마찬가지다. 아이가 서로 열심히 하자는 말을 건넨 직후 또다시 세상이 크게 깜빡였다. 이제는 이 느낌이 익숙해질 듯도 하다.
크루아상의 바람을 시간의 틈새가 읽은 것인지, 다음에 도착한 아이……는 이제 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듯한 모습이었다. 크루아상은 빛이 반짝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시간관리국에 입사하기 직전인, 그러니까 시간여행기를 갓 개발해낸 크루아상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얘기가 편하겠구나. 크루아상이 안도의 미소를 짓자 맞은편의 크루아상도 비슷하게 웃고는 먼저 인사했다.
"이제 언니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네."
"나도 이젠 언니라고 불리긴 좀 그런걸. 그래도 내가 언니긴 하겠지만."
"너……는, 그렇구나. 미래의 나였구나. 그리고 여긴……."
아, 그러고 보니 시간의 틈새는 아직 정확히는 모를 것 같다. 크루아상은 시간의 틈새를 시간관리국에 입사한 후 알게 되었고, 그때 알던 사실도 오래 머물면 시간의 미아가 되어버린다는 정도가 다였다. 아마 여기서 살고 있는 시간지기를 만나기 전에 시간의 틈새에 빠졌다면 이렇게 침착하게 시간여행기를 수리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상대가 시간여행을 알고 있더라도 얼버무려야 하는 게 하나쯤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쉬웠다.
"여긴 그냥 좀 특수한 시간선 같은 거야. 시간여행을 하다가 사고로 빠졌거든. 시간여행기만 수리하면 나갈 수 있는데, 아직 못 나갔어."
"특수한…… 시간선?"
"응, 자세한 건 너도 아마 나중에 알게 될걸? 지금은 그, 너도 시간여행에 대해 여러 가지 알아봤으니 알겠지만 과거에 개입하면 안 돼서……."
그래도 얼버무리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편하구나. 새삼 깨달았다. 상대 크루아상도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금방 왔다 금방 사라지는 상대의 특성상 대화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대화였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간여행을 시작했고, 어떤 결과로 이어졌으면 하는지. 모두가 탈 수 있는 시간여행기를 만들고 싶어. 과거의 크루아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남아서 한참이나 그 말을 곱씹으니 어쩐지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같고, 이렇게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그는 아무래도 같은 시간선의, 시점만 조금 과거일 뿐인 자신이겠지. 과거의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이야기를 듣는 건 옛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방금 사라진 과거의 크루아상은 이 공간에서 나간 후 지난 아이들처럼 이 이야기를 꿈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다시 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는 또 선명하게 기억해낼 것이다. 만약 다음 온 크루아상이 미래의 존재라면 여기에 발을 들였을 때 이전의 대화를 기억해내고 뭐라고 말해줄까? 그러고 보니 그때는 상대 크루아상이 오히려 여러 가지 질문을 어물쩍 넘어가야 할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즐거웠다.
즐거운 상상 덕인지 수리에 속도가 붙어, 크루아상은 틈새에 혼자 남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간여행기를 완전히 수리해냈다. 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기다려보았다. 미래의 크루아상은 더는 여기에 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죽기 전의 크루아상까지 계속 볼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누구도 오지 않자 전자로 결론을 내리고 다시 본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지만, 기다리던 모습은 아니었다. 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시간의 틈새가 찢기더니 익숙한 얼굴이 머리를 디밀었다.
"다 고쳤는데 안 나가고 뭐 해~? 아, 혹시 나를 기다렸어~?"
크루아상이 기다리던 과거의 크루아상들은 늘 작은 빛과 함께 갑자기 등장하고는 했다. 시간지기는 그냥 틈새 어딘가에서 크루아상을 구경하다가 궁금해서 와본 것 뿐이겠지. 역시 더는 오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크루아상은 시간여행기에 좌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너를 기다린 건 아니고……."
말이 멈추면서 계기판 위를 움직이던 손가락도 잠시 멈췄다. 멈춘 것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틈새에 온 시간관리국에 입사하기 직전의 크루아상, 그다음 차례가 누구인지. 지극히 평범했다. 크루아상과 같았다. 자신은 이 틈새에 들어온 순간 어떤 꿈속의 기억도 되살아나지 않았는데도, 상대를 과거의 자신이라고 착각해버릴 정도로. 시간관리국에 들어온 크루아상은 단 둘뿐이라는 언젠가의 말이 다시금 머리를 스친다.
"나를 기다렸잖아~?"
시간지기가 다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제 손 안에 들어온 적 없었던 존재를 잃고 남은 어리석은 황망함이다.
"……응,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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