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크루

[시간크루] 모든 것으로부터 나에게 (백업)

다음 기회를

백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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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날짜:2022.01.30

삶이 언제나 순탄할 수만은 없다. 모든 생명은 수많은 위기를 넘어가며 다음 이야기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개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누구나 셀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분명 누구나 다른 이의 삶에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만일 그런 기회가 온다면, 감사해야 마땅하겠지.

어느 순간부터 크루아상은 혼자였다. 주위에는 크루아상을 돕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외로웠다. 아마도 온 우주에 유일할 자신의 반쪽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괴롭고 괴로웠지만 그 때문에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욱 필사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모든 것은 제 실수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함께 약속한 미래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되는 것은 가슴에 사무치도록 슬픈 일이었다. 이제 크루아상은 영원히 수리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 시간지기는 영원히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크루아상의 실수 탓에 일어난 일이라면, 이렇게 되는 건 크루아상 하나만으로 족하다. 이 시간선의 시간지기를 휘말리게 해버렸으니 다른 시간선의 자신과 시간지기만은 지켜야 했다. 모든 일이 힘에 부칠 때면 이런 생각으로 애써 몸을 일으켰다.

너는 처음부터 이런 미래를 알고 있었을까. 함께 지루하지 않은 미래를 만들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네 표정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는데. 모든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언젠가 이런 미래도 보았을 테지만, 분명 나라면 새로운 미래를 밝혀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루아상은 시간지기와 관련한 일을 하나하나 떠올릴 때마다 당장 자신도 구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시 네 얼굴을 마주보고 곁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건 단순한 도피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국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수리공이 되고 싶었다. 너의 곁에 있고 싶었다.

크루아상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시간지기가 보고 싶어졌던 어느 날, 시간지기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썼다. 물론 보고 싶다든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적지 못했다. 그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나열했을 뿐이다. 편지라기보다는 일기장 한 장을 찢어냈다고 보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것은 편지였다. 늘 공유하던 일상을 계속해서 함께 나누고 싶어 글자 하나하나마다 눌러담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것을 쥔 채 시간여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게 처음으로 시간의 구멍을 찾아간 날이었다. 시간지기가 떠나버린 후 근처에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그곳에, 크루아상은 편지를 핑계로 끊임없이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멍으로 제 편지를 떨어뜨렸다. 막무가내로 보낸 편지를 시간지기가 볼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라도 보고 싶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 했을 뿐이다.

언젠가 시간의 구멍을 전부 메울 정도로 편지가 쌓인다면 네가 편지 더미를 딛고 다시 구멍 밖으로 나와주지 않을까. 허무맹랑한 생각이나 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은 흔하디 흔하지만 자신의 미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제 꿈이 이뤄지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남에게도 미래를 건 약속을 남발할 수 있었다. 노력만 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면 세상에 실패 따위 없었을 것을. 어리석었다고 반성하기에도 너무 멀리 오고 말았다. 이제는 후회할 뿐이다.

크루아상은 종종 시간지기를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무책임한 건 자신이었다. 소중한 이와 약속한 미래도, 제 꿈도 멋지게 이뤄낼 것처럼 말만 하다가 전부 실패해버린 자신 말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말의 무게를 하나하나 저울에 달아볼 텐데.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이 미래를 잘라내어 과거의 자신에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러니까, 이제 정말로 되돌아갈 수 없다. 작업에 몰두하는 바람에 네가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던 날. 네 손에 이끌려 이름도 모를 지역의 경치를 보러 가던 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던 날. 그 모든 당연했던 날들로. 너무나 당연해서 소중한 줄도 모르고 살았던 날들로 다시는.

시간지기는 원한다면 언제든 미래도 과거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간은 그런 시간지기마저도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의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최악으로 달려갈 뿐이다. 시간을 아무리 이어나가봤자 최고의 수리공은 될 수 없고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잘라내야만 한다. 지금의 크루아상이 도달하지 못한 미래, 놓쳐버린 행복을 과거의 크루아상은 다시 쥘 수 있도록. 그것이 이미 모든 게 꼬여버린 시간선의 자신이 다할 수 있는 유일한 책임이다.

국장 일은 굉장히 바빴으므로 당연히 편지를 매일 구멍에 떨어뜨리지는 못했지만, 적는 것만은 매일 성실히 했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를 편지 쓰기로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처음에는 한 장으로 시작했던 편지가 종이 수십 장의 뭉텅이가 되어갔다. 정말 시간의 구멍을 메울 수도 있겠다, 하는 농담이 적절한 상황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말을 해줄 이가 이젠 없었다.

답장 없는 편지를 꾸준히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상대에게 닿지도 못할 편지니, 크루아상이 며칠 정도 쓰지 않아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쉬지 않았다. 한 순간이라도 더 시간지기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무한한 시간을 살아갈 터였던 시간지기는, 크루아상 때문에 남은 모든 시간을 포기해버렸으니까.

