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비밀 무도회 (백업)
영원히 춤추자, 시간은 무한하니까
*글 쓴 날짜: 2021.05.12
시간관리국은 떠들썩한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리국이 분주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굳이 이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의 분주함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평소처럼 한시라도 빨리 시간선을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본다면 그들의 얼굴에 조급함 대신 설렘과 기대가 감돌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쁜 광경을 지켜보던 크루아상의 발치에 누가 떨어뜨렸는지 종이 한 장이 밀려왔다. 집어 들자 화려하면서 깔끔한 서체로 인쇄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관리국 건립기념일.
"아, 이거."
종이를 주우러 온 듯한 동료 직원에게 돌려주자 상대는 갈 길이 바쁜지 감사 인사를 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크루아상은 늘 기념행사를 해도 일에 전념하던 쿠키 중 하나였는데, 오늘은 어쩐지 나와보고 싶은 기분이어서 로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봤자 다들 자연스럽게 크루아상이 오늘도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아무도 뭔가를 맡기질 않아서 할 거라곤 구경뿐이었지만. 사실 준비를 도우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런 날이니까 혹시, 쿠키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진 않을까 해서…….
"있을 리가 없지만."
그를 찾았다는 게 괜히 멋쩍어 듣는 사람도 없는 혼잣말을 흘린다. 크루아상은 그런 뒤에도 잠시간 로비 구석에 서 있다가, 무거워 보이는 짐을 지고 힘겹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조금 도와주다 보니 자연히 행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바쁠 때면 유독 그렇듯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꼭두새벽부터 시작한 준비는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러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외부에 존재를 알리지 않는 시간관리국의 폐쇄적인 특성상 행사는 시간관리국 내부의 인원들로만 이뤄졌지만, 거의 모든 직원이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로비는 상당히 붐벼 파티 분위기가 제대로 풍겼다. 크루아상은 그 속을 한가롭게 누비다가 다시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건립기념일이라면 으레 절차에 들어있어야 할 축사 한 마디 남기지 않은 채 어딘가에서 나오질 않는 국장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히 국장실이 있을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허공에서 자신의 손까지 시선을 끌어내린 크루아상은 손에 들린 음료를 발견했고, 로비를 둘러본 뒤 같은 음료를 한 잔 더 집어 들었다. 어차피 파티라고 해봐야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는 것 정도이고, 크루아상은 말주변도 출 줄 아는 춤도 없으니 어디서 시간을 보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장실에도 없으면 다시 돌아와야겠지만, 아마 시간지기라면 시간의 틈새에 있다가도 지금 이 광경을 보고 국장실로 돌아와 주지 않을까. 그런 이상한 확신을 품고 발걸음을 옮겼다.
국장실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예상이 적중한 건지, 원래 국장실에 있었던 건지 혼자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서 들어가려는데, 양손에 음료를 든 탓에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발로 열어야 해서 크루아상의 시선은 자연히 시간지기를 떠나 발끝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최대한 소리 없이 문을 연다고 노력하던 중, 크루아상은 고개를 들자마자 어느새 문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던 시간지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양손에 음료가 들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몰래 슬쩍 들어가려던 계획이 실패했으니 이제는 조금 멋쩍은 인사를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국장실에 있었네."
"물론이지~."
시간지기는 답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크루아상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국장실은 사용감 있는 바닥과는 대조되게 텅 빈 채였다. 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는 걸까? 그러나 그런 의구심을 단박에 지워낼 정도로, 기울어진 해의 빛깔이 사방의 유리창을 칠하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그런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던 크루아상은 손에 차가운 감촉이 돌아오고 나서야 잔이 들려있었음을 기억해냈다.
"맞다, 이거. 마실래?"
"그래~."
흔쾌히 받아든 시간지기가 한 모금 가볍게 마시자 크루아상은 안도하며 말했다.
"음료 취향이 맞아서 다행이네."
"응~? 맞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가?"
취향이란 건 살다 보면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이어진 크루아상의 말에 시간지기는 글쎄~. 하고 답했지만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모든 점이 달라진 둘의 음료 취향은 같은 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크루아상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완전히 달라져 본 경험이 없으니 말이다.
잔을 비우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물던 해는 금세 자취를 감추고 창밖은 어둠에 잠겼다. 크루아상은 빛나는 별빛이 무도회장의 조명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시간지기가 이런 말을 꺼냈다.
"춤 출래~?"
때문에 크루아상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완전히 동문서답이었다.
"혹시 독심술도 써?"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 아냐. 말이 헛나왔어. 그보다…… 나 춤 출 줄 몰라."
"너는 이런 날도 작업복이네~."
이번에는 시간지기가 엉뚱한 답을 했다. 에둘러 거절하는 크루아상을 위아래로 훑어본 직후 한 말이었다.
"너도 평소랑 같은 옷이잖아?"
"그치만 내 옷은 이런 날에 어울리는걸~?"
"그건 그렇지만."
시간지기의 말대로, 크루아상이 오늘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장갑과 고글뿐이었다. 그 둘은 이것저것 들고 옮기며 뛰어다니는 작업에 별로 적합하지 않아 빠졌고, 그 외의 것들은 별로 불편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두었을 뿐이다. 그런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답할 새도 없이 다가온 시간지기가 대뜸 크루아상의 손을 잡았다. 이건 춤추기 위한 자세다. 춤을 출 줄 모르는 크루아상도,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은 많으니 단박에 알았다.
"나 춤 출 줄 모른다니까?"