검은 구멍 아래로 떨어져내려가는 편지는 몹시 연약해 형체도 없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네가 있을 곳까지 닿기도 전에 사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시간지기에게 이 편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몇 번이나 보고도 남았겠지. 너는…… 내 편지를 읽고 있을까? 읽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오만임을 안다. 너에게 무사히 도달해도, 그 후에 네가 직접 찢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매일 밤 잠들기 전 편지를 적기 위해 펜을 들었다.

크루아상은 국장이 된 후 어떤 일에도 울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떠나던 순간의 시간지기가 울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괴로울 네가 울지 않는데 괴롭게 만든 장본인인 자신이 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가장 거대한 추억의 증거를 부수는 순간에도 눈물을 참아냈다. 중앙시계를 부숴야만 했던 날, 일부러 주변에 직원들이 많을 낮 시간대를 택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이상 억지로라도 감정을 죽일 수 있으니까.

너는 무수히 많은 자신을 잘라내는 일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홀로 남은 이후 몇 번이고 거듭한 그 생각에, 이제는 의미 없어진 추억 하나를 부쉈다고 며칠씩이나 괴로워하고 난 후에야 겨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시간지기는 견딘 게 아니었다. 크루아상이 알면 슬퍼할 테니 괜찮은 말만 들려줬을 뿐이다. 지금 크루아상이 시간지기가 보면 슬퍼할 만한 감정들을 전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듯이.

그렇게 크루아상은 시간지기를 따라 최선을 다해 흔들림 없는 국장으로 있었다. 이는 속죄임과 동시에 이 시간선을 잘라내는 일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유롭고 자신 있는 모습만을 잘 골라냈으니 크루아상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각오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결심만이 남았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죄책감과 책임감만을 되새겼다. 자신이 사라져야만 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역시…….

……무서워. 크루아상은 책상 모서리를 꾹 쥐었다. 떠나버린 시간지기가 분명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봐줄 거라고 생각하니 혼자 있을 때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감정이다. 하지만 두려운 게 당연하지 않은가. 생명이 있다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죽음조차 아닌 존재 자체의 소멸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에 두려움을 억누를 뿐이다.

사라진다면 그걸로 끝이겠지. 자신의 소멸도 각오하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건 시간지기의 일이었다. 자신의 실수 탓에 구멍에 틀어박히고, 자신의 실수 탓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 시간지기에게 미안하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분명 지루하지 않은 미래를 약속했는데. 이 시간선까지 잘라내는 일을 막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듯 방관하는 걸 보면 너도 이 선택이 최선임을 알고 있는 거겠지. 서로 얼굴도 다시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결말 따위, 절대 최선일 리 없는데도.

마지막에는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다. 하지만 구멍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시간지기를 이제 와서 다시 만날 방법 따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구멍에 편지를 떨어뜨렸지만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바보같은 짓임을 알면서도 움직였을 뿐이다.

크루아상은 마지막 편지를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평소대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적으면 될 텐데, 손이 쉬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지막 인사로는 어떤 말을 써야 하지. 미안하다고? 아니면 보고 싶다고? 이제 와서? 

곧 시간은 사라지고, 우리의 삶도 사라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였다는 것, 지루한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는 것, 네가 없는 나는 이렇게나 쓸쓸하다는 것을 이 시간의 누구도 기억할 수 없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갈 다른 시간의 너와 나만이 안고 가줄 기억이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단 한 문장밖에 적지 못했다. 그래, 거창한 말을 덧붙여봤자 오히려 방해일 뿐이다. 크루아상은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여 마구잡이로 뛰는 심장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시간여행기로 향했다. 여기에 오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그런데 구멍에 편지를 떨어뜨리고 한참을 바라보다 돌아왔을 때, 국장실 책상에는 여전히 자신이 방금 떨어뜨렸을 터인 그 편지봉투가 놓여 있었다. 혹시 긴장하는 바람에 실수로 다른 종이를 떨어뜨렸나? 당황하며 열어본 봉투 안에는 크루아상이 썼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문장의 맨 앞에 두 글자가 더해진 채로.

나도 다음 시간에는 네 곁에 있을게.

그 순간 크루아상은 모든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망가진 채 잘려나갈 미래, 끝나는 나, 끝나는 너. 하지만 분명 이 끝은,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시간선에게는 기회다. 새로 펼쳐질 미래의 너는 내 곁에 있다. 새로 펼쳐질 미래의 나는 네 곁에 있다. 네가 그러겠다고 방금 직접 말해주었다.

크루아상은 국장이 된 후 처음으로, 지금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내 편지를 읽어주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도 같은 마음이라고 답해주었다. 다음 미래의 나는 분명 너와 함께 최고의 수리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이 시간이 끝나야만 시작된다. 그렇다면…… 더는 두렵지 않다. 이대로 사라진대도.

"다음 미래에선 반드시 최고의 수리공이 될게."

분명 시간지기가 듣고 있을 게 틀림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보았다. 어디선가 그 미래가 기대된다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우리의 이 기회, 부디 단단히 붙잡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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