"나도 모르니까 괜찮아~."
"그럼 어떻게 춤을 추는데!?"
"아무렇게나~."
그렇게 말하며 시간지기는 정말 아무렇게나 스텝을 밟기 시작했기 때문에, 얼결에 시간지기의 손을 마주 잡은 크루아상도 따라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춤을 출 줄 모르는 것치고는 예술적이고, 춤이라기엔 너무 제멋대로인 움직임이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보니 크루아상이 할 수 있는 건 시간지기의 발을 밟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발이 밟히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초심자에겐 너무나 불친절한 춤 상대다.
그러나 지금 크루아상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발을 밟느냐 밟히느냐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감각을 견딜 수 없었다. 시간지기는 장갑을 낀 채였지만, 그 장갑이 몹시 얇은 탓에 손과 손이 맞닿은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제야 크루아상은 둘이 맨손을 마주 잡아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발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발을 밟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으니 이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시간지기의 시선은 크루아상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이 춤을 추는 주제에 상대의 움직임 따위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표정만을 바라보면서. 크루아상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주의를 준다고 고개를 들었다가는 정면으로 눈이 마주칠 테고, 그때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하니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계속 땅만 볼 거야? 모처럼의 기회인데~."
……그래, 아무리 크루아상이 애쓴다 해도 상대가 모르는 척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잠시 동작이 멈추고 시간지기의 말이 날아들자 크루아상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간지기를 마주 보았다. 역시 지나치게 가깝다. 하지만 한 번 눈이 마주친 이상 시선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야 도망치는 것 같잖아. 크루아상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시선을 부딪히다가, 이 이상한 분위기를 깨려면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춤은 갑자기 왜 춘 거야?"
"그야 기념일이니까~."
"굳이 나랑…… 여기서?"
"흠~. 춤은 상대가 있어야 하고, 마땅한 상대는 너뿐이고, 그런데 마침 네가 여기로 찾아왔고, 여기는 아무것도 없고 넓어서 춤추기엔 딱이고~. 완벽하잖아~?"
준비한 것마냥 이유를 잘도 늘어놓는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까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국장실 내부를 한 번 둘러본 크루아상은 갑자기 떠오른 터무니없는, 그러나 시간지기라면 정말 실행할 법한 생각을 물었다.
"설마 나랑 춤추겠다고 여기를 이렇게 텅 비워놓은 건 아니지?"
"글쎄, 그건 어떨까~."
역시나 애매모호한 답변이다. 조금 더 답변이 돌아올 만한 것을 묻기로 했다.
"손은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있을 거야?"
"응? 춤을 추려면 당연히 손을 잡아야지?"
"언제까지 춤 출 거냐는 말이었는데."
"그건 아직 안 정했어~. 두 시간 정도만 더 어때~?"
"……농담이지?"
"진담인데~."
그러더니 시간지기는 처음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처럼 난데없이 발을 움직였다. 분명 춤은 상대가 있어야 해서 크루아상과 추는 거라고 말했는데, 이런 자기 좋을 대로 추는 춤이라면 상대는 있으나 마나 아닌가? 의문투성이인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손바닥의 감촉, 맞닿은 시선의 빛이 크루아상의 집중을 방해했다. 하지만 따라갈 거야. 휘둘리기만 하진 않을 거야. 그 와중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런 의지를 붙들고 애써 박자에 맞춰 발을 움직인다.
한참을 춤추다 보니 어느새 아래층에서 들려오던 떠들썩한 소리도 멎어있었다. 시간지기의 말대로 두 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수리공 생활로 다져진 체력을 거의 다 써버렸을 지경이니 꽤 오랜 시간 시달린 것은 분명했다. 반면 시간지기는 혼자 시간을 멈추고 어디서 쉬다 온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멀쩡하게 서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은 크루아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은 이랬다.
"아쉽네, 좀 더 추고 싶었는데~."
"진짜 두 시간 출 생각이었어?"
"진담이라고 했잖아~."
황당해하는 크루아상 옆에 와 앉을 때의 표정은,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상대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크루아상의 표정도 자연히 누그러졌다. 시간지기는 늘 웃고 있지만, 오늘처럼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순간은 몇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 모를 아주 약간의 기쁨을 담아 크루아상은 말했다.
"행복해 보이네."
"네 표정도 비슷해~."
"응?"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크루아상은 제 얼굴에 손을 올려보았다. 거울이 없으니 표정을 확인할 방법도 그뿐이었다. 더듬어 올라간 손끝에 닿은 것은 엷은 땀, 그리고 묘하게 올라간 듯한 입꼬리였다. 즐거웠나? 크루아상은……. 한참을 붙잡혀 얼얼하기까지 한 손바닥, 등산이라도 한 것마냥 감각이 흐릿한 발이 감상을 방해했지만 생각해 보았다. 오늘 일을 일기로 적는다면 뭐라고 적을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지도."
"역시 그렇지~?"
차츰 조명이 사라져가는 문밖과는 달리, 창문에 비치는 무수한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들만을 위한 무도회장이 아직 열려 있다. 해가 뜨기 전까지 영원히 계속될 무도회장이. 크루아상은 그 불빛을 가만 두 눈에 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제는 잔잔히 들려오던 노래도, 잔에 담긴 음료도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손을 내민다.
"괜찮다면…… 역시 조금만 더 출까?"
그리고 그 손을 기다렸다는 듯 붙잡는 이가 있다.
"언제나 대환영이야~."
국장실 바닥에 다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당히 울림 있고, 적당히 속도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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